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뜻펴기'(설교)를 문서로 정리한 것입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교회(1월 8일)
창 1:1-5; 시편 29; 행 19:1-7; 막 1:4-11
오늘은 공동의회를 앞두고 지난 해를 돌아보면서 올해의 목회 중점 계획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우선 올해는 국내적으로도 대선과 총선이 있어 매우 큰 변화가 예상되고 있지만, 교회도 60주년을 앞두고 여러 계획들이 진행이 되고 특히 분가교회 설립으로 큰 변화가 예상되고 있습니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한다]
어느 일간지는 2011년을 회고하는 기사에서 {세상이 종교를 걱정한다}라는 큰 제목으로 종교계의 어두운 소식들을 실었습니다. 이명박대통령이 장로로 다니던 S대형교회의 부목사가 담임목사를 폭행했다는 기사로 시작하여 보수진영을 총망라하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감투싸움으로 법정 소동을 일으키고 있고 여기에 감리교단 또한 감독회장 자리를 놓고 감투 싸움을 벌린지 벌써 3년이 되어가지만, 법적 투쟁만 계속하고 있지 어떤 실마리도 풀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섬김과 화해 그리고 용서를 매주일 설교하는 목사들이 이 지경이니 어찌 낯을 들고 다닐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매 주일 경찰들이 출동하여 교인간의 물리적 충돌을 막아야만 예배가 진행되는 강남과 강북의 대형교회들도 몇 개가 있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는 현실입니다. 이 모든 원인의 바닥에는 권력과 돈이 있고 이는 교회의 대형화로 생겨난 일들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죄 많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죄 많은 교회를 걱정하는 종말적 사태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반기독교 현실에 기름을 부은 사건이 최근에 일어났는데, 고문 후유증으로 64세에 돌아가신 김근태 전 국회의원을 고문했던 이근안씨의 목사직을 파면해야 한다는 네티즌들의 소리입니다. 교회를 핍박했던 사도 바울도 그러했지만, 살인자 강도도 회개하면 새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고, 그래서 전도사 목사가 되어 자신의 회개한 삶을 통해 하느님의 복음을 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근안은 70년대 민주인사들을 빨갱이로 모는 일에 탁월한 고문기술을 발휘함으로 악명을 떨친 사람입니다. 얼마나 고문이 잔인했던지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인간백정, 고문기술자”라 불렀습니다. 그가 전기고문을 하면 온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에 떨었으며, 거꾸로 매달아놓은 채, 코에 고춧가루를 넣고 물을 부우면 창자에 불이나면서 속이 뒤집혀갔다. 이근안은 김근태님에게 이런 고문을 열 번이나 자행하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이러한 고문기술자가 도망을 다니다 감옥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어느 날 갑자기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목사가 된 후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간증을 했다는데 자기가 행한 비인간적인 고문을 “고문의 예술”이라고 자찬하고 자신은 위에서 시켜서 한 일로 억울하다고 말하며 같은 경우를 당하면 그렇게 또 고문하겠다고 하니 목사는커녕 사람이 되기에도 자격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게다가 목사가 된 과정도 문제입니다. 기장을 비롯한 주요교단에서 목사가 되려면 일반대학을 졸업하고 최소한 5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근안씨는 형 출옥 후 2년도 안되어 보수예장합동개혁교단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그것도 모두가 은퇴하는 70세에 말입니다. 아마 자기가 저지른 일로 지옥갈지 몰라 그걸 피하기 위해 목사직을 선택한 모양이지만, 이런 사람에게 목사직을 주는 일은 어처구니없는 실수입니다. 목사양산이 곧 교회성장이요 교회성장이 곧 하느님 나라로 착각한 실수입니다. 지금이라도 그의 목사직을 면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연못을 흐린다고 이런 일로 인해 목사의 사회적 신뢰도는 땅에 떨어지고 교회는 그 빛을 잃고 맙니다.
