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실하신 하느님 (64:1-9 고전 1:3-9, 13:24-37)

2017.12.03. 대림절 1

 

대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우리 모두의 마음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랍니다. 벌써부터 거리에서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옵니다. 노래 가사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지만, 우리는 고요하기보다는 시끄러운 거리를 걸으면서, 거룩하기보다는 세속적인 문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경험이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어쩌면 고요와 거룩함으로 분장한 종교의 위선보다 세속 그대로의 모습 속에서 인생의 적나라함을 맛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은 모순과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인생의 여정은 합리적인 절차를 따라 매끄럽게 움직이지 않아요. 젊은 이상들이 꿈을 향해 뒤척이다 기성질서에 물들고, 처음 품은 순결은 이내 능숙한 관습이 되어 사람들의 정신을 사냥하는 도구가 됩니다. 삶은 복잡한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소중한 것이라고 믿었던 새로운 가치들마저 어느새 사소한 것으로 변하고 맙니다.

그래서인지 인생은 변치 않는 보다 근원적인 것에 대해서 갈망하게 됩니다. 기독교인은 그것을 믿음에서 찾고, 역사 속으로 화육하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발견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대림절의 주제입니다.

대림절 첫 번째 주일의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익숙한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메시지가 아닙니다. 사실 그리스도가 동정녀의 몸을 통해 아기로 오신다는 메시아 탄생설화는 믿음의 갈망을 충족시키기에는 무언가 부족합니다. 동정녀라는 순결의 이미지는 실상 로마영웅들에 관한 이야기들과 얽혀있는 낡은 것입니다. 또 그 영웅들의 서사는 신들이 자행한 폭력에 관한 설화들과 뒤섞여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을 갈망하는 기독교 영혼은 그런 이야기들로 만족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대림절 첫 주의 메시지는 성전이 파괴되고 재난이 시작될 것이라는 묵시문학적 예언이 본문으로 주어졌습니다.

 

[각성을 요청하는 저항의 복음 / 마가복음 1324-37]

오늘 마가복음서의 본문 13장은 최초의 복음서에 끼어든 () 묵시록으로 불립니다. 이 자료는 이야기의 흐름을 깨트리는 방식으로 복음서 중간에 끼어들어 있습니다. 12장에는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는 내용 있고, 14장부터는 수난 이야기입니다. 그 사이에 묵시록이 배치되어 있는데, 내용은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는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의 묵시문학은 수백 년 넘게 이어졌던 포로생활과 식민지 생활의 어두운 경험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바빌론 제국의 정복에 이어 페르시아의 제국의 강탈로, 그리스의 정복과 로마 제국의 식민통치로 이어지는 계속된 침탈과 압제의 경험이 있습니다. 묵시문학은 이런 정치사회적 위기를 배경으로 탄생했습니다.

리처드 호슬리라는 신학자는 자신의 책 [서기관들의 반란: 저항과 묵시문학의 기원]에서, 묵시문학의 내용들이 신비하고 모호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제국의 폭력과 착취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는 예언이 제국의 착취구조에 대한 저항의 메시지를 갖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유대의 독특한 역사 때문입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는 포로민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해서 성전을 다시 짓고 그것을 중심으로 살게 함으로써 식민질서를 구축하는 정책을 구축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정복한 후에 헬레니즘 문화와 제도를 유포했지만, 유대를 통치하는 정치체제로는 성전국가를 유지했습니다. 왜냐하면 사제귀족에 의한 대리 통치를 통해 세금을 거두기가 용이했기 때문입니다.

민중들의 눈으로 볼 때, 이것은 종교와 정치가 벌이는 협잡입니다. 그러니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갈등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갈등을 크게 느낀 사람들은 중간에 낀 지식인인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사제와 귀족의 아래에서 지배체제를 돕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제도를 지탱하기 위해 수탈당하는 민중들 사이에 끼어 있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민중들의 저항에 가담하며 역사와 예언을 재서술해간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묵시문학의 전통을 이어가며 그 과업을 수행했습니다. 오늘 마가복음 13장은 그런 저항 정신의 내력을 전수받고 있다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은 세 단락으로 나뉩니다. 첫째 단락인 24-27절은 재난 후에 등장하는 사람의 아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영광에 싸여 온다.”는 내용은 다니엘서(7:13-14)에 나오는 묵시문학의 전통을 잇고 있습니다. 루돌프 불트만은 이 본문을 가리켜, “유대교 묵시의 기독교적 개작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왜 이런 개작이 필요했을까요?

