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밝혀진 새해 (1:1-5, 19:1-7, 1:4-11)

2018.01.07. 신년주일, 주현절 첫째 주일

 

[새해의 마음]

새해 첫 주일 예배를 어린이부/청소년부와 함께 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금년을 육십간지로 부르면 무술(戊戌)년이라 합니다. 사람들은 황금 개의 해라고도 하는데, 사실 황금 개가 어디 있겠어요? 부자들이 황금으로 거북이나 돼지를 만들어 보관한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황금 개를 만들어서 보관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황금 개는 그냥 듣기 좋은 소리요, 그 뜻을 생각해본다면, 그냥 누런 개, 누렁이! 이렇게 보는 게 좋겠지요. 개가 황금으로 되어 있으면 죽은 거니까, 그것보다는 서민들에게 친숙한 누렁이처럼 소박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대접받는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게 역사의 황금시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앉아 있는 분들 가운데, 어떤 분에게는 한 해가 너무 길게 느껴질 것이고, 어떤 분에게는 짧게 느껴질 것입니다. 나이가 어린 친구들에게는 한 해가 길게 느껴지겠죠. 그래서 지구야 좀 빨리 달릴 수 없니?” 하고 재촉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를 태우고 우주여행을 하고 있는 지구는 난 열심히 가고 있으니, 너도 날 이해해 줘하고 말할 것입니다.

사실 지구는 아주 빠르게 달리고 있어요. 지구의 공전 속도는 1초에 30km, 달까지의 거리도 4시간이면 도달할 수 있는 속도로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돕니다. 그렇게 한 해 동안 한 바퀴를 도는 총 거리가 942백만km, 거의 10km. 그러니까 지구보고 게으르다고 말할 수 없겠지요..

더욱 놀라운 건, 그렇게 1년을 달려서 제 자리로 오면, 그곳이 예전의 그 자리가 아니라는 거에요. 우리는 사계절이 바뀌어서 1월이 되면 또 다시 1년이 반복 되는구나하고 생각합니다. 지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1년 동안 태양을 한 바퀴 돌아서 제 자리에 와도, 그곳이 1년 전의 자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태양계 전체가 훨씬 더 큰 우리 은하계의 중심을 놓고 돌고 있기 때문입니다.

태양은 지구보다 7배 이상 빠른 속도(220km/s)로 우리 은하계의 중심을 돕니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도는데 걸리는 시간이 무려 2억 년 가량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은하계가 얼마나 큰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은하계의 지름이 약 10만 광년, 그러니까 우리가 은하계를 벗어나려면 지구가 날아가는 속도보다 만 배 빠른 속도(30km/s)로 십만 년을 달려야 한다는데... 그게 끝이냐? 우리 은하계를 벗어나면, 거기에 또 우리 은하계 크기만 한 별무리가 또 일/이천억 개나 있다고 하니, 우주의 크기를 생각하면 머리가 어지러워집니다. (우리 삶이 우주의 티끌이라는 말이 거짓은 아님)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유영모라는 분은 이렇게 생각하셨어요. 아침에 일어나 가만히 앉아서 기도하는 것을 우주여행으로 보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빠른 우주여행을 눈감고 앉아서 하는 거지죠. 가만히 앉아 있지만, 지구를 타고 걸터앉았으니 그 속도가 실상은 엄청난 것입니다. (초속 30km의 지구 공전속도 + 초속 220km의 태양계 공전속도) 그야말로 기도하는 그 순간이 정중동(靜中動)의 극치가 됩니다. 유영모 선생은 기도하면서 이 우주를 살아가는 인간의 넓고 참된 마음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엊그제 맘이 답답하여 산에 올랐습니다. 부암동에서 정릉으로 넘어가는 산길 언덕에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정자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보니, 광화문광장이 있는 세종로가 시원하게 뚫려있고, 그 앞으로는 남산도 보입니다. 우리 교회가 어디 있나... 하고 찾아보니, 보일 턱이 있나요? , 저기쯤에서 우리 모두 복닥거리며 살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며 내려왔습니다.

새해를 맞으면서 유영모 선생처럼 우주적 스케일로 살기는 어렵다 해도, 최소한 산처럼 우리 눈에 보이는 것만큼은 품으며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새해가 되면서 발표한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가 시원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남과 북이 서로 품고가자고 손을 내밀고 있어서, 모처럼 화해의 시대로 들어가는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기왕에 시작된 것, 남북의 평화가 다시는 후퇴할 수 없을 만큼 진척되면 좋겠다는 바람도 생깁니다. ‘최종적, 불가역적이라는 조항을 잘못된 한일관계에서가 아니라, 남북관계에 올바로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말하면 주현절(Epiphany Sunday)입니다. 주현절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신 날 즉, 예수님이 이 세상에 등장/태어나신 날을 의미합니다. 유럽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교회는 성탄절을 1225일로 삼지만, 동방의 정교회는 16일을 성탄절로 기립니다. 개신교회는 서방교회를 따라 성탄절을 보내고, 동방교회의 성탄절을 주현절로 보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나타나셨다, 이 말은 다른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별을 따라 온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받을 만큼 귀한 탄생이라고 보고, 또 어떤 사람들은 방이 없어서 말구유에서 태어날 만큼 비천한 탄생이라고도 봅니다. 성경에는 또 다른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 이야기들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에 대해서 남들이 해준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관심해야 할 것은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 다시 말해서 우리 가운데, 우리 공동체 안에, 이 역사 안에 그리스도가 나타나신 이야기를 어떻게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갖고 주현절 성경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하느님이 기뻐하는 독생자의 등장 / 마가복음 14-11]

