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이사야 40:12-26; 에페소서 1:15-23; 마르코 12:13-17)

 

 

[김학로 장로/생명사랑교회]

 

저는 서울북노회 생명사랑교회 장로입니다. 이번에 평신도 강단교류에 처음 참여하게 되었는데, 향린교회의 강단에서 하늘 뜻을 나누게 되어 너무나 떨리고 긴장이 됩니다.

 

교회가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사회의 지탄과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피할 수 없는 시대에 향린교회가 캄캄한 바다 위에 등대같이 우뚝 서서 밝은 빛을 비춰줌으로써 기장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의 모범이 되어주시는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전해 드립니다.

 

향린교회에 대해 제가 경험한 몇 가지를 먼저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어느 해인가 시청 앞 광장에서 진행된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성탄절 연합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향린교회 어느 여성 권사님께서 기도하셨는데 그 기도를 들으며 전신에 소름이 끼쳐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기도의 내용이 세세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고난 받는 우리의 역사 한 가운데 다시 타는 뜨거운 불꽃으로 오셔 달라는 담대한 기도를 듣고, 향린교회 교인들이 얼마나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우리 교회와 관련된 것입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는 지금 53개월 된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생명교회를 세우셨던 문대골 목사님이 은퇴하실 때, 우리는 새로운 담임목사를 청빙하면서 청빙규약을 만들고, 시무 후 매 6년마다 신임을 묻는 안을 확정하였습니다. 은퇴하는 담임목사가 후임을 추대하지 않고, 교인들의 의견을 모아 민주적 절차를 거쳐 새로운 담임목사를 청빙하였습니다. 그런데, 새로 취임하고 목회하던 담임목사가 7년의 임기가 끝나가자, 원래의 약속을 어기고 노회법을 내세우며 교회의 규약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연임을 추진하였고, 그것으로 인해, 목사와 교인, 노회와 교회, 또 교인들 간에 심한 갈등과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절반의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 따로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생명사랑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우리는 작지만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 보자고 다짐했고, 교회의 기초를 놓으면서 정관을 마련했습니다. 많은 교회의 정관을 살펴보았는데, 대부분 형식적인 수준에 불과하였고, 생명사랑교회가 추구하는 방향과 부합하고 가장 민주적인 것은 향린교회의 정관이었습니다.

 

그래서 향린교회 정관의 골격을 상당부분 차용해서 저희의 정관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당회의 권한을 축소하고 평신도 중심의 목회운영위원회 체제로 틀을 짰으며, 담임목사와 장로의 임기제를 채택하였습니다. 또한 200명이 되면 분가할 것을 정관에 담았습니다. 2012년 이 정관을 만들 때 제가 향린교회에 전화를 걸어서 목회운영위원회를 중심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것이 잘 되는가를 물었습니다. 그 때 성실하게 답변해 주신 분이 바로 한문덕 목사입니다.

 

우리교회가 정관을 만드는 과정에서 여기에 동의하지 못하시고 한분의 장로님이 교회를 떠나셨고, 교인들을 설득하고 새 정관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향린교회가 먼저 굳건히 앞서가며 모범을 보여주고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목사와 장로의 기득권을 내려놓는 정관을 만들고 담임목사를 청빙하려니 고민이 되었습니다. 정관을 만들면서 우리는 교회의 목표를 작지만 건강한 교회”, “평신도 중심의 사역”, “선교 사명에 충실한 교회로 정했는데, 이런 교인들의 뜻을 충분히 이해하고 함께 해 줄 목사를 만나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했습니다.

 

다행히도 향린교회에서 오래 목회훈련을 받은 한문덕 목사님이 지원하셔서, 22분의 후보자를 물리치고 95.7%의 찬성으로 당당히 저희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고, 한 목사님은 교우들의 신앙 성숙을 위하여 열심히 수고하고 계십니다. 열정적으로 일하시는 목사님이 혹여 몸살이라도 나면 어쩌나 하고 교인들이 염려하면서 함께 신앙생활 하고 있습니다.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문제에 대하여]

 

