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9일 대림절 넷째 주일

하늘, 땅 그리고 임마누엘

시편 80:1-7, 17-19; 이사야 7:10-16; 로마서 1:1-7; 마태 1:18-25


[임기 시작과 하늘뜻]


저의 두 번째 임기가 지난 6월 달에 이미 시작하였습니다만, 첫 번째 안식년을 이제 마쳤으니 진정한 의미에서 오늘이 두 번째이자 마지막 임기의 시작인 셈입니다. 그간 수고하신 임보라, 한문덕 두 부목사님께 감사의 박수를 보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가 처음 부임하여 선택한 성서 본문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나자렛 회당에서 선포하신 이사야의 말씀이 인용된 루가복음 4장 16-20절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사실 오늘도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면서 예수님의 세상 목회의 시작을 따라 이를 다시 선택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실제는 하지 못했고, 더 많은 성서 본문을 따로 복사하여 여러분에게 나누어 드렸습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으셨어요?


사실 대부분의 남한 교회들은 제1성서든 제2성서든 하나의 본문만을 선택하여 하늘뜻펴기를 하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와 같이 1성서와 2성서에서 하나씩 본문을 정해 읽는 교회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계 교회가 주제와 절기에 따라 성서를 매주일 예배 때마다 3년을 계속 읽으면 성서 전체를 한번 읽을 수 있도록 분류해놓은 방식이 있는데, 이를 영어로 렉셔너리(lectionary)라 하고 우리말로는 성서일과라고 합니다. 더 정확하게 하면 성서주과라고 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만. 이 성서일과에 따르면 매주 4개의 본문 말씀이 주어집니다. 각각 시편, 제1성서, 서신서, 그리고 복음서의 말씀입니다. 오늘부터 성서일과를 본문으로 하여 하늘뜻펴기를 하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이러합니다. 첫째는 세계교회와 함께 하려는 에큐메니칼 정신에 있고, 둘째는 현재 목회자가 선택하는 말씀은 개개인에 따라 선호하는 본문을 선택하다보니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간 저는 예언서나 복음서의 말씀을 선호하다보니 상대적으로 그 외의 책은 자주 다루지 못했습니다. 셋째, 사실 신학교에서는 이렇게 하도록 가르칩니다만,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성공회와 같이 예전이 강한 교회를 빼놓고는 이를 따라 하는 교회는 거의 없는데, 이는 4개의 본문을 동시에 소화하여 하나의 말씀으로 전할만큼의 목회자의 능력이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가 첫 번째이고 그럴만한 시간 또한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저도 처음 목회할 때, 한 2년동안 성서일과를 본문으로 하늘뜻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저 또한 서로 다른 본문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일에 어려움이 많았고, 이를 도와주는 책이 있지만, 제가 섬기는 한인이민교회 상황과는 맞지 않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많은 주석 책들이 나와 있기에 설교자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향린교회와 같이 오늘에 일어나는 사회정치문화 전반 사건을 2천년 전에 기록된 성서의 말씀으로 다시금 풀어내야 하는 예언자적인 교회에서는 지금까지 해온 두 개의 본문만을 다루는 일도 어려웠는데, 이제는 여기에 두 개를 더해 네 개의 본문을 동시에 다루어야 하기에 배나 더 노력을 해야 하는 어려움이 생겼습니다만, 말씀 훈련의 은혜로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넷째, 이점이 저에게는 앞서의 이유보다 더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하늘뜻펴기는 목사 혼자 질문하고 답하고 그래왔습니다. 교우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까 하고 스스로 질문을 던져봅니다만, 목사 자신과의 씨름이었지 교우들의 눈을 통한 결과물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본문 말씀이 미리 주어져 있기에 교우들과의 대화가 가능합니다.예를 들면 오늘 마태오 본문을 여러분이 지난주에 읽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자연히 이런 질문들이 나옵니다. “아니 오늘 이 과학의 시대에 신의 존재를 공개적으로 부정하는 시대에 도대체 동정녀탄생의 얘기는 어떻게 증명될 수 있는가? 또 이를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은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인가? 오늘 이 시대에 나의 삶에 그리고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물음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등등 여기서 한발자국 더 나간 질문이나 나라면 이런 식으로 한번 하늘뜻을 펴보겠다 등등 여러분의 의견을 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늘뜻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이를 듣고 자신의 하늘뜻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일방 선포에서 쌍방 대화의 하늘뜻이 됩니다. 물론 이 일에 교우들이 얼마나 동참할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우선은 교회 홈피에 여러분이 댓글 형식으로 하거나 아니면 직접 전화로 얘기하거나 이메일 등등으로 하셔도 되고 트위터도 좋습니다.


