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서 살아나온 사람들 (신 32:7-15, 행 14:8-20, 막 8:1-9)

추석 명절과 함께 긴 연휴를 보내고 있습니다. 삶의 고단함을 잠시 접고, 가족과 함께 풍성한 음식을 나누는 시간들이 행복합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가족들과 정을 나누는 시간조차 가질 수 없는 분들이 우리 사회에는 많기 때문에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조상들께 차례를 지내는 추석 명절은 우리들로 하여금 뿌리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느낄 때 광야 같은 세상을 사는 동안 잊고 지낸 것들을 깨닫고 위안을 얻기도 합니다. 오늘은 성경 속의 사람들이 기억하고자 했던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특히 ‘광야’라는 상징적 공간에서 이루어진 일들에 주목해보겠습니다. 

[광야에서 살아나온다는 것의 의미, 신명기 32장 7-14절]
오늘 본문 신명기 32장은 ‘모세의 마지막 노래’로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이 노래는 이스라엘 민족이 사십 년간의 광야 생활을 마쳐갈 즈음, 모세가 온 회중 앞에서 들려준 것이라고 합니다. 그 내용은 야훼의 사랑에 대한 회상과 그 은혜를 배신한 이스라엘에 대한 훈계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노래의 앞부분으로서, 하느님의 사랑을 회고하는 내용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득한 옛날을 회상해 보아라. 선조 대대로 지나온 세월을 더듬어 보아라.” (7a절) 모세가 언급한 회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수많은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이 야훼 신의 몫이 되었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광야에서 야훼의 보호와 인도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다소간 충격적인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첫째는 민족창건 신화에 얽힌 다신 사상의 잔재입니다. 9절을 보면, “야곱이 야훼의 몫이 되었고, 이스라엘이 그가 차지한 유산이 되었다.”고 말하고 하는데, 여기에는 신화적인 설명들이 엉겨있습니다. 
8절을 보면, ‘지존하신 이’(the most High)이라는 이름을 가진 최고신이 등장합니다. 히브리어로 ‘엘룐’이라는 이름의 이 신이 온 세계의 땅을 나누고 인류를 갈라 흩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신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들의 수효대로 땅의 경계를 긋고 민족을 할당할 때, 야곱 즉 이스라엘이 야훼라는 이름을 가진 신에게 배당되었고 말합니다. 
성경에 남아 있는 이 다신론적 신화의 잔재는 성경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아마도 까무러칠만한 내용일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런 표현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저는 그것이 성경이 갖고 있는 사상의 품이요, 인문학적 안목이라고 봅니다. 우리 역시도 그런 안목으로 성경 말씀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다신(多神) 사상의 흔적을 은폐하려는 관심을 전혀 갖고 있지 않습니다. 본문이 관심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데 있습니다. 그것은 광야로 내몰린 비참한 인간들에 대한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신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졌습니다. 성경 역시도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많은 이름을 가진 신들의 흔적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성경 속의 신앙공동체가 거대한 가나안 문화권 안에서 존속했기 때문이고, 또한 주변의 다른 문화들을 창조적으로 흡수하면서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문화의 영향까지 성경에 담겨있습니다. 그것들은 마치 여러 지류가 하나로 합류하여 장엄한 강물을 이루며 흘러가는 ‘하느님의 강’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G. 라일리, [하느님의 강], 31) 
거대하게 흘러가는 이 ‘하느님의 강’ 속에서 오늘 신명기 본문이 주목하는 신이 있습니다. ‘야훼’라는 이름을 가진 신입니다. 그는 일반적인 신과는 속성을 달리하는 특이한 신입니다. 약자의 신이요, 따라서 해방의 신이기 때문이다. 이 신은 풍요 속에서 경배받기를 꺼려하며, 사람들을 광야 속에서 만납니다. 그것은 아마도, 탐욕의 체제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 풍요의 문화 속에서 질식된 사람들을 광야로 내몰아서 새 삶을 찾도록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야훼를 만나는 장소는 성전 속의 거룩한 공간이 아니라 짐승이 울부짖는 광야입니다. 
