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축복

예레미야 31:7-14; 시편 147:12-20; 에페소 1:3-14; 요한 1:10-18

 

일각여삼추(一刻如三秋)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각은 조선시대에 시간을 구분하는 최소 단위로 15분에 해당합니다.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는 기미독립선언서의 구절도 마지막 순간까지라는 의미이지만, 이는 당시의 시간이 최소단위였습니다. 오늘날로 말한다면 일분을 의미한다고 말하겠습니다. 곧 일각여삼추라는 말은 일분이 마치 세 번의 가을 3년에 해당한다고 할 만큼 기다림의 애절함을 표현하는 문구입니다. 2011년의 한해 물량적으로는 우리 모두에게 똑같은 시간이지만, 사람에 따라 그리고 나이에 따라 각기 다른 물량으로 느껴집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마치 한달과 같이 빨리 어떤 사람에게는 한 10년과 같이 더디 지나갔습니다.

 

흔히 말하기를 세월의 속도는 나이에 비례한다고 말합니다. 20대에는 20km의 속도로 40대에는 40km의 속도로 60대에는 60km의 속도로 간다고 합니다. 저도 어려서는 하루라도 빨리 한해가 가서 한 살을 더 먹었으면 했습니다만, 지금은 한주 늦게 태어난 탓에 띠는 같지만 학교 동기들은 우리 나이로 60대에 들어갔지만, 저는 아직 60대에 돌입하지 않은 것에 대해 매우 감사하고 있습니다. 올해 90대에 들어가신 홍창의장로님 앞에서는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격이고, 이런 얘기도 내년이 되면 다 부질없는 일이 되겠지만 말입니다.

 

[새해 첫 기적]

 

그래 그런지 {새해 첫 기적}이라는 반칠환 시인의 시가 새삼스럽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 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10대로부터 90대에 따라 속도가 다르게 느껴진다 하더라도 새해의 첫날을 맞이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똑같으니 이게 기적이 아니냐고 질문합니다. 더 나아가 지난 한해 황새처럼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이나 굼벵이처럼 빈 마음으로 여유있게 살아온 사람이나 같은 새해를 맞이하고 있는 것 아니냐? 이 말을 확대하면 누구누구는 지난 한해를 자랑하고 누구누구는 숨기고 싶어하는데, 새해의 시간에서 보면 결국 같은 것 아니냐? 하는 인생의 깨달음을 저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직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을 언급하지 않았는데, 이 구절이 바로 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그 마지막 결구는

바위는 않은 채로 도착했다

 

불가의 선 화두같은 느낌입니다만, 우리 인생은 아침에 사라지는 안개와 같고, 꽃잎에 맺혀 있는 이슬방울과 같다는 말씀보다는 더 인상적인 말입니다. 결국 시간이 흘러간다는 말은 우리 인간들이 하는 말이고 바위에게 있어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 고요함 그대로라는 말입니다. 어제 저녁 우리는 한해를 보내면서 명동사거리에 나가 바위처럼을 불렀는데, 바위처럼 살아가는 한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간들은 우리네 삶의 기초를 해를 따라 하루라 부르고 이를 24으로 나누고 또 이를 60으로 나누고 또 이를 60으로 나눕니다. 왜 나누는지는 모르지만, 그래 하루는 24시간 144086,400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행인들이 오고가는 명동 거리에서 길바닥에 100원짜리 떨어진 것을 보았다고 냉큼 줍는 사람 없듯이, 시간의 소중함을 별로 느끼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80년의 인생에서 한 달은 별 것 아닐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을 배우든 한 달 늦게 시작했다고 뭐 그리 문제될 경우는 없습니다. 그런데 한 달 일찍 배속에서 나와 인큐베이터에 아기를 맡겨야 하는 어머니에게 있어서의 한 달은 아이의 생명을 좌우하는 매우 소중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오늘 못하면 내일 하지 말합니다. 그러나 신문 편집장에게 하루는 신문사의 운명을 좌우하기에 충분한 시간입니다. 약속시간 일분 늦게 왔다고 문제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나 일분이 늦어 열차를 놓친 사람에게 일분은 하루보다 더 중요한 시간입니다. 1초야 말로 눈깜짝할만한 길이입니다. 그러나 앞서 가던 차가 달려오던 차와 마주쳐 부서진 장면을 목격하면 그 일초는 자신의 생명을 맞바꾼 시간입니다. 100미터 달리기에서 는 그 일초도 너무 길어 일초를 백분 단위로 나눠 메달의 색깔을 결정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인생의 성공은 모두에게 같은 시간 속에서 그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고 이를 활용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왜 시간이 금이라고 말하는지를 깨닫는 사람이야 말로 인생의 참 성공자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시간 앞에 장사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간의 가치의 중요성을 아무리 깨달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문제는 우리가 이를 모아둘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시간을 아끼라는 말을 하지만, 시간은 아낀다고 해서, 덜 쓴다고 해서 모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란 정말 물거품과 같아 우리가 순간 순간에 집중하지 않는다면 의미 없는 쓰레기들로 변하고 맙니다. 그래 영어에 현재라는 단어와 선물이라는 단어가 같은 것은 퍽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 인생의 선물(present)은 현재(present)이다. 과거를 붙잡고 후회하는 것이나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는 것은 모두 오늘이라는 선물의 포장지를 뜯지 않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일인 것입니다. 이 현재를 깨닫는 신앙의 태도를 일컬어 현존(Dasein)이라고 말합니다.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깨어 있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 오늘이 바로 나의 종말이라고 하는 종말론적 사고야 말로 참다운 신앙의 시작입니다.

