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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어부
호세야 3:1-5, 10; 시 62:5-12; 고전 7:29-31; 막 1:14-20
마르코복음서는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쓰인 책입니다. 그의 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 복음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좋은 소식 혹은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유앙겔리온이라는 이 희랍어 단어는 당시 일상적으로 쓰는 단어입니다만, 이를 하나의 문학의 장르로 만든 사람은 마르코입니다. 마르코 이래로 예수님의 생애 그리고 그의 죽음과 부활을 말하는 글들을 복음서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마르코에게 있어 도대체 무엇이 기쁜 소식이었을까요? 흔히 학자들은 마르코가 쓴 복음서는 예수의 수난사라고 말합니다. 마태나 누가가 전하는 탄생 얘기도 없고, 자라나던 과정에 있었던 일화도 없으며, 예수님의 비유 말씀이나 지혜의 말씀에 관해서도 별다른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예수께서 어떤 일을 하시다가 정치종교 권력집단에 어떤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얘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래 요한복음이 말하는 3년이라는 예수님의 복음 운동의 시간도 6개월 아니 3개월 정도로 축소가 되어 있고,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를 연결하는 시간 부사는 ‘즉시로, 곧, 다음 날’ 등등입니다. 매우 급합니다. 딱 한번 사용된 가장 긴 부사가 ‘엿새 후에’ 입니다. 마르코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갈릴리 근방에서 몇 개월의 짧은 시간동안 하느님 나라 운동을 펼치시다 유대교의 최대 명절인 애굽으로부터의 노예 해방을 기념하는 과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는데, 그것이 그의 삶의 마지막입니다.
[복음의 실체는?]
그런데 마르코는 그 한 분의 삶과 수난과 죽음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이를 ‘기쁜 소식’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예수의 죽음이 어떻게 해서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인가요? 죽음 이후에 있는 부활이 있어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인가요? 아니면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가 씻음 받았다는 대속 때문에 기쁜 것인가요? 사실 마르코의 원 복음은 16장 8절로 끝나는데, 여기에는 부활예수가 제자들에게 나타난 기록이 없습니다. 단지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에게 흰옷을 입은 한 젊은이가 예수는 살아나셔서 먼저 갈릴리로 가셨다는 얘기를 전할 따름입니다. 또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대속의 얘기는 마르코복음서에서는 거의 없습니다. 설사 부분적으로 있다 하더라도 어떤 한 사람이 자기 죄로 인해 대신 죽는 것을 ‘기쁜 소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이기적이고 유아적인 발언입니다.
물론 폭넓게 이해하면 기쁜 소식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길이 열린 것을 두고 한 말은 분명한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기쁜 소식이라고 하는 것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기쁜 소식입니까? 오늘 설 명절에 교회에 오신 것은 그런 기쁨의 소식을 듣고자 오신 것 아닌가요? 막연하게 우리의 머리 속에서가 아니라 분명하게 성서의 말씀 속에서 찾아내야 하겠습니다.
복음이라는 단어가 오늘 본문에 두 번 나옵니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하느님의 복음 곧 하느님의 기쁜 소식. 그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에서 ‘이 복음’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만약 이 실체가 교회가 지금 고백하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면 예수께서는 ‘이 복음을 믿어라’ 하고 말하는 대신에, ‘회개하고 나를 믿어라’ 이렇게 분명하게 선포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복음의 실체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은 후대 교회에서 신앙고백 차원에서 하는 말이지, 지금 마르코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나 예수님의 의도는 아닙니다. 오히려 마르코는 맨 처음에서 말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둘러싼 그 무엇,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일어나는 어떤 변화를, 복음 곧 기쁜 소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계되어 일어나는 어떤 일들이 왜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야 말로 우리의 신앙을 살아있게 만드는 질문입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의 실체로 대체하고 이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는 일이 신앙생활의 전부인양 믿는 교리적 고백이야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오늘의 교회를 값싼 은혜의 도피처로 전락시킨 주범이라고 봅니다.
[상황 말씀의 바른 이해]
이러한 자기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오늘의 말씀 첫 절을 천천히 읽어 보십시다. 이 14절 구절은 예수님의 사역 전체를 핵심만 붙잡아 요약해놓은 가장 중요한 구절입니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는 예수님께서 직접 외치신 말씀이고 이 말씀을 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을 설명하는 상황 말씀이 앞서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직접 외치신 그 말씀에 일차적 관심을 갖게 됩니다만 그러나 그 말씀을 담고 있는 상황 말씀을 바로 이해할 때 그 말씀은 진정 살아있는 말씀이 됩니다.