오늘 마가복음 본문과 비슷한 내용을 담은 요한복음 본문을 3주전에 이미 살펴본 바 있습니다. 오늘은 그 요점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복음서는 먼저 세례자 요한이 등장하지요. 그가 광야에 나타나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 하고 말하자, 온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와서,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요한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도 없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8)

요한의 말대로, 예수께서 갈릴리 지방에서 요한을 찾아와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가 세례를 받고 올라오자,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며하늘에서 이런 음성이 들립니다. “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11)

교회가 주현절에 이 말씀을 묵상해 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현절 말씀의 핵심은 11절에 있다고 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이 말씀은 이 세상에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가 비로소 등장/탄생했다는 하느님의 감격스러운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난 것을 기뻐하는 날이 주현절의 참뜻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탄생 / 사도행전 191-7]

사도행전 본문은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하던 중, 에베소에서 생긴 일입니다. 바울이 신도들을 만나 대화하며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들이 신도가 되었을 때 성령을 받았습니까?” 그런데 대답이 다소 어이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도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발생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원래 에베소교회는 아폴로라고 하는 사람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는 당시 학문의 중심지였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사람답게, 성경에 능통하고 말주변이 좋았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특이했습니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 배웠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폴로는 일찍부터 예수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그것을 에베소에서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그는 요한의 세례만 아는 사람이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18:25)

그랬기 때문에 그에게 배운 사람들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는 바울의 물음에 죄를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바울이 그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성령이 그들에게 내리셨고, 그들이 방언과 예언을 말하게되었습니다.

이 두 본문은 요한과 예수를 대비시키면서, 요한을 낮추고 예수를 높입니다. 아폴로의 가르침과 바울의 가르침을 대비시키고, 요한의 세례인 회개의 세례와 예수의 세례인 성령의 세례를 대조하면서 메시지를 구성합니다. 그 메시지는 예수로 인해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드러났다는 것이요, 예수를 통해 이 세상에 성령의 세례를 받은 하느님의 아들이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현절의 메시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들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가 등장하기 전에 있던 요한이라는 존재, 바울의 가르침이 있기 전에 전파되었던 아폴로의 전도가 지닌 의미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 의미를 파악하고자 하는 까닭은 보다 역사적인 감각을 갖고 신앙의 세계를 들여다보기 위해서입니다.

역사적인 눈으로 볼 때, 요한은 예수를 키워내는 모판과 같은 존재입니다. 아폴로의 전도는 바울의 세례가 가능케 하는 디딤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올 봄에 필 매화꽃이 작년부터 시작된 추위 속에 숨어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우주의 작동방식이요, 창조의 원리입니다.

그렇다면 주현절의 메시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하느님의 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 역사가 오랫동안 울려댄 기도의 메아리를 하느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신 이야기, 민중들이 흘린 눈물로써 시대의 죄악을 씻는 세례가 있고,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의 영을 받은 하늘의 자녀들이 이 역사에 등장한다는 이야기로 듣는 것도 좋겠습니다.

 

[어둠으로부터 탄생한 빛 / 1:1-5]

오늘 창세기 본문은 아주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지난 9월 창조절이 시작되는 주일에 이 본문으로 하늘뜻펴기를 하면서, 그 때 이 본문을 해석하는 두 가지 방식에 대해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 차이는 1절을 읽는 방식에 달려 있습니다.

첫 번째는 공동번역 성서에 나온 대로 읽는 것입니다. “한 처음에 하느님(엘로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공동번역, 개역성경, 가톨릭성서 / KJV, NIV) 이렇게 읽으면,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만물을 ()로부터 창조하신 것으로 해석되고, 그 창조활동의 첫 번째 결과물이 2절부터 나오는 것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읽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1절과 2절을 이어서 읽는 것입니다. 1절은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던 때에이렇게 읽고, 2절이 이어지지요. 그 때에, “땅은 아직 모양을 갖지 않고 비어 있었으니(formless and void), 어둠이 깊음(tehom)을 덮고, 하느님의 영(ruah)은 그 위를 움직이고 있었다.” 최근의 성서연구는 이런 방식으로 읽는 것을 권장합니다. (새번역성경, NRSV)

만일 이렇게 읽으면 하느님이 천지창조를 하실 때에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 아니라, 이 세계가 혼돈과 공허의 상태로 존재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 상태를 정확히 말하는 것이 2절 후반부입니다. “어둠이 깊은 물(tehom) 위를 덮고, 그 위에 하느님의 기운(ruah)이 휘돌고 있었다.” (공동번역)

그러니까 하느님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창조를 시작하려할 때, 이 세계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어둠이 뒤덮인 깊은 물, 테홈(tehom)’이고, 다른 하나는 그 물 위를 휘돌고 있는 하느님의 기운, 루아흐(ruah)’입니다. 이렇게 테홈 위를 루아흐가 휘감으면서 서로 교감하는 상태에서 창조가 이뤄집니다.

