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추모주일(송년주일)

불확실한 시대와 구원 소식

이사야 63:7-9, 시편 148, 히 2:10-18, 마태 2:13-23


2년 전 미국의 금융위기로 시작한 경제공황은 단순히 경제부분에서만 우리를 어려움으로 몰아넣지를 않고, 모든 영역 특히 정신부분에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3주전 서울의 sky 명문대에 입학하지 못해 미국 유학을 갔다가 거기서도 적응을 제대로 못한 강남 모범생이 잠원동에서 ‘묻지마 살인’을 저지른 일은 바로 그러한 사회적 불안이 그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거의 세계적 추세인데, 가장 잘산다는 미국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USA Today지는 경제적 고통이 개인과 가족에 경종을 울리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공포, 우울증, 불면증 등의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면서 사람들이 매우 공격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다. 그리고 이로 인한 부부갈등과 가정파괴 또한 증가하고 있다고 보고합니다. 이런 상황에 한미FTA를 체결하여 미국의 구조 속으로 편입하겠다고 하는 일을 단순히 경제의 손익 수치로만 판단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물질세계보다 정신세계를 보다 중요시여기는 종교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가 돈을 많이 벌고자 하는 것은 결국 행복감을 얻고자 하는 것인데,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행복감이 떨어지는 경쟁시스템으로 구축된 미국과 FTA를 체결하기 보다는, 국민소득은 낮아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행복감을 갖고 있는 부탄과 FTA를 체결하면 어떻게나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해지고 싶으면 나보다 많이 가진 사람과 가까이 하기보다는 덜 갖고 있으면서도 기뻐할 줄 알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시기 바랍니다. 아니 차라리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이는 예수님의 부탁이기도 하구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하늘나라가 저들의 것이라.‘는 산상수훈의 첫 번째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성서 일과와 교우 참여]


제가 지난 주 앞으로 1년동안 세계교회의 성서일과에 따라 하늘뜻펴기 본문을 4개를 갖고 진행하겠다고 말씀드리면서 여러분의 말씀 묵상 참여를 부탁드렸습니다. 그래 전화를 거신 분이 한분, 홈페이지에 글을 남기신 분이 두분, 제게 이멜을 주신 분이 세분이었습니다. 질문들을 본문 아래에 함께 실어놓았습니다. 모두의 글을 다 실을 수는 없겠지만, 중요한 질문들은 이런 방식으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홈페이지에 따로 하늘뜻펴기 교우나눔란을 만들어 놓고 본문을 여기에 올려놓았으니 많은 분들의 동참을 바랍니다. 어떤 부부는 가정예배 본문으로 말씀 묵상을 하게 되어 좋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집사님이 제안하기를 그 주의 하늘읽기 담당자는 의무적으로 이 묵상에 참여하도록 하였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저도 동의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좋은 글 나누기란도 신설하여 여러분이 책을 읽거나 생각을 하여 모든 사람이 함께 읽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성찰의 글들을 올릴 수 있도록 하여 성서 말씀과 더불어 인문학의 깨달음도 함께 나아가고자 합니다.


