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하는 신앙공동체

(시편 8:1-9, 1:1-4a, 고후 13:11-13, 마태 28:16-20)

   

김 희 헌 목사

   

 

 

[삼위일체주일과 파송 받은 제자들 / 28:16-20]

 

오늘은 성령강림절 첫째 주일, 교회력의 후반부가 시작되는 삼위일체주일입니다. 교회력의 전반부 즉, 대림절부터 성령강림주일까지 교회는 예수님의 탄생과 생애, 고난과 죽음, 부활과 성령강림을 차례대로 묵상하며, 신앙공동체를 내적으로 굳게 세우는 일에 집중합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교회력의 후반부는 교회 내적으로 기념하는 절기가 없는 일상의 시간(ordinary time)입니다. 이 기간의 주제는 성령을 받은 신앙공동체가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교회력의 전반부가 부름 받음에 초점을 둔다면, 후반부는 보냄 받음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삼위일체주일의 복음서 본문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는 이야기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을 만나는데, 그 장소는 민초들의 한()과 염원이 서린 땅 갈릴리입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ξουσία)가 나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이 세상 속으로 가서 모든 민족(θνη)을 내 제자(μαθητεύω)로 삼으십시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여러분에게 분부했던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십시오. 그리고 보십시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28:18b-20) 이 말씀을 기록한 마태는 부활한 스승이 제자들과 다시 만난 자리에 있었을 법한 감격과 기쁨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스승의 마지막 당부의 말씀만 기록하고, 복음서를 닫아버립니다. 더 이상의 말이 생략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긴 여운을 남깁니다. 그 말씀을 직접 들은 제자들만이 아니라,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려는 이후 시대의 모든 신앙공동체에게까지 예수님의 당부의 말씀은 크게 울려옵니다.

 

[신앙공동체의 현실과 꿈 / 고후 13:11-13]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갔던 사람들, 다시 말해서 예수운동을 전개하는 신앙공동체는 어떤 현실을 살아갔을까요? 오늘의 서신서 본문을 통해서 그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은 당부로 마지막 인사말을 합니다. “형제들(δελφοί) 여러분, 온전하게 됨을 기뻐하십시오. 평화 속에서 위로를 얻고 서로 한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모든 성도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χάρις)과 하나님의 사랑(γάπη)과 성령의 친교(κοινωνία)가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빕니다. 아멘” (고후 13:11-13)

 

바울의 이 마지막 인사말은 평화롭지만, 슬픔이 배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슬픔의 이면에는 간절한 사랑이 일렁이고 있습니다. 바울이 슬퍼했던 이유는 예수운동을 하는 신앙공동체가 분열된 채 갈등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식민도시 고린도에 세워진 교회는 4개의 파벌로 갈라졌습니다(고전 1:12).

 

바울의 편지를 읽어보면, 고린도교회가 크게 두 가지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부자와 빈자라는 세속적인 차이가 공동체 안에 균열을 일으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 안에서 각자가 가진 직분과 은사의 차이로 인한 긴장관계가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멀리서 전해들은 바울은 제국의 질서 아래 살아가는 신앙공동체가 가진 고뇌와 비애를 느꼈을 것입니다. 바울 역시 고린도에 들러서 함께 생활을 했고, 세 차례의 선교여행을 하면서 죽음과 같은 고통을 수도 없이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고후 11:23-27) 바울에게 예수운동은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새로운 공동체를 일구어가는 치열한 삶이었습니다.

 

그가 로마제국의 도시들을 다니면서 선교여행을 하는 동안, 그 체제안의 삶이 얼마나 피폐할 수밖에 없는 지를 목격했을 것입니다. 현실을 지배하는 제국의 질서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약탈당한 사람들의 삶은 붕괴되면서 마지막 보루까지 빼앗기는 것을 봤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사람들도 공동체가 붕괴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며 낙담할 때, 바울이 말합니다. “한 마음을 품고,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평화 속에서 위로를 받으십시오.” “온전하게 됨을 기뻐하십시오.” 이 권면은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 난 바울 자신이 체득한 신앙공동체 안의 새로운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바울이 예전에 사울이었을 당시에는 율법으로 갈라진 세계의 질서를 따라 살아가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기성 체제 속에서 형성된 율법을 충실하게 따라서 살 때, 각자의 형편대로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은 유대인대로, 이방인은 이방인대로, 주인은 주인대로, 종은 종대로,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규정된 율법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나고 나서 자기시대의 율법이 아닌, 믿음을 따라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삶이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율법이 만들어놓은 장벽을 뛰어넘고, 배타적인 영토를 가로지르면서, 사랑의 세계, 은총의 세계를 사는 믿음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중적인 분열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린도교회에 마지막 권면을 합니다. 그것은 역사의 도상을 걷는 모든 믿음의 공동체에게 반드시 필요한 세 가지 사항입니다. 첫째는 이 세상의 율법을 따라서 살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성질서가 만들어놓은 율법을 따라 자기만의 영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따라 이 시대의 십자가를 진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제국의 질서는 힘과 돈이 승리하는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이 이기는 나라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사랑이 가장 보편적인 언어요,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사실을 신뢰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사랑의 공동체로 만들어 가실 것이라는 사실을 신뢰합니다.