본문 10절을 보면, 하느님이 야곱을 만난 장소가 광야(midbar), “스산한 울음소리만 들려오는 빈 들판”이었다고 합니다. 대체 어떤 신이기에 짐승들의 울음소리만 있는 광야에 거처를 둔 비참한 삶을 사는 이들의 신이 되고자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자들을 향해 손길을 뻗치고 있는 너무도 보잘 것 없는 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광야에서 야훼와 야곱이 만나 벌인 첫 사랑은 애처로운 연가와 같습니다. 10절과 11절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야훼는 이스라엘을 “감싸 주시고, 키워 주시고, 눈동자처럼 아껴 주시며, 독수리가 보금자리를 흔들어 놓고 파닥거리며 떨어지는 새끼를 다시 날개 죽지로 업어 나르듯이” 보살핍니다. 이 사랑은 처연한 느낌이 듭니다. 광야를 유랑하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은 당대에 넘쳐나던 수많은 풍요의 신들로부터 외면당한 채, 오직 야훼의 은덕을 입고 광야에서 살아났습니다. 
12절에서 모세는 이렇게 묻습니다. “야훼 홀로 그들을 인도해 주실 때, 어느 다른 신이 그들과 함께 하였더냐?” 이 물음은 복선을 깔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광야의 사람들과 함께 했던 신실한 분은 오직 야훼뿐이라는 주장이지만, 그 밑에는 그 사랑을 잊어버린 이스라엘에 대한 원망이 감돌고 있습니다. 
그 다음 첫 구절이 “산등성이를 타게 하여 주시며”라고 우리는 읽었지만, 새번역을 보면 “주님께서 그 백성에게 고원지대를 차지하게 하시며”라고 번역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안전한 곳’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뒤를 잇는 13절과 14절의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이 풍요에 풍요를 더해갑니다. 광야생활을 하는 사람들로서는 구하기 힘든 음식까지 누리게 됩니다. ‘밭에서 나는 오곡’과 ‘바위에서 흘러내리는 꿀’을 먹다가, 마침내는 ‘바산의 특산물인 질 좋은 고기와 포도주’까지 마시게 됩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의 점차적인 풍요로움을 묘사하면서 모세의 어투가 변해갑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15절에서는 냉혹한 비판에 이릅니다. “이스라엘은 부자가 되더니, 반역자가 되었다. 먹거리가 넉넉해지고, 실컷 먹고 나더니, 자기들을 지으신 하나님을 저버리고, 자기들의 반석이신 구원자를 업신여겼다.”
그렇다면, 모세가 회상한 ‘광야’는 두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겠습니다. 하나는 하느님을 만나 은혜를 풍성하게 경험한 곳이요, 다른 하나는 안전과 풍요를 좇다가 하느님을 잃어버린 곳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묻게 됩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광야를 사십 년간 떠돌다가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도착했다고 말하는데, 이스라엘은 정말 광야에서 살아나온 것인가요? 이것은 생물학적 목숨에 관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물음이요, 영적인 물음입니다. 그리고 이 물음은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물음입니다. 

[광야에서 겪은 기적이야기, 마가복음 8장 1~9절]
오늘 마가복음의 이야기는 광야에서 사흘을 굶은 사람들이 겪은 기적이야기입니다.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고 일곱 광주리가 남았으니,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기적 자체가 하늘의 뜻을 알려주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 바로 뒤에 나오는 이야기를 미루어보면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의 기적 이야기를 들려준 뒤, 마가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와서 하느님을 드러낼 ‘표징’(sémeion/token)이 될만한 기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깊이 탄식하면서 보여줄 것이 없다고 거절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을 읽을 때, 우리는 기적 자체보다 기적을 가능케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기적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에 달려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그것을 표현합니다. 2절에서 예수님은 “이 많은 사람들(ochlos)이 벌써 사흘이나 나와 함께 지냈는데, 이제 먹을 것이 없으니 참 보기에 안 됐다 (참 가엾다).” 
사흘 동안 저 민중(오클로스)들과 지냈는데, 먹지도 못하는 저들을 보니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은 아픔’(splangchnizomai)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기는 외딴 곳인데,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일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그들에게 광야는 단지 배고픔의 자리요 빨리 벗어나야 할 자리입니다. 광야에서 탈출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고 제자들은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그곳에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빵이 몇 개나 있느냐?” 
“일곱 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받아서 감사기도를 드리고 제자들에게 나눠주라 하시고, 또 물고기 몇 마리도 같은 방식으로 기도하여 나누게 하십니다. 그러자 사천 명이 먹고도 일곱 바구니가 남았습니다.
