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사 55:1-5, 롬 9:1-5, 마 14:13-21)

[사랑, 끝나지 않은 삶의 혁명]
교회에 부임한 지 한 달이 되었습니다. 교회 행정에 적응해가는 가운데, 심방을 시작했습니다. 교우들의 삶을 더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심방위원회와 일정을 조정하여 찾아간 분은 도기순 장로님이었습니다. 98세이신데 어린아이처럼 맑은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계신 분을 보며, 그분의 삶의 역사를 떠올려봤습니다. 도장로님은 용정에서부터 안병무 선생님의 평생동지로서 살아오셨고, 또 임시정부의 군사국장을 하신 도인권 목사님의 따님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의 친구요 딸이 아니라, 그분의 삶 자체가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한편의 장엄한 역사였다고 생각합니다. 손을 잡고 기도하면서, 그분의 믿음과 사랑을 이어가겠다는 다짐을 하고 왔습니다. 
[인간의 내밀한 역사] (An Intimate History of Humanity, 1994)라는 책을 보면, 흥미로운 주제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방법과 거기에 완전히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라는 주제입니다. 저자는 인류가 고통을 줄이면서 생존하기 위한 6가지 방법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류가 인생을 여행하는 6가지 방식을 개발했다는 것이지요. (1) 첫 번째는 복종하고 현재 삶을 받아들이는 것. (2) 협상을 통해서 좋은 조건의 거래를 하는 것. (3)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기 사생활에 집중하는 것. (4) 지식을 찾는 것. (5) 자신을 드러내고 위선을 깨뜨려서 사는 것. (6) 창조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방식으로 인생을 여행하고 계신가요? 그 책의 저자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다른 이유를 ‘새로운 형태의 사랑’이 생겨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우리 삶에 여러 모양의 정열이 있고, 수많은 사랑의 실험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그 책은 인상적인 표현을 합니다. “정열은 아직 닦아야 할 기술”이요, “사랑은 끝나지 않은 혁명”이다. (T. 젤딘, [인간의 내밀한 역사], 115) 
우리의 삶에서는 어떤 정열이 자라나고, 어떤 사랑의 혁명이 벌어지고 있는지요? 

[무엇을 향한 갈망인가, 이사야 55장 1-5절]
비슷한 물음을 제2이사야도 오늘 본문인 55장에서 묻습니다. “왜 돈을 써가며 양식이 되지 못하는 것을 얻으려하는가, 왜 만족할 수 없는 것을 위해서 노동을 바치는가?” (2a절) 그는 1절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배고픔과 목마름입니다. 인간의 여러 욕망들 가운데, 아마 포로민의 고단한 삶을 반영한 대표적인 두 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배고픔과 목마름, 그것은 육체의 욕구만이 아니라 영혼의 갈망이기도 합니다. 배가 고프면 육체만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목이 마르면 영혼까지 타들어갑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고 하는데, 그 생기가 히브리어로 ‘네페쉬’입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네페쉬, 우리의 네페쉬는 무엇으로 인해 배고프며, 무엇을 위해서 목마르게 될까요? 아마 거기에 삶의 방식이 달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인만이 아니라, 사회와 역사의 생명 또한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는 무엇으로 인해 배고파하는가, 우리의 역사는 무엇을 향해 목말라하는가? 바로 그것이 사회의 품격을 결정하는 것이겠지요. 
양식이 될 수 없는 것에 돈을 쓰고, 만족할 수 없는 일에 땀을 흘리는 것은 단지 어리석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4대강을 망치는데 수십조 원을 낭비하고, 수만 년 동안 밀폐 관리해야 하는 폐기물을 양산하는 핵발전소를 짓고, 수조원의 전쟁무기를 사들여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는 것은 단지 정책결정자의 어리석음 때문만이 아닙니다. 
제2이사야는 그 이유를 하느님의 말씀을 외면하는 삶의 방식에서 찾습니다. 그는 반복해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전합니다. 나의 말을 들어라. 영원한 계약을 맺자! 
“나의 말을 들어보아라. 맛좋은 음식을 먹으며 기름진 것을 푸짐하게 먹으리라.” 「공동번역」의 번역은 너무 의역이 된 듯합니다. 원문에 가깝게 직역하면, “나의 말을 들어라. 좋은 것을 먹고, 너의 네페쉬(nephesh), 너의 영혼을 풍성하게 하여라.” (2b절)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로 와라. 너의 영혼이 살리라.” (3a절) 
인생은 바로 이 하늘의 부름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 지어지고 무너집니다. 