[하늘뜻펴기와 교회 개혁]


이렇게 하여 좋은 결과가 나온다면 남한 교회에 매우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봅니다. 현재 남한 교회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이 하늘뜻펴기에 있어 목사님들의 전횡으로 인한 평신도들의 비주체성입니다. 설교시간에 목사가 이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니 이렇게 해야 한다 하고 일방적으로 때로는 아전인수적으로 해석을 하여 단상에서 선포를 하면 교인들은 그저 아멘 아멘하는 것이 문제의 근원입니다. 교인들의 말씀의 노예화입니다. 이근본이 해결되지 않는 가운데 교회개혁 운운하는 것은 다 수박 겉핧기입니다. 500년전 루터가 시작한 중세 기독교개혁의 근본이 무엇입니까? 라틴어로만 되어 있어 신부만 읽을 수 있었던 성서 말씀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 아닙니까? 여기에 때를 맞춰 금속활자가 개발이 되었기에 성서가 쉽게 보급이 되었던 것이고 여기서 평신도들이 눈을 떴던 것입니다. 이제는 평신도가 성서를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성서를 나름대로 해석하고 이를 교회내에서 선포할 수 있는 그런 지경에까지 가야하고 이것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물론 저희 교회는 일년에 몇차례 평신도하늘뜻펴기를 시행하고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교우 전체가 보다 성서말씀에 다가가도록 하고 자기주체적인 성서 해석능력을 키우도록 하여야만 진정한 교회개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 교회가 부패합니까? 교인들의 입과 눈을 목사가 설교로 가둬버렸기 때문입니다.


처음 향린교회가 서서 20년 이상을 평신도들이 돌아가면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이 귀한 전통을 잘 살려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인터넷을 활용하면 더 잘할 수 있습니다. 사실 가정구역, 평화나눔공동체나 소그룹모임은 이것이 교회 밖의 조직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말씀을 통한 나눔과 기도입니다. 거기가 바로 작은 교회이니까 거기서 서로 기도하고 작게나마 하늘뜻을 펴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대체로 이것들이 빠져 있는데, 이를 회복해야 합니다. 이게 빠지면 교회 이름으로 모이고 아무리 큰일을 하였다하더라도 알맹이없는 모임입니다. 오늘부터 그 주의 본문 말씀을 복사하여 나눠드리니 한주동안 묵상하여 보시고 최소한 일요일만이라도 교회에 2,30분 일찍 오셔서 읽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 하나쯤은 빠져도 별상관이 없을거야. 나보다 똑똑한 분들도 많고, 또 장로님들이 있잖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지요. 무슨 비유입니까?


열 달란트 다섯 달란트 한 달란트 비유 생각나지 않으세요? 한 달란트 받은 종이 그런 생각 한 겁니다. 나보다 많은 받은 종들이 충분히 이익을 남길 것이고 나는 괜히 투자했다가 잃어버리면 욕만 더 먹으니 그냥 보관만 했다가 돌려주자. 그래 그냥 한 달란트 땅에 묻었다가 들고 왔어요? 그때 주님이 뭐라고 하지요? “너야말로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 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 쫓아라. 거기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나중에 난 이런 얘기 못 들었다고 저에게 항의하면 안됩니다. 저 분명히 말씀드렸고, 그 기회를 제공하였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저의 제안을 따라준다면, 여러분이 받는 말씀의 은혜는 지금의 30배, 60배 100배가 될 것입니다.(아멘 좀 하세요.)


그리고 끝으로 지휘자가 성가곡을 고를 때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조계연집사님 1년치 본문 말씀이 다 준비되어 있으니 필요하면 목회실에 연락주세요. 이 방식은 이 자리에 서는 부목사 초청목사 평신도 모두에게 적용이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돌아가셔서 토요일 저녁에 아 목사님 제가 읽어보니 이런 뜻이 있는 것 같은데, 내일 설교에 반영해 주세요. 그러면 되겠어요? 안되겠어요? 목사가 당황하지 않도록 최소한 목요일까지 연락주세요.


오늘은 서론이 너무 길었습니다.


지난 주 어느 여류 소설가가 신문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다시 한 해가 저물 무렵, 난마와 같은 세태와 마음의 정처를 잃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이 풍진 세상, 어지럽고 편편찮은 세상을 만나 바람에 날리는 티끌처럼 살며, “너희 희망이 무어냐?”고 물으면 무어라고 대답할까? 희망이 없는 상태는 절망이고, 절망이야 말로 마음의 자살이니, 어쨌거나 삶이라는 권리이자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희망의 끈을 그러잡고 살아야 할 터이다. 희망이란 미래에 대한 기대 어린 바람임과 동시에 현재를 견디는 의지가지이기 때문이다.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유치한 것부터 거룩한 것까지, 옹근 것부터 속절없는 것까지, 희망은 다양할수록 좋다.>