한 교우께서 히브리서 본문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그 신학적인 배경을 물으셨는데, 선택은 제가 한 것이 아니니까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히브리서 본문이 예수님의 고난을 다루고 있어 마태오복음의 아기 예수로서 당했던 고난 그리고 베들레헴 어머니들의 고난을 함께 고려해서 선택했다고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의 하늘뜻펴기를 이렇게 고난이라는 주제에 맞춰 펴나갈 때에 고민이 되는 것은 다른 두 본문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것입니다. 제1성서의 본문 이사야서와 시편 두 본문은 고난의 문제를 다루기보다는 고난 이후의 승리와 기쁨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는 바빌론 포로로부터의 귀환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고 시편 148편 또한 같은 시대의 글로 하느님을 찬양하라, 하느님을 찬양하라하는 할렐루야가 계속 반복되는 기쁨의 노래 중에 기쁨의 노래입니다. 고난 곧 아픔과 기쁨이라고 하는 양극단의 주제를 어떻게 연결해서 하나의 하늘뜻펴기로 하여 나갈 것인가에서 저의 고민이 시작합니다. 물론 감정의 흐름으로 본다면 고난과 기쁨은 같은 뿌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논리로 풀어내야 하는 하늘뜻펴기에 있어 이는 분명 걸림돌(스캔달)입니다. 그런데 하나 분명 좋은 점 하나는 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향린교회에서 7년을 설교하면서 한 번도 히브리서 본문을 선택했던 적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보고 성전제사의 복잡한 절차와 이해하기 힘든 종교적인 용어로 되어 있어 제가 피하는 책인데, 오늘은 피하래야 피할 수도 없는 것이 제게 이멜을 하신 교우님들이 모두 히브리서에 관련되어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설교가들은 자신들이 피하고 싶은 책들을 다 갖고 있습니다. 개혁의 선봉 역할을 했던 마르틴 루터는 향린교우들이 좋아하는 책 중에 하나인 믿음의 실천을 강조하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와 같은 글로 폄하를 했고, 장로교의 창시자 칼뱅은 모든 성서를 본문으로 선택하여 하늘뜻펴기를 하였지만, 요한계시록을 포함한 몇 권의 책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 책들을 폄하하지는 않았지만, 피한 것은 사실입니다. 해석의 위험이 있다고 보아 하지 않았습니다. 위대한 학자들이요 설교가들 또한 생각의 한계를 갖고 있는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래 저 또한 그러한 한계를 알고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에 접근합니다.


[하느님 아버지, 하느님 어머니]


우리는 흔히 하느님을 호칭할 때, 하느님 아버지라 부릅니다. 그런데 오늘 이사야가 본문에서 그리는 야훼 하느님의 상은 아버지의 모습 보다는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마지막 절에 “다만 그들을 사랑하시고 가엾게 여기시어 건져 내셨다. 기나긴 세월을 하루같이 그들을 쳐들어 안아 주셨다“ 가엾게 여기시고 안아 주시는 분은 아버지도 하시긴 하지만 역시 어머니의 눈물과 보호를 연상케 합니다. 이사야 46장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야곱 가문아 내 말을 들어라. 너희가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나는 너희를 업고 다녔다. 모태에서 떨어질 때부터 안고 다녔다.” 모태에서부터 안고 다니는 분은 역시 어머니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에서 하느님 아버지라고 부르셨기에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를 좀 더 해석하면 꼭 아버지라 불러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말에 번역된 아버지는 본래 아람어로 ‘아바(abba)' 보다 분명히 번역하면 ’아빠‘입니다. 당시 유대 전통사회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금기시되어 있었습니다. 너무나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감히 인간의 더러운 입술로 부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 거룩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우주 공간에 저 멀리 계신 야훼 하느님을 하나의 인격신으로 그중에서도 나와 아주 가깝고 친근한 분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게 바로 유대인들로 하여금 분노를 자아내게 했고, 신성모독죄로 고발을 당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오늘 예수께서 이 자리에 오신다면 하느님을 어떻게 부르실까?를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2천년 전 그대로 ’아빠‘라고 부르실까? 아니면 사람들이 그런 표현은 좀 지나치다. 그건 신성모독에 가까운 표현이다라고 생각되는 다른 용어를 선택하실까? 저는 후자라고 보는 것이지요. 그래 서구교회에서는 이미 지나간 논쟁입니다만, 하느님 어머니라고 부르실 것이다라고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지금 하느님 어머니라고 부르자고 제창하는 것은 아닙니다. 최소한 오늘 남성중심의 한국교회에서 계속하여 하느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일은 성적 차별을 제공하는 요인이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이덱거가 그랬지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하느님 아버지라 부르는 일이 무엇이 문제냐? 하고 질문할 수 있지만, 언어가 우리의 사고형태를 지배하고 우리의 사고형태는 우리의 살아가는 삶의 불의한 구조를 정당한 구조로 지탱하게 하는 것입니다. 피부색갈이 검은 사람을 흑인이라고 부르는 것과 검둥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언표의 차이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인식의 한계와 인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희가 초등학생일 때는 연분홍색 비슷한 크레용을 살색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면 백인들은 하얀색을 흑인들은 검은색을 각각 살색이라고 불러야 하지요. 같은 살색이 인종에 따라 차이가 날뿐만 아니라 이런 생각이 커지면 내가 옳고 상대는 틀리다하여 전쟁까지 벌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이 좁았을 때, 그러니까 한반도 안에서만 북적거리고 살 때는 별다른 문제의식이 없었는데, 세계를 들락날락거리고 우리 안에 다른 인종들이 섞이면서 아 이건 매우 자기중심적인 좁은 단어이고 인종차별의 용어라고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등을 얘기하려면 인종평등뿐만 아니라 성평등 나아가 성적지향의 평등, 종교평등까지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지 모르지만, 저는 오래전부터 하느님 아버지라는 말을 쓰지 않아왔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느님 어머니라고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하느님 아버지라 불러왔으니 평등과 회개의 입장에서 당분간은 하느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되지만, 이 역시 논란이 될 수 있으니 하느님 어버이라 부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이 되고 하느님을 굳이 인격신으로 불러야 할 이유는 없으니 저는 그냥 하느님이라고 불러왔습니다. 처음 하느님을 믿은 아버지가 가정에서 식사 기도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하느님 형님! 고맙습니다.” 그렇게 기도했답니다. 그러자 아들이 “아버지, 하느님을 부르실 때에는 하느님 아버지라 부르는거예요.” 그러자, “야! 너한테 아버지이면 나한테는 형님뻘이지 뭐 그래.” 그렇습니다. “하느님 형님! 하느님 언니!” 그렇게 부른다고 하느님이 쩨쩨하게 뭐 그걸 갖고 화내시겠습니까?