[이스라엘의 실패에 대한 바울의 번민, 로마서 9장 1-5절] 
오늘 로마서 본문에서 바울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성령 안에서 양심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내 마음에는 큰 슬픔, 끊임없이 번민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1-2절) 
그가 고백한 것은 동족 이스라엘을 향한 애절한 마음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지 바울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혈육을 같이 하는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한이 없습니다.”
이 말은 자기 민족의 이해관계에 갇힌 국수주의적인 발언이 아닙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살아갔던 바울이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 발언은 자기 동족 이스라엘의 실패에 대해서 애통해하는 심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어떤 실패인가? 그들이 가진 장점을 살리지 못하고, 생명운동의 좌절을 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민족의 장점으로 세 가지를 열거합니다. (1)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가졌고, (2) 하느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었고, (3)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과 참된 예배와 하느님의 약속을 가진 그들은 “훌륭한 선조들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훌륭한 혈통과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 왜 바울의 마음에 번뇌를 가져다주었다는 말인가요? 바울이 동족에 대한 슬픔을 갖게 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9장 전체를 읽어야 합니다. 그것에 대해서 바울은 31-3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의(義)의 법’(νόμον δικαιοσύνης)을 추구했지만 그 법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믿음(πίστεως)을 통해서가 아니라, 공적(ἔργων)을 쌓음으로써 얻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걸림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과 약속과 예배를 소유한 민족이었지만, 그 소유가 도리어 믿음을 방해하고 말았습니다. 반면 그것을 소유하지 못한 이방인들은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되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30절) 이스라엘의 실패는 믿음을 따라 살지 못한 것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을 따라서 사는 삶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도전, 마태오 14장 13-21절]
오늘 복음서 본문 13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 예수께서 들으신 ‘이 말’은 세례요한이 참수를 당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소유한 헤롯 왕과 귀족들, 그들이 잔치를 벌이며 그 여흥 속에서 예언자를 죽였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비통하여, 혼자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물러나셨습니다. 
그런데 군중들이 육로로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온 이들, ‘군중’이라고 번역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14절과 19절의 원문을 보면, 그들을 오클로스(ὄχλος)라고 부릅니다. 의지할 곳 없는 당시의 민중들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예수님은 “측은히 여기시고, 그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14절) 
여기서 병 고침의 대상이 된 사람들이 누구인지 잠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동번역을 위시한 대부분의 한글성경은 “그들이 데리고 온 병자들”이라고 번역하여, 일부의 사람만을 예수님이 치유하신 것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어성경(KJV, NIV, NRSV)은 “그들의 병” (their sick), 즉 그들 모두의 병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이 헬라어 원문에 가깝습니다. 
그들 모두의 병(病)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뒤에 이어지는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를 통해서 그것을 추정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오병이어의 이야기를 예수님의 치유 사건과 별개의 것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둘을 이어서 읽음으로써 예수님과 민중들이 함께 지낸 하루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클로스’들과 지내다가 날이 저물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께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늦었으니, 오클로스들을 흩어서 음식을 사먹도록 하는 게 좋겠습니다.” 아마 제자들은 늘 그래왔듯이 스승에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승은 그들에게 어려운 요청을 합니다. “그들을 보낼 것이 아니라,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 제자들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것을 ‘가져오라’ 하시고, 오클로스를 풀 위에 앉힌 다음, 오병이어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축복하십니다. 그런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제자들도 스승으로부터 받은 것을 오클로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찬 것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이 말씀은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도전입니다. 그 도전은 쓸 데 없는 것이 아니라, 오클로스의 치유작업과 연관된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오클로스를 양산하는 체제를 치료하는 해법이 바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명령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이 말씀은 실상 성서가 말하는 가장 큰 요청이자 도전입니다. 오병이어 이야기는 기적 이야기 가운데 네 복음서에 모두 나온 유일한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말씀으로 여겨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이 명령은 몇 장이 지난 19장에서는 어떤 부자 청년에게 주어집니다. 그는 바울이 말했던 사람 즉, 율법과 예배와 약속을 모두 소유한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율법의 모든 것을 지켰고, 이제는 영원한 생명까지 얻고자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말합니다. “네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라 오너라” (마 19:21). 
성경 속의 부자 청년은 근심하면서 돌아갔습니다. 반면에 오늘날의 머리 좋은 사람들은 자기의 것을 나누지 않고도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길을 개발했습니다. 삼박자 구원이니, 청부론(淸富論)이니 하는 것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자 청년과 이스라엘의 실패를 반복하는 것일 뿐입니다. 
 