 

셋째는 성령의 친교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공동체는 새로운 관계방식, 코이노니아를 이룹니다. 다양한 은사를 가진 여러 지체들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한 몸을 이루어갑니다. 성령의 친교 안에서 살아갈 때 생명을 살리는 공동체가 됩니다. 코이노니아로 이룬 두터운 사랑의 공간 속에서 지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은 용기와 힘을 얻고, 미래 세대는 삶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히는 경험을 하면서 생명을 신뢰하며 자라납니다.

 

그리스도의 은총, 하나님의 사랑, 성령의 친교 속에서 살아가는 신앙 공동체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이미 참여하여 살아가는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율법이 생명을 지배하도록 부추기는 힘의 철학과 그 마법과 주술에서 풀려나, 창조주 하나님이 만들어가는 생명의 세상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둘러싼 세계가 비록 고통과 좌절이 가득한 곳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세계를 새롭게 지어가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가 성경의 이야기요, 그 가운데 가장 강렬한 이야기가 오늘 창세기 본문에 나옵니다. 참혹한 상황에서 탄생한 담대한 고백의 이야기입니다.

 

[창조신앙이 피어난 자리 / 1:1-4a]

 

창세기에는 두 개의 창조이야기가 나오는데, 1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바벨론 포로기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 이야기는 나라를 잃고 포로로 끌려가 유배생활을 하던 사람들의 믿음과 꿈에 관한 것입니다. 이들은 바벨론 제국이라는 압도적인 힘의 문명 속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면서도 생명의 길을 구했습니다.

 

바빌론 제국 역시 자신들의 창조 이야기(에누마 엘리쉬)를 갖고 있었습니다. 마르둑이라는 신이 치열한 전투 끝에 바다괴물 티아맛을 죽이고, 그 주검을 반으로 잘라 하늘과 땅을 창조합니다. 그리고 흐르는 피에 흙을 섞어서 인간을 창조한 다음 그들에게 노동의 의무를 부과하고, 그 위에 신에게 갈 수 있는 도시 바벨론(babilani, 신들의 문)을 세운다는 이야기입니다. 약탈과 억압으로 문명을 유지해가는 제국의 질서가 이데올로기화 된 설화입니다.

 

제국의 위용을 담은 이 이야기는 포로로 끌려와 있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다르게 들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약탈의 표적이었고, 유배지라는 암흑세계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확고하게 움직이는 제국의 질서가 포로민들에게는 일상화된 폭력의 질서일 뿐이요, 그 질서란 실상은 평화가 안착할 수 없는 삶의 무질서요 빛을 잃은 어둠입니다. 그것은 본문 2절에 나오는 상황일 것입니다.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심연의 표면을 덮은상황입니다.

 

그런데 포로기의 신앙인들은 이러한 혼돈과 어둠의 때에도 하나님의 영이 어머니의 숨결처럼 함께 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숨결이 마침내 혼돈과 어둠을 물리치고 생명 세계를 지어낼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생명 세계의 창조는 살육의 전투가 아닌 평화의 말씀을 통해서 이뤄집니다. 하나님의 창조활동 그 어디에도 폭력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빛이 생겨라! 이 말씀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세계가 지어졌다니! 죽음의 시대를 통과한 포로민들이 가진 믿음이 놀랍기만 합니다.

 

제국의 관점에서 보면 평화의 말씀으로 지어지는 세계란 환상이요, 힘을 갖지 못한 자들의 허망한 꿈에 불과할 것입니다. 피조세계의 엄연한 현실은 제국의 질서가 관통하는 힘의 세계요, 그 체제의 밑바닥에 유배된 포로민으로서의 인생은 개/돼지처럼 비천한 존재로 비칠 뿐입니다.

 

그러나 힘의 철학이 사회적 문법처럼 작동하는 제국의 체제를 죽음의 시대로 읽고, 그 혼돈과 어둠의 땅을 하나님께서 생명의 숨결과 평화의 말씀으로 새롭게 하실 것이라고 믿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성경의 믿음을 세웠습니다. 성경은 제국의 관점이 아니라 바로 이들의 눈으로 읽어야 그 진실이 드러납니다.