오늘 저는 그동안 보수적인 기독교인들로부터 질문을 받고 늘 논쟁했던 부분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마르코 복음서에는 예수의 말씀을 트집 잡아 올가미를 씌우려는 바리사이파와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예수께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느냐? 바쳐야 하느냐? 바치지 말아야 하느냐?”를 묻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아시다시피 이 질문 자체가 올가미입니다. 예수께서 만약 세금을 바치라고 하면 바리사이파를 비롯하여 유대인들에게 원망을 살 뿐만 아니라 열심당원들에게 위협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바치지 말라고 하면 납세거부 죄로 헤로데 당원들에 의해 체포되어 감옥에 갔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시든지 올가미에 걸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위기를 예수님께서 어떻게 모면하실까요?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마음이 조마조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되묻습니다. “왜 나의 속을 떠보는 거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그러자 그들이 대답합니다. “카이사르의 것입니다.” 그러자 이어서 예수님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이렇게 말씀하시자 주위 사람들이 모두 경탄하였다고 성서는 전하고 있습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세금을 내라는 말입니까? 아니면 내지 말라는 말입니까? 예수님은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느냐? 바치지 말아야 하느냐? 라는 질문에 엉뚱하게 물어보지도 않은 하느님을 언급하면서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라고 답변했습니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청중들로 하여금 무엇이 카이사르의 것이고 무엇이 하느님의 것인지를 스스로 고민하고 판단하게 만들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많은 위정자들이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그리스도인은 정부와 지도자들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바치라고 했으니 예수님도 카이사르를 인정한 것이라고 말해왔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런 것인가요? 는 오히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카이사르를 인정한 것이 아니라, 카이사르마저도 하느님의 것이니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야 한다고 예수님이 얘기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신앙을 계속 되묻게 합니다. 과연 우리는 이 땅에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면서, 진정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드리며 살고 있는가 다시 한 번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세기 미국의 대부흥을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무디(D.L Moody)가 영국에 집회를 갔다 생긴 일입니다. 무디는 부흥집회를 위해 영국에 방문했다가 자신이 평소에 깊이 존경하던 찰스 스펄전 목사를(C. H. Spurgeon)을 뵙고 싶어 그의 집에 찾아 갔습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문을 두드리자 그토록 존경하던 스펄전이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스펄전의 첫 모습을 본 무디는 화들짝 놀랐습니다. 자신이 존경하던 목사의 입에 파이프 담배가 물려있었기 때문입니다. 무디는 깜짝 놀라 아니,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담배를 피웁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스펄전은 장난스러운 미소로 뚱뚱한 무디의 뱃살을 쿡 찌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럼 그리스도인이 배가 나와서 되겠습니까?” 영국교회를 비롯한 유럽교회들은 주초문제에 관대했지만 오히려 탐식에 대해서는 경계를 했습니다. 스펄전은 담배를 피우는 자신을 정죄하는 무디에게 또 다른 기준을 제시하며 그의 태도를 장난스럽게 꼬집은 것입니다.

 

오늘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 기장이 지난 총회에서 성 소수자 목회 지침 마련을 위한 연구 및 연구위원 구성 헌의를 찬성 74, 반대 258로 기각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일까요? 예장 통합은 교인들에게 요가와 마술을 금지하도록 하는 안을 통과시켰다는데, 우리가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 드리는 데, 이런 것들이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요? 우리 기장의 어르신이신 장공 김재준 목사님은 생명, 평화, 정의를 말씀하셨다는데, 만약 생명과 평화가 부딪히고, 사랑과 정의가 갈등을 일으킬 때, 우리는 어떻게 한 쪽을 선택할 수 있을까요? 앞으로 인공지능의 발달로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는데, 그 때 그 자리에서 또 하느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 생명사랑교회는 이런 것들을 이제야 하나 둘씩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앞서서 이런 문제들을 고민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도 여전히 우리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북 분단의 현실에서, 경쟁을 부추기고, 승자가 독식하는 세계에서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드리고 있는지 물어야 할 것입니다.

 

 

[조은화 목사]

 

앞서 평신도 강단교류로 귀한 하늘뜻펴기를 해주신 생명사랑교회의 김학로 장로님께 감사의 마음전합니다. 몇 번의 전화를 드리면서, 향린에 오시는 것에 대한 장로님의 떨림과 조심스러워 하시는 귀한 마음이 저에게는 진하게 남았습니다.


우리에게는 변화하는 시대에 따라 신에 대한 질문이 생기고 그 깨달음으로 또 다시 오늘을 사는 것 같습니다.