[요한이 잡힌 뒤에]
먼저 예수 말씀을 설명하는 상황 말씀을 보면 첫째는 ‘요한이 잡힌 뒤에’입니다. 이 말을 빼고 그냥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셨다.’ 해도 전연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마르코가 이를 덧붙이는 것은 분명한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요한은 누구입니까? 마르코는 말하기를 요한은 예수님에 앞서 보냄을 받고 예수의 길을 미리 닦는 사람이었으며, 백성들에게 회개를 외치고 세례를 베풀었던 하느님의 예언자이다. 그는 낙타 털옷을 입고 가죽 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 꿀을 먹으며 광야에서 살아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기사를 보면서 요한은 매우 생태적으로 자연친화적으로 살았구나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의 독자들은 이 글을 읽으면 대번에 아하 그는 엘리야 선지자가 다시 나타났구만 하고 생각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누구입니까? 그는 세례요한보다 900년 전 사람으로 북왕국 이스라엘의 절대 군주였던 아합왕과 그의 사악한 이방 왕비 이세벨과 대적했던 사람입니다. ‘벨’이라는 이름이 이미 이방신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아합 왕은 북왕국 역사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번영한 국가를 이룩했던 왕입니다. 인간 역사에서 어느 개인이나 어느 국가나 항상 그러하듯이 물질적 풍요는 더 큰 탐욕을 불러일으키고 이는 필연적으로 부정과 부패를 가져옵니다. 결국 풍요를 누렸던 아합 시대의 백성들은 안식일과 희년법의 근간이 되는 약자보호라는 정의로운 야훼 하느님 대신 재물과 권력의 바알 신을 좇아 끊임없는 욕망의 길로 빠져들었습니다.
엘리야는 바로 이러한 오늘날 표현으로 말한다면 1%가 99%를 지배하도록 만드는 부패한 국가권력에 저항한 사람입니다. 단순히 저항한 사람이 아니라 아합의 뒤를 잇는 새로운 왕을 기름부은 사람이었고, 단순히 유대왕뿐만이 아니라 이웃 왕국의 왕까지도 기름부었던 새시대를 열어간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바로 이러한 엘리야의 예언자적 저항과 비판정신 그리고 새시대를 여는 사람이었고, 예수 또한 바로 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그리고 이 요한이 헤롯왕의 비행을 공개적으로 비판함으로 옥에 갇히자 그의 뒤를 이어 세상에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이 잡힌 후에’라는 말은 예수님 또한 요한과 같이 정의롭지 못한 세상의 권력을 비판하고 새로운 역사 곧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새우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는 말입니다.
[갈릴리에 오셔서]
그리고 두 번째로 나오는 상황 말씀은 ‘갈릴리에 오셔서’입니다. ‘요한이 잡힌 뒤에’라는 단어를 빼도 상관이 없듯이 ‘갈릴리에 오셔서’ 라는 말을 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외치시는 말씀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라는 말씀이 지역에 영향을 받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갈릴리에서 외치든 유다에서 외치든 예루살렘에서 외치든 내용이 달라져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마르코는 굳이 ‘갈릴리에 오셔서’라는 장소의 단서를 붙이는가? 그 당시 갈릴리는 어떤 땅이었든가? 당시 팔레스타인 땅은 크게 3부분으로 나눠집니다. 북쪽의 갈릴리, 중간의 사마리아, 남쪽의 유대. 유대사람들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람들은 아시리아 제국의 지배정책으로 인해 그 피가 더러워졌다고 여겨 그들과 상종을 꺼려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나타나엘이 빌립을 향해 ‘나자렛에서 그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 하고 반문할 정도로 멸시의 대상이었습니다. 중앙정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예로부터 가난한 사람들과 떠돌이들, 사회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주로 거하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바로 그 갈릴리에 오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앞 절에서, 세례 요한의 활동과 예수를 비교하여 유심히 살펴보면 세례 요한은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다고 말하고 있고, 예수께서는 거기서 세례를 받고 나서 굳이 저 북쪽 변방 갈릴리로 가셔서 복음 운동을 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남쪽 유다와 북쪽 갈릴리를 비교하여 말하는 것은 오늘 우리나라에서 남쪽(남한)과 북쪽(북조선)을 비교하여 말하듯이 이는 단지 지리적인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념의 근본적인 차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제1성서의 여호수아서와 판관서를 유심히 읽어보면 열두지파가 가나안의 지역을 나누어 다스리던 시대로부터 남쪽의 두지파와 북쪽의 열지파는 묘하게 통치이념에 따라 나눠졌고, 처음에는 통일왕국으로 시작하는 듯 보입니다. 북쪽 출신 사울왕에 이어 남쪽 출신 다윗과 솔로몬왕이 지배를 하고 법궤를 북쪽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 여기에 성전과 왕궁을 짓습니다. 