측은지심(惻隱之心)이면 족하다

예레미야 12, 7- 13 ; 로마서 8, 4- 8


이  은 선 교수

(세종대학교)





I. 


        얼마 전부터 <예레미야서(Jeremiah)>를 읽게 되었습니다. 구약성서에서 에스겔이나 다니엘, 하박국과 스바냐 등과 더불어 동시대인으로 추정되는 예레미야는 앗시리아에 의한 북쪽 나라 이스라엘의 멸망 후에 남쪽 유다의 베벨론 유수(幽囚)를 예언한 눈물의 예언자였습니다. B. C.627-580정도까지 살다간 하나님의 선지자 예레미야의 언어를 새로 읽으면서 그 생생함과 살아있음, 지금으로부터 거의 2600여 년 전의 일이지만 자연과 인간 생태의 유사함과 반복을 보면서 할 말을 잃었고,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레미야는 당시 서아시아 지경에서의 세계 왕국들의 흥망과 성쇠를 하나님의 예언자답게 그의 징벌과 사명, 뜻으로 풀이했고, 거기서의 조그마한 왕국 이스라엘의 존망과 미래를 하나님과의 약속과 위반, 그로 인한 징벌과 해체와 다시 구원의 섭리로 이해했습니다.


II.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신과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를 원망할 정도로(렘 15:10) 세상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는 “싸움꾼”이 되어서 끈질기게 당시 유대왕국의 통치자, 예언자(학자), 제사장(성직자), 일반사람들을 향하여 외치던 소리는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힘 있는 자나 힘없는 자나 한결같이 “불의한 소득을 얻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greedy for unjust gains)(렘6:1)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평화, 평화(peace, peace)를 말하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하면서 온갖 불의와 음행과 사치에 빠져 있다는 것이었습니다(렘6:14-15). 예레미야는 이것은 과거 자신들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원한 하나님과의 계약을 깨는 일이고, 세계정세에서 위험을 느끼자 지금까지의 불의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의를 회복하는 대신에 외세의 힘 있는 자들에게 의탁하면서 과거 자신들을 종살이 시켰던 이방 나라들에게 다시 돌아가는 음행과 같은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렇게 하나님이 결국 북쪽으로부터 나라를 일으켜서 유대 민족을 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시기까지 그 땅에서 이루어졌던 모든 불의와 불신앙과 폭력을 생생하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시대의 선지자들이고 학자였던 예언자들, 예배를 주관하던 성직자들은 그러한 진실을 보지 못하고 대신에 거짓 평화를 예언하고, 또 시대의 정치가들은 들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렇게 앞날을 아프게 예언하고 눈물로 호소하는 예레미야를 잡아 가두고 죽이려고 하고, 일반 대중들은 먹고, 마시고, 결혼하고, 사치하고 치장하면서 사기를 벌여 부를 쌓은데 혼을 빼앗겨서 자신들의 정황이 진정으로 어떠한지, 어떤 위험이 앞에 놓여있는지 구분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상황을 오늘 우리가 서두에서 읽은 12장 11절의 말씀,


“그들이 내 땅을 황무지로 만들어 놓았다.

황무지가 된 이 땅을 보고 나는 통곡한다.

온 땅이 이렇게 황무지가 되었는데도,

걱정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구나!”


라고 절규하며 그들의 회개와 변화를 촉구합니다.

