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과 의인의 경계를 넘어

호 2:14-20; 시편 103:1-13,22; 고후 3:1-6; 마르코 2:13-22


복음서는 처음부터 글로 쓰인 것이 아니라 본래는 구전으로 전해지던 이야기였습니다. 3년동안의 예수님의 삶을 말하는 4개의 복음서가 대체로 같은 분량으로 되어 있는 이유도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처음부터 글로 쓰였다면 글쓰는 이에 따라 짧게 혹은 길게 쓸 수도 있었겠지만, 이야기로 전하게 되면 한 사람이 기억하여 전할 수 있는 분량의 한계가 있습니다. 보통 복음서를 그냥 읽어 내려간다면 2시간에서 3시간정도 걸립니다. 우리나라 판소리도 짧은 것은 3시간, 긴 것은 6시간이 걸리기도 합니다만, 이 판소리에는 음악적 요소가 있어 외우기가 쉽고, 또 이를 전수받는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훈련을 받았기에 길게 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또 복음서 길이에 영향을 주는 것은 청중의 집중력입니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도 청중이 듣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기억력은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들에 따라 편차가 많이 날 수 있겠지만, 청중들의 집중도는 예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연극이나 음악회나 영화의 관람 시간이 대체로 2시간 언저리에서 왔다갔다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예전을 중시하는 동방교회가 하늘뜻펴기를 중심으로 하는 서방교회보다 예배가 길 수 밖에 없습니다만, 제가 미국에서 신학대학 학생 시절 학교 미디아센터에서 알바를 했는데, 한번은 부활절 전날인데, 이디오피아 정교회가 학교 예배실을 빌려서 특별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저녁 6시에 시작하니 늦어도 밤 10시에는 끝날 것으로 알고 일을 시작했는데, 이 예배는 무려 다음날 아침 해뜰 때까지 근 열두시간이 걸렸습니다. 부활절 특별예배라서 그랬겠지만, 보통 때에도 너 댓 시간은 걸립니다. 그런데 긴 시간을 계속 앉아서 드린다면 다 졸 것입니다. 그래 동방교회는 의자가 없습니다. 물론 예전이 이동하면서 이루어지기에 의자가 있으면 불편합니다. 그날은 의자가 있었고, 예배는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며 예수님의 일생을 조명하는 형태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집행하는 사제도 나왔다 들어갔다 하면서 십자가 고난을 말할 때는 보라색 예복, 죽음을 상징할 때는 검은색 예배 부활을 상징할 때는 하얀색 예복 등으로 다양하게 갈아입었습니다. 그리고 사이사이 교인들도 순서에 참여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복도에 간식이 마련되어 있어 배가 고프면 간단한 요기를 하고 대화를 나누기도 합니다. 절도가 있으면서도 자유함이 있는 매우 흥미로운 예배 경험을 가졌던 적이 있습니다.


[복음서와 예전]


일전의 교인설문 조사에서도 많은 교우들이 다양한 예배를 경험하고 싶어 하는데, 올해는 그런 경험을 하는 방식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하나의 복음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 형식으로 전했는데, 그런 방식도 한번 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때의 분위기는 마치 판소리의 경우와 같이 소리꾼과 청중들이 함께 어울려서 추임새도 들어가는 일종의 마당극 형태로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 얼쑤 우리가락팀이 사물놀이를 중심으로 민속예배를 펼쳤는데, 이전 방식과는 매우 달라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우선 형식에 있어서도 여기 의자를 다 뒤로 미루고 공간을 마련하여 바닥에 앉아 성부성자성령 하느님께 세 번 절을 함으로 시작을 하고 기도도 비나리 형태로 드렸습니다. 마지막에는 가락에 맞춰 덩실덩실 춤도 추고 대동놀이도 하고 그리고 떡도 먹고 차도 마시면서 다들 한마디씩 하는 친교시간까지 가졌습니다. 오늘 감사찬양시간에 그중 하나를 맛보기로 들려드릴 것입니다.


