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 42:1-9 ; 고전 13:11-13 ; 마가복음 5:1-10


주여, 이 땅을 고쳐주소서.

인 금 란목사(여신도회전국연합회총무)


‘누가 세월의 한 허리를 잡아 새해라 했던가?’노래한 시인이 있습니다. 어제와 오늘이 같은 시간인 것 같지만 보낼 것은 세월의 강에 흘려보내고 새롭게 다시 시작하라고 매듭지운 시간이 이만큼 흘렀습니다.


오늘은 장로교의 모든 교회들이 여신도회주일로 헌신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몇 차례의 청원과 부결이 거듭되다가 1937년 총회에서 결의되어 매년 1월 셋째주일을 여신도회 주일로 지켜 오고 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교회와 가정을 살려내는 제자직을 잘 감당해 오신 향린 공동체의 여신도 회원들의 헌신과 기도를 하나님께서 위로하시고, 염려되고 흔들리는 이 사회가 여러분들로 인하여 바로 세워지기를 다시 결단하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기장총회는 제 96회 총회 주제를, 2011년을 보내며 생태계의 파괴와 4대강 사업, 구제역, 일본의 쓰나미와 원전폭발로 세상 모두가 치유받아야 함을 절실히 여겨 ‘주여, 이땅을 고쳐주소서.’라고 정했습니다. 여신도회도 특별한 행사를 앞에 두고 있지 않으면 총회의 주제를 따르거나 부제를 붙이기도 하면서 함께 갑니다. 목회자들이나 여신도회원 간의 소통문제도 있고 대부분 회원들이 복잡하게 여겨서입니다. 2012년 표어를 정하면서 성경 본문 선택과 어휘사용에 있어 약간의 이견이 있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제목은 그대로 가고, 오늘의 본문은 제가 택한 본문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고친다는 말은 질병을 고치거나 개선시킨다는 뜻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요즈음에는 고친다는 말보다 좀 더 넓은 개념으로 치유(healing)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인간의 몸과 마음과 정신의 온전한 회복이었습니다. 주님은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들의 말에 마음을 열고 즉시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구조를 회복시키는 일에 관심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일을 혼자 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을 부르셔서 거듭 가르치시고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을 이해하는데 더딥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도, 죽음의 길을 걸으실 때도, 죽기까지 함께할 만큼 주님을 알지도 못했고 용기도 없었습니다. 주님이 돌아가시자 ‘그래 그분은 하나님의 뜻을 온몸으로 사신 분, 하나님의 아들이었어.’ 깨닫고 제자들의 복음은 길은 시작됩니다.


주님 일행이 바다 저편 거라사 지역으로 갔습니다. 그날은 많은 사람들을 앞에 두고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스스로 자라는 씨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를 가르치시고,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설명해 주셨습니다.(4장34절) 그리고 저녁에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고 하셨고, 제자들은 따르던 무리들을 뒤로 하고 주님을 모시고 바다 저편으로 갑니다.

그런데 그만 거센 바람이 일고 파도가 배안으로 덮치고, 물이 배에 가득 합니다. 서둘러 주님을 찾는데 세상에, 그 분은 뱃고물에 누워 주무시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에 제자들의 반응이 원색적입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말에 뼈가 있습니다. 짜증과 불만이 잔뜩 밴 말투로 예수께 화를 냅니다.

아, 그러고 보니 제자들은 처음부터 이 뱃길 이 탐탁치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다 저편이란 거라사, 곧 이방인의 땅입니다.

스승을 이해하는데 아직 초보자들입니다. 유대인 보다는 이방인을, 모범적인 맏아들보다 방탕한 둘째 아들을, 경건한 바리새인보다 그들이 더럽게 여기는 세리와 창녀들을 먼저 돌보고 챙기는 스승의 사랑방식이 아직 불편합니다.


‘가자, 건너가자! 이방 땅에도 새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거기 있다.’ 그들을 향해 가는 발길이 제자들은 불만입니다. 지금 여기에 이토록 많이 몰려온 우리 유대인들은 어쩌시려고. 거룩한 선민은 제쳐두고 돼지같이 불결한 인간들에게 가는 의도는 무엇인가.


굳이 성난 바람이 불지 않았더라도 제자들의 마음은 충분히 요동쳤을 것입니다. 뼛속 깊이 박힌 유대인의 우월감과 이방인에 대한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기에.....


성지순례를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갈릴리 호수가 거리도 그렇고 파도와 풍랑으로 배가 뒤집힐 정도는 아닙니다. 그리고 뱃길에는 제자중 선수들도 있어 배가 뒤집힐 날이라면 제자들이 극구 말렸겠지요. 그래서 이 사건 역시 새로운 길을 향한 캄캄한 두려움, 새 세상을 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비유로 해석을 하게 됩니다. 거라사 지방으로 가자는 주님의 말에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제자들로서는 건너야할 바다가 따로 있는 셈입니다.