대림절이란 아기예수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아니 단순한 절기가 아니라 칙칙한 현실에서 희망을 보고 그 희망을 앞당기기 위해 안간 힘을 쓰는 절기입니다. 성서 전체가 그러합니다만 오늘 주어진 4개의 본문 말씀의 역사적 상황이 그러합니다. 시편기자는 고통 가운데 외칩니다. “만군의 하느님, 우리를 다시 일으키소서, 당신의 밝은 얼굴 보여주시면 우리가 살아나리이다. 만군의 야훼 하느님, 당신 백성의 기도소리 언제까지 노엽게 들으시렵니까?” 구체적 현실은 알 수 없지만 신앙공동체가 직면한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울부짖고 있습니다. 이사야 또한 당시의 이웃 두 왕국의 침공 앞에서 두려워하고 있는 아하즈 왕에게 야훼 하느님의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장면입니다. 바울이 로마교우들에게 보낸 인사말, 거기서 그가 받은 이방선교의 사명을 밝히고 있습니다만, 그 또한 유대전통주의자들과 로마당국 양쪽으로부터 예수 부활을 전하여 세상을 소란케하는 자로 몰려 감옥살이와 태형을 포함한 죽음의 핍박을 끊임없이 받아오던 상황이었습니다.


[예수 족보 속에 담긴 뜻]


마태오복음은 제2성서의 첫 책입니다. 씌어진 순서로 따진다면 한 열 번째쯤 되겠습니다만,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로 이어지는 긴 족보로 인해 첫머리에 놓여있습니다. 그런데 마태오가 보여주고자 하는 이 족보의 목적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런 혈통의 장자의 순수성을 보여주는 가계의 족보가 아닙니다. 이 족보 목적은 예수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신비의 인물이 아니라, 제1성서의 역사에 가장 중요한 인물로 기억되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인 ‘땅’의 사람임을 밝히는 것이 첫째이고 두 번째는 이런 ‘땅’의 족보에는 ‘하늘’의 숨은 비밀의 메시지가 담겨 있으니 이를 읽어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긴 족보를 열거한 다음 이를 굳이 셋으로 나누어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가 14대요 다윗으로부터 바벨론 포로까지가 14대요 바벨론포로부터 예수까지가 14대임을 말하는 데서 그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모두 합치면 42대가 되지만, 다윗과 바벨론포로가 각각 두 번 나오니까 결국은 40대가 됩니다.


족보에서 몇 대라는 것이 무엇이 중요하기에 그는 굳이 이렇게 수고스러운 족보를 만들어내고 그리고 독자들로 하여금 굳이 이런 식으로 덧셈과 뺄셈을 하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인가? 그래서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는 40대라고 그냥 말하면 될 일을 비밀을 밝히는 암호 마냥, 찢어진 보물지도를 서로 맞추는 것인 양, 이렇게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일까? 40은 성서에서 가장 중요하게 말해지는 숫자입니다. 노아의 홍수 기간이 40일이요, 히브리노예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광야에 머문 기간이 40년이요, 모세가 하느님의 법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머문 기간이 40일이요,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의 승리 이후 이세벨 왕후의 죽음의 위협에 겁을 먹고 도망을 쳐 하느님의 호렙산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이 40일이요, 예수께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세상에 나오시기 전 사탄을 꺽기 위해 금식하시며 기도하기 위해 광야에 머문 기간이 40일입니다.


결국 숫자 40과 관련된 성서의 이야기를 묵상해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게 된다. 40은 첫째 시련과 고통의 기간입니다. 홍수가 온 세상을 덮는 40일의 기간은 땅위의 생명이 몰살당하는 죽음의 기간입니다. 광야 40년은 인간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모든 보호와 조건으로부터 벗어난 시간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이 40은 희망의 상징입니다. 노아는 40일이 끝나자 다시는 그런 재난이 없을 것이라는 무지개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 약속을 받았고, 모세는 40일의 산기도가 끝나자 노예로부터 출발한 히브리민족이 자유민으로 살아가는 일에 중심되는 십계명을 받았고, 엘리야는 모든 일이 고통스러우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이스라엘뿐만이 아니라 이웃나라를 다스릴 새로운 왕을 기름 부음으로 야훼 하느님 신앙을 다시 회복하였고, 예수께서는 40일의 광야기도를 통해 역사의 중심에서 밀려난 가난하고 힘없는 갈릴리 민중들을 다시금 역사의 중심으로 세우고 그들이 살아가야 하는 삶의 가치, 생명 평화 정의의 하느님 나라의 기본 가치를 세우신 것입니다.