이후, 솔로몬의 강압적인 통치를 계속하고자 했던 그의 아들 르호보암을 중심한 예루살렘의 귀족 계층과 이에 저항한 여로보암의 민중지지 세력으로 남북으로 분단되어 수백 년을 갈등과 대결 속에 지내게 됩니다. 저는 이런 성서의 예가 우리나라에 적용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물론 북왕국이나 남왕국이나 왕과 귀족을 중심한 정치권력의 구조 하에서는 큰 차이가 있지는 않지만, 열지파가 결합한 북왕국이 두지파가 결합한 남왕국에 비해 훨씬 더 평등과 분배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으리라고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수도가 남쪽에 있었으니 자연히 권력 집단이 거주했던 남쪽에 비해 북쪽에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으리라고 하는 것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남쪽 유다가 아닌 저 북쪽 변방 갈릴리에 가셨다는 말은 복음의 정체를 더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곧 복음이란 우리가 쉽게 이해하는 개인 심리적인 위로와 평안의 복음을 넘어서서, 가난한 자와 힘없는 자들을 역사의 주인으로 세우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물세례와 성령세례의 차이]
세례 요한이 외쳤던 것처럼 남쪽 유다에서 예루살렘의 부자들과 권력자들을 향해 회개하라고 외치는 것과 가난한자 병든 자들이 모여 사는 갈릴리에 오셔서 회개하라고 외치는 것은 그 회개의 방식에 있어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에서 세례 요한은 회개의 방식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속옷 두벌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도 이와 같이 남과 나누어 먹어야 한다.” 곧 나눔의 회개를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영생에 대해 고민하는 한 부자 청년에게 ‘너의 가진 것을 모두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셨으며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눔이 아닌 포기를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 차이가 바로 세례 요한이 말하는 바,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는 그 차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은 물로 세례를 받고 나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광야에 나아가 40일을 기도하시며 사탄의 유혹을 이겨내십니다. 그 사탄의 유혹이란 곧 돌로 떡을 만들라는 재물의 유혹과 성전에서 뛰어내리라는 세상 명예의 유혹과 나에게 절하면 세상을 주겠다는 권력의 유혹을 말합니다. 곧 성령 세례란 예수께서 물리치셨던 이 세 가지 유혹을 이겨내는 승리를 두고 한 말입니다. 물로 세례를 받는 것은 단지 과거의 죄에 대한 회개를 뜻하지만, 예수로 인해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은 바로 예수를 따라 세상의 가치를 버리고 정의와 평화와 생명의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좇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이 바로 이런 선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는 어부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를 보시고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시자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고, 세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동생 요한 또한 그물을 손질하다 말고 그대로 아버지와 삯꾼과 배와 그물을 뒤로 한 채 예수를 좇아갔다.]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정을 버리고 직장을 버려야 한다가 됩니다. 물론 저도 몇 년동안 식당일과 인쇄소 일과 신문배달 등을 해보긴 하였습니다만, 이는 목사가 되기 위한 방편으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가 되겠다고 하는 생각을 갖지 않고 다른 직업에 열심히 종사하다 후에 목사가 된 사람들은 바로 이 구절을 통해 하느님의 부름을 듣고 결단을 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만약 어떤 목사가 자신이 그렇다고 해서 이 구절에 근거해서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는 가정을 버리고 직장을 버려야 한다고 교인을 가르쳐서 그래서 세상 사람이 모두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면 세상은 떠돌이들로 가득차고 결국 모두는 굶어죽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보통의 경우는 가정과 배를 버려두었다는 구절은 접어두고 그 다음 구절 ‘고기를 낚는 어부가 아닌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셨다는 말씀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목사님들은 이 구절을 전도를 강조하는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우리 모두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 세상의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의 그물 안으로 잡아 끌어당겨야 한다.
[사람의 어부!]