주님 일행이 배에서 내리니 무덤에서 사는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 하나가 주님을 만납니다.


죽음으로 모는 삶, 미치게 만드는 삶, 쇠고랑과 쇠사슬로도 제어가 안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는 소리를 질러 대고, 돌로 제몸에 상처를 내며, 비참하게 나날을 보내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통제할 수 없고 악령이 자리하면서, 그를 지배하고 마음대로 조종합니다. 악령들에 의해 산산조각 난 그의 내면은 인간의 삶을 살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 안에서도 종종 이런 세력을 대하게 됩니다. 악한 상황과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을 때, 우리의 내면이 갈라지고 우리 자신의 삶을 갈수록 다스릴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을 사로잡는 세력들은 다양합니다. 불안, 통제를 잃어버린 충동, 욕심, 이기심, 악습, 내 힘으로는 어찌해 볼수 없는 사회구조 등등, 자신의 본래 모습에서 멀어지게 하고 주님을 향한 발걸음을 더디게 하고, 머뭇거리게 하는 힘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의 생각의 바탕은 무엇인가? 나를 다스리는 힘은 무엇인가? 나 자신의 충동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나의 인격 전체가 그 충동에 의해 행동하고 있는가? 평화를 누리는데 방해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가 멀리서 예수님을 보았을 때, 그는 예수께로 달려갑니다.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그의 행동과 말은 서로 모순입니다. 하지만 우리도 그렇게 말과 행동이 모순되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 앞에서 무릎을 꿇면서도 다른 태도를 취하는 요소들이 우리들에게도 많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평생 부르며 사는 우리도 내가 이전부터 갖고 있던 문제들을 여전히 내려놓지 못하면서, 버려야 될 아집, 편견, 욕심을 버리지 못하면서, 온전한 인격으로 성숙하지 못하면서, 자유로운 한 인격체로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서, 주님을 안다고 합니다.

함께 울어주고, 풀어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고, 내 말좀 들어달라는 사람이 있는데 귀막고 눈감아버리는 우리들의 모습이 있지 않습니까?


주님이 그에게 물으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주님은 이 물음을 통해 그의 내면에 가까이 들어가십니다. “너는 너 자신을 스스로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질문을 받은 그는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이는 나 자신은 자신이 아닙니다. 나는 분열되어 있습니다. 그 분열된 수가 너무 많아 이미 인간의 모습이 아닙니다. 나를 얽매고 있는 버릴 것들, 악의 세력이 얼마나 많은지, 나를 온전케하지 못하는 장애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의 현실을 보게 됩니다. 때로 소리도 지르고, 간섭받기도 싫고, 제 스스로 상처를 긁으며 다른 이에게 상처도 주며 그렇게 살아갑니다. 이런 자신을 뛰어 넘어야하는 일이 괴롭습니다.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자신의 힘으로 극복하고 온전해지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와 결합되어야 하고 그분께서 우리의 삶 한가운데로 들어오시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혼란스럽게 하고 파괴시키는 것, 우리 삶을 분열시키는 것,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우리 자신을 무덤으로 끌어내리는 것을 주님께 맡길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이 모든 것을 당신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고, 스스로 살아가는 삶으로 되돌려 놓으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누르고 매고 있는 것들을 드러낸 그는 온전한 제정신이 되어 지금까지 단절되었던 인간 공동체의 구성원이 됩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미 바다 저편으로 가는 배위에서 갑작스런 공포를 겪은 제자들, ‘왜 그렇게 겁이 많으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고 책망 받은 제자들은 이 사건을 통해 또 한 단계 파스카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아마도 주님은 ‘자고 있는 나를 깨우지 말고 너희 믿음을 깨워라.’고 말씀하시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계속되는 사건을 통해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새 시대를 열어 가는 하나님 나라의 제자직을 훈련시키십니다. 이제 제자들은 인간들을 비인간화 시키는 제도와 이념의 숨결로부터 그들을 “사람”으로 회복시키는 주님의 뜻을 조금씩 이해해가며 기존 사회의 울타리 밖으로 밀려난 이들을 향한 눈이 조금씩 뜨이게 됩니다.


이제 앞으로 전개될 예수님과 함께 가는 길은 단순한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사회 구조와 종교적 제도, 로마 제국의 거대한 군사적 점령과 그에 따르는 경제적 수탈로 참담한 사람들의 삶을 회복시키는 일임을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할 때까지 기적사건과 제자훈련은 계속되었습니다.


