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 계명의 본 뜻
신 5:12-15; 시편 81:1-10; 고후 4:5-12;
막 2:13-3:6


오늘 신명기와 마르코복음서 본문 말씀은 모두 안식일에 관련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시편은 안식일의 근본인 하느님을 찬양하는 예배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고 고린도후서는 이로 통해 우리 인간에게 주시는 자유와 해방을 강조하는 사도바울로의 신앙고백입니다.


[안식일은 종교적 계명인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씀 곧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라는 말씀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말씀입니다만, 사람의 아들에 대한 명확한 성서신학적인 이해를 갖지 않으면, 이 말씀에도 우리가 걸려들기 쉬운 덫도 놓여 있습니다.


안식일은 일을 하지 않고 쉬는 날입니다. 단순히 쉬는 날일뿐만 아니라 일을 놓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관조와 성찰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안식일을 거룩되이 지키라는 4번째 십계명이 강조하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오늘 신명기 본문 말씀은 매우 구체적으로 이를 명시합니다. “너희와 너희 아들딸, 남종 여종뿐 아니라 소와 나귀와 그 밖의 모든 가축과 집안에 머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하지 못한다.” 이 명령은 누구를 향한 말씀인가요? 종을 거느리고 소와 나귀를 부리는 부자를 두고 한 말입니다. 상위 1%의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권한을 제한하는 말씀입니다.


지난 목요일 재능교육해고자 복직을 위한 1512일째 거리기도회가 박성훈회장이 사는 도곡동 타워팰리스 앞에서 있었습니다. 그때 여목사님께서 하늘뜻을 전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자신이 30대에 봉제공장에 가서 일을 했는데, 퇴근시간이 다 되어 이제 주위를 정리하고 가야 하는데, 그때 사장이 나타나면 재봉사들이 빨리 일감을 달라고 해서 재봉틀을 돌려가며 일을 하는 척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장으로부터 집에 가라는 말이 나올 때를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그래 전태일님은 이런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 노조 결성을 위해 애쓰다가 자신의 몸을 던졌고, 그의 죽음으로 인해 한국노조운동에 엄청난 변화가 생겼습니다.


산업시대의 노동자들은 출근하지 않는 날에는 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노예시대에 주인의 집에 몸 붙여 사는 종은 도무지 쉴 수가 없습니다. 주인이 잠을 자야 잠자리를 들 수 있고, 주인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일어나서 하루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안식일 계명이 생겼습니다. 종을 쉬도록 하게 하라.


이 계명이 지금으로부터 삼천년 전 왕이 신의 자리에 올라서고 귀족들이 종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던 고대노예사회에서 선포되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단순한 인권선언을 넘어 노예해방선언이고 사람만이 아니라 가축까지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 안식일 계명이 갖는 정치사회적 혁명성 그리고 자연계의 보편적 하느님 생명존엄성은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용어로 말한다면, 개미나 파리를 보고 거기에도 하느님의 형상이 담겨 있으니 함부로 다루지 말라는 말씀으로 재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성서는 이 안식일 계명이 시대에 따라 변경될 수 없는 절대법임을 말하기 위해 안식일은 인간이 만든 날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천지창조 때에 만드셨다고 증언합니다.


게다가 오늘 신명기 본문 말씀은 야훼 하느님이 안식일을 제정하신 목적은 애굽의 노예생활로부터 해방받았음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함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곧 이는 종교적 계명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정치적 해방을 지향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힌 것입니다. 곧 이는 당시의 제국주의적 점령 지배 차별 정책에 대항하여 모든 민족 모든 인간의 평등을 말하는 것입니다.


[계명 혹은 교리의 본래성]


그런데 이러한 안식일 계명이 시간이 흘러 예수님 시대에 오면 아주 복잡하고 세세한 작은 규정들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사회가 복잡해져가면서 단순히 쉬어라 하는 한 마디 같고는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도 밥은 먹어야 합니다. 지금은 냉장고 문을 열면 가스불만 올리면 해결이 되지만, 당시에는 밥 한끼를 먹으려면 불을 때기 위해 산에 가서 나무를 구해 와야 하고 물도 길러 와야 하고 곡식도 빻아야 합니다. 여전히 종은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최소한의 일만 하도록 세세한 규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안식일에는 어느 이상 걸으면 안된다. 안식일에는 밀을 자르거나 곡식을 빻기 위해 뭔가를 손으로 비비거나 돌리거나 하면 안된다 등등의 규정을 해놓은 것입니다.