저기 교회 뒤 벽에 붙어있는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그림이 있습니다. 여기에 글려진 아버지의 손을 보면 오른손은 가냘픈 어머니의 손이요 왼손은 두툼한 아버지의 손입니다. 렘브란트는 4백년 전에 남성지배의 중세시대에 이미 하느님을 여성과 남성으로 이해했고, 그것도 오른손을 어머니 손으로 그리면서 왼편의 어머니의 모습을 돌아온 탕자 성서 이야기의 아버지의 모습으로 부각시킨 것입니다. 참으로 신학적으로는 사려 깊고 종교적으로는 혁명적인 작업을 한 것입니다. 집 나간 아들을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는 사람이 어머니라고 하는 것은 이미 우리 모두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오늘 마태오복음도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가 왕이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헤롯은 자신의 가문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정적을 뿌리 채 뽑아내기 위해 군대를 보내 베들레헴의 2살 이하의 남아를 모두 살해하도록 합니다. 여기서 슬퍼하는 사람을 어머니라고 말하지 아버지를 말하지 않는 것 같은 이유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여기서 왜 아버지가 빠졌냐고 항의하는 사람은 못보았습니다.


[베들레헴 유아 살해의 신학적 배경]


여기서 유아 살해 이야기는 신학으로뿐만 아니라 상식으로도 많은 문제점을 던집니다. 왜 아기 예수로 인도하는 그 별은 곧장 베들레헴 아기 예수에게로 인도하지 않고, 헤롯의 궁전으로 인도하여 권력자의 소굴을 벌집 쑤셔놓듯이 헤집어 놓았을까? 그리고 더 더욱 이해하지 못할 일은 그렇게 하여 울부짖고 애통하는 어머니들의 애곡하는 모습을 말해놓고, 마지막에 예언자 예레미야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하는가. 도대체 하느님의 예언은 2살 이하의 어린이들의 애매한 죽음까지도 굳이 예언을 해야 하는 것인가? 여기서 야훼 하느님의 야만성을 성토할 수도 있습니다.


