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129_분가씨앗_보아라!/ 임보라
이사야43:18-25;시편41;고린토후1:18-22;마르코2:1-12
찬132장, 씨앗의 노래 / 국악찬송 126장
[불안, 친밀감 그리고 사랑]
몇 해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이 쓴 [불안]이라는 책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원제목은 ‘지위에 대한(로 인한) 불안’(Status Anxiety, 2004)인데 책머리에 쓰기를 ‘지위로 인한 불안은 비통한 마음을 낳기 쉽고, 지위에 대한 갈망이 지나치면 사람을 잡는다’(9-10쪽)라고 되어 있습니다.
걱정이 되어 마음이 편하지 않은 상태를 ‘불안’이라고 합니다. 불안하면 왠지 뒤숭숭하고, 파도처럼 허무함이 밀려오는 가운데 위기의식을 느끼게 됩니다. 긴장감이 고조되고 위협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면 그 고통을 피해 보호본능이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생존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아마 불안과 공포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면 수많은 위험에 적절히 대처할 수 없게 되겠지요.
여러분은 어떤 상황에서 불안을 느끼시나요? 현재 내가 느끼고 있는 불안 중 다섯 가지만 꼽아보라고 한다면 어떤 것들을 대시겠습니까?
많은 분들이 경험하는 일이지만, 저도 이미 오래전부터 집 밖에 나와서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도중에 갑자기 가스불은 껐는지, 문은 제대로 잠그고 나왔는지 등등, 급작스런 불안감에 휩싸여 허덕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세상이 좋아진 탓에 물이 넘치면 저절로 꺼지는 기능이 있는 가스렌지도 나왔고, 열쇠를 사용하지 않아도 문만 닫으면 저절로 잠기는 키락도 나왔습니다. 장단점이야 있겠지만, 근거 없는 불안감에 휩싸이지 않아도 되는 장치들의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불안과 공포를 마땅히 느껴야 할 때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현실적인 위험이 없는 상황이나 대상에 대해 과도한 불안감을 느끼는지 잘 구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명대학의 저널리즘스쿨에서 만드는 [단비뉴스]에서는 작년 여름부터 [가난한 한국인의 5대 불안]이라는 시리즈물을 연재해 왔습니다.
올 사순절 특강 강사로 김진숙 지도위원님이 향린교회에 오시게 됩니다만, 이 연재물에는 비정규직 노동자인 가락시장 일용직, 텔레마케터, 청소 용역, 홈키핑맨, 홈메이드 등으로 불리는 호텔 노동자들의 현실을 기자들이 직접 체험하면서 취재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쪽방, 만화방, 고시원, 비닐하우스에 이르기까지 불안하기만한 주거문제, 애 키우기 전쟁이라는 제목처럼 맞벌이, 한부모 가정 등에서 겪어야만 하는 육아와 관련된 문제들, 또 ‘아프면 망한다’, 이렇게 제목만으로도 감이 딱 오는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현재는 ‘저당 잡힌 인생’이라는 제목 아래 등록금, 병원비, 주거비 마련 등과 관련된 대출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노동권, 주거권, 육아권, 건강권 등은 우리들 삶에서 충족되어야 하는 기본권 중 사회권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인간답게 살기위해서,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받는 권리입니다. 이 기본권조차 지켜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느끼게 되는 불안은 과도한 불안감이 아니라 생존과 관련되어 있는 본능적인 불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 최소한의 것을 갖고 연명해 가는 사람들에게 들이닥치는 불안감은 바로 이마저도 언제 빼앗길지 모른다는 것에 있습니다. 대출문제를 다루는 기사에서 많은 사람들의 발목을 잡는 실체 중 하나를 ‘빚’이라고 말합니다. 과소비와 같은 허황된 욕망 때문에 생기는 빚과는 구분되어야 하는 거죠.
이렇게 우리가 멀쩡하게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기는 합니다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노동권, 주거권, 육아권, 건강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사회에서 비롯되는 불안감,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발생하게 되는 ‘빚’으로 인한 공포감 속에서 하루하루 시달리고 있는 분들도 꽤 되시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앞서 언급한 알랭 드 보통의 책에서는 [불안]의 구체적인 원인 중 하나를 사랑결핍으로 보았습니다. 사랑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사랑’밖에 없습니다. 기본권 박탈도 사랑의 결핍을 보여주는 이 사회의 단면입니다. 보통은 책에서 사랑의 반대말을 미움이나 증오가 아닌 ‘무시’라고 했습니다. 무시를 당하는 것은 사랑의 결핍 상태와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무시를 당하면 사람들은 상처를 받고, 그로 인해 주눅이 듭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사랑의 결핍으로 인해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생존을 위해 목숨 걸고 치열한 싸움을 벌이거나, 아예 싸움을 피해 ‘살지 않기로’ 결정을 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죠.
