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민족문제 연구소]가 발간한 [친일 인명사전]이 사회적으로 커다란 반향(反響)을 불러온 적이 있었습니다.


혹자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앞으로도 숨어있는 친일파를 색출해야 한다며 찬사를 보냈고, 혹자는 가뜩이나 분열되어있는 대한민국을 더욱 분열시키려는 의도냐며 상당히 부정적인 평가를 했으며, 혹자는 [친일 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들이 과연 제대로 평가받고 수록된 인물들이냐며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고, 그 후손들이 비참하게 살고 있는데 반해, 친일파와 그 후손들은 지금까지도 어떤 처벌이나, 하다못해 올바로 된 재산 환수 조치조차 받지 못하고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는 현실을 고려해 볼 때, 객관적이고 공정한 과거의 청산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점은 아마 누구도 부인 못할 진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너무 늦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해방 이후, 미국에서 건너와 재빠르게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한 이승만은 친일파를 등용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군 장교와 경찰로 근무했던 자들은 국군과 경찰의 수뇌부로 영입되었으며, 친일로 각 분야의 유력인사가 되었던 인물들중 어느 누구도 과거의 전력 때문에 해방 이후 죄과의 대가를 치르는 일 없이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사회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게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일례로 구국의 영웅으로까지 취급받고 있는 초대 1사단장 백선엽은 일본군 간도 특설대에서 일본군에 저항하는 조선인 항일 유격대 소탕작전에 종사하다가 1945년 8월 15일 만주군 중위로 종전을 맞이하였으나, 해방 이후 국군으로 들어와 30대의 젊은 나이에 1사단을 지휘하였고, 6.25전쟁시 혁혁한 공을 세워 ‘애국자’ 불리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박정희 또한 비슷한 전력을 갖고 있습니다.)


게다가 몽양 여운형 선생이 한지근에게 암살당하고, 뒤이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도 안두희에게 암살당한 이후 이승만을 견제할 마땅한 인물이 없었던 대한민국은 제대로 된 민주화와 친일 청산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채 민족의 커다란 비극이었던 6.25전쟁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6.25전쟁의 후유증은 너무나도 커서, 전쟁이 끝난지 50년이 훌쩍 넘어버린 지금도 대한민국은 빨간색에 대한 노이로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고, 가증스러운 정치꾼들은 이를 십분 활용하여 아직도 자신들의 정권 유지에 철저히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제대로 대접받고 평가받아야 할 독립운동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고, 가난에 찌들었던 그들의 후손들은 제대로 된 교육의 기회조차 잡지 못한 채 -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중 정말 잘먹고 잘사는 분들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 하겠다고 국내에서, 또는 만주로 떠나버린 분들의 재산이 과연 온전하게 보전되었을까요? 그리고 백범 김구선생조차 자식들과 헤어져서 가족의 뒷바라지는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던 상황인데, 그들의 후손들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겪었는지는 자명(自明)한 사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 소위 말하는 사회의 하층민으로 전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친일파 또한 가려내기가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고려대 설립자이자 동아일보 사장이었던 김성수, 이화여대 총장이었던 김활란, 한국 시문학의 꽃 서정주시인 같은 사람들조차 친일 의혹으로 가득하다 보니 일각에서는 그 당시의 시대상황을 고려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옹호론자들도 있으며, 반대쪽에서는 2차대전 당시의 유럽의 예를 들며, 유럽은 나치 독일에 붙어 반역을 했던 무리들은 전부 사형을 했는데, 우리는 너무나도 흐지부지하고 구태의연한 청산작업을 했으며, 이제라도 올바른 역사 바로세우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미 고인이 된 사람들도 많고, 그 당시의 정황을 증언해줄 사람들이 없으니 친일 의혹을 가려낸다는 것은 참으로 요원(遙遠)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무고한 사람을 친일파로 몰아갈 수도 있으며, 아니면 역사를 왜곡한 채 실제 친일한 사람을 훌륭한 민족의 지도자로 잘못 평가할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어쨌든 중요한 점은 지금이라도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대한민국의 자주 독립을 위해 헌신한 그분들을 역사의 중심으로 다시 모셔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뮤지컬 [영웅]은 커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매해 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항일 독립운동중 커다란 획을 그었던 의거(義擧)가 있었던 날이지만, 박정희의 10.26사건에 묻혀 제대로 주목 조차 받지 못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게다가 한국을 대표하는 뮤지컬 제작자겸 연출가 윤호진의 완성도 높은 연출은 이 작품을 더욱 의미 있는 작품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160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런닝타임 이지만 안중근 의사의 단지(斷指)장면부터 하얼빈 역에서의 의거장면, 그리고 재판과 사형장면까지 긴박하게 돌아가는 장면전환과 내용전개는 너무나도 속도감이 있었고, 환상적일 정도로 현란하고 실감나는 무대장치는 마치 영화를 보는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었습니다.