저는 가끔 나이드는 것에 대해 생각합니다. 십대 후반에는 12월이 되면 한 해를 보내는 것이 안타까워 밤새워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곤했습니다. 20대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하다 시간을 다 보낸 것 같습니다. 힘들어 하는 저를 허병섭 목사님께서 데려 가셔서 동월교회야학으로, 청계 피복 야학, 서울성남교회의 야학을 거치며 어려운 사람들과의 연대를 경험했습니다. 고달프게 중학교 국어교사가 되었는데 3년을 넘기니 이 길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삼십을 넘기며 자신에 대한 책임과 신뢰를 찾게 되고 인생의 바다 저편으로 항해하게 되었지요. 김포교통이라는 운수회사에 들어가 버스 안내원들의 사감이 되었습니다. 삶의 자리가 달라지고 260명이 머무는 기숙사에서 함께 먹고 자는 일이 쉽지 않아 힘이 들었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일도 수시로 벌어졌지만 그들과 소통이 되고 진한 관계가 되니 참 좋은 시간이었다는 추억으로 남습니다. 사십이 되니 하는 일은 분주하고 거센 풍랑이 부는데도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어요. 50대를 살아가며 더 행복합니다. 공자님이 이래서 지천명이라 하셨던가? 말씀을 묵상하고, 깨닫고, 삶에서 실천하는 일이 편해졌습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고, 뒤집고, 기고, 앉고, 서고, 걸음마를 하듯이 우리 신앙의 단계에도 과정이 있더라구요. 매듭이 있어요.


‘너희는 그렇게 알고 있느냐?’ ‘너희는 그렇게 들었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산상수훈의 말씀이 도무지 실천이 되지 않는 말씀이 많았거든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 겉옷까지도 내어 주어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같이 가주어라’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 마음이 열려 주님의 말씀이 가슴속에 사무칠 때, 저의 선택이 달라졌습니다.


온전함에 이르려면 길이 아직 멀었지만 이만큼만으로도 행복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향린교회는 기장만이 아니라 세계교회의 모델입니다. 향린교회가 존재함으로 기장의 정체성을 다시 보게 되고, 향린교회 때문에 교회의 존재를 확인하게 됩니다. 여신도회 서울 연합회의 총무를 지내고 서울 노회 회원의 한사람으로 저는 그렇게 인정합니다.


이는 60년의 역사를 거치며 향린의 공동체가 정의와 평화, 연대와 나눔의 영성을 쉬임 없이 키워온 결실이라고 믿습니다. 함께 일하는 후배가 어느날 묻습니다. “총무님 존경하는 목사님이 누구셔요?” 저의 대답은 “몇분 계신데 향린의 조헌정 목사님” “왜요?” “조목사님은 주님이 계셔야할 자리, 내가 가고 싶은 자리에 항상 먼저 가 계시거든.. 허긴 목사님 그 자리에 가실 수 있도록 함께 하는 향린 교인들이 훌륭하지..”
쑥스럽지만 이 자리에 섰으니 말씀드립니다. 물론 그때는 여신도회주일 예배를 여러분과 함께 드릴 계획이 없었습니다.

FTA시위 현장에, 용산 참사 현장에, 대추리 현장에, 정신대 집회 현장에... 수도 없이 많은 눈물과 아픔, 죽음의 현장에 여러분이 계셨습니다.


더 많이 더 크게 교인을 늘리고 교회를 건축하는데, 향린은 몸집을 줄여야 한다고 분가교회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새로 시작하는 교회를 택하는 일이 선뜻 내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본토 아비집을 떠났던 아브라함보다 더큰 결단일 수도 있습니다. 길 떠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었듯이 분가교회를 또 하나의 향린 교회로 세워 가실 것을 믿습니다. 임보라 목사님을 분가 교회의 목사님으로 택하신 것도 향린이기 때문에 있는 일입니다. 여목사의 한사람으로 그일도 감사하고 감동입니다.


오늘 이사야 선지자는 향린 공동체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종을 보아라. 그는 내가 붙들어주는 사람이다. 내가 택한 사람,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가 뭇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쇠하지 않으며 , 낙담하지 않으며, 끝내 세상에 공의를 세울 것이니 먼 나라에서도 그의 가르침을 받기를 간절히 기다릴 것이다.

“나 주가 의를 이루려고 너를 불렀다. 내가 너의 손을 붙들어주고, 너를 지켜주어서 너를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할 것이니 네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감옥에 갇힌 사람을 이끌어 내고 어두운 영창에 갇힌 이를 풀어줄 것이다.”