사랑한다고 백날 말해도 ‘친밀감’을 느낄 수 없다면 사랑의 실체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4주 동안 향린의 교우이시기도 한 김영옥 선생님이 하시는 ‘사랑’을 주제로 한 강의에 참여했습니다.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비밀의 공유’로부터 시작되는 친밀감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감춰져 있는 비밀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비밀의 공유’로부터 사랑이 시작된다고 하는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여러분들은 내 안에 있는 여러 가지 불안에 대해 얼마나 많이 드러내어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이런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는 친밀한 관계를 얼마나 많이 갖고 계십니까?
[치유의 기적]
‘사랑’은 기독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낱말이고, 그렇기에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늘 교회에서 넘쳐납니다. 하지만 친밀감으로 느껴지는 사랑의 실체가 없다는 것을 빈번하게 느끼는 곳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교회입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들은 사랑의 본질을 담은 친밀감을 통해 불안과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선택하기 보다는 불안을 오히려 상품화시키고 있는 것이 현실 입니다.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오는 사랑의 결핍, 그로인한 불안과 공포의 본질은 보지 못하게 합니다. 정작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것에 늘 불안을 느끼도록 만듭니다. 그렇다면 불안을 상품화한 교회는 과연 무엇을 얻었을까요? 상품화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불안을 조성하여 막대한 부를 챙겼습니다.
주일에 사고가 나면 주일성수를 하지 않아서 그런가? 사업이 망하면 십일조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그랬나? 라고 말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병이 나도, 길을 가다 넘어져도 그 원인을 헌금과 예배 또는 목사와의 불편한 관계들에서 먼저 찾곤 합니다. 종교적인 신경증에 걸린 것이지요.
시편 41편의 기자는 병상에 있으니 흉허물 없던 친구들마저 뒷발질 한다며 호소합니다. 다양한 질병의 원인을 알 수 없었던 시대에 죄는 곧 병이요, 병이 곧 죄였습니다. 모든 병이 죄로부터 시작된다니, 도저히 기억해 낼 수 없는 죄, 혹은 내 부모의 죄, 조상의 죄를 무조건 회개해야 했으니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죄인이라 낙인찍힌 사람들은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며 끊임없이 밀려오는 근거없는 죄책감과 사투를 벌입니다. 그 결과 병적인 불안상태에 빠지고 비합리적인 공포에 매몰되지요.
이러한 사회적 구조 속에서 예수가 치유의 기적을 베풀었다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병에 걸리면 사회와 분리되어, 삶 자체가 송두리째 빼앗기게 되는 사회적 시스템 속에서는 몸보다도 공동체에서 분리되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더 서럽고 아팠을 것입니다.
마르코 2장의 중풍병자 이야기를 보면 1절에서 4절, 그리고 11절과 12절은 ‘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동사가 많이 쓰입니다. 중풍병자이기에 거동하기가 힘들어 네 사람의 친구에 의지해야 했던 사람이 예수의 말 한마디에 따라 ‘벌떡 일어나 곧 요를 걷어 가지고 나갔’습니다. 샌드위치처럼 끼여 있는 5절부터 10절은 ‘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뇌혈관이 회복되었다’라는 말 대신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선언합니다. 신성 모독죄로 걸려서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발언입니다. 거기에 앉아있는 율법학자들은 아팠던 사람이 일어나 걷는 것보다는 죄인에게 죄인이 아니라는 말을 함부로 하는 예수의 발언에 충격을 받습니다.
믿음은 심리적인 신뢰가 아니라, 상대에 대해 전적인 의지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성실하게 믿는 바대로 행동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준다’(히브리서 11:1)고 말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하느님을 믿는 것, 그리고 몸과 맘이 하나로 어우러져 사람들 사이에 깊은 신뢰를 갖는 것은 대면대면한 관계에서는 만들어 지기 힘듭니다.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을 신뢰하는 것은 상대가 사회적으로 상당한 권력을 갖고 있을 때나 가능할까요? 그마저도 요즘에는 먹히지 않지요. 그러다보니, 대부분 강자보다는 약자가 먼저 신뢰의 표현하면서 친밀감을 형성하려고 합니다. 생존을 위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마르코 본문에서는 상대적으로 강자라고 할 수 있는 예수가 약자, 아니 약자 정도가 아니라 죄인에게 먼저 친밀감을 표현합니다. 어떤 중풍병자(paralytik?, παραλυτικ?)로 불리우는 사람에게, 아들아(tek'-non, τ?κνον)라고 부른 것이지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단번에 예수는 죄인이자, 병자였던 이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합니다. 하루하루 아픔을 동반한 불안감에 떨고 있던 사람은 이렇게 뜻밖의 친밀감을 보이는 예수로 인해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채 고립되어 있던 나를 둘러싼 장벽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체험합니다.