[초대형교회의 몰락과 그 이후]
개신교가 개독교로 목사가 먹사로 평신도가 병신도로 사회적 놀림을 받고 교인 숫자가 급격하게 감소한다는 얘기는 그리 새삼스런 얘기는 아닙니다만, 최근 미국에서 날라 온 소식은 남한의 대형교회들을 전전긍긍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지난 11월 17일 미국의 초대형 교회 중에서도 그 화려함과 명성으로 인하여 가히 미국 복음주의 개신교회의 아이콘이라 불렸던 로스엔젤리스의 크리스털 커데드럴 처어치 우리말로는 수정교회라고 불리는 교회가 파산하여 법원에 의해 매각을 당했는데, 이 교회당이 천주교 오렌지 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 변모될 것이라는 소식입니다. 저도 오래 전에 가보고 건물의 화려함에 놀랐었지만, 문자 그대로 미국을 넘어 전 세계 개신교회의 대표적인 건물입니다. 개신교의 대형교회를 메가 처치 (megachurch)라고 부르지만 주일 예배 참석률이 10,000명을 넘으면 기가 처치(gigachurch) 즉 초(超)대형교회라고 부르는데 수정교회는 기가처치의 원형을 이루는 교회였습니다.
설립자인 로버트 쉴러(Robert H. Schuller) 목사의 목회를 성공으로 이끌었던 메시지는 “네가 꿈꾸는 바대로 이루어지라” (If you can dream it, you can do it) 라는 ‘긍정의 힘’이었다. 그의 성공적인 목회신학은 남한에도 직수입되어 70년대의 소위 “잘살아보세”라는 새마을운동과 잘 들어맞고, 한국인들의 기복신앙과도 잘 맞물려 개신교 성장의 기폭제가 되었다. 예수만 믿으면 부자되고 성공하고 모든 병이 낫는다는 맹신 신앙이 퍼져나간 것이다. 강남대학교의 종교학 문영석교수가 지적한대로 결국 신은 인간의 현세적 성공과 번영을 위해 이용되는 도구 내지는 수단으로 전락된 것입니다.
작년에도 {긍정의 힘}이라는 제목의 조엘 오스틴목사의 책이 우리나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대형 교회를 열망하는 한국목사들은 이런 미국 대형교회목사들의 설교집의 열렬한 외판원이 되어 성서 대신에 아예 이런 책을 갖고 무슨 40일 고난주간 특별기도회 같은 것을 갖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그 책에 등장하는 웅장한 예배당과 각종 호화 설비와 많은 헌금이 나오는 대형교회를 이룩하는 것이야 말로 신자들에게는 이 땅에서 부자가 되고 성공하고 천국에 들어가는 증표가 된다고 은연중에 압박을 합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사회학자 피터 버거의 말대로 종교는 상품으로 신자는 소비자로 전락하게 되어 교회는 시장의 자본논리에 지배당하게 됩니다.
문영석교수가 수정교회와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비교하는 재미있는 글을 발표했습니다. 로버트 쉴러 목사는 2006년 은퇴하면서 교회를 먼저 아들에게 물려주었다가 이후 딸에게 넘어갔고 사위들까지 가세하여 갖가지 방법으로 돈을 챙기고 형제간 분란이 지속되면서 급기야 파산을 선언한 것입니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 또한 아내와 두 아들이 관계된 족벌운영과 교회의 사유화 논쟁 때문에 작년 4월 조용기목사가 신도들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로 사죄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쉴러목사와 조용기목사는 거의 동일한 시기에 목회를 시작했고 둘 다 비슷한 긍정의 축복신앙과 목회 전략으로 초초대형 교회를 만들었으며 서로 간에 친분도 깊습니다. 은퇴도 거의 비슷한 시기에 했고 양쪽 다 은퇴 후 자신들의 자녀가 연관된 교회의 족벌경영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예고하였듯이 하느님의 말씀에 위배하는 교회는 아무리 웅장하고 큰 건물과 성도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바벨탑은 결국은 무너진다는 사실과 그래서 어느 교회이든 보수든 진보이든 끊임없이 자기를 내어 놓고 개혁하지 않으면 그 또한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가르침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진리를 복잡하고 신비스러움에서 찾지만, 실상 진리는 단순함에 있습니다. 사람이 맛있다고 단음식과 콜라만을 먹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비만과 당뇨, 고혈압 등 갖가지 합병증으로 고생합니다. 영적 건강도 마찬가지이다.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성공신화 등 달콤한 간증만을 은혜로운 설교라고 아멘과 할렐루야를 외치며 좋아하고 사회정의나 개인의 윤리와 책임을 얘기하는 설교들은 쓴 소리로 멀리하면 결국 그 영혼은 병이 듭니다.
