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세상의 빛”

이사야 52:7-10, 시편 98, 히브리 1:1-4, 요한 1:1-14


성탄절은 로마의 태양신을 섬겼던 이방종교의 축제일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해가 지구 주위를 돌지 않고 지구가 해를 돌고 있으며, 해는 수억만 개의 위성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오늘날의 우주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던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시기에 아기 예수가 태어났다고 하는 믿음은 당시로 본다면 가장 이성적인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날을 일년 중 가장 기쁜 축제의 날로 기념하고자 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염원에 덧붙어 상술이 기승을 부려 일년 중 가장 매출이 높은 시기가 되면서, 북반구에서는 겨울 추위로 인해 사람의 활동이 위축되기 마련인데, 오히려 사회가 분주해지고 있습니다.


[성탄절 이야기 하나, 둘, 셋]


예수가 과연 동정녀의 몸을 통해 이 땅에 하느님의 아들로서 왔는가? 하는 그런 종교적 질문은 차치하고서라도, 분명 여러 가지 점에서 성탄절이 우리 인간 사회에 기여한 바는 있다고 하겠습니다. 100년 전 세계 제1차대전 중 서부전선 격전지 이프르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성탄절 전날 독일군이 참호 주변에 촛불과 성탄절트리를 놓고 캐롤를 부르기 시작하자, 건너편의 영국군도 따라했습니다. 이어 큰 소리로 메리크리스마스를 외친 다음 그들은 참호에서 나와 각자 가지고 있던 음식, 담배, 술, 단추, 모자와 같은 작은 선물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리고 죽은 병사들을 묻고 함께 추모했으며 정초까지 휴전이 이어진 곳도 있었습니다. 1차대전이 벌어진 뒤 성탄 축일의 밤이라도 공식적으로 휴전을 하여달라는 교황의 요청을 양쪽 정부에서 무시했지만, 약 10만명의 병사들 또한 그들 정부를 무시했던 것입니다. 그 다음해에도 캐롤은 울려 퍼졌고, 양쪽 병사들은 또 다시 참호에서 나와 메리크리스마스의 인사를 주고받았으며, 심지어 축구 경기까지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프랑스군과 독일군 사이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우정이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한 군인은 “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특별하고 이상한 크리스마스였다”고 술회하였습니다.(조한욱. <크리스마스 1914> 한겨레 2010.12.22.)


한 가난한 가정이 성탄절을 맞았지만, 가족간에 선물을 줄 형편이 전혀 안되자 아버지는 돈은 없어도 성탄절의 즐거움은 있어야 하겠다 하면서 ‘아내와 어린 아들에게 서로에게 주고 싶은 선물을 그림으로 그려서 주자.’고 제의했습니다. 이에 가족들은 서로의 눈을 피해 신나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성탄절 아침이 밝았고 보잘 것 없는 성탄절트리를 가운데 두고 각자가 준비한 선물을 교환했습니다. 아버지는 검정 벤츠와 빨간 모터보트를 선물로 받았고, 어머니는 다이아몬드 반지와 새 모자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어린 피터는 잡지에서 오려낸 장난감 선물을 받고 활짝 웃었습니다. 이제는 피터가 부모님께 선물을 드릴 차례가 되었습니다. 피터는 얼굴 가득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밝은 색 크레용으로 남자, 여자, 그리고 사내아이가 그려진 그림을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그림 밑에 꼬불꼬불 힘들여 쓴 단어 두 글자(we)를 보고 세 식구는 서로를 부둥켜 않았습니다. 그건 ‘우리’라는 글자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 사람의 식구를 합친 현실의 숫자 3을 넘어선, 미래의 희망 속에서 오늘의 아픔을 견디고 나아가도록 하는 거룩한 공동체로서의 ‘우리’입니다.


오 헨리의 작품에서 말해지듯 오랫동안 일할 곳을 찾지 못한 가난한 부부가 성탄절에 서로에게 줄 선물을 위해, 남편은 오래된 시계를 팔아 아내의 머리에 꽂을 아름다운 핀을 사고, 아내는 머리를 잘라 남편의 새 시계줄을 사서 교환하는 그 마음입니다. 서로에게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물건이 되고 말았지만, 그건 영원히 간직할만한 그 무엇보다도 값진 선물이 된 것이지요.


