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212 대림절3 / 시편109편 21-27 ; 야고보 2:1, 8-13 "차별없는 세상"
다함께 시편 109:26-27
찬68장, 오 하느님 우리의 창조주시니 / 찬 466장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 / 국찬 109장, 성전 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아가라


 

[세계인권선언 62주년을 맞아]

이틀 전인, 12월10일은 62주년을 맞이한 세계인권선언 기념일이었습니다. 올해는 “차별 종식을 위한 인권옹호자”(Human rights defenders who act to end discrimination.)라는 주제로 인권을 지키기 위해 활동해온 이들을 조명했습니다. 원주민들이 평등하게 치료 받을 수 있는 권리, HIV/AIDS 보균자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이들의 권리, 정치적 갈등 속에서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이들의 생존확인을 비롯하여 인종차별, 여성차별 등에 대한 현장의 소리를 알리기 위해 올해의 구호는 “목소리를 높여라! 차별을 멈춰라!(Speak up, Stop discrimination!)로 정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8년 12월10일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선언문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자세하게 기록한 최초의 문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세계’라는 말이 시사하는 것은 사람의 권리인 인권이라는 것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또 그 어디에서나 적용된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각 나라마다 갖고 있는 독특한 역사, 문화, 종교, 정치, 경제 등의 상황에서 공통분모를 찾아내기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모든 인류가 ‘다 함께 달성해야 할 하나의 공통기준’을 제시하기 위해 이 선언문을 선포했고, 그 결과, 세계인권선언은 국제인권법을 비롯하여 각 나라의 헌법과 법률에 반영될 정도로 영향력 있는 문건이 되었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 결과입니다.

이야기를 더 이어가기 전에, EBS의 지식채널e 동영상을 보겠습니다.

전문과 30조로 이루어진 세계인권선언은, 동영상 제목처럼 인권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목록’을 담고 있습니다. 62년 전에 만들어진 문구이기에 현재에 이르기까지 선언을 기초로 하여 보다 구체적인 내용들을 덧붙이며 각 현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을 반영하여 여러 형태로 보완되어 오고 있습니다.
  


제1조에서 제3조에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제1조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으며 서로에게 형제의 정신으로 대하여야 한다.
제2조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정치적 또는 그 밖의 견해, 민족적 또는 사회적 출신, 재산, 출생, 기타의 지위 등에 따른 어떠한 종류의 구별도 없이, 이 선언에 제시된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 나아가 개인이 속한 나라나 영역이 독립국이든 신탁통치지역이든, 비자치지역이든 또는 그 밖의 다른 주권상의 제한을 받고 있는 지역이든, 그 나라나 영역의 정치적, 사법적, 국제적 지위를 근거로 차별이 행하여져서는 아니된다.
제3조  모든 사람은 생명권과 신체의 자유와 안전을 누릴 권리가 있다.

자유와 권리는 평등하며, 차별이 행해져서 안 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자유, 존엄, 평등, 이성, 양심.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말입니다. 그 가치에 대해 어느 것이 좀 덜하다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와 함께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며, 사람이란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기에 서로 자매/형제 정신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에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이라는 것에 있습니다. 지식채널e 연출가와 말 한번 나눠본 적은 없지만 ‘모든 사람’이라는 것을 메인 타이틀로 걸어둔 것을 보고는 ‘통’하는 지점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찌 보면 새삼스러울 것 없는, 상당히 평범한 문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선언문을 19개국에서 모인 이들과 한 자리에 모여 읽었을 때,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현장과 경험을 떠올리면서 가슴 벅차 했습니다. 이 세상 어디든,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평등을 누리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지 못한 사람처럼 존중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프리카 사람, 달릿/불가촉 천민 계급에 속하는 사람, 소수 민족 출신, 여성, HIV/AIDS 감염인, 시골 출신,   가난한 사람 등등의 이유로 자신의 존엄성이 훼손된 경험을 한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이 선언문을 읽으며 그 아픔을 드러낼 때, 그곳은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지 말라!]