오늘날 남한교회의 부패와 타락은 대형교회에 몰입된 성장지상주의자들이 외치는 바 구원을 철저히 개인적이고 내세적이고 추상적인 상상물로 변질시킨 일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에게 있어 구원은 정반대로 철저하게 가난한 자와 갇힌 자와 억눌린 자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라는 지극히 사회적이고 현실적이고 정의를 실천하는 이 땅의 사건이었음을 향린교우들은 꼭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거부한 광야의 유혹에 빠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세례와 하늘 부름]
오늘은 주현절 후 첫 번째 주일입니다. 주현절은 주님께서 이 땅에 나타나셨다는 말입니다. 동방교회는 서방교회에서 중시하는 성탄절보다 1월 6일이 되는 주현절을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를 경배한 날로 여겨 더 중요시여깁니다. 그리고 주현절 다음 주일은 언제나 세례주일로 지킵니다. 세례는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종교적 예식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 동방교회들은 성탄절을 지켰는데, 그 축제 예식이 주로 강에서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천지창조 첫째 날의 얘기와 예수님의 세례 받는 장면의 얘기와 사도바울로가 에페소교회에서 예수 이름으로 성령세례를 베풀어 12명을 지도자로 세우는 장면의 얘기입니다. 곧 예수께서 12제자를 세워 옛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대신하는 새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부르셨듯이 바울사도는 이방인들을 위한 새로운 사역자로 12명을 세우신 것입니다. 오늘 우연하게도 집사 임명을 받는 사람들이 12명입니다. 오늘 본문은 모두 새 역사의 출발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래 오늘 올 한해동안 봉사할 청지기들을 새롭게 세우는 예식은 퍽이나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주보에는 올해 새롭게 임명을 받을 교사와 집사명단만 실렸지만, 본래 교사나 집사를 비롯한 성가대 예향 모든 부서 임원들이 1년직임을 감안한다면 모두가 새롭게 임명을 받는 시간입니다. 대표로 올해 교사와 집사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임명을 받는 것입니다. 교사직은 한 인간의 영혼의 앞날을 책임 짓는 매우 중요한 직분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신앙의 참 기쁨을 누려보려면 누구나가 교사를 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중학교 때부터 교사를 하였습니다만, 그때 제 인생의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교사는 젊은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나이가 많을수록 아이들의 교육에 더 좋습니다. 그래 서구교회는 머리가 백발인 나이 드신 분들이 교사로 봉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집사직은 교회에 3년 이상 열심히 출석하신 분들에게 주는 직분이지만, 자동직도 아니고 명예직은 더 더욱 아닙니다. 교회에 더 충성스럽게 봉사하고 책임감 있는 주인의 역할을 하라고 부르시는 하늘의 거룩한 직분입니다. 조금 있다 예식을 갖게 되겠지만, 하나만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집사님으로 감당하는 여러 일들이 있지만, 일 년에 6번 모이는 정기 제직회에는 빠짐없이 참여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매번 제직회가 모이면 참석인원이 작아 회의 정족수와 관련하여 종종 문제가 되어왔습니다. 목회실에서도 이 문제 때문에 매년 고민하여 왔고 올해는 제직회를 앞두고 문자를 보낼 예정이니 반드시 참석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정관에는 집사가 아니더라도 신도회 임원들에게도 제직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각 신도회 임원들도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논란을 거쳐 이 정관을 만든 의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향린교회가 진보교회로서 자유와 해방이란 단어를 자주 말하다보니 자기 편리한대로 믿는 것이 마치 자유인 양 착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자유는 하느님의 뜻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자기 책임을 다 한 후에 누리는 자유입니다. 