가상의 인물이지만 설희의 비장한 각오와 결심은 제 마음을 숙연하게 만들어 주었으며, 또 하나의 가상의 인물, 링링의 안중근에 대한 애틋한 사랑은 관객들의 누선(淚腺)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을 높이 평가할수밖에 없는 이유중 하나는, 무조건적인 애국심을 관객들에게 호소하며, 그러한 감정을 관객들에게 팔아먹는 얄팍하고 가증스러운 상술 또한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 있습니다.


시종일관 이 작품은 객관성과 공정성을 보여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 또한 ‘악인’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 나름대로 대동아공영(大東亞共榮)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확신이 있으며, 자기 자신만의 이상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인물로 - 심지어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가 발각된 설희를 용서해주는 대인(大人)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 등장합니다.


이는 마지막 장면중 하나인, 안중근 의사가 감옥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영혼과 만나 서로 대화를 하는 장면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자신은 아시아의 공동 번영을 위해 노력했는데 왜 나를 죽였냐며 물어보는 이토 히로부미의 당당한 태도 앞에, 안중근 의사는 하느님을 믿는 신자의 입장에서는 미안하지만, 대한제국 의병군 참모중장으로서 마땅히 죽여야 할자를 죽인것 뿐이라며 마찬가지로 당당히 자신의 입장을 표명합니다.


각자 자신의 입장이 달랐으며, 조국이 처한 상황이 각기 달랐기에 서로 적대할수밖에 없었던 두 영웅의 입장을 - 일본의 시각으로 볼 때 이토 히로부미는 마땅히 영웅이라 불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 이런 장면으로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객관성과 공정성을 제외 하더라도, 뮤지컬 본연의 원칙을 놓고 보더라도 이 작품은 모처럼 나온 한국 창작 뮤지컬의 커다란 성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했던 뛰어난 무대장치와 무대연출은 브로드웨이의 어느 뮤지컬에 비해 손색이 없었고, 다소 늘어질 수도 있다는 느낌을 받을만한 장면의 바로 뒤에는 여지없이 긴박한 장면들로 채워져 있어 관객들이 시종일관 지루하다는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으며, 특히 마지막 장면들은 눈물이 저절로 나오게 만들 정도로 커다란 감동을 관객들에게 선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아쉬운 점은, 국내 창작 뮤지컬의 한계인 ‘음악’입니다.


뮤지컬을 보고 나오면, 한번만 본다 하더라도 저절로 흥얼거리게 만드는 뮤지컬 넘버가 있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한국 뮤지컬들은 그런 점에서 상당히 약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뮤지컬 [영웅] 또한 장중하면서 감동을 선사하는 멋진 선율들로 가득하나, 극장을 나서는 순간 음악이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감동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 CD를 구입하긴 했지만, 어쨌든 조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



어쨌든 모처럼 한국을 대표하는 대형 뮤지컬 한편이 탄생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청춘을 불사르며 스러져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그 후손들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고, 제대로 된 대접을 받는 그날이 오기를 기원합니다.




사족(蛇足)....


극중 안중근 의사가 법정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당당히 밝히는 장면이 나옵니다.


뮤지컬 넘버의 제목은 [누가 죄인인가]인데,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 중에 이러한 내용이 있더군요.


교과서를 빼앗아 불태우고 교육을 방해한 죄.


신문사를 강제로 철폐하고 언론을 장악한 죄.


대한의 사법권을 동의 없이 강제로 장악 유린한 죄....


저는 불현듯 쓰키야마 아키히로가 떠올랐는데요, 뭐 그냥 그렇다는 이야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