결국 마태오가 족보라는 머리말을 통해 그의 글을 읽는 모든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여러분이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역사라 할지라도 포기하지 말라. 역사는 결국 하느님의 것이다. 그렇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선포는 그의 후세 곧 우리를 위한 선포일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향한 선포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예루살렘 성전이 온전히 파괴된 희망이라곤 눈꼽만큼도 발견할 수 없는 처절한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입니다. 600여년전 성전이 함락되고 왕을 비롯한 수많은 동족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후 야훼 하느님의 선민의 민족으로서 자부심에 큰 상처를 입은 것은 사실이고 그래도 정치적 독립은 잃었어도 성전만은 다시금 회복함으로 신앙만은 면면히 지켜오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마저 끊어지고 만 것입니다. 150년전 로마제국에 대항하여 잠시 독립을 되찾았던 막카베우스 집안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던 독립 저항운동이 완전히 멸절하고 만것입니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말하면, 돈이 최고의 가치인 이 시대에서 나이 60의 가장이 한칸방 월세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면 그가 무엇으로 자신을 버텨올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이 신앙인도 아니라면 이 사람은 술 외에는 다른 희망이 없습니다. 마태오와 그의 공동체가 처한 상황이 그러했습니다. 신앙마저 포기해야 하는 막다른 골목에 처한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제1성서의 역사 예루살렘 성전과 율법 중심의 적어도 2천년간의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의 역사가 이제 완전히 끝장이 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살을 하지 않는다면 그래도 희망을 품어야 한다면 이제 남은 길은 딱 하나입니다. 그건 하느님이 직접 이 역사에 내려오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왕과 예언자와 제사장으로 이어지는 그런 그리스도(메시야,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말고 정말 이 인간 역사를 근본에서부터 그 방향을 뒤집을수 있는 그런 메시야가 와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절망의 끝까지 가보세요. 목사님 저는 희망이 없어요. 그건 아직 끝까지 안간겁니다. 끝까지 가보세요. 끝에 가면 빛이 보입니다. 마태오는 모든 희망이 끝나는 절대절명의 순간, 하늘로부터 번개가 내리치는 카이로스의 환상을 본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우리 한반도의 역사를 어떻게 보고 있나요? 외세의존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민족주체의 입장에서 묻는 것입니다.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이 번갈아가며 이 땅을 유린했고 이로 인해 나라는 두 동강 났고, 이미 서로 죽고죽이는 전쟁을 치른바 있고, 그 여한이 계속 남아 오늘이라도 19일 오늘 이시간이라도 여차하면 핵전쟁이라도 날수 있는 절대절명의 순간입니다. 물리적인 성전만 파괴되지 않았을 따름이지, 이미 군사정치문화적으로 희망이 끊긴 2천년 전 저 팔레스타인의 한 민족이 겪는 모습과 거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마태오공동체가 바라는대로 하늘에서부터 직접 메시야가 내려오지 않으면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이 아닙니까? 6자회담이 대안인가요? 미국이 우리의 대안인가요? 남북이 마주 앉아도 남과 북의 그 근본체제가 바뀌지 않는 한 결국은 힘겨루기에 불과한 것 아닌가요? 저는 이 한반도에 머물고 있는 짙은 먹구름을 제거할 수 있는 힘은 그런 소수의 정치가들에게 달려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40대의 긴 족보가 말해진 다음 임마누엘이라고 불리는 한 아기가 그 족보의 계보에서 태어날 것이고 이 아기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 한 여인에게서 태어날 것이라고 하는 하늘의 소식은 그야말로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희망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망망대해 뭍이라고 조금도 보이지 않는 절망의 상태에서 노아의 방주를 떠난 비둘기가 막 싹이 돋아난 푸릇푸릇한 가는 잎사귀를 입에 물고 온 그 이상으로, 모세가 제멋대로 흩어진 노예들을 하나로 묶어 하나의 이상적인 나라를 세울 수 있는 근본 십계명을 받은 그 이상으로, 엘리야가 백성들의 개인주의에 기초한 배반과 무력함에 철저에게 절망하고 나서 아합의 뒤를 잇는 왕을 기름 붓는 그 감격 이상으로, 그건 희망 그 자체 미래 그 자체였습니다,


[동정녀탄생과 성서비평학]