마가복음 13장의 내용을 들은 주후 70년경에 살았던 최초의 청중들이 묵시문학적 표현이 무엇을 암시하는지를 또렷이 알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수 년 전에 벌어진 유대전쟁의 참상을 연상시키는 것이었습니다. 1314-19절에 나오는 재난의 급박함, 손쓸 수도 없는 위급한 상황 가운데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길만을 제시하는 그런 메시지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지, 그들은 본능적으로 느꼈을 것입니다.

28-31절에서는 무화과나무를 예로 듭니다. 마가는 이미 11장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의 첫 번째 행위가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였다고 기록한 바 있습니다. 마가는 그 기록을 통해서 성전종교의 파멸을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옛 세계의 파멸에 관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강조점은 옛 세계의 파멸에 있지 않고, ‘사람의 아들이 몰고 올 새로운 세계의 등장에 관한 것입니다.

어떻게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는가?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는 것을 아는 것에는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워진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앞에 다가온 줄 알아라.”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언제 부드러워지는지를 알려면 관찰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일에 대한 관심을 잃었습니다. 어쩌면 제국이 통치하는 역사의 겨울이 너무도 오랫동안 지속되어서, 가지가 연해지는 것을 도저히 기대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성전종교의 약탈적 제도와 기만적인 가르침 속에서 사람들의 정신이 일그러지고 뒤틀리고 말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새 시대를 꿈꾸는 자들은 사라졌고, 동트는 역사의 미명은 보이지 않습니다. 질서는 계속해서 보수주의를 내면화해가며 생존해 가며, 저항마저도 체제내의 습관이 되어갈 때, 바로 그러한 때에 필요한 구원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본문은 마지막(32-37) 부분에서, “깨어있으라고 반복해서 권고합니다. ‘항상 깨어있어라. 늘 깨어있어라!’ 그런데 이 말을 하는 예수님은 사제귀족들의 표적이 되고 맙니다.

깨어 있는 삶이란 위험이요 고통이 됩니다. 누가 깨어있기를 바라며, 그들은 도대체 어떻게 깨어있을 수 있을까요?

 

[신실하신 하느님을 향한 믿음 / 이사야 641-9]

오늘 이사야서 본문은 포로기 이후에 등장한 한 무명의 예언자가 전한 말씀입니다. 3이사야라는 별명을 가진 그가 했던 예언은 후대까지 큰 영향을 준 강력한 메시지를 갖고 있습니다. 61장에서 했던 그의 예언은 예수님의 취임설교 본문으로 채택되었고, 65장에서 밝힌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비전은 이후의 전승에서 신앙공동체의 가장 근원적인 꿈이 되었습니다.

3이사야가 활동했던 시기는 혼란스러운 때였습니다. 바빌론의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아직 성전은 재건되지 않았고, 모든 것이 황폐한 시기입니다. 사람들은 갈 길을 잃었습니다. 오늘 본문 직전에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원수들은 주의 성소를 짓밟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당신의 백성이라는 이름을 잃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63:18-19)

여기에서 표현되고 있는 예언자의 괴로움은 바람과 현실 사이에 있는 간격때문에 생겨납니다. 구원을 바라는 간구는 외쳐지지만, 하느님은 그 간구에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탄식하고, 그 탄식이 오늘 본문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63:7~64:12)

1~2절에 나오는 예언자의 간구를 들어보십시오. “, (주님!) 하늘을 찢고 내려오십시오. 그러면 산들이 당신 앞에서 떨 것입니다. 나뭇가지가 불에 타듯이, 그 불에 물이 끓듯이, 대적자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알려서 민족이 당신 앞에서 떨게 하소서!”