개혁과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과 같이 보수적인 바리새인들보다 더 열심을 내야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는 종교적 열심은 말할 것도 없고, 더 나아가 사회정의에 대한 열심까지 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니 더 어려운 일입니다. 진보와 자유라는 이름하에 자기 편한대로 신앙생활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만약 자기 책임을 다하기 어려울 때는 공식적으로 잠시 휴무를 하고 그리고 다시 힘을 얻어 제직의 일을 맡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올해는 내년 교회창립 60주년을 앞둔 마지막 해입니다. 계획하고 있는 60주년 사업들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모든 교인들이 힘써 노력해야 합니다. 이제 앞으로 기념사업회에서 교우 여러분에게 소식들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할 때 적극 협력하여 주시어 향린교회가 지켜온 아름다운 향기를 계속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그중 가장 큰 일은 분가선교입니다.
[교회됨의 근본은 공동체]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이 그러했지만,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대교회는 공동체로 시작했다. 서로의 재산까지 공유하는 완전한 가족공동체였다. 이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이유였다. 이는 사유재산의 축척과 경쟁을 부추기는 로마 제국주의 경제구조에 도전이었다. 그래 초대교회에 대한 핍박의 원인은 종교적이라기보다는 로마의 지배체제에 대한 반발로 인한 정치적 핍박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런데 이러한 초대공동체의 평등나눔구조가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화함으로 국가 주도의 자본주의와 개인주의 방식에 잠식되어 버렸다. 그래 중세기에 교회는 국가권력에 못지 않는 엄청난 권력을 갖게 되고 엄청난 부를 소유하게 되어 결국 부패하게 되었고, 이로서 개신교가 생겨났다. 그러나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며 개혁을 외치고 나온 개신교도 여러 분파로 갈리고 산업혁명 이후 도시로 인구가 몰리면서 20세기 후반에 들어 초대형교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하여 권력과 부를 소유하게 되어 결국 부패하게 된 것이다. 교회가 커져서 큰일을 하겠다고 하는 꿈은 좋지만, 커서 부패하지 않는 교회는 역사상 존재한 예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교회는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딸과 아들로서 나눔과 평등이라는 가족공동체의 근본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
함께 예배를 드리는데, 옆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모른다.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건 이미 하느님 앞에 드리는 예배의 공동체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난 나의 구원만을 위해 믿고 오직 하느님만을 사랑한다. 그렇게 믿는 사람은 자기 골방에 들어가 하느님께 예배드리면 된다. 설교를 듣고 싶으면 아무 교회 인터넷에 연결하고 설교를 들으면 된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하느님 사랑이란 곧 이웃 사랑이라고. 그리고 그 이웃은 길에서 강도만나 신음하는 사람이고 그리고 그 이웃은 네 몸과 똑같이 평등한 위치에 있다고.
향린교회는 처음부터 12명이 한 울타리 안에서 기도하며 생활했던 초대교회 생활공동체로 시작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2년 만에 이 생활공동체는 더 이상 유지되지 못했지만 그러나 공동체 정신만은 우리 안에 계속 지켜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일환으로 교인 500명이 넘으면 분가를 하자고 했고, 이를 20년 전에 세상에 알렸다. 그리고 당시 부목사로 있던 김경호목사가 강남향린교회로 분가했다. 그러나 이때의 분가는 그 준비기간이 짧았고, 충분히 논의되지 않아 재정적 뒷받침만 하였지 실제 교인들의 분가는 거의 없었다. 실제적인 분가는 강남향린교회가 10주년을 맞아 약 3분지 1 교인들로 시작한 들꽃향린교회이다.