인권이란 사람에게 주어지는 권리입니다. 조금 더 범위를 넓히면 생존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인권과 생존권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누구도 침범당해서는 안 되는 권리입니다.
개개인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권리로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 직업을 선택할 수 있고 재산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 체포나 구금, 수색 압수 등에 있어서 적법한 절차가 보장되고 고문을 당해서는 안 되는 것 등이 포함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난했던 역사 속에서는 이 기본에 속한다고 하는 권리들이 얼마나 쉽게 유린되고 훼손되어 왔습니까! 이로 인해, 우리 모두에게는 집단적인 트라우마/상흔이 남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 중에 있었던 강정구 선생님의 공판 결과를 오키나와에서 들었습니다.
대법원은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할 목적으로 논문 등을 제작.발표한 것으로, 헌법이 보장하는 학문의 자유의 범위 내에 있지 않으므로 공소 혐의는 유죄”라면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자격정지 2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하였습니다. 반인권적인 국가보안법. 이따위 법을 아직까지도 철폐하지 못해, ‘낙인’찍힌 희생자를 바로 우리 곁에서 또다시 내게 된 것은 우리의 수치입니다. 교회 건물 밖에 ‘국가보안법 철폐’ 현수막을 수년째 걸어두면서 우리의 목소리를 전해왔으나, 그 실천에 대해 되짚어 보게 합니다.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입건된 분들이 2006년 35명이었으나, 2010년에는 130명으로 4배 가까이 늘어났습니다. 지난 9월에는 한나라당 심재철 의원 외 19명이 개정 법률안을 제출하여, 이적단체 강제해산명령 제도를 도입하자고 했습니다. 기본질서를 흔든다고 할 때, 무엇이 기본이고, 흔들린다는 것의 구체적인 증거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잣대를 두고, 이제는 결사의 자유까지 빼앗으려고 하는 모양이, 그들이야 말로 기본부터 흔들리는 위기감을 느끼나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헌법에 보장된, 양심의 자유, 언론, 출판, 집회, 결사, 학문, 예술 등의 자유를 침해하는 국가보안법이 세계인권선언이 발표된 1948년 같은 해에 제정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나날이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각종 법률들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나고 있는 지금, 어디가 끝인지 모르고 계속 뒷걸음치는 반인권적인 국가보안법과 같은 법률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반인권적인 억압과 탄압에 앞장서는 이들의 행태를, 어디가 끝인지 뒷짐 진 채 보고만 있어야 하겠습니까!
이러한 상황에서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며, 사회에서 불온하고, 질서를 파괴하는 이들이라고 일컬음을 받았던 합삐루들의 편에 서셨던 야훼 신앙의 전통을 이어가는 기독교가 오늘날 부여받은 사명이 무엇인지 전해주시는 하느님의 음성은 분명하다고 믿습니다.

[사회적인 약자들의 탄원]


 
오늘 함께 읽은 시편109편의 말씀은 하느님을 향해 ‘잠잠하지 마소서!’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억울한 상황에 처한 이의 탄원, 무고하게 고소당한 이가 고소한 이들을 하느님 앞에 고소하는 탄식, 몸과 영혼을 괴롭히는 모든 불행에 대한 호소가 담겨 있습니다.
부당한 저주가 난무하는 가운데, 하느님 앞에 서는 것은 그야말로 하느님 빽 밖에는 의지할 곳이 없어서입니다. 하느님 앞에 솔직하게 내어놓는다는 것은 그 자신을 온전히 맡긴다는 전적인 신뢰가 없으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앞에 서서 자신의 속을 내보이는 과정을  통해 두려움이 확신에 찬 찬양으로 바뀌는 것을 이 본문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기독교라는 종교, 하느님을 믿는 우리 기독인들이 서야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재차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인 약자들은 원래부터 약자였던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그러니까, 한 사회가 배제의 논리를 통해 평등권을 빼앗겼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개개인의 인권과 함께 사회가 보장해야할 인권인 노동권, 교육권을 비롯한 생존권 등이 이에 속합니다. 얼마 전 대폭 삭감된 예산안 중 결식 아동들에 대한 예산, 저소득층에 대한 에너지 보조금,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되는데 필요한 예산 등이 전액 삭감 되었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국가가 보호는 커녕, 최소한의 보호막조차 거두겠다는 심보라 할 수 있습니다. 벼랑 끝으로 몰아세워두고, 그들로부터 빼앗은 예산으로 배 부르는 사람은 따로 있는 현실을 볼 때, 국민을 대변하는 일을 한다며 가슴에 금뺏지를 달고 있는 이들을 이렇게 두고 보고만 있어야 할런지요. 이런 결과가 우리 스스로 체감되지 않는 한, 많은 부분 우리는 방관하면서 침묵을 계속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70억에 가까운 세계 인구를 100명으로 환산해보면, 이라는 스탠포드 대학의 의과교수가 계산한 내용을 토대로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100명 중, 70명이 문맹이고, 70명이 유색인종입니다. 11명이 동성애자이고, 1명이 죽기 직전에 있고, 1명만이 대학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컴퓨터를 갖고 있는 사람도 1명입니다. 이야기의 끝에는 ‘냉장고에 먹을 것이 있고, 몸엔 옷을 걸쳤고, 머리 위로는 지붕이 있는데다 잘 곳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 사는 75%의 사람보다 풍요롭게 살고 있는 것이며, 거기에 은행이나 지갑에 돈이 있고, 잔돈을 넣어둔 동전통까지 있다면 상위 8%에 해당하는 사람에 속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가 인권을 보장하라는 외침을 목숨을 내놓고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비롯한, 장애인, 성소수자, 빈민 등 사회적 약자들에게 역으로 이용되어 무조건 현재 상황에 감사하고 불평, 불만하지 말라는 식으로 이용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소수의 권력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사안이 있는가하면, 소수라는 이유로 있어도 없는 취급을 당하고, 방치되고 있는 현실이 우리들 주변에는 얼마나 있는지, 그리고 그렇게 지배하는 일에 직간접적으로 우리 역시 가담되어 있는지를 돌아볼 수 있어야겠습니다. 