 

[새해의 첫날]

 

그래 오늘 곧 {새해의 첫날}이라는 선물을 우리 모두가 만끽할 수 있기를 바라며 다음의 시를 드립니다.

 

첫 마음으로 다시 시작합니다.

내리자마자 녹아버리는 진눈깨비처럼

첫날에 했던 다짐들 그 후회의 흔적마저

지금은 돌아보기 슬픈 기억이지만

사랑은 거듭하여 일어서는 것

내가 나를 용서하며 기쁘게 희망하는 것

해마다 맞이하는 1월이 새로운 것은

겸허한 마음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너와 나를 위하여 다시 시작하는 용기입니다.

(홍수희)

 

지난 한해 돌이켜본다면 기쁜 날 보다는 슬픈 날이 더 많았고 어떤 분들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힘들었던 날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새해는 그런 날들을 떨쳐버리고 새롭게 일어설 수 있는 기회입니다. 새해 그것은 곧 옛것은 지나갔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후회하기 보다는 자신을 용서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 진정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지난해의 쓰라린 아픔들이 남아 있는 분들에게는 도정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란 시를 읽어드립니다.

 

[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흔들이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고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저는 이 시는 남한의 모든 중학생들에게 필수적으로 암송하도록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최근 왕따와 폭력으로 인한 중학생들의 자살이 사회적 문제로 급격하게 떠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래 전부터 교육계나 종교계의 생각 있는 지도자들은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수차례 경고 해왔습니다. 입시교육과 경쟁시스템이 가져오는 반생명의 결과로 죽음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말해왔습니다. 지난주만 해도 동료들의 폭력에 견디지 못한 대구의 한 중학생의 자살 외에 광주와 청주에서도 성적과 생활을 고민하던 중학생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자살이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습니다. 한미FTA가 발효되면 경쟁에 밀린 사람들이 목숨을 끊는 일이 생겨날 것입니다.

 

열네 살에 자신의 삶을 마감한 그가 남긴 글입니다. “제가 일찍 철들지만 않았어도 저는 아마 여기 없었을 거예요. 매일 장난기 심하게 하고 철이 안 든 척했지만, 속으로는 무엇보다 우리 가족을 사랑했어요. 아마 제가 하는 일은 엄청 큰 불효인지도 몰라요. 집에 먹을게 없어졌거나 게임을 너무 많이 한다고 혼내실 때 부모님을 원망하기보다 그 녀석들에게 당하고 살며 효도 한 번도 안한 제가 너무 얄밉고 원망스러웠어요. 제 이야기는 다 끝이 났네요. 그리고 마지막 부탁인데, 그 녀석들은 저희 집 도어키 번호를 알고 있어요. 우리 도어키 번호 좀 바꿔주세요. 저는 먼저 가서 100년이든 1000년이든 저희 가족을 기다릴께요.”