III.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당시 자신은 명령하지도 않았고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아들딸들을 불태워 제물로 바치는” 행위를 지적하셨습니다(렘7:31). (성폭행당한) 여인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하늘까지) 들려서 “나의 기쁨이 사라졌고, 절통함이 나를 짓눌러서 가슴이 멍들었다”고 표현하십니다(렘8:18). 그러한 일을 겪은 백성들은 소리치기를 “이 땅에는 하나님이 안 계신가, 이 땅에는 통치자도 없단 말인가?”라고 울부짖습니다(렘8:18-19). 예레미야가 악으로 가득한 유대 땅을 그리는 그림에는 많은 자연에서의 비유가 많이 들어있습니다. “새장에 새를 가득히 잡아넣듯이, 남을 속여서 빼앗은 재물로 자기들의 집을 가득 채워놓고, 그렇게 해서 그들은 세도가가 되었고 벼락부자가 되었지만, ... 악을 행하는 데 한계를 모르고 계속 자기 잇속만 채운다”(렘5:27-28)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데도 내가 그들을 벌하지 않고 놔둘 수 있겠느냐?”(렘5:29)고 물으십니다. “그 땅에서 그렇게 끔찍하고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고”, “도성 안에는 탄압뿐이고, 샘이 물을 솟구쳐내듯이 죄악을 솟구쳐내고, 들리는 소리는 폭행과 파괴의 소리이며, 나의 눈앞에 언제나 보이는 것은 병들고 상처 입은 사람들뿐인데,”(렘6:6-7) 또한 “예언자들은 거짓으로 예언을 하며, 제사장들은 거짓 예언자들이 시키는 대로 다스리며, 백성들은 이것을 좋아하니” “끝이 오면, 마지막 때가 오면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고 물으십니다(렘5:31).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하시는 지적은 당시 통치자들과 종교인들과 힘 있는 사람들은 “괜찮다, 괜찮다”(peace, peace)고 하면서 때로는 거짓평화와 부와 발전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면서, 때로는 자신들의 굴욕적인 외교와 거짓선지자들의 위로에 기대어서 닥쳐올 위기와 위험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대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다에 쌓인 불의와 음란이 너무나 커서 북쪽의 바벨론에게 예루살렘을 내주기로 하신 하나님의 결단을 보고는 그런 가운데서도 어떻게든 최악의 파국을 막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유다의 시드기야 왕에게 새로운 세계의 강자 바벨론과 잘 관계하여 최악의 형태의 예루살렘 함락과 성전 붕괴를 막아보려고 했지만 당시의 왕과 지도자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고 파국의 때가 오자 자신들만 빠져나가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당시 어떤 말로도, 눈물로도, 싸움으로도, 자신의 목숨과 가진 것을 모두 내어놓으면서 40년을 줄기차게 외치는 외침으로도 자신의 전달을 듣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의 완악함과 막힘을 보고 “그들은 바보고, 도무지 이해가 없고, 현명하다고 하지만 악을 행하는 데만 현명하고”, “주께서 때리셨어도 그들은 정신을 차리지 않았고, ... 얼굴을 바윗돌보다 더 굳게 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합니다”(렘5:3)라고 쓰고 있습니다. 부자들은 음란과 향락으로 바빠서 들을 시간이 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바위처럼 굳어진 마음으로 새겨들을 줄 모르고, 그렇게 “재앙”이 닥치는 데도 아무도 집중하지 않는 것을 한탄하고 하나님께 자신도 더 이상 이 일을 하지 못하겠으니 그만두게 해달라고 항변합니다.


IV.


        하나님은 당시 유대 땅이 “들녘의 암사슴도 연한 풀이 없어서 갓 낳은 새끼까지 내다버리고, 들나귀도 언덕 위에 서서 여우처럼 헐떡이며, 뜯어먹을 풀이 없어서 그 눈이 흐려지는” 정도로 황폐해졌지만 아무도 거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그렇게 “온 땅이 황무지가 되었는데도 걱정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통탄하십니다. 그래서 유대 백성에게 “마음의 할례”(remove the foreskin of your hearts)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렘4:14). 그렇지 않으면 악한 행실 때문에 하나님의 분노가 불처럼 일어나서 아무도 끌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태울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좋은 옷과 화려한 화장과 제사와 성전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시는데, 마음의 양피를 벗겨내는 것, 그래서 그 안의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고, 그것으로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정의이고 참으로 두려운 것이 무엇인지, 위기가 어떻게 다가오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예레미야가 여기서 우리 마음의 표피를 벗기고 회복하자고 한, 진정한 봄과 들음과 느낌을 가능하게 해주는 우리 마음의 핵을 ‘仁’(惻隱之心, humanity)으로 표현하고자 합니다. 그가 “온 땅이 황무지가 되었는데도 걱정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통탄하신 말씀에서의 그 ‘걱정하는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아시아 전통에서 지금까지 인간성의 핵심으로 이야기해온 仁(commiseration)과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예레미야도 바로 그 仁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유대의 위기를 구할 수 있는 관건으로 본 것입니다. 그것을 회복할 때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며, 온 몸과 마음으로 세상의 物과 다른 사람의 처지와 죽어가고 신음하는 생명의 호소와 흐느낌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큰 고통 가운데 있지만 사람의 말과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외칠 수 없는 자연과 땅의 생명을 향한 외침도 들을 수 있는 仁의 마음을 16세기 아시아의 왕양명(1472-1528) 같은 이는 “천지만물이 하나됨을 아는 공감의 마음”(天地萬物一體之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폭력과 전쟁과 절망, 외로움의 위기도 바로 우리들이 이 마음의 핵인 仁, 측은지심, 나 외의 대상과 物을 측은하게 보고, 그의 사정을 알아주고, 그래서 나와 나의 욕구와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마음을 줄이는 마음이 부재해서 생기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동아시아 전통에서의 仁(사람다움)은 원래 그 상형문자의 뜻으로 보면 몸身 자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자신 안에 다른 사람을 품고 있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여성이 임신한 모습이기도 하겠고, 서로 사랑의 포옹이기도 하며, 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부축하는 모습이기도 하겠습니다. 그래서 동아시아의 고전들은 하나같이 仁을 ‘인간’(人), ‘인간의 길’(人路), ‘인간성의 씨앗과 뿌리’(桃仁), ‘인간의 본성’(性) 등으로 표현해 왔습니다.

