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합니다.
order_no | 2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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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창의 장로(향린교회 원로장로)
일신회
6. 25 이전 서울대학 기독학생회에서 만난 다음과 같은 적은 숫자의 동지들이 있었다.- 신암교회(기장) : 이종완, 장하구, 이영환, 홍창의 ,한철하
- 숭동교회(예장) : 김동명, 오기형, 곽상수
- 기타교회 : 안병무, 백종모, 김철현
이들은 자기들의 모임을 "일신회"라 불렀는데, 이는 한 하느님(一神), 한 믿음(一信), 한 몸(一身)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모여 기도하고 성서공부를 하며 신학 원서를 윤독하였다. 이때 서울대학 기독학생회는 문리대 종교학과에 모여 가끔 철야기도회를 하기도 했는데, 기독학생회 첫 회장은 안병무였다.
일신회원들은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논의하기 위해 1950년 6월 23일 저녁부터 자하문 밖 승가사 근처에 있는 수도원(원장 유재현 목사)에서 기도회를 갖고 있었다. 이때 참석한 사람은 안병무, 장하구, 이영환, 이종완, 한철하, 홍창의 등이었다. 그런데 시내에 갔던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6.25가 일어났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구국기도회를 갖고 6월 26일 서울로 돌아와 헤어졌다.
6.25 피난 시절
동지들은 6.25로 인해 부산, 대구, 전주, 제주도 등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안병무가 동지들을 방문하여 연락이 끊어지지는 않았다. 이때 안병무는 부산에서 [야성](野聲)이라는 잡지를 발행했다. 이 [야성]은 "광야의 소리"(Voice of wilderness)라는 뜻으로, 기성 세대의 뜨뜻미지근한 교회 생활에 도전하며 즐겁게 살면서 예수를 믿자는 식의 안이한 신앙생활에 저항하는 젊은이들의 생생한 목소리였다.이영환이 전주 적십자병원장으로 부임하게 되어 동지들은 전주로 모이게 되었다. 이때 전주로 모인 이영환, 안병무, 곽상수, 홍창의 등은 전주의 각 교회를 맡아 대학생들을 지도하며 집회를 갖기도 했다.
남산시절
서울이 다시 탈환되자 흩어졌던 동지들은 1953년 2월부터 안병무를 필두로 하여 서울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남산 기슭에 있는 향린원(香隣園), 전에 향린고아원이 있던 곳. 지금의 동보성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는 국군이 서울을 탈환하고 북진하였으나 언제 또 다시 후퇴할 지 알 수 없고 북쪽 하늘에서는 아직도 포성이 울리고 있던 때였다. 향린원 안의 집들은 다 부서지고 기둥만 남은 집들이었다. 우선 대강 칸막이를 하고 신문지로 도배를 했다. 당시 이들의 생각으로는 백로지로 도배하는 것도 사치로 여겨졌다. 도둑도 많아 밤 사이에 빨래를 넣어놓으면 다음날 아침에는 반드시 없어지곤 했다. 물을 긷기 위해서는 남산으로 올라가야 했다.
2. 향린교회의 창립
공동생활을 하던 믿음의 동지들은 교회를 창립하기로 하고 1953년 5월 17일에 창립예배를 드렸다. 이 창립예배에는 남자 6명, 여자 6명 모두 12명이 참석했다. 그리하여 곽상수, 안병무, 이영환, 이종환, 장하구, 홍창의가 창립교인이 되었다. 그때 나는 감격의 소감을 이렇게 적었었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이 한 순간이여,
감격의 눈물 내 앞을 가리우니
말없이 핀 저 꽃의 향기로움이여
우리의 기도소리 저 나라로 옮기소서.
우리는 아무 교파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교회로서 교역자를 따로 두지 않고 교인 모두가 선교에 직접 참여하는 평신도(平信徒)교회로 시작하였다. 설교만을 가지고 선교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 의료, 음악 등 각자의 직업을 통하여 입체적(立體的)이고 유기적(有機的)으로 사회에 접근해 나간다는 것이 처음 생각이었다.