이를 역사적 사실로 보는 신학자는 거의 없습니다. 일종의 마태오 저자의 소설적 구성으로 봅니다. 우선 제일 확실한 것은 마태오는 계속해서 제1성서의 구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아브라함으로부터 그의 얘기를 풀어나가고 있고, 오늘 10절의 본문에서만도 제1성서가 3번이나 인용하고 있습니다. 결국 마태오는 제1성서를 예언으로 그리고 자신의 예수의 복음은 이에 대한 성취로 보고 얘기를 풀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마태오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이 몸담고 있는 신앙공동체의 다수가 제1성서에 익숙해 있는 유대인들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면 마태오는 왜 이런 이야기를 굳이 만들어냈을까? 이런 비극적인 얘기 설정없이 예수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오늘 본문에서 아기예수가 헤롯왕의 살해를 피해 에굽으로 피신을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이야기는 누구의 이야기를 연상시키십니까? 모세입니다. 모세 또한 태어날 때부터 모든 히브리족속들의 남아들은 태어나자마자 죽이라고 하는 애굽 파라오왕의 죽음의 명령을 피해 태어났습니다. 이후 40세가 되어 히브리노예들의 지도자로 나섰다가 한 애굽인을 살해함으로 미디안광야로 피신을 갔다가 다시 에굽으로 돌아왔다가 백성들을 이끌고 다시금 홍해를 건너 광야로 들어갑니다. 떠돌이의 삶, 권력의 칼날을 피해 돌아다녀야 하는 삶, 이것이 그의 단면입니다. 모세는 히브리 백성들을 노예의 억압과 홍해바다의 죽음에서 이끌어낸 이스라엘 최고의 지도자입니다. 모세가 인류 구원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 마태오는 예수님이 전한 말씀을 모두 다섯 마당으로 묶어 놓았는데, 이 또한 모세 5경을 머리에 두고 편집한 것입니다.


아기 예수의 실제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마태오복음서에 의하면 애굽으로 피신을 갔다가 헤롯이 죽어 유대 땅으로 돌아오지만, 아들 헤롯 아켈라오 왕으로 인해 고향 베들레헴으로 가지 못하고 갈릴리의 나자렛으로 가서 사십니다. 정치권력의 횡포로 고향 잃은 자의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우리들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북녘이 고향인 사람들, 연변, 네팔, 방글라데쉬에서 온 이주노동자들 또한 고향 떠난 슬픔을 안고 살아갑니다. 이렇게 자기 땅에서 살아가지 못하고 추방당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저소득으로 구조적으로 가난하게 살아가야 하는 나라 사람들을 지칭하는 ‘제3세계 사람들’에 비유하여 ‘제4세계의 사람들’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루가의 이야기 속에서는 마구간이라는 그림을 통해 이 땅의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는 아기예수의 모습을 그리고 있지만, 그래도 그 안에는 천사들의 찬송소리도 들리고 목자들의 기뻐하는 모습도 보이지만, 마태오의 이야기 속에서는 폭력과 살인 그리고 추방과 떠돌이의 차가운 이야기로 점철됩니다. 추운 날 을지로와 시청 지하철을 타러 갈 때마다 피할 수 없이 만나야 하는 노숙인들을 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 교회의 한공간이라도 그들을 위해 따뜻한 잠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예수님의 뜻일텐데, 사회선교와 복지를 말하고 희생과 봉사를 말하면서도, 내 뒷마당에는 안 된다는 님비(Not In My Back Yard)의 편의주의가 우리 안에 있는 것은 아닌가 항상 자신을 돌이켜 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도 노숙자였지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8장 20절) 그냥 잠잘 곳이 없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칼날을 피해 피신 다녀야 하는 추방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연의 죽음, 사회적 죽음]