예언자는 1~3절에서 각 절마다 당신 앞에서’(mip·pā·ne·ḵā)라는 표현을 반복하면서, 하느님이 등장하기를 간구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7절을 보면, “당신이 얼굴을 숨기셨기에(his·tar·tā p̄ā·ne·ḵā) 우리는 자기 죄에 깔려 스러져가고 있습니다.”하고 탄식합니다.

왜 역사가 죄에 물들어 어두워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자신의 얼굴을 숨기고만 있는가? 만일 구원자라면 무언가를 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이런 질문이 일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예언자는 이미 하느님이 그런 방식으로 역사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위대한 예언자 엘리야가 낙심하여 호렙산의 동굴로 피했을 때, 지진과 폭풍과 불길이 일어나 산을 흔들고 바위가 깨지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거기에 야훼는 계시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왕상 19:11-12) 따라서 예언자들은 벌어질 기적을 예견하며 예언하기보다는, 살아갈 좌표가 어디에 있는지를 밝히기 위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사야라는 이름을 함께 사용하는 이 예언자는 그 예언전통의 뿌리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서는 처음부터 하느님의 뜻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두 손 모아 아무리 빌어보아라. 내가 보지 아니하리라. 빌고 또 빌어보아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너희 손이 피투성이이기 때문이다.” (1:15) 정의를 이루는 삶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5절에서 이렇게 탄식합니다. “정의를 기쁨으로 실천하는 사람, 주의 길을 잊지 않은 사람들이 당신의 눈에 띄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것은 하느님의 눈에 띄지 않았지만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정의를 잃어버렸다는 탄식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구원을 간구하지만 하느님은 응답하지 않습니다. 예언자는 그 이유를 시대의 불의와 죄에서 찾습니다. 오늘 본문 6절에서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모두 부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잘했다는 일도 실상은 더러운 것이요, 죄가 바람처럼 우리를 휩쓸어서, 주님을 예배하는 자도, 의지하려고 마음 쓰는 자도 없습니다.” 이 고백은 그 옛날의 고백만은 아닙니다.

하느님이 당신의 얼굴을 역사에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 침묵은 사실 심판보다 더 큰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이 세계에서 활동하는 방식에 대한 예언자적 성찰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과거의 신화에 나오듯이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해내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습니다. 이집트에서 히브리 노예들을 구출했다는 신은 포로기 이후의 사람들에게는 응답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느님은 가라앉은 세월호를 물 밖으로 끄집어 올리는 일을 하지 않지요. 날아가는 미사일을 떨어뜨리지도 않으며, 고등학생 실습생을 죽음으로 내모는 저임금 경제구조를 변경하는데 관심이 없는 듯합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진솔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세월호 이후의 신학을 진행해야 합니다. 힘과 권력을 쥔 신에 관한 문학적 잔상들에 의존했기 때문에 길을 잃었던 기독교 신학의 실패를 답습할 수는 없습니다. 해방의 길을 열어가려고 힘의 신에게 간구하는 종교의 습관을 반복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삶의 진실에 집중해야 하고, 그것은 삶이 지닌 아이러니한 모습을 견뎌 낼 수 있는 믿음의 근거를 다시 놓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의미 있는 답변을 제공한 신학자들이 가운데 본훼퍼 목사가 있습니다. 잘 알려졌듯이, 그는 히틀러 암살조직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갇혔고, 결국 처형당했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이런 글을 남깁니다.

하느님 앞에서(before) 살아간다는 것, 하느님과 더불어(with) 살아간다는 것은 하느님 없이(without) 살아감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자기 자신을 이 세계 밖으로 밀어내셨다. 그것이 십자가에 달린 사건의 의미이다. 그 분은 이 세계 안에서 약하고 힘이 없다. 바로 그 방식이 그분이 이 세계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고, 우리를 돕는 유일한 길이다.” (D. Bonhoeffer, 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 (Macmillan, 1971), 360)