성탄절은 세상이 경쟁으로 아무리 각박하여지더라도 우리의 마음이 풍성해지는 시간이요 수은주가 아무리 영하 십수도를 가리켜도 이웃 사랑의 뜨거운 정이 충만해지는 기간입니다. 그건 ‘우리’는 생각이 다르고 행동은 달라도 같은 어버이 밑에서 태어난 한 자매요 형제라고 하는 하나임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이념이 다르고 실천의 방향이 달라도 우리는 한 단군의 조상을 지닌 하나임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피부색깔이 다르고 말이 달라도 우리는 모두 한 지구 아래 운명을 함께 하는 하나임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이 너와 나가 하나라는 예수 마음을 품고 앞뒤좌우 서로를 향해 ‘예수탄생 좋을씨구’하며 인사를 하시기 바랍니다.


이 성탄절의 감격을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천지가 창조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우주의 근원인 말씀으로 설명하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이것보다 더 단순하고 분명하고 명백한 진리는 없습니다.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여러분 어둠이 빛을 이긴 것을 본 적이 있나요?


[요한의 신학적 고민]


저자 요한은 마태오와 루가와 마르코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고, 나자렛 예수야 말로 부활의 첫 열매로서 야훼 하느님의 새 역사를 만들어내신 구원의 주임을 고백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금 예수를 새로운 관점에서 고백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시간이 흐르면서 신앙공동체가 분열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뛰어난 지혜자와 사회변혁 운동가로 고백하면서 열심히 선교운동을 하였지만 동정녀탄생이나 부활을 의심하거나 부정하고 있었고, 이와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이 땅에서의 삶은 연기와같고 예수의 육체는 그저 옷에 불과하다고 하여 이 땅의 하느님 나라 운동의 무용론을 주장하며 예수는 신으로서 오직 비밀스런 영으로만 만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인성과 신성, 사람에 따라 둘 중에 하나를 선호하게 되어 있습니다만, 이것이 극단이 되어 어느 한쪽만을 붙잡게 되면 그때 믿음의 공동체는 분열되고 결국 공중분해하게 됩니다.


바로 요한은 그런 위기 속에 있었습니다. 단지 내부에서 믿음의 분열이 일어났던 것만이 아니고, 외부로는 점점 자라나는 예수 공동체에 대해 유대공동체와 로마당국으로부터 유혹과 핍박이 가시화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요한은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은 단순히 사회제도의 변화를 꿈꾸는 사회운동으로 환원되어서도 안 되고, 반대로 육은 더럽고 이 세상의 삶은 유한한 것이니 영원하고 거룩한 하늘의 일에만 관심해야 한다며 믿는 자의 시선을 하늘로만 돌리는 영지주의적인 폐쇄적인 영성 운동에 제동을 건 것입니다. 아니다! 예수는 단지 하느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 그 자신이었다. 당시 종교철학의 화두였던 로고스 말씀론에 근거하여 예수는 로고스로서 우주 창조의 근본부터 존재하신 분이시다며 예수의 신성을 의심하고 거부하던 자들을 향해 진리의 소리를 높였고, 동시에 예수의 육체를 의심하고 거부하던 자들을 향해서는 예수의 몸은 바로 그 썩어 없어지는 그 육을 가지신 참 인간으로서 살아계실 때에는 목이 말라 우물의 물을 떠 잡수셔야 하였고, 심지어는 부활하시어 벽을 뚫고 시공간을 마음대로 왔다갔다 하시면서도, 그 몸에는 십자가 위에서 받은 못자국과 창자국을 지니고 계셨을 뿐더러, 허기를 느껴 물고기를 구워 잡수시는 분이셨다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영과 육이 구별되어 영은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육은 미천하고 더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지니게 되면 골방에 들어가 하늘만을 쳐다보게 되어 결국 세상 일에 무관심하여 불의가 판을 쳐도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이 당하지 않으면 상관하지 않는 이기의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당하더라도 운명론에 빠져 자포자기하게 되거나 아니면 감상에 빠져 예수천당만 외치게 됩니다. 반면 예수를 사회운동의 실천가요 변혁운동가로만 이해하게 되면, 그 사람은 자신이 바라던 소기의 목적을 이루거나 아니면 그 운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때, 자신의 삶에 안주하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현실 정치에 뛰어든 수많은 정치인들이 한때 젊어서는 바로 그렇게 예수를 이해하고 살아온 신앙인들이었지만, 지금은 권력쟁투의 현장에 매몰되어 시류를 따라 말을 바꾸는 모습을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예수공동체가 처한 이 양자의 위험을 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자신의 복음을 써나갔던 것입니다. 안팎으로 어둠의 세력이 시시각각 밀려오는 위기의 순간 그는 외친 것입니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습니다.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빛의 와전]