        이 仁의 마음, 자기 외의 다른 物을 껴안고 이해하고 측은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잃어버려서 초래된 비인간적 상황으로 예레미야는 여러 가지를 드는데, 예를 들어 사람이 죽었는데도 묻어 줄 사람이 없고, 울어주는 사람도 없으며, 부모를 잃었지만 위로해 주는 사람이 없고(렘16:4-7), 안식일에도 사람들은 죽도록 일만 하고(렘17:21-23), 후손들이 조상의 지은 죄를 기록을 통해서 보고 기억할 것이라(렘17:2-3)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측은지심이 사라져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독이 깊고, 또한 떠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애도의 마음이 충분히 표현될 겨를도 없이 숨이 끊어지자말자 영안실의 차가운 냉동실로 보내지고, 그 시신의 정기가 땅으로 돌려지는 대신에 간편한 화장으로 산화됩니다. 이와 더불어 오늘 우리 사회에서 먹고 사는 일로 모두가 노동자가 되어 안식일이 잘 지켜지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오늘 한국 교회의 행태는 많은 경우 안식일의 예배조차도 노동과 일이 되게 했으며, 휴가와 여가를 즐기는 것이 또 하나의 노동과 의무가 되어버렸습니다. 오늘의 교육 공리주의와 교육 속물주의의 범람 속에서 자신이 어른인 아버지보다 더 긴 시간을 공부해야하는 것을 한탄하며 자실을 하는 초등학생이 나오는 현실은 자식을 번제로 바치던 그 옛날의 불의함과 폭악으로부터 얼마나 먼 것일까요?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효의 공경과 사랑 대신에 부모의 죄와 잘못을 기억하고 가장 큰 아픔을 주는 심판자가 됩니다.

   

V. 