그러니 그가 일어나 걸어가는 순간이 기적이 아니라 ‘아들아!’라고 불린 그 순간이 바로 기적의 시작입니다. 그 기적은 마을 밖에 있었던 사람을 마을 안으로, 공동체 안으로 끌어 들입니다. 공동체 밖에 내쳐져 있던 그였지만, 그에게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죄인의 친구였으니 그들 역시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았겠지요. 당시 집 지붕은 뚜껑을 들어 올리듯 사뿐히 들려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큰 나무 둥지와 작은 나뭇가지들 그리고 진흙들로 만들어진 지붕이니, 그 지붕을 들어 올리고 구멍까지 팠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진 것인지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진흙 덩어리가 떨어지고, 먼지는 풀풀 나고, 어쩌면 막대기 하나는 그 아래 있던 예수의 머리를 툭!하고 치고 튕겨져 나갔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많았으니 ‘누구야!’, ‘그만두지 못해!’라며 큰소리를 내는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친구들은 그 상황에 창피해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친구들과 함께 죄인이라 불렸던 이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드러내신 예수는 성스러운 곳의 대표적 공간인 회당이나 성전이 아닌, 어수선한 상황이 연출되는 바로 그 곳을 기적의 장소로 만들었습니다. 죄에 대한 용서가 선포됩니다. 결코 흔히 말하는 경건한 분위기와는 아주 먼 상황에서 말입니다. 그곳은,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 하느님의 현존을 경험하는 현장이 되었습니다. 회칠한 무덤과 같던 회당과 성전을 향해 내민 저항의 카드는 바로 이것 이었습니다. 많은 회당과 성전이 있었겠지만, 치유의 기적을 통해 온 생명의 온전함과 풍성함을 회복한 곳은 따로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중풍병자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친구들에게도, 또 그 사건의 증인들인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작은 교회가 희망이다]
연말이나 연초에 목회자들에게 제공되는 프로그램들이 여럿 있고 각 교단에서도 연례 세미나들을 개최합니다. 매해 정말 가고 싶어서 참석하는 프로그램이 딱 하나 있는데, 그것은 역사적 예수와 관련된 좋은 책들을 꾸준히 내고 있는 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주최하는 예수목회세미나입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다양한 책들과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성찰을 하게 만드는 좋은 책들을 내고 있는 곳입니다. 올해로 9회째가 되는 예수목회 세미나의 주제는 “작은 교회가 희망이다.”입니다.
몇 주 전, 조 목사님의 하늘뜻 펴기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번영의 신학을 토대로 크리스탈처럼 영롱한 빛을 영원히 발할 것만 같았던 교회가 파산하는가 하면 정말 많은 교회들이 내부의 균열로 위태로운 지경에 빠져있습니다. 문제없는 교회가 없더라. 라는 말을 저 역시도 요사이 정말 많이 듣게 됩니다.
야훼 하느님, 합삐루의 하느님,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인 이 번영이라는 말은 밑도 끝도 없는 ‘긍정’을 모토로 합니다. 본디 긍정이라는 것은 좋은 말이지요. 하지만, 존재의 내면으로부터 오는 불안을 보지 못하게 하는 ‘긍정의 힘’은 도리어 독소가 됩니다. 왜냐하면 거짓 불안을 양상 해내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 하지요. 긍정의 힘에서 헛된 불안이 나온다니요.
‘작은 교회가 희망이다’라는 주제를 내건 이유를 소장이신 김준우 목사님은 초대말에서 이렇게 밝힙니다.
‘우리의 문제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예수의 혼과 꿈이 살아 있는 사랑과 섬김과 믿음의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마가가 "가난한 자들이 오히려 하나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예수의 복음을 전했듯이, 가난한 자들이 희망이라는 예수 본래의 복음을 우리 시대의 목회자 언어로 바꾼다면, 그것은 결국 "작은 교회가 희망이다"가 아닐까요?’
사실 복음서 그 어디에도 예수 자신이 교회를 세웠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단지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를 따르기 위해 자신의 삶을 투신하며 하느님 나라를 선취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공동체를 계속 만들었습니다. 현존하지 않는 예수의 실체를 공동체로 증명하려 했던 것이죠.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공동체들은 제도화되어 갔고, 교회라는 조직을 통해 교리화 되어 갔습니다. 하지만, 본질적인 예수 공동체를 회복하고자 하는 몸부림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향린교회도 그러한 몸부림의 결과입니다. 당연히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공동체는 그릇된 번영, 변질된 긍정과 성장을 그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 생명의 온전함을 경험하는 현장을 추구합니다.
[분가교회 새싹틔움]
오늘은 분가교회의 새싹을 틔우는 주일입니다.
아직 이름도 없는 공동체에 참여하겠다고 선언한 씨앗들이 처음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을 시작하는 날입니다.
2003년 향린교회에 부임했을 때도, 분가선교, 분가교회에 대한 이야기는 있었습니다.
언젠가 ‘분가교회는 목사 사례비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니냐? 얼마면 되냐?’ 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또 어느 날인가는 분가교회를 진지하게 고민하던 청년들이 모인자리에 초대되어 간 적도 있습니다. 분가교회를 만들면 목회자로 올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한 타진이었습니다. 그분들이 기억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당시 제 대답은 이랬습니다.