오늘 바울선생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 여기서 문자는 전통에 매인 상태를 말하고 성령은 자유함을 의미합니다. 우리 예배가 아무리 좋아도 형식에 매이고 굳어지면 성령의 자유함을 방해하기 쉽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예배 형식도 약간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제가 향린교회에 온 이래 지난 9년동안 조금씩 조금씩 예배순서나 형식에 변화가 있어왔습니다. 우리나라 교회들의 예배는 너무 천편일률적입니다. 어디가나 똑같습니다. 우리 교회 예배가 국악예배로 매우 독특하긴 하지만, 내년 60주년을 맞이하면서 어떤 형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의 시대와 호흡하는 또 다른 예전의 변화가 필요하지 않겠나 생각하고, 특히 하늘뜻펴기에서 평신도와 목회자가 함께 하는 횟수를 더 많이 늘릴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성서를 읽어갈 때에 질문을 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예를 들면 오늘 마르코복음 첫 절을 읽는다고 합시다. “예수께서 다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도 모두 따라왔으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을 가르치셨다.” 평범한 문장이지만 여기서도 질문을 던질 수도 있습니다. 아니? 예수께서 호수가로 나가신 것과 오늘 이야기와 무슨 상관이 있지? 베드로나 야고보 형제를 부르실 때에는 그들의 직업이 어부였고, 당시 그물을 깁고 있었으니까 이야기의 맥락이 맞지만, 오늘 얘기는 세리 레위를 부른 이야기인데 무슨 연관이 있지? 그렇다면 왜 저자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활동하시는 것을 강조하는 것일까? 물론 물고기가 많이 잡히고 물이 귀한 곳이니 어부들과 농부들이 마을을 이루며 살았으니 당연한 얘기입니다. 그러면 지금도 그러하지만 부자나 귀족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으려 하였으니 어디에 살았을까요? 당시는 민족과 나라 사이에 전쟁이 많았으니 그때는 높은 곳에 성을 쌓아 도시를 만들었고 부자나 귀족들은 그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다시 호숫가에 나가셨다는 말은 단순히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들과 함께 하였다고 하는 얘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 예수를 따라 다닌 ‘군중’들도 단순한 무리들이 아니라 민중신학에서 말하는 사회적 약자, 정치적으로 억압당하는 민중으로서 하느님의 새로운 통치의 역사를 기다리는 ‘오흘로스’들입니다.


오늘 얘기는 세관원 레위를 제자 삼는 장면입니다. 당시에도 오늘날의 고속도로와 같은 국도가 있어 이곳을 통과하는 상인들은 통행료를 냈습니다. 레위는 톨비 징수원이었습니다. 높은 직위는 아니었지만, 로마의 관료였고 정해진 세금 외에 더 많은 세금을 걷어 착복을 하는 경우가 많아 백성들로부터 조롱과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하니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나섰다’고 성서는 증언합니다. 이 말씀도 그물을 깁던 베드로 형제나 야고보 형제의 부르심 사건과 같이 예수님의 부르심의 사건을 시간을 압축하여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지 문자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세리 레위? 세리 마태오? 12제자?]


그런데 교회를 조금 다녀본 사람들은 이 레위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니 이 사람의 이름이 마태오가 아니었나? 우리가 흔히 세리 마태라고 하지 않나요? 그런데 왜 여기서는 이름이 레위인가? 이 둘은 다른 사람인가? 같은 사람인가? 그래서 마태오복음과 루가복음의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본문을 읽어보면 루가는 여전히 레위라고 부르는 반면에 마태오는 이를 마태오라고 말합니다. 그럼 왜 마태오복음에서만 이를 마태오라고 하였을까? 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답으로 이런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레위는 본래 야곱의 12 아들 중 셋째 아들로 후에 12지파 중 하나인 레위지파의 조상이 되는데, 이 레위지파에서 모세와 아론이 나왔고 이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 때, 성소에 관련된 거룩한 일만 하도록 되어 있어 땅을 분배받지 못한 거룩한 지파의 첫 조상 이름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사제와 성가대와 예향과 관리부원들로서 세상 직업이 없는 대신 다른 열한 지파 사람들이 십일조를 내면 그것으로 생계를 이어간 거룩한 사람들을 칭하는 특별명사였습니다. 마태오공동체는 주로 유대사람들이었으니 그들 가운데에는 레위라는 이름을 개인 이름으로 그것도 매국노에 가까운 세리의 이름으로 쓰는 일에 항의를 하였을 것으로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오복음에서는 그 이름을 바꾸지 않았을까?