오늘 우리가 성도추모주일을 지키면서 우리 곁을 떠나간 사랑하는 가족을 추모합니다만, 아기 예수의 탄생으로 인한 베들레헴의 애매한 아기들의 죽음 이야기는 자연적인 죽음이나 사고죽음이 아닌 권력에 의해 희생당하는 사회적 죽음도 함께 기억하라는 얘기입니다. 광주항쟁과 같은 시민항쟁이라는 집단 희생이 아니더라도 전태일님의 죽음 이후 우리 땅에는 자기 몸을 불태운 수많은 개인적인 죽음이 있어왔고 지금도 그러한 사회정의를 향한 죽음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장준하선생이나 노무현대통령의 죽음도 포함되고 가난으로 인한 자살 혹은 가족들의 소외로 인해 노인들의 죽음 등등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 많은 죽음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남한이 OECD 30개 국가 중 자살율이 가장 높습니다. 자살은 부자나라에서 진행되고 있으니 실상은 남한의 자살율은 세계 최고인 것입니다. 자살율이 세계 최고의 나라가 과연 잘사는 나라인지 그러한 희망이라도 있는 나라인지는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이 대부분의 자살은 공동체의 비판 시각에서 보면 사회 타살입니다. 자살이 좋아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주류로부터 내어 몰린 마지막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46명의 천안함과 4명의 연평도 희생자만이 희생자가 아니라 이들 모두가 희생자입니다.


모세와 애굽 왕 파라오와의 대결에서도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이 애굽 땅의 모든 장자 곧 사람과 동물의 모든 맏이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사실 이런 구절들은 계속해서 평화와 생명을 화두로 갖는 기독교의 진리와 어긋나는 것인데, 이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종교적 상징언어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곧 세상 권력과 하늘 권력이 부딪히고 이 과정에서 애매하게 백성들이 고통을 겪는다는 얘기인데, 바로 아기 예수 탄생에서 나타나는 유아살해 또한 마찬가지로 이해됩니다.


선한 자에게 왜 불행한 일이 닥치는가? 불가에서는 그건 바로 인생 자체가 고(苦)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라는 일종의 개인 인생 숙명론을 펼치고 있다면, 기독교는 그건 세상 권력과 하늘 권력과의 충돌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집단 역사숙명론을 말합니다. 그래 불가는 이를 마음의 세계 안에서 해탈의 신앙을 통해 열반의 세계로 올라가는 일종의 철학종교의 믿음 세계를 갖고 있다면, 기독교는 그런 불의한 세상 권력을 부정하고 야훼의 해방의 신앙을 통해 이 땅으로 내려오는 일종의 역사종교의 믿음 세계를 갖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하느님의 아들이 땅에 내려오는 화육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해탈과 화육 이는 불교와 기독교의 차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차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개인의 고난에 대한 해답은 불교가 더 명확하게 제시하는 것 같고, 집단 고난에 대한 답은 기독교가 더 명확하게 제시한다고 보겠습니다. 저는 그래서 불교와 기독교는 서로 적대적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이해합니다. 불교는 인간이 신을 찾아 올라가는 철학적 종교라면 기독교는 신으로부터 소명을 받는 계시적 종교인 것입니다. 선호의 차이이지 옳고 그름으로 보는 것은 좁은 소견입니다.