지난 가을부터 시작한 여성의 눈으로 읽는 성서가 앞으로 3주 후면 12주 과정을 마치게 되겠습니다만, 첫 강의 때 “힘의 꽃(The Power Flower)”이라는 것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제가 불러드리는 항목을 잘 들으시면서 그것으로 인해 내가 차별받은 경험이 있는지 없는지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생물학적인 성(여성/남성), 인종(황인종/흑인/백인), 언어, 종교, 가족형태(비혼/기혼), 사회적 계급, 연령, 교육정도, 몸의 상태(장애냐 아니냐, 혹은 건강하냐 아니냐), 출신지역, 성적 지향(동성을 사랑하냐, 양성 모두를 사랑하냐, 아니면 이성만 사랑하냐 등등)

여성의 눈에서는 차별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은 꽃잎을 색칠하도록 했습니다. 당시 16명 정도가 참석했는데 그 가운데 제일 꽃잎을 많이 칠한 사람이 11개, 제일 적은 사람, 그러니까 차별의 경험이 많은 사람은 단 1개만 색칠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몇 개의 꽃잎에 색을 칠할 수 있습니까?
여기서 꽃잎 색을 다 입히지 못한 사람일수록 차별을 많이 당해온 사람이요, 꽃잎 색이 많을수록 그 사회에서는 기득권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함께 모여 있는 우리는, 냉장고에 먹을 것이 있고, 옷도 입고 있고, 지붕이 있는 곳에서 잘 곳이 있는 25%에 속해 있지만, 일상에서 느끼는 차별의 정도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부터 사투를 벌여야 하는 이들이 분명 있지만,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다라고 단언할 수도 없거니와, 먹고 사는 문제는 물론이요, 수도 없는 사회적 차별의 장벽을 넘어 자신의 존엄성을 지켜내기 위해 복합적인 차별구조 속에서 생존권을 위한 사투를 벌여야 하는 이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의 수보다 훨씬 많습니다.

[차별에 대항하는 목소리를 내라!]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갖고 있는 기독교인, 그리고 보다 효과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교회가 단순히 건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러한 복합적인 차별구조 속에서 어떻게 ‘하느님의 형상’을 온전히 지켜나갈 것인지의 과제는 우리 모두의 몫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느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행위를 일삼으면서도 그것이 ‘복음’을 위한 믿음의 행위로 둔갑해 있는 현실을 곳곳에서 목도하게 됩니다.

국가를 전복할 위험이 있는 자로, 자유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자로,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자로, 교리를 수호하지 않는 자로 누명을 씌워 제거해야 하는 대상으로 만듭니다. 사회장벽에 부딪힐 때 가로 막고 있는 장벽을 없애려 하면 바로 불순한 자로 낙인을 찍습니다. 오로지 측은한 존재가 되어 베풀어주는 자선을 받을 대상이 되어야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이들은 경멸해도 되는 존재로 여깁니다. 사회적인 편견과 차별에 반기를 드는 사람은 별 것도 아닌 일에 예민하기만 사람으로 여기고, 하찮게 여깁니다. 이러한 것들이 사회 곳곳에 존재하고 있는 차별을 정당화시키는 기자재로 작동하고 있고, 더 나아가 종교의 이름으로 이러한 차별과 혐오가 정당화되고 있습니다.