그런데 여기서 호기심이 많은 교인들은 한발자국을 더 나가 그런데 예수의 12제자 중에 레위라는 사람이 있었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 12제자 이름이 나오는 마르코복음 3장을 찾아보니 정말 없습니다. 그런데 마태오라는 이름은 있습니다. 이거 뭐야? 그러면 이 레위는 12제자 중 한사람이 아니었나? 그러면 다른 복음서에서는 있나 하고 찾아보니 마태오복음에도 안 나오고 루가복음에도 안 나옵니다. 다만 레위라는 이름은 없지만, 마태오는 세 복음서에 다 나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본문은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 하는데 반해 세복음서가 모두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라고 하는 점입니다. 그러면 아 레위가 후에 개명을 해서 야고보가 된 모양이구나 하고 이렇게 이해할 수 있는데, 여전히 문제가 되는 것은 마태오복음서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를 말하고 또 ‘세리 마태오’를 구분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모순입니다.


그리고 또 12제자 이름이 등장하는 세 복음서를 비교해보니 비슷하긴 한데, 한 두 명씩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있는데, 저기에는 없습니다. 결국 12제자가 공동체마다 조금씩 달랐다는 결론에 도달할뿐더러 12제자 또한 꼭 12명이 아니라, 열셋 혹은 열 네 명이 될 수도 있었고, 12제자 명단에는 나오지 않지만, 여성 제자들도 분명히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12제자란 12지파에 상응하는 새 이스라엘의 상징적 표현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고 그래서 이스라엘의 회복이 아닌, 온 세상의 회복을 말하는 요한복음은 12제자 명단에 관심이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죄인? 의인?]


어느 날 예수께서는 세리 레위를 제자로 삼았고, 그래 레위는 예수를 집으로 식사 초대하면서 동료 세리들을 함께 불렀고, 또 거기에는 예수를 따라다니던 사람들도 많이 참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조금 전에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을 ‘군중’이라고 하더니만 지금은 ‘죄인들’이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죄의 개념은 상당히 막연하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매우 분명했습니다. 종교적 계명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 죄인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지켜야 할 종교적 계명이 모두 몇 개였어요? 크게 보면 십계명이지만, 당시의 율법 교사들은 이를 잘게 쪼개 매우 세세한 계명들을 만들어냈는데, 무려 613개나 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하필 613개입니까? 일 년 365일에 당시 몸의 뼈의 숫자로 말해지던 248을 더한 숫자입니다. 그리고 이 계명들은 ‘하라’는 긍정계명이 365개 ‘하지 말라’는 부정계명이 248개였습니다. 그러니까 계명을 전체로 해석하면 매일매일 긍정적으로 살되, 네 몸을 잘 관찰하여 하지 말아야 할 것에 조심하라 이런 뜻이 되겠지요.


하여간 당시에는 이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모두 죄인이 됩니다. 그러니 죄인이 되지 않으려면 우선 이 계명을 다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계명을 알려면 글을 알아야하지요. 그런데 당시 문맹률이 95% 이상이라고 하니까 소수의 1%를 제외하고 99%는 저절로 죄인이 되는 겁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못 배운 것도 억울한데, 게다가 죄인까지 되는 어처구니없는 사회가 당시 불평등한 사회 구조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리는 예수가 이들과 어울리며 함께 밥을 먹고 술을 마시는 친구가 된 것입니다. 이게 지배자들의 입장에서는 큰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이는 사회질서를 깨뜨리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사회적으로 매우 존경받는 어른이 거리의 노숙자들과 좌빨로 의심되는 빨갱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행위가 되는 일입니다.