그런데 만약 요한이 오늘 이 남한 땅에 와서 시청광장에 밝혀진 성탄절트리 불빛과 애기봉 위에 세워진 성탄철탑 불빛을 보면서는 실소를 금치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청광장에 불빛을 밝히는 대신에 기독교가 이웃들로부터 왜 개독교로 매도당하는지에 대해 반성을 하고, 애기봉에 불을 밝히는 것 대신에 북녘 땅에 안녕과 참 평화를 위해 남녁 땅 기독교인들이 정말 무슨 일을 먼저 해야할 것인지를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부를 향한 자성의 소리로 외친 요한의 외침이 외부를 향한 교만의 몸짓으로 와전되었기 때문입니다.


저희 교회 장년신도회에서 작년에 찾아가서 하루를 지냈던 애기봉 아래의 평화교회 이적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2004년 6월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이 열리면서 군사분계선에 설치된 모든 선전수단이 제거되기 시작했다. 서로를 비방하던 방송이 일시에 멈춰 마을 주민들은 오랜만에 가슴떨리는 평화를 맛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기쁜 성탄절 날, 애기봉 트리 하나 때문에 우리 교회 교인들과 민통선 주민들은 지금 공포에 떨고 있다. 우리는 지금 약속을 먼저 깨뜨리고 민통선 지역을 초긴장상태로 몰아넣는 국방부와 점등식에 참석한 김문수도지사, 이를 행한 ㅅ교회는 전쟁예방이 목적인지 전쟁 촉발이 목적인지 이들의 행보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도시의 큰 교회가 민통선의 작은 교회에 성탄 선물을 주지는 못할망정 공포의 트리를 선물로 주고 간 이 기막힌 사실을 예수님이 아신다면 뭐라고 얘기하실까?”


분명 이 시대는 어둠의 시대입니다. 남북의 긴장상태와 전쟁위기는 또 다시 외세의 세력들을 이 한반도로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멀리 갈 것도 없이 최근의 역사를 통해 절절하게 경험했습니다.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횡포는 결국 가난한 백성들의 저항운동인 동학항쟁을 불러 일으켰고, 이는 결국 외세를 이 땅으로 불러들여, 꼭 백년 전, 기억 속에 떠올리기도 싫은 을사늑약을 강요당해 대한의 칭호는 사라지고 국비는 일본인 깡패의 칼에 의해 처참히 살해당하고 그 시신은 불에 태워졌습니다. 그리고 35년동안의 식민지지배를 당해 딸들은 성적 노리개 정신대로, 아들들은 총알받이 징병으로, 아버지는 비행장 건설 징용노예로, 어머니는 누군가의 어머니의 아들을 죽이기 위한 총알 제조를 위해 놋그룻 놋수저를 내어놓야만 했습니다.


그리고나서, 이렇게 되고 나서, 기미년 31운동은 무슨 의미가 있고 항일독립운동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요? 또 다시 이 부끄러운 역사를 반복하시겠습니까? 나라를 잃고 혈서를 쓰고 자살을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되는 것입니까? 또 소 잃고 또 외양간 고치는 일 반복하시겠습니까? 내 외양간의 소만 지키면 된다고 아무리 몸부림친들 구제역을 막을 수 있나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나요? 어쩌면 이 한반도는 미국과 중국의 전쟁터가 아닌 미국과 일본의 전쟁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먹이를 놓고 달려드는 건 일단 제 배가 고프면, 배부를 때 형님 아우 하던 어제의 동지의식이란 제국의 동물세계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입니다. 정신을 차려야 할 때입니다. 북이고 남이고 정신을 차려야 할 때입니다. 서로를 향한 총부리를 내려놓아야 할 때입니다. 훈련연습, 달리기에는 필요한 일이지만, 총에는 훈련연습이 없습니다. 그건 결국 자살을 훈련하고 연습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한 연못에 사는 두 마리의 물고기입니다. 한 마리가 죽으면 그 시체 썩는 물로 인해 다른 한 마리 죽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한 몸에 머리가 둘]