[피해자의 시각]


한 교우님이 베들레헴의 유아 살해 사건을 피해자의 입장에서 하늘뜻을 펼쳐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런 시각에서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약간의 슬픔을 당한 적은 있지만, 아들이나 딸을 잃어본 적도 없고, 아버지께서 파산선고를 받아 모든 재산을 내어 놓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야 했던 경험은 있지만, 집이 불타거나 자동차사고로 다리를 잃어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제가 드릴 수 있는 얘기는 마태오가 그런 처참한 얘기를 하는 것은 예수 탄생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단순 기쁨의 사건이 아니라, 이로 인해 애매한 민중들의 죽음이 유발되는 정치적 사건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주43항쟁, 419의거, 유신항쟁, 광주항쟁, 6월항쟁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 착하고 선량하고 때로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던 애매한 이들이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박종철, 이한열의 어머니들은 왜 수많은 학생들 중에 자신의 아들이 죽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희생당한 사람들로 인해 역사는 조금씩 진보되어 온 것입니다. 예수의 어머니 또한 왜 자신이 그러한 역사 회용돌이 속에 선택되어야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 마구간에서 아기를 낳아야 하고, 해산의 고통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애굽으로 피신을 가야하고 그리고 돌아와서도 고향땅에 살지 못하고 낯선 땅에서 살아가야 했고, 동네사람들로부터 아들이 귀신에 홀렸다거나 미쳤다는 얘기를 들어야 했고, 끝내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이후의 역사 속에서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의인이 당하는 고통과 죽음, 저는 여기까지만 말씀드릴 수 있고 나머지는 스스로 찾아가야 할 몫인 것 같습니다.


[죽음에 관한 목회적 관심]


오늘이 성도추모이기에 죽음 일반에 대해 한두 마디를 더하고 마치겠습니다. 인간의 죽음 자체에 대한 설명은 불교에 훨씬 많고 더 자세합니다. 제가 두달 전에 티베트를 다녀오면서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티베트의 지혜>라는 소갈 린포체의 책을 읽으면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성서는 죽음 그 자체에 대해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과정, 죽음을 맞이하는 신앙인의 자세 이런 부분에 대해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자는 것과 같다. 그래서 죽음을 뛰어넘어 곧장 부활로 갑니다. 안병무선생께서 말한대로 불교는 죽음을 말하고 유교는 주검을 말하지만, 기독교는 죽임을 말합니다. 매우 적절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안선생님께서는 평신도 신학자로서 그렇게 얘기하고 그칠 수 있지만, 그러나 저는 목회자로서 죽임은 물론이고, 죽음도 얘기하고 주검도 얘기해야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 제가 부임 초기 <죽음을 예비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란 작은 명상집을 내고 유언장 작성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죽음에 대해 목회적으로 조금 더 생각해 본 것은 이것입니다. 동양에는 죽은 자가 바로 땅을 떠나지 않고 별리의 아픔 때문에 이생에 49일을 머문다고 생각하고 완전히 떠나가는 날, 곧 49제를 갖지만, 기독교문화 전통에서는 그건 것이 없습니다. 3일 길어야 일주일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가족 특히 아버지나 어머니를 떠나보내는 기간으로 3일 혹은 4일의 추모 기간은 너무 짧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세상 일을 끊고 무덤 곁에 초막을 짓고 3년을 보내는 것은 지나친 일이지만, 추모기간이 너무 짧아 오히려 속으로 더 큰 심리적인 고통을 겪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수십 년 동안에 맺어진 사랑의 정을 맥박이 뛰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찌 단 며칠 만에 끊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 책을 보면서 죽음의 과정을 보다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이를 어떻게 기독교의 목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할까를 고민하여 오고 있습니다. 제가 결론을 내린 바는 적어도 교회도 사랑하는 사람의 추모기간을 40일로 하고 49제 대신에 40일 추모예배를 지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전혀 성서의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바로 하늘로 가시지 않고, 제자들과 함께 40일을 머무시는데, 여기에 바로 그런 이유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죽었다고 삼일장으로 오일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건 시신을 정리하는 기간이고 영혼과의 별리는 40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목회자로서 내년부터 교우 가운데 장례가 생기면 죽음 40일이 되는 때에 가정에서 불러주시면 추모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교우 여러분들께서는 기억하셨다가 저를 불러주시면 좋겠습니다. 미국의 경우는 시신을 처리하는 장례는 조촐하게 가족끼리 진행을 합니다. 물론 지금도 서양에서도 마을 사람 전체가 참여하는 공동체 예식이 진행되었지만, 옆집 사람들이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도시에서는 그런 장례식을 진행할 수가 없지요. 그리고 가족들이 외국에 있는 경우도 많은데, 3일장을 치르게 되면 가족들이 다 모일수도 없습니다. 국가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아주 중요한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에게는 장례식 참석을 위해 며칠동안 떠나있는 일이 어려울 경우도 생깁니다. 그래 가족들 중심으로 시신을 묻기 위한 장례를 드린 다음, 2,3개월이 지나 가족들과 친지 친구 이웃들을 모두 초대하여 추모예배를 갖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자리는 그래도 슬픔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기 때문에 각자가 추모의 얘기들을 하는데, 한번은 이미 추모예식에 참가하여 제가 그분을 잘 모르는 사람이었는데도, 아들딸은 물론이고 손주들까지 준비를 하여 얘기를 하는데, 두세시간에 걸쳐 울다웃었다 하면서 많은 인생의 깨달음을 얻었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장례문화도 이제는 좀 바꿔져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뭐 그리 급하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신처리는 급하게 하더라도 추모예배는 보다 준비해서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떠나가신 분에 대한 예의이고 남아 있는 자들에게도 슬픔을 이겨내고 삶을 돌이킬 수 있는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그리고 이 부활이 그냥 영혼만의 부활이 아닌 몸의 부활을 말합니다. 물론 이 몸이라고 하는 말은 단순히 육신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씨앗과 꽃의 관계와 같이 이땅의 몸이 씨앗이라면 부활의 몸은 꽃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 히브리서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녀들은 다같이 피와 살을 가지고 있으므로 예수께서도 그들과 같은 피와 살을 가지고 오셨다가 죽으심으로써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악마를 멸망시키시고 한평생 죽음의 공포에 싸여 살던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부활을 죽음의 공포로부터의 해방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시 예수를 따른다는 이유로 로마의 권세자들로부터 추방과 순교를 당해야했던 저들에게는 죽음의 공포를 넘어 정의에 바로 서게 하는 절대불가결의 신앙고백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부활은 믿고 안 믿고의 선택의 교리가 아니었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정의를 믿고 싸우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절대필수의 믿음이었습니다.