그래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이 문제를 제기하지요?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요? 본을 보여야 할 선생이란 사람이 이게 무슨 짓이요? 예수님의 답변은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주장에 할 말이 없습니다. 또 암묵적으로 자기들을 의인이라고 부르는데,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 의인입니까? 바울로 선생은 로마서 3장 10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올바른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 불란서의 철학자 파스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에는 단 두 종류의 인간만이 있다. ‘스스로를 의인이라 여기는 죄인과 죄인이라 여기는 의인.’ 예수님도 이런 관점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를 서로 비교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실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을 향해 당신들이야 말로 회개해야 할 죄인들이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단식의 참 뜻]


율법학자들이 이런 점을 눈치를 채고 또 다른 시비를 겁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단식을 하는데 당신 제자들은 왜 단식을 안 하는 것이요?” 당시 경건한 사람들은 매주일 두 번 단식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답합니다. ‘잔칫집에 온 신랑 친구들이 어찌 단식할 수 있겠느냐? 그런데 신랑을 빼앗긴 후에는 단식을 하게 될 것이다.“ 결혼식 기쁨의 자리에 단식할 수 없지 않느냐? 후에 필요하면 할 것이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단식의 본래 의미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단식이란 단지 음식을 굶는 종교적 행위가 아니다. 단식은 자신도 곧 죽는 유한한 존재임을 깨닫기 위함이다. 이사야 58장을 보면 단식을 하면서 돈벌이에 눈을 밝히고 일꾼들에게 마구 일을 시키는 일을 부자들을 비난합니다. 우리나라 재벌들도 천국은 가겠다고 교회와 절은 대부분 다니고 헌금이나 시주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정작 실천을 해야 할 것은 단식이 아니라 40시간 이상은 노동을 시키지 않아야 하고 저들의 권리보장을 위해 노조를 허락하는 것이고, 빵, 순대, 떡볶이 같이 자잘한 것은 소상인들이 나눠먹고 살 수 있도록 건들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단식하는 이유입니다. 그래 이사야를 통해 하느님은 이렇게 꾸짖습니다. “그렇다. 단식하는 것들이 시비나 하고 싸움이나 하고 가지지 못한 자를 주먹으로 치다니 될 말이야, 이 따위 단식을 내가 반길 줄 아느냐?”(58장 4절)


정치인들 상당수가 교회나 절을 다닙니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식은 시비와 싸움 얘기입니다. 이명박장로 대통령께서는 청와대에 입성하자마자 재벌들을 불러 어려운 일이 있으면 직접 전화하라고 했습니다. 지금 재벌들에게 어려운 일이 생겼습니다. 골목의 문방구, 빵가게, 떡복기, 순대가게를 다 접수하려고 했는데, 서민들의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빨리 가카에게 연락을 해야 하는데, 요즘 가카도 발등에 떨어진 불 때문에 정신이 없습니다. 한나라당(새누리당?) 당원들에게 푼 선거비용이 청와대에서 나왔다는 것 아닙니까? 게다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슨 일이든 형님을 통하면 다 된다던 만사형통 상득이 형님은 자기는 저금통장 하나 없는지, 8억원의 거금을 여비서 통장에 넣어 놓아 만사불통이 되었지, 박희태, 최시중전방송통신위원장을 비롯한 심복들은 모두 뇌물착복사건에 연루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돈들이 모두 어디에서 나왔느냐 하는 것은 비밀이지만,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4대강 막개발에 나랏돈 수조 원을 처 부어 넣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어느 트위터에 이러한 오늘의 사태를 고발하는 글이 떴습니다. [‘못하는 짓이 없다’는 뜻의 ‘무소불위’는 두 종류의 사람들에게 썼다. 절대권력자와 파렴치한, 그런데 파렴치한이 권력까지 갖는 건 세상에 재앙이나 다름없죠, 그래서 권력자에게는 특히 염치를 강조했습니다. 그러다 파렴치가 표준이 되면 재앙도 일상이 됩니다. 지금 재앙이 일상이 되는 종말의 시간이 점점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새 포도주? 새 부대?]


오늘 마르코복음 본문 말씀의 마지막 문장은 매우 유명한 말씀입니다. “낡은 옷에 새 천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낡은 옷이 새 천조각에 켕겨 더 찢어지게 된다. 또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다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예수님의 새로운 말씀과 사상을 담기 위해서는 새로운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이해가 됩니다.