‘향린교회의 창립정신 중 하나인 평신도 교회는 오늘날이야 말로 정말 의미가 있기에 그런 교회를 꿈꾸면 좋겠다’ ‘목사가 굳이 없어도 된다. 목사는 필요 없다. 그런 공동체를 시작하면 목사직을 버리고서라도 참여하고 싶은 열정이 생길 것 같다.’
그 후, 많은 시간이 또다시 흘렀습니다. 오랜 동안 논의해온 결과 어떠한 내용을 담는 교회가 되던지 목회자가 있는 교회여야겠다는 것이고, 이를 위한 파송목사로 제가 보냄을 받게 되었습니다.
공동의회가 결의가 있던 날, 큰 딸이 결과를 물어왔습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며 향린교회가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기로 했고 거기에 엄마를 보내기로 결정 했다고 알려 줬더니, 대뜸 ‘엄마를 좋아해서 그렇게 결정한 거야?’ 라고 묻더군요. 생각하지 못한 질문이여서 ‘글쎄다...’하며 머리를 긁적였더니, 손뼉을 치며 ‘엄마가 싫어서 내보내려고 하는 거야!’라며 깔깔 웃는 통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공동의회 결의를 한지 2개월이 지났고, 분가교회 씨앗 모집 공지를 낸지는 한 달하고도 열흘이 지났습니다. 그 사이 분가교회에 참여하겠다고 확실한 의사를 밝힌 분들이 50명을 넘어섰습니다. 고민하느라 아직 결론을 내지 못했다는 분들도 계십니다. 분가교회 설립을 위한 기초 작업을 해왔던 교우들은 분가교회에 참여하는 분들을 ‘씨앗’, 향린교회에서 분가교회에 지지를 보내며 기도해주실 분들을 ‘물방울’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아마도 씨앗이던 물방울이던 분가교회에 거는 기대, 또 향린교회에 갖는 기대는 저마다 100인 100색일 것 입니다. 처해 있는 상황도 다르고, 갈급해 하는 지점들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갖고 있는 신앙의 색깔 또한 다릅니다. 그렇기에 분가교회의 씨앗들을 아우르는 모토는 ‘다양성’입니다. 다름으로 인해 비난받지 않고, 다름으로 인해 차별받지 않는 것이지요. 이 모토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이곳, 향린교회에서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분가교회를 불안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이유 또한 다양할 것입니다. 당장 손에 쥐고 있지도 않은 재정적인 문제를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 ‘분가’는 정말 적극적으로 작아지겠다는 선언인데 이 실천으로 인해 이후 두 교회 모두가 어려움을 겪게 되지는 않을까? 등입니다. 전해들은 이야기 중에는, 임보라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에 과연 누가 올 것인가? 모이는 사람들이 빤하지 않겠는가? 라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작년 여름, 당회의 부름으로 분가교회에 대한 제 나름의 꿈을 발표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분가교회의 구체적인 상은 저 역시도 씨앗들 중 하나이기 때문에 함께 그려나가야 하는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대신 당회 발표 후 6개월이 넘는 시간이 흘러 표현은 다소 달라졌을 수 있지만, 본바탕은 그때와 변함이 없기에 제가 이해하고 있는 향린교회 분가선교의 의미를 세 가지 정도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 세 가지란, ‘내어줌’, ‘키움’, 그리고 ‘살림’입니다.
제게 있어서 향린의 분가선교란 ‘내어줌’을 의미합니다.
선교지향적인 공동체로서의 갱신에 방점을 찍고 있는 향린의 교회갱신 선언문에는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의 30% 이상을 사회선교를 위해 할당하고 사용해야 하며, 목회자도 목회시간의 30%이상을 사회선교를 위해 써야 한다’고 했습니다. 교회 증축이나 신축 또는 자체 유지에 급급하기 보다는 섬기고 봉사하는 교회 본래의 존재 의의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눔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분가의 분(分)도 ‘나누다’ 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제가 ‘내어줌’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나눔보다는 더 적극적인 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눔은 내 것 중에서 일부를 너에게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어줌이란 ‘내 것 전부가 다 네 것이다’ 라는 예수의 마음을 더 잘 표현해 줍니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내밀고, 속옷을 가지려 하면 겉옷도 주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는 것이 바로 ‘내어줌’입니다.
사회 곳곳에서 나눔이라는 이름을 달고 하는 활동들이 많고, 하물며 번영과 성장을 지상목표로 삼고 있는 허다한 교회들도 나눔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제 우리는 나눔보다 더 적극적인 실천인 ‘내어줌’의 실천을 환갑을 맞이하는 향린교회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학자(앙리 르페브르)는 공간은 물리적 개념이고, 장소는 그곳에 사람들의 관계가 쌓여하는 곳이라고 그 차이점을 설명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삶과 문화와 기억, 그리고 친밀감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 그리고 장소를 갖고자 하는 욕구는 향린교회 교인들의 전유물이 아니요, 사람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기본적인 욕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번듯하고 시설이 편리한 곳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들은 그저 공간일 뿐, 그곳을 점유하고 있는 사람들의 속성은 번영, 즉 자본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자본에 매몰된 채, 내가 가진 것을 헤아리기 시작하면, 특히나 교회가 그러한 늪에 빠지면 어떤 병폐적 현상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너무나 많은 사례를 보아 왔습니다.