 

[민중과 함께 모험하는 신앙 공동체]

 

오랫동안 우리 사회 역시 누적된 적폐로 인해 희망을 잃어가는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지난겨울에 이룬 촛불혁명을 통해서 새로운 사회를 창조할 수 있다는 믿음을 회복했습니다. 새로운 세계를 꿈꾼 믿음의 사람들이 광장에서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촛불혁명이 조성한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려는 종교혁명이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운동 오백 주년을 맞아 그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지만, 16세기에 발생한 사건과 신학과 제도를 강조할 뿐, 정작 가장 중요한 사실, 낡은 시대의 율법을 뛰어넘는 모험적인 신앙인이 등장한 사실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종교개혁운동이 가능했던 것은 암담한 현실의 무게를 이겨내고 일어선 믿음의 사람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종교개혁운동을 가능케 한 이 사람들은 잘못된 방식의 종교적 경건에 대해서 정직한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습관적인 가르침이나 형식적인 관례를 통해서 정신적 안식을 누리는 것을 거부했으며,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지체된 사제들이 가르치는 것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려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인간을 억압하는 잘못된 제도들에 도전했으며, 신의 이름을 빙자하여 진실과 양심을 짓밟는 율법적 질서를 거부했습니다. 바로 그들이 개혁가들과 함께 저항정신을 공유했고, 운동에 직접 참여하며 그 운동이 지속될 수 있도록 뒷받침했을 뿐만 아니라, 그 운동과 함께 성장해갔습니다.

 

이들이 아직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지 않았던 때에 활동한 체코의 운동가 후스는 면죄부 판매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화형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 1세기가 흘러 이들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을 때 동일한 주장을 한 루터는 교황의 칙서를 불태우면서까지 저항했는데도 불구하고 지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운동의 진면모는 신학이나, 사건이나, 제도보다도, 그 운동에 참여한 모험적인 믿음의 사람들이 태동했다는 사실 자체에 있습니다. 그들은 낡은 율법에 갇힌 어두운 사회를 새롭게 지어내는 미래의 선물이었습니다. 종교개혁운동은 이렇게 새로운 믿음의 사람을 지어서 세상에 바쳤습니다.

 

오늘도 교회는 바로 이들을 선교의 주체로 삼고, 이들과 함께 역사를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여전히 민중들을 선교의 대상으로 여기고 교회의 교리로써 계몽시켜야 할 존재로 여깁니다. 비상식적인 지식을 믿음이라고 가르침으로써 사람들을 반지성주의에 빠뜨리고, 안락한 종교 서비스에 탐닉하게 함으로써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타오르게 할 예수운동의 전선을 붕괴시킵니다. 그것은 교리주의에 물든 교회의 무능이요, 성장주의 시대를 지나온 교회의 정신적 병폐입니다.

 

복음의 방향을 잃은 한국교회가 되찾아야 할 믿음의 원점은 민중과 함께 했던 예수님의 갈릴리 선교입니다. 안병무 선생님은 교회의 출발점을 민중들 속에 담긴 예수의 에토스에서 찾았습니다. 교회가 생동하는 공동체로서 역사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바로 이 예수의 에토스를 민중의 삶 속에서 피워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민중사건 속에 그리스도가 현존하고 있음을 증언하는 일일 것입니다. 안 선생님은 바로 그것이 기존교회의 사활이 달린 열쇄라고 말합니다. (민중신학의 새 교회상, 189)

 

이런 가르침 속에서 육십여 년의 자라온 향린교회가 앞으로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충실하게 증언하는 모험적인 신앙공동체를 이루어가기를 바랍니다. 안선생님의 은사요 주례자였던 장공 김재준 목사님은 신앙인의 삶의 좌표를 일컬어, “하나님을 믿고 모험하라!”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 말은 바벨론 제국 치하의 무질서와 흑암 속에서도 새로운 세계의 창조를 꿈꾼 신앙공동체의 정신과 같은 것이요, 이 세상의 율법을 뛰어넘어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고자 했던 바울의 꿈이 아니겠습니까?

 

한국교회는 산업화 시대에 맞춰 이식된 성장주의와 번영신학이 그 마력을 잃고 죽어감으로써 이제 환멸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길을 잃은 한국교회가 갈망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모험하는 공동체입니다. 예수께서 부르셔서 오늘의 역사 속으로 파송할 제자도 바로 그러한 공동체일 것입니다. 향린교회가 그 부르심을 따라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함께 나눈 말씀을 생각하며,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