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원점 (5:18-24, 살전 4:13-18, 25:1-13)

창조절 12 / 전태일 열사 추모주일

 

한 주간 잘 지내셨는지요? 지난주 공동의회를 통해서 우리교회는 두 분을 장로로 선출했습니다. 2/3 이상 되는 교우들이 한데 모은 마음에는 교회를 향한 간절한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가 새로운 사명을 품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짐에 눌려서는 안 된다. 앞으로 가자!’ 하는 마음을 모은 것이지요.

교우 여러분은 우리 교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진보적인 교회인가요? 진보란 앞으로 발자국을 내딛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지금 앞으로 발자국을 내딛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기 신념을 따라 서로 진지전을 벌이는 일에 묶여 있습니까? 우리들의 힘과 뜻은 공동체를 세워가는 일에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까?

생존에 관심이 있는 집단은 과거가 만들어놓은 그루터기를 지키는 것에 주목합니다. 예전에 만들어진 지도의 등고선을 따라서 이동합니다. 왜냐하면 안전한 여행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는 생명적 존재는 새롭게 피어나는 지점에 주목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 과거를 바치려는 모험입니다. 왜 그런 위험을 감내하려는 것일까요? 바로 그곳이 만물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느님과 동행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동행할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우리 모두가 믿음의 원점으로 삼아야 할 곳입니다.

믿음의 원점이라는 개념은 제가 지어낸 것이 아니라, 안병무 선생님과 서남동 목사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민중신학의 개념입니다. 그들은 제도와 교리로 만들어진 기독교의 신학 체계를 비판하고, 예수운동을 이어가는 생동하는 정신에서 믿음의 원점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의 원점은 물리적 장소라기보다는 정신의 태도입니다. 이 믿음의 원점은 기억된 과거라기보다는 현재를 지어내는 신앙의 전통입니다. 그것은 뒤로 되돌아가서 획득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앞으로 나아감으로써 품을 수 있는 그 무엇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러한 믿음의 원점을 재확인하는 시점에서 두 분의 장로를 선출했습니다. 앞으로 두 분은 6개월 동안 장로교육을 받고 내년 창립기념주일에 즈음하여 임직하실 텐데요, 그것을 기점으로 하여 교회의 여러 아픔과 갈등이 해소되고, 창립 65주년을 맞는 우리 교회의 뜻과 꿈이 하나되어 활발한 예수운동을 펼칠 수 있도록, 교우들이 마음모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전태일 열사의 사랑과 믿음]

우리 교회는 오늘 <전태일 열사 추모주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함께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한 공동기도주일>로 예배드립니다. 47년 전 자신의 몸을 불살라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던 전태일 열사는 여러 각도에서 조명됩니다.

그가 일으킨 사건이 한국사회에서 노동운동의 효시가 되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습니다. 또한 [전태일 평전] 서문에 나오듯이, 그가 추구했던 것은 인간을 물질화하는 시대에 저항하는 인간선언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하기를 원하는 것은 그가 신앙인으로서 가졌던 믿음의 원점에 관한 것입니다.

전태일 열사의 일기와 수기를 모아 엮은 책,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를 보면, ‘자기훈련이라는 제목을 가진 두 쪽짜리 글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스스로 묻는 30여개의 질문 목록이 나오는데, 그 첫 번째 질문이 이것입니다. “나는 어떠한 일이든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있는가?”

전태일은 늘 믿음의 원점이 무엇인지를 물었고, 그것이 자기 삶에서 관철되기를 진실로 원했습니다. 우리가 오늘 그를 추모하는 것은 그의 믿음을 이어가기 위해서입니다. 그의 믿음을 잇기 위해서는 그의 죽음보다는 그의 삶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가 살아가면서 내렸던 선택의 순간순간에 아로새겨진 고뇌와 사랑을 읽어야 합니다. “가난이 운명처럼 따라 붙은, 실로 비참한 삶이 뒤척이며 맺어내는 눈물겨운 사랑의 의미를 오늘 우리는 온전히 느낄 수 있을까요?