‘내어줌’은 예수의 몸과 보혈을 나누는 성찬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를 기억하며 예수를 담고 살아가기 위해 친밀한 관계 속에서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대안적인 장소가 많으면 많을수록, 자본에 대한 저항 또한 힘차게 해나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교회로 하여금 진정한 ‘내어줌’을 실천하기 힘들게 가로막고 있는 장벽은 무엇일까요? ‘개 교회 중심주의’와 ‘교회 이기주의’일 것입니다. 검소하고 깔끔하게 교회를 운영하고, 주일 아침에 쓰지 않는 나이트클럽을 예배 장소로 사용하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이런 교회들은 교회에 대한 자긍심을 불러일으키고, 다른 교회들의 모범으로 칭송 받기도 합니다. 어느 교회들일까요?
이름을 대면 다 아는 S교회와 O교회입니다. 그 중 O교회는 지 교회를 많이 세우기로 유명합니다. 사람보다는 일정정도의 재정적 지원과 함께 목회자를 파송합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강한 자긍심을 갖게 하는 O교회 라벨을 붙입니다. 그 라벨만 붙이면 사람이 모인다는 일종의 상술과도 같습니다.
그와 반대로 진정한 ‘내어줌’을 실천하는 교회라면 상표를 붙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몸집을 줄여, 작은 교회들과 공생하는 길을 택할 것입니다. 강한 자긍심을 갖고 독야청청,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가자! 를 중요한 가치로 내세울 것입니다.
두 번째로, 제게 있어서 향린의 분가선교는 ‘키움’입니다.
평신도 운동의 불을 새롭게 지펴가면서 사람을 키워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목회자가 없는 교회이길 바랬지만, 목회자가 있는 교회로 시작하게 되었다면 이제, 그 부름을 받은 목회자에게 공이 넘어 온 것이기에 제 스스로 자리매김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관건입니다.
목회자와 평신도에게는 각기 다른 역할들이 부여되어 있지만, 그 다른 역할이 계층이나 차별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작은 몸집을 갖게 되면 목회자와 평신도가 얼굴을 마주하고 만나는 횟수는 분명 더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많아진 횟수만큼 서로 깊이 있는 나눔이 가능해 질 것입니다. 대면대면한 관계로는 깊은 신뢰로 이어지기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이미 드린바 있습니다. 작아질수록 조직과 운영의 방식을 단순화 시킬 수 있습니다. 조직이 방만해지고 운영의 방식이 복잡해질수록 목회자가 독주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교우들의 생각을 미처 다 읽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해질 수 있고, 이러다 보면 생계를 위한 일터가 있는 교우들이 복잡한 운영방식으로 인해 아예 방관해버리면서 목회자의 몫으로 돌려 버리기 쉽습니다.
저는, 비록 부족한 점이 많긴 해도 적어도 이제껏 ‘당신은 너무 권위적이야’ 라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습니다. 평신도 운동을 통한 교회 개혁의 불을 밝혀 나가는 것은 제 목회에 있어서도 중요한 화두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키워내는 것, 그래서 맘몬에게 저항할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하느님 나라가 지금-여기에 임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는 있지만, 목회자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교우들이 서로 얼굴과 가슴을 마주 대하면서 각자 갖고 있는 다양한 은사들을 교회 내부만이 아닌 사건의 현장에서 펼쳐갈 수 있도록 모두가 참여하는 원탁 목회를 실천하고 싶습니다. 당연히 이러한 목회 틀거리는 의사결정 구조와 소통의 과정이 수평적으로 오고가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원탁 목회는 예배나 교육에 있어서도 일방이 아닌 쌍방소통을 기본으로 합니다. 예배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함께 드리면서 친밀한 공동체성을 느낄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모색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피교육자와 교육자로 나뉘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서 배우는 기회를 많이 갖기를 바래 봅니다. 제가 목사니까 교우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제가 목사이니까 교우들로부터, 또 어린이들로부터도 배울 것이 많이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게 있어서 향린의 분가선교는 ‘살림’의 선언입니다.