기적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오늘 이야기,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고 일곱 광주리를 남겼다는 이야기는 사실 맥 빠지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마가는 이미 6장에서 스케일이 더 큰 오병이어 이야기를 들려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보다 작은 것(오병이어)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을 먹이고도 훨씬 더 많은(열두) 바구니를 남긴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할 대목은 기적 후의 배부름이나 광주리의 풍요가 아닙니다. 그것이 생겨나기 전의 상황, 그리고 그 사건이 벌어진 장소인 ‘외딴 곳’(erémia), 광야(사막)라는 상징적인 공간이 갖는 의미에 관한 것입니다. 광야는 위험과 모험이 교차하는 자리입니다. 광야는 기갈(飢渴)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자리만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사탄의 유혹을 이겨내는 승리가 보장된 자리도 아닙니다. 광야는 배고픔의 야수성이 배회하는 자리만도 아니요, 연민의 휴머니티가 승리의 면류관을 쓰고 있는 자리 역시 아닙니다. 그곳은 생명과 죽음이 혼재된 자리요, 고통과 기적이 뒤얽힌 자리입니다. 
그곳에서 생명은 일차적으로는 생존하기 위하여, 그리고 나아가 보다 더 생명답게 살아남기 위해서 대결을 펼칩니다. 생명이 분투하는 그 자리는 고통과 희망이 혼성적(hybrid)으로 섞여 있습니다. 생명의 현실에는 항상 도전과 응전이, 과거의 무게와 미래의 꿈이 함께 서려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순수와 순결이란 추상의 산물일 뿐, 현실 자체는 아닙니다. 따라서 “순수함에 대한 환상 속에는 건설적인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 철학자의 지적은 타당하다고 하겠습니다. (M. 누스바움, [혐오와 수치심], 199) 
우리는 신명기 본문을 읽고 나서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40년의 광야생활을 마친 이스라엘은 과연 살아나왔는가? 비슷한 질문을 마가복음 본문을 읽은 지금 던져볼 수 있겠습니다. 예수와 함께 광야에서 기적을 맛본 제자들과 오클로스들은 과연 살아서 나왔는가?

[광야에서 되살아난 바울, 사도행전 14장 8-20절]
예수운동을 치열하게 벌이며,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을 따라 전략적으로 그 운동을 퍼뜨린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본문은 바울의 1차 선교여행 마무리 단계에서 벌어진 사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전형적인 종교적 구도를 갖고 있습니다. 기적을 벌일 때는 사람들이 추앙하지만, 진리의 복음을 설파할 때는 군중들의 박해가 뒤따릅니다. 그러자 믿음의 사람은 다시 일어나 길을 떠난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루스드라(Lustrois)에서 선교를 할 때,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로 살아온 사람이 바울의 가르침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을 눈여겨보던 바울의 마음에 울림이 생겨났습니다. 앉은뱅이가 스스로 몸이 성해질만한 믿음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당신의 발로 일어서시오.” 그러자 평생을 앉은뱅이로 지내던 그가 벌떡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처럼 떠받들었습니다. 심지어 신당의 사제들은 꽃을 들고 나와서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여기고, 황소를 잡아서 제사를 드리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자 두 사도가 그들에 말합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이며, 우리가 온 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요. 여러분은 이런 헛된 우상(mataios/vanity)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오시오. 기적을 맛본 그들은 도대체 무슨 헛된 것에 빠져있었던 것일까요?
바울이 전한 하느님에 관한 이야기는 간결합니다. (1) 하느님은 창조주요, (2) 모든 민족이 ‘각자의 방식대로 살도록’ 하시고, (3) 철따라 열매를 맺도록 그들에게 은총을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여러 신들을 모시고 지중해 연안의 도시문명을 건설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될 수 있었을까요? 
결과적으로 본다면, 바울은 예수운동의 소박한 진리를 설파했다는 이유로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바울의 주장이 로마 황제를 이 세상의 구세주로 여겨야 한다는 당시의 풍조에 동조하지 않는 체제전복적인 논리였기 때문이어서 일까요? 아니면 신중의 신인 제우스와 지혜의 신 헤르메스로 섬기고자 하는 그들의 종교적 욕망을 꺾어버리고, 경배하기 어려운 십자가의 신을 전하는 바울의 종교적 불경함이 분노를 유발했기 때문일까요? 
지나왔던 이전 지역(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부터 바울에게 증오와 적대감을 보였던 사람들이 이곳 루스드라에까지 찾아와서 군중들(오클로스)을 선동하였고, 결국 이 둘이 합세하여 바울을 돌로 쳐 죽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죽은 줄로 알고 그의 시체를 ‘성 밖으로’(outside the polis) 끌어내 버립니다. 