본훼퍼의 가르침은 단지 신이 보이지 않는 세속화된 세계를 견디는 기독교 신앙의 개정판이 아닙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달린 존재를 신으로 여기게 된 기독교의 고유정신을 밝힌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신에게 힘이 있다면 그것은 고난에 참여하는 힘일 뿐이요, 그의 전능함이란 도리어 유약함이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제2이사야가 말한 고난 받는 종에 관한 예언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53:5)

성서의 신앙은 바로 이 믿음에 기초하여 성장해갔습니다. 이런 신앙의 전통에서 벗어나서, 힘의 신을 숭배하는 교회는 정신적인 질병에 시달리게 됩니다. 보수가 걸리는 질병은 우상숭배요, 진보가 걸리는 질병은 미지근함입니다. 둘 다 힘의 신에 중독되었기 때문에 생긴 병입니다.

우상숭배가 성공과 축복을 베푸는 힘의 신을 향한 병든 종교의 욕망이라면, 미지근함은 그런 신을 경멸하는 이성이 자기만의 길에서 경험한 방향상실입니다. 이성은 신을 죽였다고 생각하지만, 죽은 것은 신이 아니라 우상일 뿐입니다.

힘의 신을 숭배하는 성전종교의 길과는 다른 믿음의 길,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는 그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역사의 허무가 깊어 사회가 길을 잃었을 때, 삶의 아이러니가 깊어 인생의 방향이 불투명할 때, 예언자가 붙잡은 것은 하느님의 신실성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두 가지로 표현합니다. 하나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다른 하나는 도공과 흙의 관계입니다. 히브리 원어성경의 8절은 ‘Yahweh abinu’ , “야훼,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시작됩니다. 예수님도 하느님을 아람어로 아빠’(abba)라고 부르는데 (14:36), 같은 어근(ab)을 가진 듯합니다. 아빠는 원초적인 친근감을 나타냅니다.

하느님에 관한 또 다른 표현은 도공(陶工)입니다. 도공이 흙을 주물러 작품을 만들 듯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손으로 우리를 지어가실 것이라고 이사야는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표현하든, 도공으로 표현하든, 예언자는 하느님과 맺어진 관계의 깊이에 주목하고, 그 관계를 가능케 하는 것은 신실함입니다. 그것은 기적을 베푸는 힘의 신을 숭배함으로써 경건을 소비하는 종교와는 다른 관심입니다. 예언자에게는 하느님의 신실성이야말로 삶의 허무와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듬고 가는 근거입니다. 또 그 반대로 삶의 허무와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서도 하느님의 신실성을 보는 것, 그것이 바로 깨어있는 신앙의 특징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in) 살아가는 신앙공동체 / 고린도전서 13-9]

바울 역시 동일한 믿음을 잇고 있습니다. 그는 고린도에 있는 신앙공동체에게 은총과 평화를 빌면서, 그들이 지닌 신앙의 진실을 열거합니다.

맨 먼저 5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살면서 모든 면에 풍성(enriched)하게 되었다고 감사를 전합니다. 바울이 전한 첫 번째 감사는 풍성한 삶에 관한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풍성하게 살아가는 비결은 그리스도 안에(in)’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간명하면서도 가장 심오한 신앙공동체의 진실을 말해줍니다.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면서 삶이 풍성해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 이 경험이 신앙공동체를 세웁니다. 그 밖의 것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marturion)에서 깊은 확신을 가졌다는 점, 은총의 선물(charisma)을 부족함 없이 받고, 그리스도의 날(apocalypse)을 고대하는 것 등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삶에 맺힌 열매입니다.

본문 마지막 9절에서 바울은 대림절을 보내면서 우리 마음에 간직해야 할 말씀을 하나 담아줍니다. “하느님은 신실하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불러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게 해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믿음(pistis)을 갖듯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향해 신실성(pistos, faithful)을 갖고 있습니다. 신실하신 하느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친교(koinonia)를 맺게 하십니다. 거기에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실하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와 맺게 하시는 친교, 이 영적인 연속성 속에서 대림절에 맺어야 할 신앙의 열매를 거두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는 대림절 기간은 묵은 것을 털고, 새해를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신앙공동체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의 과제를 아름답게 이루어가는 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