주 1회 모이는 예배 공동체에서 살림 공동체로의 전환입니다. 이 때, 분가교회만 살림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향린교회 역시 분가를 기점으로 살림 공동체로서의 진면모를 드러낼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예배 공동체의 한계성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1회 이상 만난다고 해서 살림 공동체가 저절로 만들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동안 향린교회를 비롯하여 삶을 나누는 공동체에 대한 시도는 정말 많이 있어 왔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시도들이 계속 유지되지 못하는 이유는 많이 만난다 해도그 공동체가 속해 있는 사회와 단절되거나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매몰되었기 때문입니다. 개방성과 다양성이 아닌 획일성을 강조하다 보면 그 공동체는 숨을 쉬지 못하게 됩니다.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는 분가교회의 위치는 적어도 봄이 될 즈음이면 씨앗들에 의해서 정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미 도시 안의 공동체도 많이 있습니다. 모여서 삽니다. 따닥따닥 모여서 사는 재미가 분명 있지만, 정서적인 유대감을 만들어 가면서 생기는 ‘친밀감’을 통해 사회구조로 인한 불안함을 함께 극복해 나가는 실천하는 삶이 우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나아가 다른 작은 교회 공동체 뿐 아니라, 이미 있는 공공성을 추구하고 있는 도시 공동체들로부터 지혜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길 바래봅니다.
살림 공동체는 사건 현장의 한복판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해방의 복음을 선포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수많은 억압들에 저항할 줄 아는 용기와 지혜가 가득합니다. 이웃을 향해 가슴을 활짝 열어 관계의 단절 속에서 아파하는 이들의 진정한 벗이 되어주고, 죄인의 친구라고 손가락질 받더라도 지붕을 뜯어내어 치유의 기적사건을 만들어 낼 줄 아는 용감한 벗들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보아라! 내가 ‘지금’ 새 일을 시작하고 있다!]
향린교회에는 한국 현대사의 맥락에서 나침반의 역할을 감당해온 60년이라는 긴 시간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미 향린교회는 어느 한 공간이 아니라 사건이 끊임없이 시작되는 장소입니다.
안병무 선생님의 ‘탈(脫) 향(向)’의 화두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에 있어서는 편안함을 회복시켜주되, 안주하려고 하는 이기심으로부터는 끊임없이 떠나는, ‘끊어내기-단(斷)’하라는 야훼 하느님의 목소리를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내외부의 요인으로 신음하고 아파하던 시절이 있었고, 현재도 그런 요소들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생기를 부여받은 존재로서 우리들은 어떻게 나갈 것이냐?, 어떻게 믿는바 대로 실천해나갈 것이냐? 를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어왔습니다.
향린교회가 시작한 씨앗들의 새싹을 틔워갈 분가선교는 60주년을 맞이하는 향린의 새로운 “‘탈-향’ 운동”입니다.
제2 이사야의 입을 빌어 야훼 하느님은 말씀하십니다.
포로된 사람들에게 박혀있었던 고정관념을 뒤엎는 선언입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이 ‘포로됨’에서 자유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관성에 젖어있는 포로들이요, 자본의 포로들이요, 어두운 성전에 야훼를 가두어 놓는 거짓 신앙의 포로들이요, 거짓된 불안감으로 매일 전전긍긍하는 공포의 포로들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야훼 하느님은 외칩니다.
“보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시작하였다. 이미 싹이 돋았는데 그것이 보이지 않느냐? 내가 사막에 큰 길을 내리라. 광야에 한길들을 트리라. 사막에 물을 대어 주고 광야에 물줄기를 끌어 들이리니”
‘시작하였다’라고 번역된 이 문장은 ‘시작하고 있다.’ ‘시작되고 있다’라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attah! 지금! 말입니다.
무엇이 시작되었습니까? 싹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광야에 길이 납니다. 사막에 강이 생깁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광야와 사막을 결코 없애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곳에서 싹이 틉니다. 광야와 사막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싹을 돋게 하고, 길을 내시는 야훼 하느님의 의지가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지금 시작하셨기 때문에 피곤이 몰려와도, 눈물이 나도록 아프고 힘든 일이 덮쳐 와도 새 일을 행하시는 바로 그 이로 인해 저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참이 지난 후, 우리가 바라는 그대로를 이루지 못했다라고 고백할지도 모릅니다. 이제껏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싹을 틔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신앙을 바탕으로 한 희망의 본질은 욕망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희망의 싹은 우리가 바라던 대로의 향과 색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광야와 사막에 내어질 그 어떤 길을 소망합니다. 그저 우리는 사랑의 빛을 비추어 주면서 싹을 내고자 하는 하느님의 일에 동참할 뿐입니다.
싹의 자라남은 양적인 성장주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세포가 없어지더라도 또다시 새로운 세포가 생기듯, 잃는 것 같지만 도리어 얻게 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성장입니다. 그러니 껍질을 깨고 나와야 싹이 돋지요. 새롭게 채워지는 것도 있지만, 동시에 포기해야 하는 것도 생길 것입니다.
이렇게 새싹이 자라는 모습을 통해 그 모습을 지켜보는 우리 모두는 새로운 희망을 보게 될 것입니다. 새싹의 기운이 퍼져 나나기 때문입니다.