그런데 희랍어 성서를 보면 지금 우리가 읽듯이 사람과 어부의 관계가 주어와 목적어로 그렇게 문장이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주어와 목적어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직역하면 ‘사람의 어부’로서 사람과 어부는 동일한 관계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고기 잡는 어부가 사람을 낚는 어부로 된다는 것은 어떤 직업의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가치의 변화를 통한 인간됨의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본 훼퍼목사가 말하는 값싼 은혜와 값비싼 은혜를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를 단순히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에 나오게 하는 곧 교회 성장을 위한 제자직으로 이해한다면 그건 하느님의 거룩한 부름을 또 하나의 일, 곧 값싼 은혜로 전락시키는 일이 될 것이고, 우리 각자 각자가 ‘사람의 어부’가 되어야 한다는 곧 내 자신의 사람됨을 위한 삶의 변화 그리하여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가기 위한 거듭남의 부름으로 이해한다면 이 부름은 죽는 날까지 싸워나가야 할 값비싼 은혜로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가 다음 중에 분가교회 시작을 확인하는 새싹티움주일을 갖는데, 이를 또 하나의 교회를 세우는 일로 본다면 이것은 값싼 은혜로 이해하는 것이고, 이는 세상의 물량성장주의적 가치에 대한 대안적 비판으로 생명과 평화의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세우기 위한 나눔운동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값비싼 은혜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할 때만이 이 운동은 나가는 사람들만의 교회세우기 운동이 아닌 우리 모두의 하느님 나라 운동이 될 것입니다.
[신앙의 즉각성]
오늘 본문을 보면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이 처음 예수를 보자말자 예수를 좇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를 그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 달에 걸쳐서 서로 만나 대화를 나누고 기도하며 하느님 나라에 대한 꿈을 함께 꾸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그 꿈을 펴가기로 결단을 하고 가족들과 얘기도 하고 동의를 구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물을 씻고 있는 아버지를 두고 떠나는 야고보와 요한 형제나 결혼을 한 베드로는 너무 무책임한 사람입니다. 아마 한 50년쯤 지나 분가교회가 어떻게 시작했는가 하고 말할 때에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아, 나는 그때 분가교회라는 말을 듣자말자 그대로 결정해버렸어.’ 그러나 그렇게 혼자 결정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내와 남편과도 의논하고 며칠을 고민하고 기도하면서 결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은 시간의 압축 속에서 자신의 결단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한 눈에 반해 버렸다’는 사랑의 고백도 그러한 표현법입니다. 곧 즉시로 그물을 버리고 가족을 버렸다는 말은 즉시로 자신의 생업이나 가족을 버렸다는 말이 아니라, 삶의 가치관의 변화의 즉각성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이는 지금 이 글을 읽는 우리 독자를 향한 외침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일에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이 때라는 것입니다.
이런 극적인 변화를 가져온 분으로 헨리 나우엔 성공회 신부님이 있습니다. 하버드신학대학장으로 베스트셀러의 책들을 펴내고 이곳저곳에서 강사로 부름을 받던 어느 날, 갑자기 교수직을 포기하고 <데이브레이크>라는 ‘새벽의 집’에 봉사자로 들어가 정신지체아들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목욕시키는 일을 하는 일을 하며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묻습니다. “학자가 제자들을 길러내고 책을 펴야지 왜 이런 일을 하는 것입니까?” 나우엔 신부님은 답하기를,“나는 그동안 성공과 인기라는 이름의 꼭대기를 향해 오르막길만 달려왔습니다. 하지만, 장애인을 만난 후, 내리막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오르막길에서는 ‘나’만 보일 뿐입니다.”
{때의 임박]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사람마다 때에 대한 인식이 다릅니다. 똑같은 일을 겪어도 정반대의 태도를 취합니다. 예를 들면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폭발을 통해 더 이상의 원전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위기의식을 갖고 원전 포기를 선언하는 사람과 정부가 있는가 하면 시설 투자효율성에 있어서나 돈벌이로 이 이상 좋은 것이 없다 하며 더 많은 원전 건설과 수출을 목표로 삼는 사람과 정부가 있습니다. 당시에도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이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에도 많은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때는 이를 깨닫는 자의 몫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나라는 로마 황제나 헤로데가 다스리는 세상 권력에 대적하여 정의와 평화 생명의 가치가 다스려지는 나라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말은 아주 가까이 왔다라는 의미이지만, 묵시론적 종말이나 우주적 종말 이해보다는 실존론적 종말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다가왔다는 영어식 표현에 의하면 at hand입니다. 곧 무슨 말인가 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와 있다는 말인데, 문제는 손을 뻗으면 닿지만, 손을 뻗지 않는 사람에게는 우주의 별만큼이나 먼 거리에 있는 것입니다.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의 연속입니다. 깨달음이 없이 살다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순간이 닥칩니다.