우리가 새로운 조직을 필요로 할 때에 이 구절을 자주 인용합니다. 새 포도주에는 새 부대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 하나는 영국 속담에 친구와 포도주는 오랠수록 좋다는 말이 있듯이 포도주는 오랠수록 좋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루가복음은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또 묵은 포도주를 마셔 본 사람은 묵은 것이 더 좋다고 하면서 새것을 마시려 하지 않는다.”


우선 우리는 새것이라고 할 때, 그 기준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최근에 나온 것이면 다 새것이냐? 곧 새것이란 양적인 시간이 기준인가? 아니면 어떤 질적인 변화를 두고 하는 말인가? 시간적으로 새로운 것을 새것이라고 말한다면 시간은 계속 흘러가니 따지고 보면 새것이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새것이란 곧 시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옛것과 구별되는 질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희랍어 성서 본문을 보면 새 포도주의 ‘새’와 새 부대의 ‘새’의 단어가 다릅니다. 전자는 neos 후자는 kainos 로 다른데, 앞의 단어는 양적 시간의 의미로서의 새것, 뒤의 단어는 질적 시간으로서의 새것을 의미합니다. 곧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새 부대란 이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전연 새로운 것. 상상할 수 없는 그 어떤 근본적인 변화, 나중된 자가 앞서고 앞선 자가 나중되는 뒤집어지는 전복성의 근본 변혁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본다면 문자적 계명에 억매여서 사람들을 죄인과 의인으로 구분하는 그런 종교적 시스템이나 신앙은 사라져야 할 옛것이 되는 것이고 거기서 죄인들이라 부르는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사람간의 경계를 무너뜨림으로 저들에게 희망을 제시하고 나아가서 저들이 주인되는 운동이야 말로 진정 새것이 됩니다.


지금 우리 안에 분가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여기서 분가교인들은 새 포도주가 되고 분가교회는 새 부대가 되고, 반대로 남아 있는 향린교회 교인들은 오래된 포도주가 되고 향린교회는 오래된 부대가 되는 것인가? 양적 시간으로 구분한다면 그렇게 되겠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질적인 변화로 구분한다면 둘 다 오래된 포도주와 오래된 부대가 될 수도 있고, 둘 다 새 포도주와 새 부대가 될 수 있습니다. 그 기준은 사람을 죽이는 문자의 교회인가 아니면 사람을 살리는 성령의 교회인가 하는데 있습니다.


흔히 교회 안에는 전통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과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는 개혁가들이 있습니다. 어느 한쪽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전통도 필요하고 개혁도 필요합니다. 전통없는 교회는 나아갈 방향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방황하기 쉽고, 개혁없는 교회는 변화가 없어 새사람이 들어오지 않아 식물인간이 되기 쉽습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는 사람 중심의 열린 구조가 되어야 하고 또 여기서 말하는 사람이란 이미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들이 아닌 교회 밖의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인 민중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새 포도주와 새 부대의 본질입니다. 사회가 만들어 놓은 죄인과 의인의 경계를 넘어 오히려 사회가 죄인들이라 규정하는 그러한 사람들을 품에 안고 나아갈 때 새 술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제직훈련의 시간을 갖습니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진행을 하고자 합니다. 이전과 다르다고 해서 새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고 우리 교회의 구조가 새로 온 교인들과 20대의 청년 세대들이 쉽게 접근하고 저들의 의견이 교회 활동에 반영이 될 때 우리 교회는 새 부대가 될 것입니다. 자신과 다른 소리에 귀 기울고 나아가 자신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가능성의 존재로 열어 놓을 때, 진정 우리는 새 부대에 들어가는 새 포도주가 될 것입니다.


아기 분가교회와 어머니 향린교회는 이제 전통과 변혁이라는 의미에서 서로 서로가 거울이 되어 좋은 전통은 살려나가고 사회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변혁에는 항상 열린 자세로 나아갈 때 엄청난 시너지의 효과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하느님의 선교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