하느님께서 빛이 있으라하시니 빛이 생겼다.” (3) 그러니까 하느님의 창조활동에서 첫 번째 피조물을 ’(ōwr)이라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기서 질문을 하나 던져보겠습니다. 이 빛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와서 생겨난 것일까요? 오랫동안 교회 교리는 무로부터 창조되었다고 말해 왔습니다. 그런데 빛이 무로부터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어둠으로부터 분리되었다고” (separated from darkness) 보는 것이 옳다, 그래서 빛을 어둠 안에 있었던 요소이거나 그 안에 있는 잠재성으로 보는 신학자도 있습니다. (C. Keller, Face of the Deep, 202)

중세의 철학자 니콜라스 쿠자는 하느님의 빛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결코 범접할 수 없는 것으로 경배하는 빛은 단지 어둠의 반대되는 빛이 아니다. 우리가 경배하는 빛은 자신 안에서 어둠마저도 무한히 빛나게 하는 그런 빛이다.” (Nicolas Cusa, in De Docta Ignorantia)

깊이 생각해야 이해할 수 있는 말일 듯싶습니다만, 아마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런 것이겠지요. 빛이 어둠과 반대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편협한 생각이다. 빛은 어둠을 품고 존재하며, 더 나아가 빛은 어둠을 뚫고 나오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 우리가 바라는 빛, 그리고 혼돈 속에서 등장하는 질서란 모두 진통을 이기고, 그것을 뚫고 나오는 것이지, 어떤 전능한 존재의 말끔한 입술을 통해 진공상태에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역사 속의 새로운 창조는 혼돈과 어둠의 시기에 있는 진통을 안고 신비롭게 태동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창세기 1장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포로기의 경험과도 같습니다. 바벨론 제국이라는 압도적인 힘의 문명 속에서 살았던 포로민들은 그 혼돈과 어둠의 세계 속에서 빛과 생명의 질서를 목말라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오늘 성경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본문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함석헌 선생님의 묵상을 인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67세 쓴 저항의 철학이라는 글에 담긴 내용입니다.

천지창조하려는 하나님이 물 위에 운동하셨다는 그 운동은 무슨 운동이었나? 반항운동이었다.... 그 운동이란 말은 곧 영겁의 침묵을 깨치려는 첫 말씀의 고민이요, 무한 깊음의 혼돈을 뚫고 나오려는 코스모스의 몸부림이요, 원시의 어둠을 한 칼에 쪼개려는 빛의 떨림이었다... 진동하고 진동하던 끝에 빛이 있을지어다!’하고 벼락 소리 질렀을 때 완전의 늙은 하나님은 죽어 터져 티끌로 헤어지고 영원히 새로운 자유의 생명 역사가 돌기 시작했다.” (“저항의 철학” 19672, 2:114-5)

 

[새해의 다짐]

오늘 우리는 세 개의 본문을 살펴보았습니다. 세 본문 모두 같은 관점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도약에 관한 것입니다. 요한에서 예수로, 아폴로에서 바울로, 어둠에서 빛으로!

모든 도약에는 발판이 필요합니다. 창조가 아직 이루어지기 전의 상태는 혼돈과 공허의 상태라서 뭐라 콕 집어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거기에 빛을 머금고 있는 깊음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숨결이 휘감긴 그 어둠 밑에는 무언가를 암시하는 움직임이 있고, 생명을 피워내려는 고투가 있으며, 미래의 잠재성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이 생명의 모판이요 도약대입니다.

바로 거기에 하느님의 말씀이 울리는 것이지요. 빛이 있으라!

하느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의 뜻은 텅빈 진공상태에서 무언가를 만드는 마술을 부리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어둠이 머금고 있는 암시를 깨트려서 밝히고, 고군분투하는 삶에 열매를 맺게 하며, 아직 생명으로 피어나지 못한 잠재성이 생명 세계 밖으로 튀어나올 수 있도록 하늘의 은총을 베푸셨다는 말입니다.

빛이 있으라! 이 말씀이 우주에 울리면, 창조의 언어가 됩니다. 그 말씀이 우리 마음에 담기면,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명령이 됩니다. 빛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어둠 속에 머물지 말고 새로운 창조에 힘쓰라는 하느님의 호출이자, 이 땅이 비록 혼돈의 세계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영과 더불어 생명과 정의와 평화를 세우라는 하늘의 명령이 됩니다.

새해가 되었으니 우리 삶에 하느님의 빛을 밝혀야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밝힌다고 밝혀지는 것이 아니지요. 빛은 하느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만 산처럼 살아가면 됩니다. 그러면 이미 우리 안에 빛이 있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느님께서 오래 전 우리 안에 빛을 담아 주셨으니, 우리의 새해는 이미 빛이 밝혀진 새해입니다.

산처럼 삶을 품고 살아가면서, 주의 빛으로 밝혀진 새해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침묵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