자본주의 소비문화 속에서 뒹굴며 살아가는 영혼들은 결코 가질 수 없는 눈동자가 있습니다. 민주주의보다는 향락에 탐닉하는 문화, 존재보다는 소유에 길들여진 종교가 결코 갖출 수 없는 관점이 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예수의 시선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구두닦이, 신문팔이, 우산장수 등의 일을 닥치는 대로 했던 전태일의 눈에 비친 세계는 어떠했을까요? 그가 죽기 1년 전에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쓴 수기 가운데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태양은 마른 대지 위의 그 무엇이라도 태워버릴 것 같이 이글거린다. 14살의 한 소년이 허기진 배를 달래면서 어느 양화점의 쇼 윈도우 그늘진 곳에서 잠시 갈증 나는 더위를 피하고 있다. 소년은 누구에게도 무엇에도 반항함이 없이 생각한다. , 저 사람들은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길래 전부가 다 행복한 얼굴들일까? 나는 왜 이렇게 배가 고파야 하고, 항상 괴로운 몸, 그리고 떨어진 신발에 남이 입다 버린 계절에 맞지도 않는 헌 때 뭉치 옷을 입어야 할까?” ([전태일 평전], 13)

이런 회상은 과거의 삶에 대한 후회나 한탄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난이 주는 두려움을 이긴 사람이 가진 사랑의 연가, 낮아지는 것이 목적이 될 만큼 하느님을 철저히 신뢰하는 인간이 드리는 기도에 가깝습니다. 해방신학은 이것을 가리켜 가난한 자의 인식론적 특권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다시 말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눈에만 보이는 역사의 진리, 따라서 심령이 가난하지 않고서는 결코 소유할 수 없는 믿음의 원점말입니다.

 

[노동자의 눈으로 본 세계, 5:18-24]

오늘 아모스서를 보면 분노하는 전태일이라고 할 만한 예언자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예언자 아모스는 남녘에서 태어났지만 북녘으로 옮겨서 노동을 하던 이주농업노동자였습니다. 그의 목소리를 들어보십시오.

너희 야훼의 날을 기다리는 자들아, 저주나 받아라! 그 날에 무슨 수라도 날 듯싶으냐? 너희들에게 그날은 어둠이다. 빛이 아니다. 그날에 너희들은 사자를 피하려다 곰에게 공격을 당하고, 안전한 집안으로 피하려다 뱀에게 물리게 될 것이다.” (5:18-19)

야훼의 날은 도대체 무엇이고, 그 날을 기다리는 자들은 누구였을까요? 예언자는 그들을 이토록 저주하고 있는데, 성서는 왜 그 농업노동자의 신랄한 목소리를 우리에게까지 전해주고 있는 것인가?

야훼의 날’(yōwm Yahweh)이라는 사상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의 통속적인 신앙과 얽혀있는 관념으로서, 민족주의적인 기대가 만들어낸 종교 이데올로기였습니다. 그것은 야훼 신이 거룩한 전쟁(聖戰)을 통해서 원수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라는 소박한 믿음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종종 뻔뻔스럽고 자기기만적인 교리로 변질되어버리곤 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아모스라는 노동자의 눈에는, 베델이나 길갈과 같은 중앙 성소(聖所)에서 벌이는 축제에서 찬양받고 있는 야훼의 날이 단지 풍요와 소비의 찬가로만 들렸습니다. 구원의 사상으로 태동했을 그 옛날 믿음의 꿈을 잃어버린 종교교리에 불과한 것으로 비친 것입니다.

그런 교리에 심취하여, 실제로는 자기기만과 안일에 빠져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마치 야훼의 날을 기다리는 거룩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인 냥 춤추는 사람들을 향해서, 노동자는 하늘의 소리를 대신 외칩니다.

축제 때마다 바치는 분향 냄새가 역겹구나. 너희가 바치는 번제물과 곡식제물이 조금도 달갑지 않다. 친교 제물로 바치는 살진 제물은 보기도 싫다. 시끄러운 노랫소리도 집어치워라.” (5:21-23)

마치 현재가 더 이상 달려갈 필요가 없는 역사의 종착역이나 되는 듯이 자신이 가진 것을 자기만족을 위해 소비하는 것에 목적을 둔 인생그런 영혼들이 서로 뭉쳐 뒹굴며 벌이고 있는 종교적 향락을 향해서, 노동자 아모스는 이 역사와 인생을 향한 하느님의 바람과 소원을 외칩니다. “정의(justice)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righteousness)이 힘찬 시내처럼 흐르게 하여라.” (5:24)

아모스는 여기서 신앙공동체가 품어야 할 믿음의 원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야훼의 날이 소비와 향락에 젖은 종교의 볼모에서 풀려나 진정한 해방의 소식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의 원점정의와 공의에 두어야 한다는 예언자적 가르침이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재림의 의미, 살전 4:13-18]