        18세기의 서구 계몽주의자 레싱은 당시 여전히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의 갈등이 심한 상황에서 <현자 나단>의 입을 통해 “인간, 인간이면 족하다”라고 하면서 우리 모두가 인간이라는 사실이야말로 어떠한 차이나 분리를 넘어서서 거기에서 오는 분쟁과 갈등을 넘어 우리를 하나 되게 하고, 친구가 되게 하는 근거라고 하였습니다. 20세기의 여성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다시 그러한 레싱이야말로 폭력과 분쟁과 전쟁의 “어두운 시대”(Dark times)를 비추어 주는 빛과 같은 존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16세기 극심한 사화기의 우리나라에서도 퇴계선생은 “인을 구해서 초월을 완성함”(求仁成聖)을 자신의 일생의 과제로 삼으셨고, 그것을 통해서만이 사람들이 “세상을 자기 자신으로 오인하는 병”(認物爲己之病)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또한 지난 수요일에 여기 향린 교회에 와서 통일운동가 김낙중 선생님을 알게 되었는데, 그분에 대한 서사시 <임진강>을 보면서 한국의 예레미야와 같은 분이라고 생각 했고, 그날 김낙중 선생님은 仁을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일로 다시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天地生物之心’, 아시아의 고전 <중용>이 ‘천지의 만물을 낳고 살리고 보살피는 마음’이라고 표현해준 仁이 저는 예레미야를 거치고, 무수한 혹독한 시련을 거치면서 예수에 의해서 다시 한 번 ‘하나님 부모님’의 마음으로 표현되었고, 우리가 오늘 바울사도의 언어로 읽은 ‘생명’과 ‘평화’의 영과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최근 학생들과 더불어 다시 읽게 된 백범 김구선생님은 <나의 소원>에서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를 밝히시면서 그것을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게 하는 “문화의 힘”으로도 표현해 주셨습니다. 그는 예전부터 우리민족은 仁을 좋아하는 민족이었고, 인후지덕을 중시 여기던 민족이니 이 仁의 마음을 잘 배양하는 것으로 모범이 되고,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실현되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그는 그렇게 “최고 문화 건설의 사명을 달할 민족”은 한마디로 말해서 모든 사람을 “모두 성인(聖人)으로 만드는데 있다”고 하셨고, 최고 문화로 인류의 모범이 되기로 사명을 삼은 우리 민족의 각 사람은 “이기적 개인주의자”여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저는 이 선언처럼 고귀하게 우리의 문화와 교육의 헌장을 잘 현시해주는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에 백범 선생님과 그의 동지 김창숙 선생님이 남북이 하나 되기를 그렇게 역설하였고 그렇게 되지 못할 때 어떤 위험과 위기가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셨는데, 오늘 우리의 상황이 그 예언으로부터 그렇게 자유롭지 못한 것을 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깨어있기를 더욱 더 간구합니다. 작년 여성작가 정이현의 『너는 모른다』의 사람들처럼 그렇게 겉은 멀쩡하지만 측은지심의 마음이 산산이 부서져있는 경우와 가족의 삶과 우리 사회의 삶이 되지 않도록 어떻게 우리가 해야 할 것인가를 더욱 생각해 볼 일입니다. 우리가 仁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는지, 내 마음이 仁으로 채워진 것이 아니라 욕심과 시기와 분쟁, 무지와 비겁함 또는 만용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일(識仁)이 더욱 요청되는데, 저는 그 일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책 한 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 책은 16세기 중국 명나라에서 한 평범한 범부였던 원황(袁黃, 1533-1606)이 자신의 매일의 삶에서 어떻게 仁을 행하는 일에 있어서 앞으로 나아갔고 실패했는지를 도교의 ‘공과격’(功過格)이라는 형식을 빌어서 기록해 나간 수행고백서입니다. 그는 인생의 위기에서 한 스승을 만나 운명을 바꾸고, 금생에서 평범의 경지를 벗어나 성현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굳은 결심으로 매일같이 자신이 행한 일을 공과격에 기록했다고 합니다. 거기서 그는 선한 일은 하나하나 그 숫자로 기록하고, 악을 저지른 경우에는 선행의 수에서 그만큼 빼는 방식으로 자신의 “평범을 마침”(了凡)의 기록을 『요범사훈(了凡四訓)』이라는 글로 저술하여 유훈으로 아들에게 남겼습니다.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명나라 군사고문으로도 왔었다고 하는데, 부유하지 못하면서도 항상 보시를 즐겼고, 그가 내놓는 곡식 중 70%는 승려들에게 30%는 친척과 친지들에게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는 당시 갈등관계에 있었던 유불선의 삼교합일에도 크게 기여했고, 생활 속에서 항상 경전을 독송했으며, 아무리 바쁘고 갑작스러운 일이 생겨도 부인과 함께 매일 이 일을 규칙적으로 실행해서 한 평범한 사람의 인격 수행에 있어서 큰 모범을 남겼습니다.

        오늘 이 책이 우리에게 『운명을 뛰어 넘는 길』(김지수 옮김, 불광출판사 2005)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예전 예레미야가 자신의 민족의 위기를 예언한 것처럼 지금 우리 민족도 운명의 큰 위기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힘을 합하여 그 운명을 뛰어넘는 일에 보탬이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생명’과 ‘평화’의 화두가 우리 모두에게 더욱 강한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2010년 성탄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는 대망절, “한 아기가 우리에게 태어났도다”(a child has been born unto us)의 복된 소식처럼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仁의 씨앗이 다시 싹을 틔우고 피어나서 우리 자신과 우리 민족의 운명을 뛰어넘는 열매로 자라나기를 간구하고 기도합니다.


Merry Christmas and Happy New Ye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