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문 : 3장 서방의 그리스도교적 사고의 발전

(190~ 198) 김균열

 

아우구스티누스를 이해하기 위한 사상의 발전과정(이어서...)

6) 아우구스티누스는 회의주의를, 단지 신플라톤주의의 도움을 입어서 철학적으로 극복했을뿐 아니라 교회의 도움을 입어서 극복했다는 사실.

중세 전체는 회의주의라고 하는 불안에 시달려왔는데 (오늘날 무의미성의 불안과 같은...) 이 불안은 계시나 교회적 권위라고 하는 사상과는 대립된 것.

또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교회의 권위라 함은 교호의 압도적인 힘과 위대한 대표자들

만일 이런 권위가 없었다면 그는 그리스도교의 메시지에 대한 신앙을 가지지 못했을 것.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교회의 권위란 타율적인 힘을 지닌 권위가 아니라 고대적 회의주의에 내포되어 있는 물음에 대한 대답. 그는 그 권위를 신율(Theonimie)로 체험.

7) 그리스도교적 금욕(주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자신 안에서 신비적 이상과 자신의 감각적 성격 사이의 갈등을 경험

당시 자유분방한 성의 자연주의 내에서 철학들이 모든 계율을 설파하고 있었지만 자연주의적으로 왜곡된 리비도에 대항하기엔 무력해서 저지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세계를 동시에 긍정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하는 신플라톤주의의 긴장처럼 그리스도도 창조를 긍정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신적인 것의 [역사적]현현을 통해서 삶[실재]를 성화하는 것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본 것.

구약성서를 그 바탕으로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는 가정이나 성생활을 긍정했지만 신 플라톤주의자로서는 성적인 것을 부정하고 금욕을 칭찬했다.

종교개혁자들도 육체를 원칙적으로는 긍정했지만 리비도에 대한 유혹 때문에라도 신플라톤주의적 금욕(주의의 잔재)을 완전히 타파할 수가 없었다.

8) 이상의 일곱가지 요소에 대해서 그에게 결여 되어 있는 하나의 요소

-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

- 플로티누스는 그의 체계 안에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요소를 많이 끌어들여 왔지만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그리스적 자연과학의 측면이나 정치적 사상의 측면이 내포 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원론이 아니고 그 사이를 매개하는 조정의 체계를 전개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원론이 더 그리스도교 사상을 표현하는데 알맞음.

개체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강조는 교회의 공동체를 원한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무의미

아리스토텔레스는 두 극단 사이의 중용의 길을 금했기에 에로스적 엑스타시는 물론 금욕적 엑스타시도 거부 (유사 부르조아적 태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여러사물의 합리적관계를 다룬 특수 과학을 간직한 사람이라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과 혼의 인식이 더 중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객관적 주의주의적 사상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귀납적 사상가, 곧 경험론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직관적 사상가

- 파울 틸리히는 형태의 철학자, 형태의 신학자로서 아우구스티누스 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더 가깝다. 왜냐하면 원자론적, 기계론적, 수학적 경향의 학문은 아우구스티누스나 플라톤적이지만, 유기체의 생명적 구조에 관한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이기 때문.

 

2. 인식론

- 인식의 목표와 방법으로 신과 혼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알고 싶어했는데 혼이야말로 신이 인간에게 나타나는 장소.

- 신이란, 다른 대상과 함께 있는 대상이나 객체가 아니고 주관 객관의 분열 이전에 인간의 내면에 현존하고 있다.

- 신은 우리 자신에게 선험적(apriori)인 것이며, 그 존엄성, 실재성, 논리적 진리성에서 우릴 앞지른 전제다.

- 신에게는 주관과 객관의 분리가 극복되어 있고 신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가까운 것보다도 더 우리에게 가까운 데에 있다.

- 종교철학은 무조건적인 것의 경험, [궁극적인 것의 경험]에서 출발. 이것은 [모든 것의] 절대적인 첫째의 것.

- 두가지 것에 관해 직접적인 명증을 갖는다

하나는 인간 오성이 지니는 논리적 형식

인간의 감각적 지각 또는 감각적 인상. (자체로서 확실성을 지님)

- 반드시 현실적인 것에 관해서는 회의가 일어나나 오성의 논리 형식은 실재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물음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구조. 다만, 나의 감각적 인상으로서 실재적인 것

- 실재에 대한 회의는 원리적[일반적]인 회의에서 출발해야 함.

- 안으로 눈을 돌려야 함 진리는 인간의 속 깊이에 있기 때문.

- 그 내부의 영역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혼이고 세게는 혼에서 하나의 현상이다. 혼은 모든 현상의 총체로서의 세계를 그 안에 간직하고 있다. 혼 만이 유일하고 실재적인 것.

- 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의 명제는 같은 메아리를 지니지만 자기 확실성이 수학적인 명증성의 원리, 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내적 명증성만이 신의 직접적인 확실성이 된다.

- 혼의 내부에는 그 자신을 초월하는 무엇인가가, 다시 말해서 단적으로 변하지 않는 것, 곧 신적인 바탕이 있다.

- 이는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 아니고, 신은 신에 대한 회의에 선행하며,그것의 전제 그자체. 우리는 우리가 신앙하고 있는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고 자신 안에 있는 신앙을 본다.

- 우리는 왜 진리를 탐구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만일 우리가 진리에접근하고 있는 것을 확인 하려고 한다면, 그것을 위해 판단의 기준을 가져야 하는데 그기준 또한 진리 그 자체다. 모든 상대주의에도 절대적인 규범이 전제되어 있다는 사실.

- 진리는 인간 홍의 내면에서만 발견되기 때문에 외적인 물질적 세계의 인식은 신을 인식하는데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 인식이 참여인 동시에 결합인 한, 그것은 사랑이다. 따라서 물질적 세계를 인식하려는 사람은 그것을 사랑하며, [거기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은 가장 높은 인식에 이르지 못하도록 방해를 받는다.

- 만일 자연과학이 어떤 가치를 가진다면 자연 속에서 신적인 근거를 곧 그 자체로선느 아무런 의미도 없는 동물이나 식물 안에서 삼위일체의 흔적을 보여주는 한에서다. 중세에서 자연과학이 침체되어 있던 이유도 자연에 대해 사랑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 예술로 표현

- 중세의 예술표현도 자연과학적으로는 정확하지 않지만 삼위일체의 흔적, 곧 자연의 대상 안에 있는 분리와 재결합의 생명운동을 나타내기 위해 그려져 있다. 그것들은 자연에 있는 신적인 바탕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것들에게 아름다움을 제공한다.

- 이 창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의 지향성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