데살로니카 교회에 보내는 첫 번째 편지에서 바울은 죽음 너머에 있을 무언가의 약속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오심,’ 헬라어로 파루시아(parousia, 15)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바울이 파루시아 즉,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사후세계에 대한 기독교 철학을 정립하려는 목적이라기보다는 어떤 목회적인 필요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 편지를 처음부터 읽어보면, 데살로니카의 교인들은 종말론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110절을 보면, 그들을 가리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날을 고대하는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그들에게 새삼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그들 가운데에서 어떤 의구심이 생겨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 속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운명에 관한 의구심,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기 전에 죽은 사람들은 살아서 기다린 사람들과는 달리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냐 하는 불안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생각이었고, 그들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많은 신앙인들이 갖고 있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물음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불안해하는 그들에게 주님이 다시 오시기 전에 죽은 사람도 걱정할 것이 없다고 안심시킵니다. “주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면,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이 먼저 살아나고, 그 다음에 살아있는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들리어 올라가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살전 4:16b-17)

바울의 이 말은 자신이 봤던 어떤 우주적 종말에 관한 드라마를 재방송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문자주의적인 해석에 치우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속히 오실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 자신들의 생애 안에 오실 것으로 기대했던 모든 초기 기독교인들은 헛수고했다고 밖에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죽음 너머의 약속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구원의 약속 말입니다. 그것을 14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εἰ/if) 우리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다면, 그것과 마찬가지로(houtōs kai) 하느님께서 잠든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르실 것이라는 점을 믿(을 수 있)게 됩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처럼, 부활과 재림은 사실 증명의 문제라기보다는 믿음과 희망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 믿음과 희망 속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역사의 종말에 관한 의미가 해석되고 재해석됩니다.

종말(eschaton)’에 관한 기독교 신학의 본질적인 물음은 이 세상의 종말이 아닙니다. 기독교 종말론이 관심하고 있는 것은 악()의 종말에 관한 것입니다. 신앙공동체가 바랐던 종말은 세상 자체의 파국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의 시작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J. Moltmann, The Comming of God: Christian Eschatology, xi)

하느님 나라(βασιλεία)와 주의 날(ἡμέρα κυρίου)을 소망했던 사람들은 모두 제국주의적 질서 속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세상 자체의 끝장이 아니라, 약탈과 억압이 없는 세상에서 각자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운동 역시 그런 평화의 세계를 향한 건설적 참여였지 타계적 도피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신앙공동체 안에 평화의 이상이 깨지고, 기독교가 지배종교가 되어가자 예수운동 역시 제도화되어 갔습니다. 예수운동의 정신을 사제들의 가르침에 의존하게 되었고, 그 운동의 활력은 제도와 건물에 박제화 되었으며, 그 운동이 꿈꾼 하느님나라는 저 세상의 피안적인 것으로 변모해갔습니다. 신앙이 시들어가면서 악한 질서에 저항하는 힘을 잃고, 기득권의 억압과 약탈을 미화하는 종교 장치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재림을 이천 년 전에 죽은 예수의 몸뚱이가 우주여행을 통해 되돌아오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이란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가 이 땅에 화육하는 사건이요, 억압과 고통이 있는 곳에 정의와 평화가 세워지는 사건을 통해서 도래하는 하느님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한 삶, 25:1-13]

오늘 마태오복음 본문은 하느님나라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이 세상 끝 날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말씀의 요지는, 그날이 곧 오겠지만 그 때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24:32-44).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예수님은 차례로 네 개의 비유를 들려주시는데, 오늘 본문은 그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신랑은 마지막 때에 오시는 그리스도를 대변하고(11), 혼인잔치는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실현될 하느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어리석은 처녀와 슬기로운 처녀는 두 가지의 삶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어리석은 삶이요, 무엇이 슬기로운 삶인가?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마지막에 깨어있으라고 말하시지만, (25:13, 24:42/44) 잠에 든 것을 문제 삼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삶이란 잠든 것 자체가 아니라, 기름을 준비하지도 않은 채 잠든 것입니다. 그것은 현실의 욕구에 눈이 멀어 중요한 것을 준비하지 않은 삶의 어리석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최근 [미성숙한 국가]라는 제목의 책을 낸 중국 평론가 쉬즈위안(41)은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람들의 정치적 의식이 각성되지 않았을 때, 그 열정은 전부 돈 버는 일과 소비, 오락에 집중된다.” (경향신문 526) 오늘날의 문명이 권장하는 슬기로운 삶에 대한 비판처럼 들립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를 향한 슬기로운 삶이란 무엇인가요? 우리는 그 삶을 가장 소중한 것을 낮은 곳에서 찾고, 믿음의 원점을 낮은 곳에 둔 전태일 열사의 삶에서 발견합니다.