본래 이사야 본문에 나오는 이사야가 아하즈왕에게 말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하는 구절에서 한국어 번역은 모두 ‘처녀’라고 번역을 했습니다만, 영어를 비롯한 다른 번역은 젊은 여인(처녀를 뜻하는 virgin이 아닌 young woman)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본래 히브리 단어 'almah의 본뜻이 그러하고 이야기의 문맥을 보더라도 이는 아하즈 왕의 젊은 후비에게서 아들이 나올 것이라고 하는 예언입니다. 게다가 여기에 쓰인 히브리동사의 용법으로 보더라도 없던 아기가 생길 것이라는 예언이 아니라 지금 아기를 태중에 갖고 있고 그 아기가 태어날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처녀든 젊은 여인이든 이사야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그 아이가 ‘나쁜 것을 버리고 좋은 것을 택할 줄 알게 되기 전’ 이는 선악의 윤리 판단이 아닌,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을 구분할 줄 아는 3,4세가 되기 전에 지금 남왕국 유다를 위협하는 자 두 왕국 곧 북왕국 이스라엘과 아람왕국이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가 이사야 본문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 이사야의 이야기 속에서 아들이 탄생하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고 하는 이 14절 말씀만 전체 문맥에서 뚝 떨어져 나와 제2성서의 마태오복음과 루가복음의 예수 탄생 이야기 속에서 젊은 여인이 처녀로 둔갑을 하고 이후 이것이 교회의 동정녀교리의 근간이 된 것입니다. 중세시대에는 이것 부정했다가 화형당한 사람도 많습니다. 이사야의 입장에서 보면 입이 벌어지는 아전인수의 해석입니다. 그런데 이건 마태오와 루가 혹은 이 두 저자 혹은 이 두 저자의 근간이 되는 Q문서(Q문서가 뭔지 모르는 교우는 다음 성서배움마당에 필히 참석!) 저자의 입장이 아니라 이당시보다 삼사백년 전에 히브리어를 모르는 그리스제국 전체에 흩어져 살아가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위해 그리스어(헬라말)로 번역을 했고 이를 셉투어진트 혹은 70인역이라 흔히 부르는데, 여기에 이미 이사야서 7장 14절의 히브리어의 젊은 여인 almah를 처녀라는 뜻의 헬라어 parthenos라는 단어로 번역을 해놓았습니다. 실수인지 의도인지는 알수가 없고, 또 마태오나 루가가 이 사실을 알았는지도 확인할 수 없지만, 모든 희망이 단절된 상태에서 동정녀탄생 이야기를 근간으로 야훼 하느님의 새로운 역사를 펼쳐나갈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늘의 섭리였지 우연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동정녀탄생과 오늘의 해석]


물론 이 동정녀탄생 주장이 비기독교인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하고 신을 부정하는 과학자들은 이를 호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믿지 못할 것은 아닙니다. 현대과학에서 설명할 수 없는 자연현상은 얼마든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또 과학자들이 설명한다고 해서 다 옳은 것도 아닙니다. 이론에 근거한 추론이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을 따름입니다. 세상을 놀라게 한 아인스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은 과학자들 모두가 동의하는 바입니다. 하여간 요즘 술 한잔하는 자리에서 비기독교인 친구들이 이런 얘기를 꺼내면 매우 곤혹스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분명한 것은 1960년대 신의 죽음의 신학이 등장하고 세속의 물결이 급속하게 일어나면서 사회학자들이 이제 종교는 설자리를 잃게 되었다고 다들 예언을 하였는데, 실제는 그 반대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기독교인이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반면 불교나 이슬람교 혹은 유사종교인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고, 기독교의 경우도 북구에서 남구로 그 중심축이 옮겨가고 있을 따름이지 전체적으로 보면 오히려 증가추세입니다. 그저 남한에서만 폭발적으로 성장했다가 급속히 줄고 있는 것인데, 이는 남한만이 갖는 사회정치 현실에 맞물린 기독교 근본주의의 병폐 때문입니다. 남한만의 독특한 예입니다. 결론으로 종교와 과학이 서로 적대적이라고 보는 일반 견해는 성급한 판단입니다.


가장 쉬운 예로 창세기 1장은 창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하는 과학적 논술이 아니라, 이 우주는 신에 의해 어떤 목적을 갖고 창조되었다는 신앙고백문이자 찬양의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문학적인 이해만으로도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1장의 창조의 기사는 같은 단어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문구가 계속 반복되는 시의 형태로 씌어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구조만 그런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로 읽으면 마치 노래와 같이 같은 운율이 주기적으로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신을 찬양하는 시인의 눈과 음악가의 가슴으로 쓴 것이지, 왼쪽 뇌를 바탕으로 쓴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왼쪽 뇌의 구조 속에는 이성과 우상이라는 구별과 판단이 존재하지만, 오른쪽 뇌의 비언어의 가슴 영역에서는 사랑과 책임이 돋아나기 때문입니다.


만약 창조이야기를 과학의 눈으로 보게 되면, 사람이 하느님의 형상을 띠고 나왔다는 이 명제는 인류의 모든 사람들의 모습을 컴퓨터에 넣어 조합하면 가장 근접한 신의 형상을 찾아낼 수 있다는 엉뚱한 해석까지 가능해집니다. 이 언술은 사람이 창조주 하느님을 대신한 자연의 피조물들을 잘 보호하라는 청지기 직분으로 이해가 되어야 마땅한 것이고 그래서 인간을 향해 생육하고 번성하라. 그리하여 땅을 정복하라는 지금의 번역이 당시의 고대 제국주의 시대의 군사문화를 반영하는 매우 잘못된 번역임을 깨닫게 되고, 바로 이러한 청지기직 창조 신앙에 근거해서 현 정부의 4대강 막개발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것입니다. 이는 인류미래를 염려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모든 종교의 근본입니다. 그래서 사대강 개발을 반대하는 종교인들이 하다하다 이명박정부 물러가라고 외치고 시민불복종운동을 외치게 된 것입니다.