작년 11월 공동의회에서 우리가 결의한 분가는 근 10년 이상의 몸부림 끝에 내린 결정이다. 사실 시기적으로 말하면 세대 간의 소통이 안 되고 새 교우들의 정착율이 낮다는 얘기가 나온 2,3년 전에 이미 실행되었어야 옳았다. 시기적으로는 늦은 감이 있지만, 교인 대다수의 찬성으로 분가 결의가 된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다. 이제부터 우리가 할 일은 분가를 잘 진행하는 일이다. 현재 참가 희망자가 아이들까지 30명 정도이다. 30명이라고 못할 이유는 없지만, 애당초 계획했던 대로 100명 정도가 함께 하면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남아 있는 향린교회도 산다. 향린교회도 대형교회를 지향하지 않는다면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 그리고 이번에 진행되는 분가교회는 우리가 자매교회라고 말하는 강남향린교회나 들꽃향린교회, 들녘교회와는 그 관계의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다.
무슨 말인가 하면 향린교회와 분가교회는 마치 친정엄마와 시집간 딸이 서로 오고가듯이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김장김치도 담그면 나눠먹고 시골에서 곳감이 올라오면 나눠먹고 아이폰 작동법을 모르면 가르쳐주고 아이를 낳으면 공동양육하는 것과 같다. 그래 저는 분가를 하고나서 향린교회에 있는 분이나 분가교회에 나간 교인이나 일 년에 최소한 다섯 차례 이상은 서로 오고가며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고가야 그게 진정한 분가이지, 따로 떨어져 나 몰라라 한다면 그건 진정한 분가가 아니다. 이렇게 할 때 시너지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한 영혼 구원에 대한 깊은 갈망]
저도 미국에서 단독 목회를 처음 시작할 때, 부름 받아 간 교회의 첫 예배에 20여명이 모였었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내오면서 한 명 한 명 교인들이 불어나는 일에 온 교인이 정성을 들이고 기뻐했다. 바쁜 이민 생활에도 서로 집에 불러다가 저녁도 같이 먹고 때로는 어려운 가정에는 경제적 도움도 주고 정이 오고 갔다. 지금 우리에게 그런 열정과 정이 있는가? 별로 없다고 본다. 새 교우란 가정에 한 아기가 새로 태어난 것 같이 기쁜 일이다. 예수님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고, 잃어버린 한 마리를 구하기 위해 나머지 99마리를 남겨두고 갔다. 우리는 한 영혼의 소중함에 대한 가치를 잃어버렸다. 이는 향린교회가 공동체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유는 딴 게 없다. 크기 때문이다. 이민교회를 섬길 때에 저는 교인 집에 숟갈 몇 개있는 것 까지 다 알았다. 부부싸움이 일어나면 새벽 2시에도 나보고 오라고 했다. 향린교회 부부들도 부부싸움을 하겠지만, 부부싸움에 날 부른 적은 한 번도 없다. 좀 섭섭하다. 이건 여러분들이 저를 목자가 아닌 교회 CEO로 보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또 하나를 지적하면 장례식장이나 결혼식장의 교인들의 참여도를 보면,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과 오래지 않은 교인들의 차이는 너무 크다. 제가 올해 교회에 등록하지 2,3년이 된 교우 결혼 주례를 4번 했고 이를 주보에 알렸는데, 딱 한번 한 분의 장로님만 오셨다.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한 결혼식에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 교회라면 그건 이미 교회가 지녀야 할 공동체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건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교회가 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아들딸이 결혼할 때, 혹은 내가 결혼할 때, 교인들이 한명도 안와도 상관없다라고 생각하시면 괜찮지만, 그건 아니다라고 생각하신다면, 여러분 스스로가 반성해야 할 부분이고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과의 일대 일의 영적 관계를 잘 맺도록 하는 것은 물론, 교인들간의 수평적 관계를 잘 맺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바로 십자가의 수직과 수평이 만나는 점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한쪽으로 기울어 하느님과의 관계만 소중히 하고 교인간의 관계를 소홀히 하거나 교인간의 관계만 소중히 여겨 예배에는 참여하지 않고 친교시간에만 나오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분가는 이런 십자가성의 공동체성이 일어나지 않으면 계속해서 해야 하는 일이지 이번 한번만으로 그치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분가는 우리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도 분가로 유명한 교회들이 많습니다. 수만 명이 모이던 교회들이 8개로 나눠진 경우도 있고, 학교강당에서 수천 명이 모이던 교회가 대형교회를 세우는 대신 4개로 나눠진 경우도 있고, 어떤 목사님은 부목사로 하여금 교회를 개척하도록 하여 10개 이상의 분가개척교회를 이룬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모두 대형교회들의 경우이다.