머물고 싶기에 새로운 곳으로 ‘탈-향’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머무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탈-향’만이 잘하는 일이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진정으로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말입니다.
분가교회 씨앗님들!
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쉬운 일만 하고 살지는 않았습니다. 고비마다 이끌어 주신 하느님의 손길이 우리들 삶에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 결심한 대로 광야와 사막에 길을 내고 계시는 그분을 따라 가봅시다. 짧던 길던 삶의 여정 속에서 크고 작은 열매들을 맺어왔습니다. 자, 이제는 ‘attah! 지금!’ 내게 주어진 새로운 장소에서 나는 또 어떤 싹을 틔우는 씨앗인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갔으면 합니다.
싹 트는 과정을 지켜보며 마음을 담은 기도로 함께 해주실 향린교회의 물방울님들!
얼마 전, ‘향린의 정체성을 가름하는 것이 분가선교이다’라고 하신 한 어르신의 말씀을 듣고 눈물을 쏟을 뻔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보시는 이 씨앗들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향린에서 자라난 씨앗들입니다. 짧던 길던, 향린의 토양에서 양분을 먹고 자랐습니다. 우리 몸의 일부입니다.
오늘 하늘뜻 제목을 ‘보아라!’라고 붙였습니다.
공교롭게 제 이름의 뜻과 같습니다만, 이미 시작되어 진행 중인 야훼 하느님은 ‘보아라!’라고 당당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야훼 하느님의 새 일은 분명, 서로에게 전해지는 온기를 느끼며, 서로를 향한 믿음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침묵기도 후, 분가교회의 씨앗들이 전하는 따뜻한 이야기와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연극-나무가 된 꼬마씨앗]
나무 : 윤영수 장로, 씨앗 : 유신애 교우, 이야기꾼 : 최선인 교우
시작(음악-비발디 사계 ‘봄’..10초 후 음악이 사라지며)
언덕 한 가운데 작은 씨앗들을 품고 있는 나무가 있었어요.
꽃이 활짝 핀 언덕에 바람이 불어와 가지를 흔들자
나무에 매달려 있던 씨앗들은 하나 둘씩 바람을 타고 날아갔어요.
어, 그런데 씨앗 하나가 날아가질 않고 나무 끝에 매달려 있네요.
나무 : “씨앗아, 어서 친구들을 따라가야지!”
씨앗은 어디로든 가고 싶었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했어요.
그리고 언덕에 덩그러니 혼자 남게 된 나무도
문득 외로워진 마음에 하루쯤은 괜찮을 거라며 씨앗을 보살펴 주었어요.
“씨앗아, 오늘은 비가 너무 많이 오네. 내가 우산이 되어 줄 테니
비가 그칠 때 까지만 있다 가”
“씨앗아, 오늘은 햇볕이 너무 따가운 걸? 넌 모자도 없으니 하루만 더 있다 가”
씨앗도 어디론가 날아가 길을 잃는 것 보다는
나무 곁에서 지내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씨앗아, 먼 길을 가려면 신발도 있어야 하고, 외투도 있어야 하고,
여행가방도 있어야 하는데 넌 아무것도 가진 게 없구나. 아무래도 안 되겠어.
하루만, 하루만 더 있다 가.”
그렇게 나무는 씨앗을 곁에 두고 하루, 하루가 지나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어디선가 날아 온 까마귀가 꼬마 씨앗을 낚아채 가 버리고 말았어요.
“어어..”
(까마귀 소리 효과음)
(뒤이어 다시 비발디 사계 ‘봄’..13초 나레이션 시작하면 음악은 줄여진 상태로 계속)
계절이 바뀌고 다시 찾아 온 바람은 나무의 씨앗들을 데리고 여행을 떠났어요.
(음악을 다시 키움)
(이 때 앞에서부터 풍선 4개가 사람들의 손을 타고 뒤로 전달되며 날아간다. 맨 뒤까지 전달되는 동안 씨앗은 웅크리던 몸을 펴면서 해설자 옆으로 가서 나무의 모습으로 팔을 활짝 펴고 선다. 여기까지 이뤄지면 음악은 사라지면서 끝낸다.)
씨앗들이 바람을 타고 여기 저기 잘 날아갔네요.
그리고 나무는 저 맞은 편 언덕 위에 싱싱한 한 그루의 나무를 발견했어요.
나무는 한 눈에 알아보았어요. 바로 그 씨앗이라는 것을.
“멋진 나무가 되었구나!”