[인간 이성의 자기 한계]


체코의 신학자 로흐만이 지적하기를 동구의 공산주의나 서구의 자본주의나 생산과 소비라는 물질주의적 사고로 실재를 파악하는 단편적 시각만을 제공해왔기에 현대인들의 사고구조는 자신도 모르게 매우 편협하게 형성되어 있다고 비판합니다. 쉬운 말로 하면 둘이서 서로 얘기를 하면 A를 얘기해도 상대방은 A' 혹은 심하면 B로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생각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이해가 안되는 것은 버리고 되는 것만 추려서 그것도 자기 인식 구조에 맞춰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전이해라고 하기도 하고 편견 혹은 선입견 혹은 제한적 이해라고 말하는 것이고 여기서 오해가 생기고 저의 얘기를 여기 앉으신 분이 다 똑같이 들었지만, 집에 가서 얘기할 때는 다 다른 얘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물어보십시다. 지금까지의 얘기를 종합해볼 때, 저 조목사는 동정녀탄생 교리를 믿는 것 같다고 생각하시는 분 손들어 보세요? 안 믿는 것 같다고 생각하시는 분 손들어 보세요. 숫자가 비슷하군요. 제가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가 믿는 사람이고, 제가 믿지 않고 있다고 보는 사람은 자신도 안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을 볼 때 자기 안경으로 보는 것이지요. 자기 안경을 벗고 실상을 보는 일은 평생 애써도 잘 안되지요.


이것은 당장 마태오와 루가 또한 서로 다른 안경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 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말하는 것은 같은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믿기 어려운 얘기를 듣고 고민하고 이를 신앙적으로 결단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마태오복음서에서는 예수의 아버지가 되는 요셉이고 루가복음서에서는 어머니가 되는 마리아입니다. 이는 마태오는 남성이라는 안경을 루가는 여성이라는 안경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 탄생 이후에 전개되는 이야기에서도 마태오는 동방박사라는 고귀한 인물이 등장하고 예루살렘 왕궁 안에 들어가 헤롯왕을 비롯한 권력계층이 등장하고 예수 또한 집에서 태어나는 남성적 그림을 그리고 있는 반면에 루가는 베들레헴 성 밖에서 양을 치던 당시의 가장 낮은 계층의 목자들이 천사의 소식을 듣게 되고 아기 예수를 영접하고 이 아기 예수는 마구간에서 태어날뿐더러 말구유 짐승의 밥통에 누워 있고 이를 경험한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다.’라고 여성중심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임마누엘과 인간 역사]


결론을 져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오늘 4개의 본문이 지향하는 한 중심 말씀은 이것입니다.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동정녀탄생의 이야기는 결국 임마누엘을 향한 머리말임을 보게 됩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 하늘에만, 그리고 가끔 희생제사들 드릴 때에 저 성전 안에만 내려오시는 야훼 하느님이 죄 많은 인간 우리 곁에 있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고백이지만, 당시로서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솟아나는 엄청난 고백이었습니다.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는 성서만의 독창적인 얘기는 아닙니다. 그리스 신화에도 이런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본질은 신으로 그리고 잠시 겉모습만 인간으로 내려온 영지주의의 신들은 인간세계를 오히려 혼란 속으로 빠뜨립니다. 그러나 성서 안에 보여주시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는 하느님은 역사의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며 로마제국의 착취와 지배 아래서 신음 속에서 살아가던 떠돌이 민중들에게 희망과 의지를 심어주게 됩니다. 그런 허위의 신들을 바로 보게 하는 우상을 타파하는 이성의 힘을 길러준 것입니다. 역사의 주체가 바로 인간 자기 안에 있는 것을 깨닫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마태오와 루가가 당시의 절박한 상황 속에서 동정녀 예수 탄생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요지입니다.


마태오와 루가는 과거 역사의 인물이 아닙니다. 당시 그들이 처했던 절박한 상황 속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기다리던 사람들의 영혼 속에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살아있는 인물입니다. 오늘날 이천년이 지나 마태오와 루가가 살았던 비슷한 형편에 처한 나라가 있습니다. 그 나라는 동아시아 대륙의 끝자락에 맹장처럼 조그마하게 달려있는 반도 안에 있는데 예로부터 하얀 옷을 입기 좋아하여 백의민족으로 불리었습니다. 대륙과 해양의 중간에 처해 있는지라 두 세력들로부터 수 천 년에 걸쳐서 끊임없이 침공을 당하고 지배를 받았지만, 그래도 자기 언어도 갖으면서 꿋꿋하게 자기 문화와 역사를 지켜왔는데, 그만 어떡하다 북위38도를 경계로 남과 북으로 나누어지고 무슨 이유때문인지 철조망이 처치고 티격태격하더니 그만 한판 대판 죽기살기로 전쟁을 3년이나 벌였는데, 결국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수백만의 사람들만 죽어 나자빠지고 살림만 왕창 박살이 났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는 것은 그랬다 치고 함께 살아가던 사람들이 영영 헤어지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백년해로를 약속하고 한 이불속에 살아가던 남편과 아내도 있고, 같은 엄마 뱃속에서 나온 피붙이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60년이 지나도록 편지나 전화는커녕 생사확인조차 못하고 살아왔는데,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 왜 그러느냐고 항의조차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로 살아왔습니다.