초대 교회와 비슷하게 공동의 생활을 하면서 수도원적(修道院的)인 형태로 전적(全的)인 신앙생활을 해 보자는 것이 우리들의 생각이었다. 설교는 안병무, 이영환, 장하구, 홍창의가 돌아가면서 하고 아침에는 중앙에 있는 도서실에 모여 새벽 기도회를 가졌다. 매주일 마다 한 가지씩 실천사항을 정하여 실생활에 옮기도록 노력하였다. 도서실에는 각자가 가지고 있던 책을 중앙화하여 누구나 신앙서적을 읽을 수 있게 하였다.
교인 상황은 출발했을 때 12명이었던 교인 숫자가 같은 해 12월에는 약 50명이 되었고 54년 말에는 85명, 55년 말에는 135명, 56년 말에는 150명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창립동지들 중 여러 사람이 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선교활동
향린교회는 1956년 5월 경기도 광주군 거여리에 거암교회(巨岩敎會)를 개척하고 김학봉 전도사를 담임목회자로 파송하였다. 의료봉사활동은 거암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1958년 2월부터 시작되었다. 매주일 예배를 마치고 의료반이 거암교회로 가서 하루에 약 40명의 환자들을 치료하였다. 이때 참여한 사람은 홍창의, 이영환, 김재의, 원금순(이상 의사), 약사 3명, 서울대병원 간호사들, 의대생, 약대생들이었으며 차량은 기독교세계봉사회의 지원을 받았다. 그 후로도 시흥군, 군포, 일산 등 지역으로 장소를 옮겨 계속하였다.
한국기독교장로회에 가입
향린교회가 독립교회로서 있은 지 6년만인 1959년 3월에 한국기독교장로회에 가입하였다. 교단에 가입하게 된 동기는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3월 13일 공의회를 소집하여 연합정신(에큐메니칼 정신)을 강조하며 진보적인 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에 가입할 것을 결의했다.
남창동, 을지로로 이전
향린교회는 1960년 12월 남대문시장 한 가운데인 남창동으로 이전하였다. 그 까닭은 남산의 대지의 터는 넓지만 너무 낡은 건물들만 있어 교회로서 불편한 점이 많았고, 또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장으로 내려간다는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남창동 시기 후반기에는 안병무 선생이 독일에서 학위과정을 마치고 귀국하여 오랫동안 강단을 맡았다.
이후 1967년 12월 24일 다시금 을지로에 있는 지금의 교회로 옮겨 첫 예배를 드리고 68년 6월 헌당식을 가졌다.
3. 일반교회로의 전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가 점차 다원화하고 전문화되면서 장로들만으로 교회를 꾸려가기가 힘들어졌다. 그래서 담임목사를 초빙하는 문제가 깊이 있게 논의되어 결국 담임목사를 모시고 일반교회의 형태로 가게 되었다. 1974년 10월 담임목사로 김호식 목사가 취임하게 되어 향린교회는 창립 후 21년만에 일반교회의 형태가 되었다.
김호식 목사가 담임목사이던 때 향린교회는 교인 숫자나 교회 재정 면에서 큰 발전을 이룩했다. 그러나 향린교회가 처음 지향했던 모습에서는 점점 멀어지고 초점이 흐려지며 대교회주의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1986년 김호식 목사가 사임하게 되자 새 목사를 모시는 일과 관련하여 우리가 바라는 교회상(敎會象)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벌어졌다. 이미 교회창립 20주년 기념 좌담회에서 안병무 선생에 의해 제시되었던 바와 같이 "세상과 발맞추기 위해서 교회가 타협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문을 닫는 한이 있더라도 순수하게 제 모습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새 목사를 모시면서 다음과 같은 바람직한 교회상을 정립했다:
1) 교인수는 한 당회장이 돌볼 수 있는 정도(500명 내외)가 적당하며 그 이상이 되면 지교회를 만드는 방법을 강구한다.(분가선교)
2) 대내 경비는 최소화하고 대외 선교비를 극대화한다. 모든 교회 행사는 검소하게 하고 전임 교역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봉사직을 원칙으로 한다.