성(城)이란 헬라어로 ‘폴리스’ 즉, 도시를 의미합니다. 폴리스는 정치와 경제와 문화가 확고한 질서를 이루며 구축된 체제입니다. 그 밖에서는 사회적 생명이 생존할 수 없다고 여겨졌습니다. 체제 밖의 공간은 죽음의 공간으로서 시체가 버려지는 공간입니다. 바울이 이곳에 버려졌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절을 보면, 신도들이 폴리스 밖으로 나옵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 처형 이후 골고다 언덕을 찾은 여인들과 같은 장면입니다. 공동번역에 ‘신도들’로 번역된 단어는 마쎄테스(mathétes), ‘제자’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죽자 제자들이 성 밖으로 나와서, 죽은 바울을 둘러선 것이죠. 그 때 바울이 말짱하게 깨어 일어납니다(anistemi). 그리고 그는 다시 성/폴리스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음날 다른 곳으로 길을 떠납니다. 
이 마지막 장면은 불가사의하고 압축적 상징들로 이어진 듯한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폴리스 밖에서, 체제 밖에서, 광야에서 다시 일어난 사도에 관한 증언입니다. 그가 체제로부터 죽임을 당하고 성 밖의 공간 광야에 버려졌지만, 그 광야에서 다시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고, 또한 그곳을 초연히 떠나 복음을 안고 자기 길을 갑니다. 


[지쳐버린 문명, 그 너머를 향한 종교의 꿈]
오늘 세 본문은 모두 생명이 피고지는 장소로서 광야를 말하고 있습니다. 신명기의 광야(32:10)는 ‘눈동자처럼’ 아껴주는 신의 사랑을 받았지만, 결국에는 풍요를 향해 떠나며 그 은혜를 저버린 곳입니다. 마가복음의 민중(오클로스)들은 사흘 동안이나 광야(8:4)에서 굶다가 기적을 맛보았습니다. 그것은 타자의 고통을 읽는 공감의 능력이 촉발한 기적이었습니다. 죽임당해 버려진 성 밖(행 14:19) 광야는 바울이 제자들과 함께 다시 일어선 곳입니다. 
이와 같이 광야는 고통이 직접적 현실이 된 곳이면서도, 어른거리는 죽음에 맞서 참 생명을 갈구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보여주는 광야는 일차적으로 하늘 뜻을 깨닫는 종교적 공간입니다. 하지만 정작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 현실은 거친 광야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짐승이 되어버린 것과 같은 삶은 아닌가? 진실로 우리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울리는 광야에서 생명을 지킨 인간이 되어 살아나올 수 있는가? 
오늘 우리는 풍요의 문화를 살고 있습니다. 짐승소리가 들리는 광야를 벗어나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깁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살아서 광야를 빠져나왔는가, 아니면 모든 타자를 적으로 여기며 야수처럼 광야를 살아가고 있는가? 한 철학자는 자본주의 문명의 병폐를 가리켜 ‘안전과 문명을 혼동하는 정신의 비관’에 있다고 말합니다. 자본주의 소비문명 속에서, 우리는 안락함의 크기만큼 문명을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위험을 잉태하는 미래를 거세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개인이든 사회든, “과거가 제공하는 안락함 너머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정(vigor)에 의해서 삶이 자극되지 않을 때, 이미 쇠퇴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Whitehead, Adventures of Ideas, 360)
인류는 배고픔과 고독으로 가득 찬 광야를 지워버리기 위해 도시문명을 건설해왔습니다. 정말 우리는 광야에서 살아나왔는가? 바울은 도시에서 죽임을 당하고 도시 밖에 버려졌습니다. 그런데 그는 말짱하게 죽음을 떨치고 일어나 갈 길을 갔습니다. 오늘 우리가 갈 길도 그가 걸었던 예수운동의 길입니다. 단지 광야를 벗어나는 기적의 길이 아니라, 광야에서 생생하게 살아나오는 믿음의 길 말입니다. 
우리 교회에게 10월은 중요한 기간이 될 것 같습니다. 이번 주는 홍근수 목사님과 안병무 선생님을 기리면서 우리 교회의 선교와 신학에 대해서 성찰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 다음 주는 전교인수련회를 통해서 ‘앞으로 10년을 어떻게 갈 것인’ 마음과 뜻을 모으는 시간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장로선출을 위한 공동의회를 열게 됩니다. 중요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우리 안에 믿음의 좌표를 바로 세우며 함께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