[분가교회와 교계사회]
우리같이 700여명의 등록 교인 정도에서 분가하는 교회는 거의 없다. 물론 정기적인 출석 교인으로 따지면 절반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게 보면 아직 500명이 안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출석교인 500명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인가? 현재의 예배당 좌석으로는 불가능하다. 지난 3년간 교인은 계속 늘어도 출석교인이 제자리에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매주일 모임마다 공간이 없어 애를 먹고 제 방은 매주일 주일학교의 분반공부 교실로 월례회 모임 장소로 월쑤 연습장소 그리고 당회로 계속 이용되고 있다. 공동식사를 할 때 앞사람과 편하게 얘기할 시간도 없이 다음 사람을 위해 빨리 일어나야 하는 형편이다. 그러면 2부 예배를 드릴 것인가? 현재도 옆에 앉은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판에 만약 1부 교인, 2부 교인이 나눠지면 그야말로 이는 두 개의 교회로 더 붐비게 되고 결국은 평신도교회로서의 역할은 끝나고 만다. 집에 사람이 많아지면 집을 넓히든가 아니면 분가하는 것이 수순이다.
현재 기장교단을 비롯한 남한의 진보기독교진영에서는 향린교회가 어떻게 분가교회를 이루어 가는지를 매우 주시하고 있다. 우리가 잘만 행한다면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우리 교회의 크기에 해당하는 교회들이 교회당 크게 짓는 일보다 분가하는 쪽으로 선택할 것이다. 우리가 20년 전에 시작한 장로 임기제를 당시에는 모든 교회들이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지만, 지금 많은 교회들이 도입하였고, 또 도입하고자 하고 있다. 이에 관해 계속 문의가 들어온다. 장로임기제로 교회 문제는 없는가? 재신임 받을 때에 떨어지면 교회에 분란이 생기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발생했다면 다른 교회들이 따라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혜롭게 성숙한 신앙으로 이를 잘 극복해가고 있어 좋은 본이 되고 있습니다. 현재는 총회법이 70세 종신제를 선택하고 있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총회법도 바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회가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분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좋은 선례를 남겨야 한다. 임기제와 향린공동체 예배와 들녘교회와의 도농교류가 다른 교회들에 좋은 본이 되듯이 분가교회도 좋은 선례를 남겨야 합니다.
[작은공동체의 활성화]
담임목사로서 분가선교 외에 목회적으로 고민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그건 어떻게 하면 우리 안에 가족적인 친밀감을 높일 수 있을까하는 작은공동체 형성의 문제이다. 7,80년대만 해도 구역예배가 매우 성행했다. 주로 낮에 주부들의 모여 삶을 나누고 전도에도 매우 효과가 높았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이 맞벌이를 하고, 직장 또한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해야 하고 그리고 주말에는 자녀들의 뒷바라지로 인해 이제는 구역예배는커녕 심방 또한 힘든 상황이 되어버렸다. 더구나 패이스북 세대의 젊은이들은 이런 구역예배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다. 10년 전 제가 처음 부임했을 때부터 참여도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래 몇 년을 고민한 끝에 4년 전에 {평화나눔작은공동체}라는 새로운 조직을 통해 소모임을 활성화시켜나갔다.