북을 허가없이 방문했던 한상렬목사님에게 검사가 집요하게 묻더군요. 왜 남쪽정부는 그렇게 비난하면서 북쪽 정부는 비난하지 않는가? 그건 남쪽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거부하고 북쪽의 사회주의 체재를 따르기 때문이 아닌가? 목사님이 답변하기를, 북쪽 사람들 만나면 나도 비판할 것은 비판한다. 다만 남쪽은 그런 비판을 수용할 수 있는 반면 북쪽은 그럴만한 형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하게 살아야만 하는 그 배경을 이해하고 함께 고민하고 아파해야지 나는 부자가 되었는데, 자네는 왜 가난한가 하고 묻는 것은 오히려 반감만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그렇습니다. 60년동안 세계 최강의 미국과 함께 경제봉쇄를 통해 상대방의 목을 잔득 조르고 나서 왜 몸이 그렇게 쪼들었는가 하고 묻는 것은 상대방을 약 올리는 일이지요. 한 아이는 건강하고 다른 아이는 허약한 쌍둥이를 길러본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보면 어떨까요? 유대 격언에 한 몸에 머리가 둘이 달렸다면 이는 한 사람인가? 두 사람인가?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한사람인지 두사람인지 어떻게 알지요? 뜨거운 물을 한쪽에 부어 다른 쪽이 아 뜨거! 하면 한사람이고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두사람입니다. 그걸 고소해하면 그때는 뭐지요. 인간이하이지요.


아니 인간 이하가 아닌 개 이하입니다. 개도 왕초 개가 먼저 먹이를 차지하면 그가 배부를 때까지 옆에서 기다렸다가 남은 것을 먹습니다. 먹이도 없는데, 서로 대가리 맞대고 자존심 대결하다 둘 다 쓰러지는 일은 하찮은 미물들도 안합니다. 한낮 미물보다 못한 어리석음. 그게 바로 우리가 몸담아 살아가고 있는 한반도의 모습입니다. 열심히 일하면 뭐합니까? 돈 벌어서 남의 나라 신무기나 사들이고 젊은이들 삼팔선으로 보내 방한복이나 사서 보내면 그게 도대체 뭐냐고 묻는 것입니다. 저쪽 화력은 이런데 우리쪽 화력은 그보다 몇 배나 더 세다. 그게 자랑거리라고 생각하세요. 여러분은 그런 얘기 들으면 안도하시나요. 나는 총을 들고 있고, 옆집은 칼을 들고 있으면 여러분은 안도하세요? 열심히 돈 벌어서 보다 성능 좋은 총을 사고, 그 옆집은 보다 날카로운 칼을 사고 그런다면, 그렇게 돈을 쓸 바에는 차라리 안 버는 것이 낫지 않나요?


여러분 올해 돈 벌어서 어디에 썼나요? 그렇게 허비될 줄 알았다면 벌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고 후회해본 적은 없으신가요? 돈 많이 버는 것이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지요? 후회하지 않으시거들랑 내년에는 차라리 헌금이나 많이 하세요. 어떻게 생각하면 교회가 수많은 명목으로 헌금을 강요한다고 욕을 많이 얻어먹습니다만, 어차피 그렇고 그런 곳으로 쓰여질 돈이라면, 차라리 그게 낫지 않는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헌금 많이 내느라 비싼 음식, 술 한번 거나하게 마시지 못했다는 얘기 듣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전자제품 새 모델로 바꾼다고 인생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예수님말씀 마다나 어차피 빚지고 사는 인생이라면, 하늘 창고, 뜻있는 일에 쓰는 것이 현명한 생각 아닌가요?


누가 정말 삶을 성공적으로 산 사람인가? 그 잣대는 사랑의 감수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작년보다 올 한해동안 신앙생활 잘 했는지 어떻게 알수 있습니까? 작년에 비해 이웃의 아픔에 대한 감수성이 올라갔다면 잘 한 것이고 내려갔다면 잘못 한 것입니다. 이 사회가 작년에 비해 정말 나아졌는가? 수출이 어떻고, 주식이 어떻고 국민소득이 어떻고 하는 경제수치에 있지 않습니다. 그건 숫자놀이입니다. 잣대는 이 땅의 사람들이 얼마나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였는가 하는 감수성에 달려 있습니다. 이점에서 본다면 올해 이 사회는 한참을 뒷걸음쳤습니다.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고, 어둠이 짙으면 짙을수록 새벽의 여명은 가까이 왔음을 우리는 지나나 역사를 통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읽은 네 개의 말씀이 다 그러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백성을 향해 외칩니다. “예루살렘의 무너진 집터들아, 기쁜 소리로 함께 외쳐라. 야훼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시고 예루살렘을 도로 찾으신다. 야훼께서 팔을 걷어붙이시니 세상 구석구석에 우리 하느님의 승리를 보리라.” 이 승리의 소식을 시편 기자는 온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시니 새노래로 함께 부르자고 말합니다. 요한은 이를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 사건에 비기는 새로운 구원 사건으로 얘기하고, 히브리기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 만물을 물려주셨다고 말하면서, ‘당신이 잡으신 지팡이는 정의의 지팡이라고 그리하여 불의의 세력들은 곧 넘어질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화육은 하느님의 입맞춤]


매년 우리는 감옥에 갇힌 양심수들에게 내복을 보내왔는데, 작년부터 법이 바뀌어 보냈던 내복이 대부분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래 올해는 구속노동자위원회를 통해 내복대금을 보내면서 다음과같은 글을 함께 보냈습니다.