그래 전쟁 후에 태어난 젊은 사람들은 북쪽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지도 못하는데, 단지 북쪽에 살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쪽 사람들은 죽도록 미워하라고 태어날 때부터 교육을 받았고 세계 다른 나라 사람들은 다 만나도 괜찮은데 그쪽 사람들은 국가의 허락없이 만나면 간첩으로 몰아 감옥에 가두고 있고, 그쪽사람들 하는 일은 무조건 욕만 해야지 조금만 잘한다고 칭찬하면 국가보안법에 걸어 징역에 자격정지를 때려 사회에서 매장을 시키는데, 도대체 왜 그래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이념이 달라 그렇다고 하는데, 아니 세상에 이념 다른 나라가 한 두 나라가 아니고 심지어는 이념이 아니라 이념을 설명하는 말까지 다른 나라가 태반인데, 왜 같은 말을 한다는 그쪽 사람들을 그렇게 미워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권력을 잡은 사람들끼리 서로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서로가 적이 되어 미워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권력과 상관도 없는 백성들까지 덩달아서 미워하고 덩달아 저주하고 마음의 살인을 계속하여도 괜찮은건가요? 그것도 때로는 신의 이름으로 미워하고 예수 이름으로 빨리 죽으라고 기도도 한다는데, 그거 괜찮은건가요? 하긴 그 사람들은 그렇게 금긋기를 좋아해서 남쪽 북쪽만 가르는 일로 성이 차지 않아 이제는 동쪽 서쪽 중앙 중앙남 중앙동으로 갈라놓고 무슨 자리하나 생길 때마다 자기 쪽 사람 앉히려고 그렇게 또 싸운다면서요? 이번에도 무슨 육해공참모총장 다 그쪽사람들이 차지했다고 야단이데요. 그중 한 사람은 지역만 같은게 아니라 무슨 대통령과 선후배사이라면서요. 그렇게 동쪽 사람들이 17년 전 군사정부시절 이후 처음이라고 하니까 아마 다시금 군사정부시절로 돌아갔네요. 그래놓고 무슨 정부생긴 이래 최고로 공평한 인사라고 한다면서요. 공평과 공정의 의미가 사전의 정의와 너무 달라 정신이 돌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여간 티격태격하면서도 그래도 그럭저럭 대화한답시고 회의도 하고 오고가기도 했는데, 2년 전 새 정부가 들어오면서부터 아예 대화의 씨가 말랐다지요. 그러다 어느 날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그 지역은 국경으로 서로 합의가 되지 않은 지역이니 거기다가 포를 쏘지 말라면서 계속하면 우리 쪽에서도 가만있지 않겠다고 하는데도 계속하다가 아니나 다를까 어느 날 포탄이 날아와서 사람이 4명이나 죽었습니다. 맞은쪽에서는 도발이라고 하고 때린 쪽에서는 계속 경고했고 당일 날에도 통지문을 전달하지 않았느냐? 한두 번도 아니고 수차례 경고하고 때렸는데, 그게 무슨 도발이냐? 도발은 느네들이 하는 것이지. 전쟁 연습하려면 우리가 잘 관찰이 안 되는 저 밑의 제주도 남쪽바다에서 가서 하지 왜 하필이면 분쟁지역으로 되어 있는 서해바다 우리 코앞에서 하냐? 우리를 뭐 졸로 보는 모양인데, 우리가 얼마나 참나하고 시험하는 모양인데, 우리 화나면 무섭다. 그런겁니다. 그러자 맞은쪽에서 단단히 보복하겠다고 국방부장관도 갈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는 다시금 같은 자리에다 포사격을 하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기는 법적으로는 싸울 자격이 없으니 자격이 있는 골목대장 형님을 모시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기가 죽을 줄 알았는데 ‘그래 붙어볼테면 붙어보자. 손이 근질근질하던 차에 잘됐다. 전에는 우리말을 곧이 듣지 않는 것 같아 맛만 보였는데, 이번에는 본때를 보여 주겠다. 아예 핵전쟁도 불사하겠다.’


[여러분, 오늘 여기 왜 나오셨어요?]