소떼를 몰고 청와대로 향하는 농민들의 분노의 함성이 뜨겁습니다. ‘오죽하면 저런 선택을 할까’


동료의 폭력에 시달리던 중학생이 생명을 놓아버렸습니다. 담임선생님 “혼자 울고 있었어요. 그때 왜 우느냐고 다가가 말을 걸지 못한 것이 이렇게 후회가 될 수가요”


OECD국가중 자살율 1위 나라, 하루 평균 50여명(2009년도 통계 42.2명)이 자살을 하는 나라가 이나라입니다.


우리는 지금 세상의 모든 가치를 돈으로, 힘으로 지배하려는 살벌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이들도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생명이 파괴되고, 공동체가 무너져도 내 밥그릇만 넉넉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향린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정의가 먼저입니다.


세상은 행복은 남과의 경쟁에서 이기는데 있다고 말합니다.


향린 공동체는 서로 소통하며 가엾게 여기고, 기다려 주고, 일으켜 주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택합니다.


가장 여린 생명 하나도 소중하고 나눔, 돌봄, 섬김이 가장 아름다운 가치라고 말합니다. 전쟁이나 폭력, 학대, 착취를 버리고 상대방의 필요에 응답하는 것이 참 평화의 길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길을 따라 걷는 용기, 그것이 영적인 담대함입니다.


뒤쳐진 이들, 넘어진 이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위로하고 회복을 돕고, 일으켜 세워주고, 함께 걷는 이들, 이들이야말로 생명의 길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살다보면 존재의 터전이 흔들리는 상황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비틀거리면서라도 다시 그 길을 걷는 것, 그것이 용기이고 믿음입니다. 다시 일어서는 사람을 잡아주고 함께 가는 동안 자신들이 치유되는 경험을 하게 되고 새벽이 밝아옴을 아는 이들은 행복합니다.


하와의 뜻은 생명입니다.


오늘 헌신의 제단을 쌓는 우리 하와의 후예들이/ 생명과 평화의 세상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가슴에 품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땀 흘린다면 아무리 힘겨운 삶이 우리를 기다린다 해도 우리는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가슴에 사랑과 평화의 샘물이 고이면 그것을 퍼다가 지친 영혼들에게 나누기를 소망합니다.


삶에 지친 이웃들이 우리 때문에 살맛을 되찾을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생명과 평화의 축제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땅위에 심겨진 생명나무로, 이땅을 치유하며 공동체의 모습을 회복시키는 하와들입니다.


주님을 모신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어 자신 안에 있는 생명력으로 주님께 응답하고 결단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맹목적으로 단순히 의존만하는 무력한 사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바 된 그것을 위해

남들은 익숙하지 않아 걷지 않는/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이루는 길을 스스로 걷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2012년 주님의 뜻을 받들어 자신과 공동체를 치유하고 새생명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시는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독일의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전쟁을 일으키고 수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했을 때 90%의 독일교회가 침묵했습니다. 10%의 교회를 이끈 지도자 디트리히 본훼퍼, 예수님의 제자직을 감당하기 위해 활동하다가 감옥에서 39세의 나이로 처형당했습니다. 본 훼퍼 목사님의 ‘나는 누구인가?’ 시를 낭독해 드립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감방에서 나오는 나의 모습이

어찌나 침착하고 명랑하고 확고한지

마치 성에서 나오는 영주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간수들과 대화하는 내 모습이

어찌나 자유롭고 사근사근하고 밝은지

마치 내가 명령하는 것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불행한 나날을 견디는 내 모습이

어찌나 한결같고 벙글거리고 당당한지

늘 승리하는 사람 같다는데

남들이 말하는 내가 참인가?

나 스스로 아는 내가 참인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하고 그립고 병약한 나

목 졸린 사람처럼 숨을 쉬려고 버둥거리는 나

빛깔과 꽃, 새소리에 주리고

따스한 말과 인정에 목말라하는 나

방자함과 사소한 모욕에도 치를 떠는 나

좋은 일을 학수고대하며 서성거리는 나

멀리 있는 벗의 신변을 무력하게 걱정하는 나

기도에도, 생각에도, 일에도 지쳐 멍한 나

풀이 죽어 작별을 준비하는 나인데

나는 누구인가?


이것이 나인가? 저것이 나인가?

오늘은 이 사람이고 내일은 저 사람인가?

둘 다인가?


사람들 앞에서는 허세를 부리고

자신 앞에선 천박하게 우는 소리 잘하는 겁쟁이 인가?

내 속에 남아있는 것은

이미 거둔 승리 앞에서 꽁무니를 빼는 패잔병 같은가?

나는 누구인가?


으스스한 물음이 나를 조롱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당신은 아시오니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오, 하나님!


1주일후 히틀러는 실권하게 되고 20일후 히틀러는 자살합니다.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