 

오늘 이사야 본문은 귀향살이를 가면서 들었던 이스라엘의 질문은 신은 어디에 있는가?’, ‘신은 우리를 버렸는가?’ 찾아도 찾아도 회복의 길은 안보이니 이제 끝인가에 대한 좌절을 맛볼 즈음 귀향살이가 끝나갈 즈음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귀향살이 하던 사람들이 돌아온다. 이제 노예살이가 끝나고 새로운 출애굽을 맞이하면서 야훼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찾아와 걸어가실 것이다. 노예살이의 깊은 슬픔 속에서 겪었던 아픔 속에 드디어 기쁨에 넘친 푸른 희망이 솟아나리라

 

돌아오는 이들이 질문을 던집니다. 수 십 년간 바벨론에서 강대국의 문화를 경험하며 느낀 것이 있었겠지요. 타국의 신들 앞에서, 새로운 출애굽을 실현하시는 야훼는 어떤 분인가? 이 질문의 이면에는 과연 야훼 하느님은 강대국의 신보다 나은가? 힘이 센가? 우리가 믿고 가도 되겠는가?’의 질문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야훼께서 우주와 역사의 최고 주님이시다. 강대국의 신 마저도 모든 것과 모든 사건이 그 분의 손안에 있다. 야훼 위에는 아무도 없다. 그 다른 신들은 아무런 힘이 없는 것에 지나지 않고, 인간의 상상과 손재주로 만들어낸 것임을, 강대국의 신이란 지배자들이 설정해 놓고 그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인간들을 노략하는 도구로 쓰인다고, 아무리 강해보이는 신이라도 그것은 간악한 지배자들의 우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사야는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귀양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실망하여 야훼께서 자기들을 버리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새로운 출애굽의 실현을 막는 장애물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통해 진짜 하느님의 속성을 보여줍니다. 오늘의 본문에 이어지는 뒷부분 29절을 통해 깊은 하느님의 속성을 알게 됩니다.

 

힘이 빠진 사람에게 힘을 주시고 기진한 사람에게 기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야훼를 믿고 바라는 사람은 새 힘이 솟아 날 것이다.”

 

우주를 창조한 영원한 하느님께서 몸소 지친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약한 사람들에게 굳은 의지를 주신다고 말하면서 하느님은 자신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을 받쳐 주신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오늘의 이사야 본문이 담고 있는 양극성을 봅니다. 위엄 있는 놀라운 하느님을 찬양함과 동시에 그 위엄을 버리고 수난 받는 사람들의 낮은 자리로 내려오는 하느님을 찬양함을!

바로 이것이 이사야가 보여주고자 하는 창조주인 동시에 역사의 주이신 하느님의 진면목입니다.

 

다음주 화요일과 수요일 12일에 걸친 트럼프 미대통령 방한을 앞두고 반대시위가 연이어 진행되고 있습니다. 향린교회는 지난 주 오후거리기도회를 통해 트럼프 방한에 반대하며 평화를 염원하는 뜻을 전한바 있습니다. 지난3일은 여의도 국회 본청 계단에서 대학생들 30여명이 '전쟁막말 트럼프는 국회연설 할 수 없다'고 적힌 펼침막을 들고 기습시위가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대대적인 전쟁반대 집회가 이어질 예정입니다.

 

이번 방한을 두고 다시금 우리의 안보의식과 힘없음을 보게 됩니다. 강대국에게 우리의 안전을 맡기고 우리는 거기에 헌신하는 이 구조가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정말이지 강대국의 군사력이 우리의 평화를 책임져 줄 수 있는 것인가요? 기독교인들이 더 미국에 의지해서 북한을 견제하려는 이러한 시국을 우리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강한 것이 좋은 것이라는 착각이 우리 안에 깊게 들어와 있습니다. 부자로 사는 게 행복한 것이다라는 것과 일맥상통하겠지요. 지난번 한 청년교우가 저에게 연락을 주었습니다. 그 고민의 내용은 하도 약해서 사람들한테 치이니 내가 힘이 세면되느냐? 싸움 잘하는 기술을 배우고 싶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 말의 의미를 생각해본다면 우리의 마음 한켠에 갖고 있는 생각의 솔직한 면이겠지요. 이런 개인의 생각이 결국 국가의 생각으로 연결되어 지금까지 오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정부는 미국의 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는 헛된 신념을 갖고 빌붙고 있습니다. 촛불혁명으로 정권이 바뀌었지만 사드배치는 막을 수 없었고, 트럼프의 막말논란에도 불구하고 그의 방한을 그저 받아들일 수 밖 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임을 봅니다.