 

가장 천진난만하고 인생의 꿈을 가장 순수하게 그리고 높게 가져야 할 십대에 경쟁의 구조로 말려들어가 수학 한 문제 영어 한 문제에 인생의 전부를 걸거나 아니면 아예 그런 경쟁에 들어갈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하고, 그저 책상에 엎드려 잠만 자다 집에 돌아와서는 컴퓨터 게임에만 몰두해야 하는 양극화의 교실, 그건 양쪽을 모두 죽이는 비인간화의 교육입니다. 그걸 누가 만들었나요? 물론 신자유주의 시대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런 일을 부추긴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4년 전 이명박정부가 처음 출발하면서 이전 정부에서 교육부 혹은 문화교육부라고 부르던 부서의 명칭을 교육과학기술부로 부르겠다고 하는 일을 보고 경고했었습니다. 학교 교육은 한 인간의 품성, 곧 인격을 함양하는 생명 그 자체에 대한 경외에서부터 시작하는 일인데, 학교 교육을 과학과 기술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결국 교육을 돈벌이를 위한 도구로 본 것입니다. 건설회사에서 평생을 굴러 돈에 환장한 사람이 국가의 모든 제도를 뜯어 고쳐 국민들을 4만불 목표를 위한 앵벌이들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지금 중학생들의 자살은 바로 이런 반생명적인 교육들로 인한 인간 병폐의 한 단면일 따름입니다. 교육의 결과는 몇 십 년 후에 나타나니 이후 지금보다 더 큰 문제가 일어날 것입니다. 중학생이었기에 자살로 끝났지 만약 어른이라면 종로 한 거리에 나가 생명부지의 사람들을 향해 칼을 휘두르거나, 폭약을 만들어 건물 전체를 날려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들을 외신에서 듣고 있습니다만, 계속 이런 반생명적인 교육이 진행된다면 우리 사회에도 일어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교육과 종교 그리고 법원은 우리 사회의 양심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입니다. 학교가 경쟁구조 앞에서 무너지고 있고, 종교 또한 탐욕 앞에서 무너지고 있고, 법원 또한 정치 권력 앞에서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저는 목사이지만 교회는 통제가 안 되는 곳입니다. 자신이 하는 말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이 아니다라고 통제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저 어찌되었던 사람만 많이 모으면 진리로 행세를 하는 곳이 교회이니 평신도가 깨지 않는 한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 저는 법조계가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 정의 평등 생명의 가치를 바르게 지켜주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남한은 떡값검사니 벤츠검사니 하는 용어가 우리 사회에 유행어가 되어 있고, 부장판사가 변호사로 개업하여 맡는 첫 번 재판은 반드시 이기게 해준다는 전관예우라는 말을 듣고 나면 어깨에 힘이 쑥빠집니다.

 