[나눔과 사랑의 급진주의]
오병이어의 이야기는 초대교회의 성만찬의 자리에서 자주 읽혔습니다. 그들은 무슨 다짐을 하고자 이 이야기를 읽을까요? 그들은 예수를 따르며, 대안적인 공동체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예수의 참된 제자들이 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들은 계속해서 삶의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그 위기의 본질은 오늘 복음서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연루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민중들을 향해 애끓는 마음을 갖고 계셨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충격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어서, 자신들만 먹기에도 모자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가진 것은 아주 작은 것이요, 그것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와 함께 하는 대안적인 삶의 세계가 어려움에 봉착한 것입니다. 그 핵심은 먹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민중들을 ‘돌려보내자’ 하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먹여볼 테니 너희들은 구경이나 해라’ 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도전하십니다. 
부유한 서구의 교회는 이제까지 오병이어의 이야기를 주로 음식이 자동으로 불어난 기적사건으로 해석해왔습니다. 그러나 인도의 민중들, 달릿신학자들은 다르게 해석합니다. 그들은 제2이사야가 했던 것처럼 문제제기를 합니다. “왜 사람들은 그렇게 많은 음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종일 굶주렸다는 말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대답하기를, 그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게 된 까닭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만 먹이고, 배척하는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주지 않는 문화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마태복음], Dalit Bible Commentary, 138) 
오병이어의 이야기를 읽을 때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복음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기적의 메카니즘’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의 내용만으로는 어떻게 오병이어로 남자만 오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모종의 기적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전체 이야기가 매끄럽게 이해되지 않고, 해석이 필요한 공백이 있습니다. 그 해석에서 사람들은 자기 방식대로 추측하게 됩니다. 예수님 정도 되는 분이라면 그런 기적을 베풀 수 있다고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추측과 희망사항으로 이야기의 공백을 메꾸고, 그것을 사실로 믿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그런 생각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오병이어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축복합니다 (spoke a blessing). 이 행위는 마술적인 예전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요, 감사입니다. 하나님만이 사람들의 삶에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는 분이라는 믿음, 그분에 대한 신뢰가 표현된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옵소서!” (마 6:11) 일용할 양식에 대한 기도를 이제 오천 명의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서 드리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서 예수님이 했던 기도의 대상이 ‘빵과 물고기’라고 추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축복을 받아서 그것이 마술처럼 커졌다는 것은 본문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축복을 하고 난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셨다는 것뿐입니다. 
성만찬에서 이 이야기가 읽혀진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고, 제자들은 오클로스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모두가 배불리 먹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하면서도 핵심적인 메시지입니다. 떡을 떼고 자기 소유를 부수는 것, 이것은 성령의 마음입니다. 기적은 빵이 불어났다는 점이 아니라, 오천 명이 먹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기적은 열정의 기술이요, 사랑의 혁명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시대에도 큰 도전이 됩니다. 그것은 사랑의 혁명과 함께 벌어질 기적으로의 초대입니다. 오늘 교회 공동체는 마치 바울이 탄식했던 이스라엘처럼, 예배와 약속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걸림돌이 되어 믿음의 실패를 맛보고 있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도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정의로운 분노 대신, 분별없는 혐오로 얼룩져가는 이 세계에서, 우리는 우리의 자매들에게, 우리 시대의 오클로스 형제들에게 무엇을 주고 있습니까? 

사랑의 혁명이 일어나는 기적이 우리 공동체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길 바라며, 침묵으로 묵상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