 

미국이 잘사는 것이 하느님을 믿어서 은혜인가요? 오히려 하느님을 우상으로 박아놓고 전 세계를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식민지화하고 강제로 물건을 사게 만들고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떤 식으로든 보복하면서, 약소국의 피를 빨아먹으며 지금의 부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 하늘뜻펴기의 제목은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입니다. 이 말씀은 단지 우리의 수입 중 십의 일을, 드리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고자 하는 값싼 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하늘의 상급이 있을 거라며 헌금을 강요하고 교회의 배를 불리기 위한 저급한 종교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갖고 있는 삶의 자리는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를 면밀히 살피고 창조된 모든 이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도록 애쓰는데 힘을 쏟는 것이야말로 하느님께 드리는 삶이 아닐까요?

 

우리는 진정 하느님께 하느님의 것을 드리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진 것들은 하느님의 일을 할 때 그 진가를 발휘하고 그렇게 가야한 다는 것입니다. 각자의 능력대로가 아니라, 혹여 내가 버는 돈이 누군가의 노동력을 강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는 나의 생각이 편협하여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고 있지는 않은지 늘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 마음, 물질적인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왔음을 기억하고, 주님이 함께 하여 주심을 믿는다면 우리안의 더 나은 삶을 위한 변화를 이룰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노동의 문제가 해결되었나요? 비정규직의 참혹성은 어떻고요. 평화와 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꿈을 이룰 수 없는 구조는 우리의 아픈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겠습니다. 아직 자본주의 영향아래 불평등을 생산하는 시스템 속에서 상위 10% 고소득 부유층과 재벌 대기업 등은 행복할지 모르지만 그들이 가져간 누군가의 노동의 값을 가져간 대가로 90%는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하는 안타까운 삶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소득이 과연 자신의 것인 양 그저 감사하다고만 할 수는 없는 이유이겠습니다. 불평등한 구조 속에 얻게 된 소득을 재분배해서 빈부 격차를 줄이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 진정 하느님께 드리는 삶의 구체적 예시가 아닐까요?

 

지난주 남옥순 권사님 생신을 맞아 캐나다에서 사시는 따님과 함께 만나뵙게 되었는데 해마다 한국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분위기가 다르게 느껴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작년에는 화가 난 얼굴들이었는데, 올해는 사람들의 표정이 없다는 말씀을 통해, 독재정권에는 분노할 힘까지는 내었지만, 이후 바쁜 삶의 자리로 인해 이웃에게 관심이 가지기에는 그만큼 어려운 때를 맞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럴 때일 수록 우리가 놓치는 것은 무엇인지 더욱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의미를 생각하며 강남순 교수의 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신을 사랑한다. 유신론자이다 라는 선언을 한다고 해서 종교성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제도화된 모든 종교에는 신의 이름으로 신을 배반하는 죄의 역사가 있다. 신을 사랑하는가라는 물음이 의미 없는 이유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신을 사랑하는가라는 물음을 내가 나의 신을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로 전이시킨다. 물적축복과 성공을 보장하는 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유신론자라고 한다면, 그 종교인은 이기적이고 황금만능주의적인 신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의 이름으로 성소수자들을 혐오하는 종교인들은 신을 혐오의 신으로 만든다. 그러나 종교란 타자를 향한 연대와 환대를 실천하면서 이 세계가 더욱 정의롭고 평등한 세계가 되는 것에 헌신해야 한다. 신의 이름으로 신을 배반하는 이들은 바로 이러한 연민과 책임의 의미를 자신의 종교에서 재현하기를 거부하는 이들이다. 신의 이름으로 신을 배반하지 않으려면 아우구스투스의 내가 나의 신을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라는 물음과 치열하게 씨름해야 할 것이다.”

 

힘의 논리에 굴복함이 아니라 우리 안에 힘써 일하시는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드리는 여러분의 삶 되시길 바랍니다. 에페소의 말씀을 읽는것으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주셔서 하느님의 백성이 된 여러분이 무엇을 바랄 것인지 물려받을 축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믿는 사람들 속에서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시길 바랍니다.” (에페소 1:18-19)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