씨앗 : “네, 조금만 용기를 내면 멋진 나무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바로 씨앗과 나무의 노래-느리게 전주. 씨앗과 나무의 노래)
노래가 끝나면 원래의 빠른 노래 전주-30초간 흐르는 동안 분가의 씨앗들 모두 무대로 올라와서 씨앗의 노래 다 함께 부른다. )
[찬양-“씨앗의 노래”]
하늘 끝에서 불어오는 저 바람을 타고 가자
손에 쥔 것 하나 없지만 저 바람에게 맡겨보자
때론 땅 깊은 어둠 속에서 뒤척이며 눈물도 흘리겠지만
어디든 닿으면 알게 될거야 바로 내가 누구인지
나는 씨앗 나를 그렇게 부르신 이가 있어
촉촉한 비를 내려주실테니
껍질을 깨고 나아갈거야 조금씩
나는 씨앗 나를 그렇게 부르신 이를 믿고
아픔을 딛고 자라나는 거야
조금씩 조금씩 쏟아지는 빛을 향해
나는 씨앗
[기도-분가교회를 위한 기도]
인도 : 조헌정 목사
[파송사]
편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근심, 공포와 불안이 닥쳐와도 희망의 새 길을 내십시오!
그 길을 걸으며 우리 서로 뜨겁게 사랑합시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당신과 나,
그리고 그렇게 맺어진 우리들의 사랑으로 인해
새 빛이 밝아올 것입니다.
그러니 한주간도 당당한 하느님의 사람답게 사십시오!
2) [강좌1] 이론 입문:사랑하거나 미치거나, 살거나 죽거나-아니, 사랑함으로 미치고, 삶으로 죽는 (http://kscrc.org/academy/class.html)
3) 흉허물없이 사귀던 친구마저 내 빵을 먹던 벗들마저 우쭐대며 뒷발질을 합니다. (시편41:9)
4) 로버트 귤리히(2001), 마가복음 34(상), 서울:도서출판 솔로몬, 174-175쪽 참조 (문체상으로 2:1-5, 11-12의 생생함은 2:6-10의 의논의 추상성과 대조를 이룬다.)
5) 표준새번역은 ‘아들아’로, 개역개정편은 ‘작은 자야’로 번역되어 있다.
6) 같은 책, 179쪽 참조 (“구멍을 내는 것”은 팔레스틴 지방의 흙과 이엉으로 만든 지붕 뿐 아니라 구멍의 형태를 상사하게 묘사해 준다.”)
7) 초대의 글, http://www.historicaljesus.co.kr/xe/116521
(목회자 중심의 세미나이지만, 역사적 예수 연구에 관심있는 향린교회 교인들 참여는 환영한다고 하시니, 시간이 허락되시는 분들은 참여하셔도 좋겠습니다. 2/13-15, 카톨릭교육문화회관)
8) 문영석, "한국교회가 열광하는 미국판 번영신학의 추락", 가톨릭뉴스 지금여기(2011.12.29, http://m.catholicnews.co.kr/articleView.html?idxno=6461)
9) 향린교회 신앙고백 선언과 교회갱신 선언(1993년 5월), http://www.hyanglin.org/bbs/54008
10) 김억수, “공간과 장소에 대한 생태적 단상”
(뉴스스토리, 2011년4월11일, http://www.news-stor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25)
11) 김진호, “기독교 우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대화문화아카데미 예수길벗 11월 발제문) 참조 (이 글은 꼭 읽어보면 좋을 글이므로 원본파일을 향린교회 게시판에 올려놓도록 하겠습니다.)
12) 안병무, “탈-향(脫-向)의 인간사”(구원에 이르는 길, 성서의 맥1, 1997) 서울:한국신학연구소, 60-69쪽 참조 (“인간의 욕구에는 크게 두 가지 방향이 있다. 하나는 정착하려는 욕구고, 다른 하나는 자유하려는 욕구다. 이 두 방향은 상호긴장 내지 모순의 관계를 빚어낼 수 밖에 없다. 정착의 욕구는 안전하려는 욕구다. 안전하려는 이 욕구에는 벌써 무엇인가 자기의 삶을 보장할 만한 것을 소유했다는 전제가 있다”)
13) 같은 책, (“탈출! 그것은 과거를 단절하는 행위다. 탈출은 가진 것에서 해방 되는 일이다.”)
14) ?? ??????? ?????? ??????? ?????? ???????, ?????? ?????????; ??? ??????? ???????????? ???????, ??????????? ????????.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설이 있으나, 마침 60년사 작업 중 설교비평 준비모임을 위해 오신 이영미 교수(한신대 구약학)에게 즉문을 한 결과, 야훼의 의지를 강조하기 위해 분사형으로 만든 현재 진행형의 뜻을 담고 있다는 즉답을 들을 수 있었다.
15) 보라는 ‘보아라’의 뜻을 담고 있답니다. ^^ 첫 번째는, ‘임’을 ‘보아라’(당시로는 무신론자이셨던 아버지가 절대적인 존재를 일컫는 말로 ‘임’을 재해석 하신 것은 놀랍습니다.) 두 번째는 ‘숲(林)을 보아라’,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보라색(紫)’-본디 귀인만이 쓸 수 있었던 색이라고 합니다.
16) 유신애 각색, 원작-크리스티나 발렌티니 글, 필립 지오다노 그림, 나무가 된 꼬마씨앗(2011), 서울:사파리
17)유신애 글/가락, 김형석 편곡/믹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