같은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너무 창피하다고 해도, 기독교를 자신의 종교로 갖고 있지 않은 이들에게는 50보, 100보일 뿐, 다같은 기독교인 입니다.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정치권력과 야합하거나, 아예 손아귀에 넣어 쥐락펴락하면서 오만함을 드러내고 있는 일부 기독교 권력자들의 행태에 대해 우리가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않음으로 인해 같은 부류로 낙인찍히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올해 세계인권선언 기념일의 구호인 “목소리를 내라!”는 우리에게 제대로 하라는 실천을 요구하는 목소리로 들려옵니다.

정치, 경제, 문화를 비롯한 모든 영역에서 비주류가 되지 않고자 몸부림 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주류라고 불리우는 이들 사이에 끼지 않아도 정정당당하게 행복하게 살 수 있고, 또 그렇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은 사실 그리 많지 않습니다. 주류에 편승하고자 할 때, 우리는 은연 중에 주류 사회가 들이대는 잣대를 남에게도 들이대게 됩니다. 내 자신이 그러한 물결에 휩싸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이 갖고 있는 생명권, 생존권이 보장되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변에서 예민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표현하고 알려야 합니다. 빨갱이고, 국가 전복을 기도하는 자라고 엄청난 탄압을 받더라도 그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지난한 과정을 겪더라도 그러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이리저리 재단 당하느라 고통 받는 이들, 그렇게 손가락질 받고, 배척받고, 고난을 당하는 당사자의 편에 서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차별을 금지하는 법이 필요한 이유]

올해만 해도, 차별과 혐오를 조장해 온 일부 기독교의 행태는 다양합니다. 특히 동성을 사랑하는 동성애자, 생물학적인 성과 사회적으로 요구받는 성이 자신의 정체성과 다른 트렌스 젠더를 비롯하여 다양한 성적 지향을 갖고 있는 이들을 주된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차별금지법 제정을 훼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두푼도 아닌 엄청난 돈을 들여,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 많은 부수를 발행하는 신문에 광고를 내고, 국회위원들을 압박하고, 산하 단체에 속한 교회들에게 문서를 발송하는 등 상당히 왕성한 활동력과 함께 조직력, 재정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한 차별을 정당화시키는 기자재들을 다양하게 활용하면서 눈에 보이는 죄인의 실체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의 죄가 무엇인지를 말할 때, 구체적인 죄에 대한 명목이 성서에 명시되어 있어도, 내가 걸리는 사항이면 죄가 아니라고 교묘히 빠져나가고 나와 별반 상관이 없는 사항에 대해서는 길길이 뛰는 모양새가 가관입니다.


성서에 있는 3만여 구절 중에서 단지 여섯 곳 정도 명시되어 있는, 그것도 상당히 편견을 갖고 해석되어 온 내용으로 전수되어 오고 있다는 것을 밝혀도, 찾고 찾던 ‘죄인’의 실체가 발견되었으니 죄에서 구하고, 구원 받게 해야 할 지상명령을 받았다는 듯이 호들갑을 떨며 난리를 칩니다. 정작 파헤쳐야 할 죄들을 깊은 구덩이에 파묻고, 간접적인 살인을 서슴치 않고 행하는 이들이 속해 있는 거대 집단이 바로 ‘기독교’라는 문패를 걸고 있는 것에 분노를 느낍니다. 이들의 행태는 성서가 쓰여진 원래 자리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에 대해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성서가 어떻게 폭력과 살인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지 잘 보여줍니다. 교회의 가르침이 일점일획도 틀릴 수 없다는 착각과 환상에 빠져있을 때, 우리가 성서의 참 복음의 내용을 얼마나 왜곡할 수 있는지, 그로 인해 이웃의 존엄성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성서가 쓰여진 원래 자리에서도 있었고,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는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고발에 대한 목소리에 귀를 막은 결과, 성서가 말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은 사라지고, 어둠과 부패만이 남아있는 것을 볼 때, 우리가 서야할 자리가 어디인지 되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직까지도 편견과 차별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흑인들이 백인들과 같은 화장실을 사용하거나, 같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카페에 앉을 수 있게 된 것이 법으로 보장된 지 50년이 조금 넘었을 뿐입니다. 영국 여성들이 참정권을 갖게 된 것이 올해로 100년이 되긴 했지만, 쿠웨이트 같은 나라에서는 2007년에서야 여성의 참정권을 보장받았습니다. 물론 여전히 참정권이 주어지지 않는 나라도 있습니다.