 

[믿음의 원점을 낮은 곳에 둔 전태일]

16살에 평화시장에 들어가서 노동자로 살았던 전태일은 밑바닥에 있지 않고는 느낄 수 없는 가장 낮은 자의 아픔을 경험합니다. 어느 날 미싱사 처녀가 일을 하다가 각혈을 하자, 돈을 걷어서 병원에 보냈는데, 폐병 3기라는 진단을 받습니다. 그러나 직업병을 얻은 그 여공은 도리어 해고당하고 맙니다. 이 일이 전태일의 맘에 죽어가는 여공들을 살리자는 각성의 계기가 됩니다.

당시 평화시장의 작업장 다락방은 천정이 1.5미터밖에 되지 않은 밀폐공간이었고, 2천명이 노동하는 공간에 화장실은 3곳에 불과했습니다. 그곳에서 16시간을 노동해도 임금은 커피 한잔 값에 불과한 50원이었지요.

전태일은 동료 재단사 10명과 바보회를 조직하고, ‘근로기준법을 지켜달라는 청원서를 노동청에 내는 등의 활동을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경멸과 비웃음뿐이었습니다. 결국 바보회는 거의 해체되고, 자신도 낙인찍혀 일자리조차 구할 수 없게 되자, 삼각산의 임마누엘 수도원의 공사장에서 5개월가량 일하게 됩니다. 이 기간은 죽음을 생각하기 위해서떠난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묵묵히 노동을 하면서 중대 결단을 내리고, 그것을 일기에 적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중략) 오늘은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 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치오니, 하느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197089, 일기)

이 일기를 쓴 지 석 달 나흘 후, 그는 이 사회에 깊은 메아리가 되어 울리면서 생을 마감합니다.

수도원에서 노동을 할 때, 그곳에 기거하던 목사와 신학적 대화를 하기도 했다 합니다. 전태일의 분신자결 이후, 이 목사는 자살은 교리에 위배되는 불신자의 짓이라고 비난했고, 전태일이 죽어서 빨갱이들이 춤출 것이라고 말했다 합니다. ([전태일 평전], 236)

이 사람에게 믿음의 원점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지 이데올로기가 된 교리일 뿐이요, 따라서 관념의 노예가 된 신앙과 무지의 포로가 된 삶만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전태일의 몸짓에서 예언자 아모스의 꿈을 읽어낸 새로운 믿음이 태동하기도 했습니다. 한 신학자(서광선)의 증언에 따르면, 헐레벌떡 뛰어온 서남동 목사님이 전태일이라는 노동자가 분신을 했대하고 외치자, 이제까지 성경을 읽는 눈신앙인으로서 추구할 삶의 방식이 송두리째 바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역사의 현장에서 일하는 하나님을 만나고, 민중사건에 나타난 정의와 평화를 통해서 오늘의 파루시아를 경험하는 생동하는 신앙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교회가 기득권을 향유하는 종교기관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부름 받은 공동체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때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민중들의 고통과 꿈을 나눌 때입니다. 교회가 증언할 복음을 민중의 눈으로 해석하고, 그 선교적 실천이 민중현장 속에서 생명력을 가질 때입니다.

생동하는 신앙공동체는 바로 거기서 자신들의 믿음의 원점을 발견합니다. 이 믿음의 원점은 하느님과의 소통할 수 있는 역사의 못자리, 생동하는 신앙공동체는 바로 그곳에 열린 마음으로 우뚝 서 있습니다.

역사를 새롭게 지어가시는 하느님께서 인도하시도록 내어맡기는 모험에는 위험이 따릅니다. 그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지어가시는 나라는 정체된 왕국이 아니라, 풍성한 생명을 향해 영원히 약동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선하심에 자신을 온전히 노출시키는 믿음에 생명의 열매가 맺힙니다. 우리 모두의 등잔에 은총의 기름을 채우고, 생명의 등불을 밝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침묵으로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