3) 어려운 교회를 돕는 일을 중점적으로 한다.
바람직한 목회자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논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것은
1) 교인들이 마음 속으로부터 존경할 수 있도록 인격과 성실성, 검소한 생활 자세를 갖춘 분
2) 기독교의 진수를 전할 수 있는 분
3) 사회의 불의에 대해 예언자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분
4) 청년들을 올바로 이끌 수 있는 분이었다.
4. 시련과 극복
이 같은 교회상과 목회자상에 따라 1987년 1월 홍근수 목사를 담임목사로 모시게 되었다. 이때는 5공화국 말기여서 독재정권이 엄청난 폭력을 휘두르고 있을 때였다. 홍 목사는 사회구조적인 악을 비판하였으며 그것에 의해 시달리는 억울한 민중에 대한 관심을 강조했으며, 특히 우리 나라의 모든 구조악의 원천인 분단의 벽을 허물고 남북이 통일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1988년 2월 5일, 7명의 장로들이 홍 목사에 대해 노회에 제출한 소원장은 교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교회에 크나큰 상처를 입혔다. 그러면서 일부 교인들이 하나씩 둘씩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떠난 교인들이 결국 다른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향린}지 1991년 5월, "새롭게 태어나려는 몸부림의 시기" 참조).
1991년 2월 20일 홍 목사는 국가보안법에 의해 구속되어 재판 끝에 1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향린]지 1991년 3월호 및 [통일의 길 십자가의 길] 참조).
홍 목사가 1년 6개월의 형을 치르는 동안 향린교회 온 교우들이 일치단결하여 더욱 열심히 교회를 섬기며 불의와 싸우며 이 고난의 시기를 극복하였다.
5. 초점을 가진 교회
살아있는 사람의 눈은 초점을 갖고 있다. 정신이 몽롱한 사람의 눈에는 모든 것이 희미하고 동질의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께서도 초점을 갖고 목회를 하셨다. 예수님은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았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가 2:17)고 하셨고, 마태 25:31-46에 보면 주님의 초점은 굶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감옥에 갇힌 자에 맞춰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교회는 여러 가지 구색을 갖추어 놓은 백화점 같은 교회가 되기를 원치 않았다. 백화점 같이 많은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드는 화려한 교회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한때 대교회를 하자는 시험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교회가 대형화할수록 강단에서는 올바른 설교가 나오지 못하고, 올바른 선교 활동을 하기 힘들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되었다.
이 시대에 있어서의 향린교회의 초점은 주님이 그러했듯이 이 땅의 고통받고 이는 민중과 고난을 같이하며 하느님의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다. 참과 거짓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일이다. 참된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구조악의 원인이 되어 있고 고통을 주고 있는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어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는 일이다. 즉 향린교회의 초점은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선포하고 구현하는 일이다.
6. 창립 40주년을 맞이하며
1993년 5월 17일로 향린교회는 40주년을 맞이하면서
1) 통일공화국 헌법 초안
2) 교회 갱신선언을 선포하였고
3) 40주년 기념교회(강남 향린교회)를 설립하고(분가 이념에 따라서)
4) <향린 40년>(향린교회사)를 발간하였다.
광야를 지나 약속에 땅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향린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약속의 땅에서 안주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계속 광야 같은 험난한 길을 걸어갈 것이다. 우리 향린교회는 앞으로도
1) 고통받는 민중과 고난을 함께 하는 민족교회
2) 우리 민족의 평화 통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앞장서는 교회
3) 하느님의 정의(正義)를 구현하는 교회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하여 계속 광야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