그중 장애우 어르신 목욕봉사 나간이, 무지개사람들, 역사와 사회의 비판적 탐구, 향린봉사단, 환경 농촌, 얼쑤들은 지금도 활발한 모임을 갖고 나름대로 좋은 결실을 맺어가고 있고 나머지 두 세 개는 올해 휴식기간을 가질 예정이다. 수고하신 담당 장로님들은 물론이고 신앙과 문학을 담당하여 주신 김태준집사님, 신앙과 과학 모임에 귀한 강좌를 베풀어주신 최무영교수님, 노경선집사님 그리고 통일모임을 인도하여 주신 강영옥장로님께 특별히 감사를 드리고 강정구교수님도 건강을 빨리 회복하시어 다시 모임을 이끌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에 역사비판 강좌가 시작하면 특별히 젊은 분들이 많이 참여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새로운 요구에 따른 목회 계획]
지난 번 분가교회 목회 방향에 대해 설문조사를 하였을 때, 상당수의 교우들이 응답을 하였는데, 그중 가장 많이 나온 단어는 끈끈한 가족공동체, 치유와 영성훈련, 다양한 형식의 열린 예배, 세대간 소통, 그리고 2박 3일간의 수련회였습니다. 저는 이런 요구를 충족시킬만한 새로운 형식의 작은공동체로서의 만남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가진 단식영성훈련은 예년에 비해 참석자가 그 배에 달했는데, 대다수가 처음 하는 사람이었고, 젊은이들이였습니다. 사실 한 끼를 굶는 일도 쉽지 않거늘 기도원이나 단식원에 가지 않고 직장 일을 계속 하면서 5일을 굶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우선은 굶는 일 자체도 어렵지만, 직장동료들에게 단식중이라 알리기도 힘듭니다. 왜냐하면 약간 이상한 보수교인으로 보는 것이 현대 사회의 풍조이거든요. 그래 어떤 교우는 연초 회식자리에서 다음날 대장검사를 한다고 얘기하고는 먹지를 않았는데, 그것도 4일째라 가장 힘든 날이었지요. 그리고 밤 늦게 집에 왔는데, 술자리에는 꼭 와야 한다고 해서 다시 갔는데, 새해 다짐할게 많아서 그랬는지 무려 5차까지, 새벽녘이 밝아올 때까지 쫓아다녀야 했는데, 계속 물만 마셨다는 겁니다. 동료들이 지독하다고 했다는데, 제가 보니 얼굴이 순하시어 전연 지독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다만 새로운 영성에 대한 갈망이 그를 그렇게 견디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술자리에서 곧장 교회 새벽 기도회 모임에 참석하셨습니다. 젊은 세대들의 영성에 대한 욕구가 높은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습니다.
저도 지난주에는 교회협의회나 서울노회나 신년하례예배로 모입니다. 가면 식사가 준비됩니다. 그런데 제가 먹지 않고 가니 동료들이 묻습니다. ‘단식중이다’ 그러니까 ‘대뜸 교회에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교회가 심각한 문제에 부딪히면 금식기도를 하는 것이 목사들의 일반이기 때문입니다. ‘아니다. 그게 아니고 매년 연초에 교인들과 함께 하는 영성훈련이다.’ 그러니까 모두 놀래요. 아니 향린교회가 영성단식훈련을 하다니. 대체로 향린교회는 무슨 거리 시위만 참여하는 교회로 알고 있지요.