<이 땅의 정의와 평화, 노동해방과 민중의 삶,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해 온 몸을 투신하여 싸우다 갇히게 된 동지께 서울 명동에 자리하고 있는 향린교회에서 인사드립니다. 겨울이 깊어가는 이 시기, 노동자들은 복직과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차디찬 길바닥에서 밤을 지새우고, 우리의 친구인 이주노동자들은 추방의 위협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사람들은 살고 있던 집에서, 그리고 강과 그 기슭이 집이었던 새와 동물과 생물들도 쫓겨나고, 비닐하우스 판자촌에는 화재가 나는 등, 몸을 뉘일 곳조차 빼앗긴 철거민들은 주변으로 계속 밀려나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권의 독재로 민주화는 뒷걸음치고, 인권은 짓밟히고 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 마저 인권감수성이 전혀 없는 권력의 하수인들이 쥐고 있는 형국인데다가, 국가보안법의 망령으로 인해 또 다시 공안정국이 되었습니다. 민중들의 생명을 담보로 한 서해안 전쟁놀이로 인해 더 불안해져 가는 오늘입니다.


자유와 해방의 소리를 담아 낮은 자리로 한결같이 나아가고자 애써온 향린교회는 온 몸을 던져 싸우는 동지들 앞에 부끄럽고도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내복대금을 보낸 것으로 따뜻한 방안에서 겨울을 지나고 있는 저희들이 차디찬 감방에 있는 동지들이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고생을 이해한다고 감히 말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삶의 현장에서 오만한 정치 권력자와 자본가에 저항하며 맞서는 일에 게으르지 않기 위해 다시금 다짐해 보며, 그 의지를 담아 보냅니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오 5:10)”


박해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향린교회 교인들은 행복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늘나라에 가까이 서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 신이 인간이 되신 화육을 너무나 멋들어지게 설명하는 것을 보고 깊은 감동을 느꼈습니다. 갓 결혼한 부부가 있었는데, 아내가 편도선 암이 있어 이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할수 없이 일부 신경을 절단하게 되어 아랫 입술과 윗 입술이 비틀어지게 되었습니다. 마취에서 깨어난 아내가 거울을 보면서 의사에게 물었지요?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나요? 예 신경을 절단하였기에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옆에 서 있던 남편이 말합니다. ‘난 참 깜찍하고 예쁜데!’(It's cute!) 그러면서 키스를 하는데, 아내의 비틀어진 입술 모양에 맞춰 남편이 자기 입술을 비틀어서 키스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목사님은 순간,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낮아짐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을 본받아 우리의 입술을 비틀어서 낮은 사람들과 함께 입맞춤하는 성탄절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추운 겨울 감옥에 갇힌 양심수들, 특히 남북의 하나됨을 위해 투쟁하다 10년 구형을 받은 한상렬목사님을 위해 기도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성찬에의 초대]


떡을 뗌

우리가 나누는 이 성찬의 떡은 예수님의 몸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몸은 십자가 위에서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우리가 나누는 떡은 한 떡에서 나뉘어 우리 각자의 입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떡을 먹을 때에 이 떡이 본래는 하나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 떡을 먹으면서 우리는 한 몸임을 고백합니다. 북의 형제와 자매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같이 먹겠습니다.


잔을 나눔

이 성찬의 잔은 예수님의 피, 사랑의 새 계약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몸은 십자가 위에서 창에 찔림으로 그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그런데 그 흘린 피로 그 십자가 밑에 서 있는 여인들과 제자들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어머님, 어머님의 아들입니다.’ ‘요한, 너의 어머니다.’ 추위에 떠는 노숙자들, 돈이 없어 고향에 돌아갈 수도 없고, 추방의 위협으로 거리로 나와 활보할 수도 없는 이주노동자들, 자신이 옳다고 믿은 신념 하나 때문에, 사람다운 세상, 자녀들에게 이런 욕된 현실을 남겨줄 수는 없어 소리치다 항거하다 옥에 갇힌 양심수들 또한 우리와 함께 이 잔을 나눕니다. 같이 마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