그런데 그날이 오늘이라던데, 이런 비상 판국에 우리 이렇게 한가하게 주님 오신다고 예배나 드리고 있어도 괜찮은건가요? 저는 여기서 봉급 받는 사람이고 그간 6개월 쉬었다가 오늘 처음 나오는 날에다가 무슨 연말당회인가가 있어 내년 계획을 준비하는 중요한 회의가 있다고 해서 인사도 해야 하고 회의도 주관해야 해서 나왔습니다만, 여러분은 여기 왜 나오셨어요? 장로님들은 연말당회하기 위해서 나왔다고 하지만, 다른 분들은 여기 왜 나오셨어요? 전쟁 일어나서 그러다가 핵폭탄 터지고 그러면 교회도 없어지고 잘못하면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이 죽고 내년은커녕 내일도 없어지는 판국인데, 그래도 괜찮은건가요? 지금 거기 가서 제발 전쟁연습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애원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저도 한반도정신병원에서 몇 년 살다보니 감각도 무디어지고 판단도 흐려져서 저도 저를 잘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여러분은 더 더욱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되는건가요? 예수 예수 외치면 총알도 포탄도 다 피해가나요? 그래 나는 피해간다고 치고 그래서 다른 사람은 다치고 죽어도 괜찮은건가요?


북쪽에서 통지문을 보내 이번에는 더 큰 맛을 보여주겠다고 위협을 했는데, 북한학을 전공했다는 사람들이 ‘아 그거 괜히 해본 소리다’ 그렇게 얘기해요. 저는 이해가 안됩니다. 언젠가는 서울 물바다 얘기가 나오니까 백성들 겁을 주어 코풀이 아이들 저금통장까지 걷어서 무슨 댐을 짓는다고 법석을 떨더니, 이제는 괜히 해본 소리다 이렇게 얘기해도 되는 겁니까? 3주전에 경고 무시하다가 사람이 죽었는데, 그렇게 얘기해도 되는 겁니까? 이거 자존심의 감정싸움인데, 언제 전쟁 할 때 이성적으로 했습니까? 총 쏘면 상대방이 피 흘리고 죽고 그 집 아이들은 평생 아빠 없이 살아가고 그 부인은 평생 과부되는 것이고 이쪽도 총 맞으면 똑같은 일이 벌어지는데, 이성 갖고 전쟁하는 경우 있습니까? 정말 자녀를 사랑하는 아버지라면 아무리 감정이 일어나도 자녀의 미래를 생각해서 참고 대화로 풀어나가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이 판국에 국민의 생명을 지켜주어야 할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난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얘기했다지요. 그렇게 말을 하는 사람은 죽음이 뭔지 모르는 천치 바보 아니면 의를 위해 죽을 만큼 준비가 된 용기 있는 사람 둘 중의 하나입니다. 판단은 여러분이 하시기 바랍니다. 군대에 가서 총을 쏘아보면 총알이 쉬-익-하고 날아가 바위를 부수는 그 소리에 소름이 끼치고, 어깨와 뺨에 밀치는 차가운 반동으로 온 몸이 얼어붙어 그래서 전쟁이라는 것은 정말 하면 안되겠구나 하고 누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마태오나 루가가 동정녀탄생의 이야기를 고백하던 2천년 전 유대 땅에도 헤롯이라는 로마제국의 애완견이 왕으로 있었는데, 이 친구도 자기 치적을 남기는게 그렇게 소원이라 백성의 혈육을 짜내어 궁도 새로 짓고, 예루살렘에 대대적인 수도관 건설공사도 하고, 맛사다라는 사면이 절벽인 천연요새에다가는 일이년을 버틸 수 있는 물 저장소와 음식 곳간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이 헤롯이 자기 권력을 지키기 위해 아기 예수를 죽이겠다고 베들레헴으로 군사를 보내 2살 이하의 남아들을 다 죽이는 살육을 저지르기도 했지요. 이 헤롯이 죽고 그 아들들이 그 나라를 나누어 지배했는데, 세례요한이나 예수라는 분이 또 이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니 여우니 하고 맞서다가 한사람은 목이 잘려 죽고 다른 한사람은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희망이 없는 상태는 절망이고 절망이야 말로 마음의 자살이니 어쨌거나 삶이라는 권리이자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희망의 끈을 그러잡고 살아야 한다고 어느 여류소설가는 외치는데, 우리의 희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임마누엘의 하느님! 우리 곁에 계신다는 야훼 하느님은 과연 어디에 계시는건가요? 시편기자마냥 “만군의 야훼 하느님, 당신 백성의 기도소리 언제까지 노엽게 들으시렵니까?”하고 비탄의 기도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오늘입니다. 마태오가 꿈꾸는 세상, 하느님이 인간 역사 안으로 들어와 우리를 깨우시는 그 음성과 그 손길을 이 시간 침묵 속에서 듣고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