예전에 저의 설교비평을 했던 정용섭목사도 그런 시각을 갖고 있었습니다만, 선입견 편견이라는 것은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평택 대추리에서 부활절 새벽녘 조만간 미군군사기지로 변할 광활한 농토를 바라보면서 교우들과 함께 마을회관 뒷벽에 서서 새벽의 찬바람을 피하면서 가졌던 성찬예식, 곧 예수님의 살과 피를 나누었던 거룩한 시간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단순히 정치군사적 대결의 현장이 아니라, 생명과 평화를 향한 예수의 꿈을 나누는 민중사건의 현장이었습니다. 지금 대부분의 교회들은 예수가 가졌던 갈릴리의 민중현장을 다 잃어버리고 여전히 건물 안에서의 찬양과 경배의 예배만을 예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부활의 몸, 현장교회로서의 말씀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향린교회가 현재 강조하고 있는 이 땅의 고통당하는 민중들과 함께 하는 사회선교를 계속 지켜가면서 동시에 새로운 욕구 곧 끈끈한 가족공동체와 치유와 영성의 훈련과 다양한 형식의 열린 예배와 교인간의 세대간 소통이라는 이 네 개의 화두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방식이 어떤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머리에 정리된 것이 있습니다만, 분가교회가 싹을 틔우고 나서 3월경부터 일단 작은 규모로 실험적 형태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그때 가서 다시 여러분에게 자세하게 알려드리겠습니다.
또 올해는 구역조직을 대신하여 신도회가 보다 잘 활성화되도록 노력하고자 합니다. 교우들께서도 1년에 6차례 모이는 신도회 모임에는 빠짐없이 참석을 하고 임원들은 자기 신도회에 속하는 모든 교인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해서 참여를 독려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각 신도회에서는 각 부서에 회원들을 파견하여 교회 일에 적극 참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회선교에 있어서는 한미 FTA나 재능교육사태 등 여러 사회적 현안문제에 있어서는 그때그때 유관단체와 함께 야훼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행동들을 꾸준히 하게 되겠지만, 향린교회 방북단을 구성하고 평양봉수교회를 방문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깊은 교제를 통해 민족화해와 통일운동에도 기여하는 교회가 되고자 하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올해 기장 총회는 ‘주여 이땅을 고치소서’라는 주제로 환경문제에 주력합니다. 그래 여기에 발맞춰 매주일 주보 앞면에 우리가 교회나 가정에서 한주가 동안 지켜 행할 실천사항들을 명시합니다. 오늘은 {비닐없는 주일}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좋은 제안이 있으면 목회실로 연락주시면 이를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불과 성령]
오늘은 세례주일입니다. 예수께서 요단강에 나아와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아 물 속에서 나올 때,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옵니다.” 이는 하늘이 감동하는 우주적 사건임을 고백하고 있으며 그래서 세례 요한은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예수께서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은 더러움을 씻어내는 역할을 하지만, 불은 태워버립니다. 완전한 회개를 말합니다. 성령 곧 거룩한 하느님의 영으로 새로워지는 새 인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에 의한 새 인간은 곧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전연 새로운 가치와 새로운 꿈을 갖고 나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래 새것이 되었도다하는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이 에페소교회에서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다시금 예수의 성령 세례를 베푼 것은 그들에게 새 시대를 열어가는 꿈과 비전 그리고 열정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12명의 교인들이 성령 세례를 받고 이상한 언어로 말을 하고 예언을 하였다는 말은 요즘 교회에서 말하는 교인간의 구별을 짓게 만드는 방언이 아닙니다. 이는 사도행전 2장에서 이미 저자 루가가 말했듯이 다른 언어를 쓰는 인종과 민족의 벽을 깨고 세상을 평화와 생명의 하느님 나라로 만들어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언 또한 이 시대를 치유하기 위한 하느님의 공의로운 말씀을 선포하는 행위입니다. 곧 성령 세례는 모두를 화해하게 하고 소통하게 하고 하나 되게 하는 평화의 세례를 말합니다.
세상을 향한 예언과 세상과 소통하게 하는 성령의 은총이 이 시간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우주의 첫날은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한처음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다.” 그때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고 그 빛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 저는 오늘 향린교회가 이 남한 사회에서 새 시대를 열어가는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빛의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