[당신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미국 뉴욕시에 가면 라과디어공항이 있는데, 라과디아는 1933년부터 45년까지 뉴욕 시장을 세 차례나 역임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뉴욕시장으로 재직하기 전 판사로 있었을 때 일입니다. 한 노인이 빵 한 덩어리를 훔친 죄목으로 끌려왔습니다. 배가 고파 어쩔 수 없이 그랬다는 딱한 사정을 들은 다음 다음과같은 판결을 내렸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래 저는 법대로 판결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그리고는 법정에 앉은 사람들을 향해 이 사람이 빵 한 덩어리를 훔친 것은 이 사람만의 책임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도 10달로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분에게도 각각 50센트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그리고는 지갑에서 10불을 꺼내 모자 속에 넣고 모자를 돌렸습니다. 모두 57달러 50센트가 걷혔습니다. 그 노인은 10불을 벌금으로 내고 47달러를 갖고 눈물을 글썽이며 법정을 떠났습니다. 범죄행위가 일어났을 때 그건 그 한사람의 범죄행위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범죄행위라는 공동체적인 책임의식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지난 한해 우리 사회를 아름답게 만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언론인은 이들을 4명으로 말하더군요. 첫째는 309일을 고공크레인 위에서 홀로 버텨 부당한 노동자 해고를 철회하도록 한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 둘째는 무한경쟁과 약육강식의 정글에서 통 큰 기부를 통해 노블레스 오블레주를 실천하고 새로운 정치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안철수 서울대 대학원장. 세 번째는 이 바람으로 서울시장으로 당선된 박원순시장 앞으로 이 서울의 행정을 어떻게 바꾸어낼지 궁금해지는 한해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급한 사람은 개인이 아닌 불특정 다수입니다. 올해 타임지가 올해의 인물로 Protester 시위대라고 말했지만, 우리 사회에도 부산의 희망버스와 제주 강정마을과 서울 홍대와 평택 쌍용차, 그리고 재능교육의 현장에서, 정의와 평화를 위해 행동으로 기도하는 시위대들이 있었고, 매년 이름을 남기지 않은 채 상당한 액수의 돈 박스를 동사무소에 보내고, 구세군 자선냄비에 2억원을 선뜻 놓은 90대의 노부부와 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진 소녀상에 목도리와 털모자를 씌워주는 얼굴 없는 천사들이 바로 우리 사회를 아름다운 가꾼 사람들이며 공동체의 책임의식을 가진 주인들이었습니다.

 

바울 선생은 2천년 전 에페소 교인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가 받을 상속을 보증해 주시고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하여 주십니다.” 당시는 로마황제를 주님이라고 불렀고, 자신을 황제의 딸과 아들로 인식했습니다. 결국 이는 세상의 가치에 매몰된 인간형, 권력과 부와 명예에 매인 인간을 말합니다. 이런 세상적 가치에 저항하여 바울 선생은 우리는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며 하늘 축복의 상속자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당연한 선언같지만, 이는 당시의 시대적 가치를 따라가지 않겠다는 혁명적 선언입니다. 저는 이 하늘의 그리스도를 통한 영적 축복과 성령 안에서의 완전한 자유를 오늘의 언어, 이 땅의 언어, 세상사람 누구나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비종교적인 화법으로 바꾸면 어떤 말이 될까 생각해보았는데, 정용철 시인의 불량품이란 시에서 발견했습니다.

 

정용철 시인의 {당신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당신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이 세상 어떤 꽃도 당신의 두 손보다 못하고

어느 별도 당신의 눈동자만큼 빛나지 않습니다.

봄도 겨울도 여름과 가을도 당신을 위해 옷을 갈아입고

아침과 저녁도 당신을 위해 빛을 열고 닫습니다.

바람은 춤을 추고 빗방울은 노래하며

강물은 조용히, 도랑물은 소리 내어 흐릅니다.

당신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은

당신만이 당신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모습, 당신의 꿈, 희망, 용기, 진실

사랑, 믿음, 기쁨, 미소, 땀과 눈물, 후회와 한숨까지

당신의 모든 것은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보석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진정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우리 옆자리 뒷자리 앞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보고 당신은 진정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라고 말하며 포옹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남북이 화해하고 통일되는 그날이야 말로 진정 우리 모두가 힘써 이룩해야 할 신앙의 목표임을 나누기 위해 문익환목사님의 꿈을 비는 마음의 한 단락을 읽어드림으로 오늘 저의 하늘뜻을 마치겠습니다.

 

벗들이여

이런 꿈은 어떻겠소?

155마일 휴전선을

해뜨는 동해바다 쪽으로 거슬러 오르다가 오르다가

푸른 바다가 굽어보이는 산정에 다 달아

국군의 피로 뒤범벅이 되었던 북녘 땅 한 삽

공산군의 살이 썩은 남녘땅 한 삽씩 떠서

합장을 지내는 꿈,

그 무덤은 우리 5천만 겨레의 순례지가 되겠지

그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다 보면

사팔뜨기가 된 우리의 눈이 제대로 돌라

산이 산으로, 내가 내고, 하늘이 하늘로,

나무가 나무로, 새가 새로, 짐승이 짐승으로,

사람이 사람으로 제대로 보이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 외다.

 

우리 모두 어처구니가 되는 꿈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하느님의 딸과 아들들이 되기를 다짐하면서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