오늘 오후, 인권주일 특강으로 마련되는 “혐오와 폭력에 맞서는 기본, 차별금지법”은 기본적인 인권보장을 왜 세세하게 법으로 명시해야 하는지 그 필요성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아직까지 차별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합의한 바가 없기 때문에 사회적인 공감대를 만들어가기 위해서 차별해서는 안 되는 사항에 대한 명명작업이 필요합니다. 그 누구도 차별하는 행위를 하지 않으면 문제가 없겠지만, 차별의 행위라는 것이 사회 곳곳에, 가정, 학교, 일터, 교회, 그리고 메스컴을 통해서도 행해지기 때문에 필요합니다. 사회적인 약자를 보호하는 법이 제1성서에 명시되어 있듯이 이 시대에 필요한 사회적인 약자 보호법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차별과 낙인이 우리를 더 아프게 한다]

마지막으로 한 친구의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2008년 초 겨울, 불편한 몸을 이끌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자 모인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 향린교회 4층까지 올라왔던 그때였습니다. 

사회가 규정하는 가정이라는 울타리 밖에서 태어나 가정이라는 곳에 편입되면서 온갖 눈치를 보며 형에 의한 폭력을 경험했습니다. 중학교 1학년이 되어서는 그런 집이 싫어 가출을 했습니다. 학교의 울타리에서도 벗어났습니다. 창신동 봉제공장에 들어가서는 10대 노동자, 미싱사로서의 삶이 시작됩니다. 일이 바쁘면 공장문을 걸어 잠근 채 심야까지 일을 시키는 노동착취를 당해야 했고, 동료들에 의한 상습적인 성폭력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여성보다는 남성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았던 게이로서의 자신의 성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에서는 자살시도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AIDS에 감염된 것을 알게 되고 치료를 받으며 쉼터에서 외롭게 죽어가는 이들을 목격하게 됩니다. 치료제가 있기에 복용하면 생명이 연장되고, 활동도 가능하지만, 가난한 이들은 상시 복용이 힘들 정도로 높은 가격을 매겨놓은 다국적 제약사의 횡포로 인해 사회의 부조리함에 눈을 뜨고 이에 맞서오고 있습니다. 오른쪽 눈은 실명했고, 왼쪽 눈도 시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청력도 반 이상 손상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얼마 전 한겨레 신문에서도 소개된 바 있는 윤가브리엘 입니다.
근래 출판된 그의 삶을 담은 책, “하늘을 듣는다”에서 윤 가브리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HIV/AIDS 인권연대 나우리+에서 활동하면서 가장 확실히 알게 된 것이 하나있다. 그건 바로 권력자들에게는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늘 나에게 절망만 주었다. 저 탐욕스런 제약회사, 무능한데다가 감염인을 사람보다는 바이러스로 먼저 인식하는 정부, 소독만 잘하면 되는 것을 모르고 에이즈 환자의 치료를 거부하는 병원들, 에이즈에 걸렸다는 이유로 감염인의 일터를 빼앗는 자본가들, 권력을 가진 자들은 HIV/AIDS 감염인뿐만 아니라 동성애자들, 장애인들을 절망에 빠트려 불행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권력을 가진 자들에 의해 절망할 때 나에게 희망을 준 사람들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다.”

시각장애자, 청각장애자, AIDS환자, 게이, 그리고 노동자인 그는 말합니다.

“(에이즈보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차별과 낙인이 우리를 더 아프게 한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편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만큼
차별을 두고 사람을 대우하지 마십시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최고의 법을 지키십시오.
심판을 이기는 자비, 바로 그 마음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의 존엄성을 귀히 여기는 것이
내 자신의 존귀함 또한 존중받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고,
오는 한주도 당당하게 하느님의 사람답게
각자의 삶터에서 살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