프랑스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삐에르신부입니다. 그는 빈민구호공동체 <엠마우스>를 세우신 분입니다. 그에게 한 청년 신사가 상담을 원하였습니다. 그는 가정문제와 직업문제로 심한 경제적 파탄으로 자살을 할 수밖에 없는 괴로운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신부님은 “사정을 들어보니 저라도 자살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괴로운 형편이군요. 그런데 이왕 죽을거라면 죽기 전에 저를 좀 도와주고 그리고 나서 죽으면 안되겠습니까?” 청년 신사는 너무나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신부님을 쳐다보았는데, 신부님의 얼굴이 너무 진지합니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더니 “저야 어차피 죽을 건데, 만일 신부님이 필요하다면 제가 얼마동안 신부님을 돕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곤 그는 신부님을 도와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해 집을 짓고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을 도와줍니다. 얼마 후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만약 신부님께서 내게 돈을 주었든지 내가 들어가 살수 있는 집을 주었든지 하였다면 나는 다시 자살을 시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내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오히려 내게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나는 신부님과 함께 이웃을 섬기면서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인생의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발견했습니다.”
[불완전 문장의 완전성]
마르코는 첫 문장 1절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 주어만 있지 ‘은 이러했다’라는 동사가 없습니다. 성서 전체에서 유일한 불완전문장입니다. 그런데 시작이 그러했듯이 그의 글은 끝도 매우 어색하고 불완전합니다. [젊은이는 그들(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에게 ”겁내지 말라. 너희는 십자가에 달리셨던 나자렛 예수를 찾고 있지만, 예수는 다시 살아나셨고 여기에는 계시지 않다. 보라, 여기가 예수의 시체를 모셨던 곳이다. 자, 가서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전에 말씀하신 대로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거기서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전하라.“ 여자들은 겁에 질려 덜덜 떨면서 무덤 밖으로 나와 도망쳐 버렸다. 그리고 너무도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못하였다.](16장 6-8절, 9절 이하는 후기 사본에만) 너무도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못하였다. 이게 마르코가 전하는 복음 기쁜 소식의 마지막입니다. 기쁨의 소식은 좋아서 만나는 사람마다 전해야 하는데, 두려워서 입을 닫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들은 뭐가 그리 무서웠던 것일까요? 죽은 줄 알았던 예수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무서웠던 것일까요? 아니면 이런 소문이 퍼지면 또 다른 박해가 일어날 것이 두려웠던 것일까요? 아니면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는 얘기는 예수께서 평소에 말씀하셨던 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 제2의 제3의 하느님 나라 운동을 계속하여 펼쳐 나가라는 얘기인데, 이 말은 곧 자신들을 포함한 제자 모두가 결국 십자가 처형 죽음을 의미하기에 이를 두려워한 것인가요? 두려움의 원인에 대한 해석과 그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왜냐하면 마르코 저자가 그 해석의 여지를 독자들에게 남겨놓았기 때문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라는 메아리를 남겨놓고 붓을 내려놓았기 때문입니다.
1장 1절에서 복음의 시작이라는 말만 있지 동사가 없다고 했습니다. 마르코가 의도했던 복음의 시작은 그의 글 16장 전체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 관련한 이 이야기 전체가 곧 복음의 시작입니다. 그렇다면 시작이 있다면 이를 이어가는 중간이 있어야 합니다. 곧 동사가 이어져야 합니다. 그가 의도한 동사는 무엇일까요? 그건 예수의 뒤를 따라가는 우리들을 두고 한 말은 아닐까요? 때가 찼다는 종말론적인 시대적 인식을 한 사람들의 삶 말입니다.
바울 선생은 이 종말론적인 때의 인식을 고린도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이제부터는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남편이 있는 사람은 남편이 없는 것처럼 살고, 슬픔이 있는 사람은 슬픔이 없는 사람처럼, 기쁜 일이 있는 사람은 기쁜 일이 없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 물건이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세상과 거래를 하는 사람은 세상과 거래를 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답은 여러분이 삶에서 스스로 채워가야 가시기를 바랍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