죽음이 죽음 그 자체로 끝난다면 실상은 삶 자체도 무의미해지는 것입니다. 삶이 의미를 추구하다보면 죽음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고 죽음의 의미를 추구하다보면 부활에 도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바라기는 오늘 이 성도추모예배에 초를 밝히신 가족들은 물론이고 교우들께서는 예수의 부활을 통해 죽음이 가져다주는 해방을 경험하고 이 죽음의 해방경험에서 내가 살아가는 목적과 소명을 찾아내어 이 땅을 정의 평화 생명의 가치가 지배하는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내년에도 더욱 힘써 일구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는 가운데 우리 곁을 먼저 떠나간 교우들과 여러분의 가족들을 잠시 떠올리며 그분들의 따뜻한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보냄의 말씀>


밉게 보면 잡초 아닌 풀이 없고 곱게 보면 꽃 아닌 사람이 없으되

내가 잡초 되기 싫으니 그대를 꽃으로 볼 일이로다.

떨려도 들면 먼지 없는 이 없고, 덮으려고 들면 못 덮을 허물 없으되

누구의 눈에 들기는 힘들어도 그 눈 밖에 나기는 한순간이더라


귀가 얇은 자는 그 입 또한 가랑잎처럼 가볍고

귀가 두꺼운 자는 그 입 또한 바위처럼 무거운 법

생각이 깊은 자요!

그대는 남의 말을 내 말처럼 하리라


겸손은 사람을 머물게 하고 칭찬을 사람을 가볍게 하고

넓음은 사람을 따르게 하고 깊음은 사람을 감동케하니

마음이 아름다운 자여

그대 그 향기에 세상이 아름다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