처음에는 종을 보호하기 위해 이런 규정들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나중에는 이 규정들의 본래 정신은 사라지고 규정만 남아 오히려 인간을 옭아매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안식일 논쟁은 제자들이 길을 가다 배가 고파 밀 이삭을 자른 일에서 시작합니다. 왜 안식일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까? 다윗도 그가 쫓김을 받아 배가 고팠을 때, 사제들만 먹을 수 있는 빵을 먹지 않았느냐?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일이 먼저이지 계명을 지키는 일이 먼저이냐? 회당 안에서 마른 손을 고치는 일을 두고 예수님과 바리사이파 사람들과의 대결 장면도 같은 맥락입니다.


어느 분이 교회 홈피에 이런 질문을 올렸습니다.


[저는 오순절계통 신학교를 다닌 전도사입니다. 민중신학과 안병무선생님의 가르침에도 관심이 많아 기회가 주어지면 꼭 공부해보고 싶습니다. (중략) 흔히 기존 보수신학 노선에서는 삼위일체, 성육신,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천사 타락 후 마귀됨.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그리고 다시 오심. 십자가의 대속 구원과 천국과 지옥의 실존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음을 말함으로 타종교의 구원없음을 얘기합니다. 이런 교리들을 '펙트'라는 전제 하에 '교리'로 믿고 있는데요. 향린교회에서는 위의 신학노선에 대해 어떤 '입장'인지가 궁금합니다.]


이에 대해 한문덕목사님께서 매우 적절한 답을 주셨습니다.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고, 교리를 변하지 않는 절대적 진리로 믿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억압과 폭력을 자행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삼위일체, 성육신,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등등 그리스도교의 다양한 교리는 그 시대의 한계 속에서, 특히 이제 막 출생한 어린아이 그리스도교가 살아남기 위해 요구되고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리가 만들어지기까지 나름의 이유와 정당성이 있었지만 그것이 모든 시대를 통틀어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교리는 매 시대마다 재해석될 필요가 있고, 사용가치가 떨어진 교리는 신앙인들에 의해 저절로 외면당해 사라지겠지요. 위에서 질문으로 말씀하신 다양한 교리들이 오늘날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는 게시판에서 몇 문장으로 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삼위일체를 수용하느냐 수용하지 않느냐보다 도대체 삼위일체라고 표현된 그 교리가 함의하는 바가 무엇이며 그것이 오늘 우리의 신앙에 어떻게 적용되고 이해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신학을 하셨다고 하니 종교언어가 가지는 은유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책들을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시면 "사실(fact)" 언어가 가지는 한계와 그것이 신앙언어가 될 수 있는 것인지도 함께 고민하실 수 있으시리라 생각됩니다.]


부부도 함께 살면 닮는다고 하는데, 목사와 부목사도 한 십년 있으면 서로 닮는 것 같습니다. 한목사님 대답이 제 대답입니다. 저는 이점에서 우리 교회가 대부분의 교회들이 예배시에 고백하는 ‘사도신조’ 대신 이를 오늘의 언어와 사고로 재해석하여 고백하는 ‘향기로운 이웃’은 너무나 훌륭한 것으로 세계 교회에 자랑하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가 성서를 재해석하여 하늘뜻을 이해하듯이 모든 교리나 신조 또한 이를 재해석하여 고백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전통을 중요시한다는 의미입니다.


[성서의 안식일]


어떤 교단은 성서가 정한 안식일은 지금의 일요일이 아닌 토요일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엄격히 말한다면 이것도 틀린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나 지금이나 유대인들이 지키는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입니다. 왜 저녁부터이지요? 그건 해를 기준으로 하지 않고 달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왜 달을 기준으로 하였을까요? 중동과 팔레스틴 지역은 사막과 광야지대입니다. 태양이 비치는 낮은 너무 뜨거워 인간이 활동을 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해가 지는 저녁부터 일상 활동이 시작합니다. 우리는 농경사회라 해가 중심이지만, 중동지역은 유목사회로 달이 중심입니다. 그래서 중동지역의 많은 국가들은 국기에 초생달과 별을 그려 넣습니다. 오늘 시편에서 하느님께 드리는 축제의 예배 또한 달을 기준으로 한 것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의 모든 절기는 자신들만의 음력을 기준으로 합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는 하루의 때도 새벽이거나 아니면 저녁때입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부터 시작인데, 시계가 없었으니 정확한 때를 정하기가 힘들어 탈무드에는 안식일의 시작은 하늘에 별이 세 개쯤 보일 때부터라고 말합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한 613개의 계명이 있었습니다. 왜 613개인지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신앙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시는 분들은 지난 주 하늘뜻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이나 뉴욕을 가면 예수님 당시에 지켜졌던 613개의 세세한 규정들을 지키기 위해 검은 양복과 검은 모자를 쓰고 다니는 정통유대인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더운 여름에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나건만 그 긴 검은 옷을 입고 다니니 긴 수염 사이로 땀을 쉴새없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모두 랍비는 아닙니다. 20년도 넘었습니다만, 토요일 예루살렘의 한 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정통유대인이 타이어가 터져 갈아 끼우고 있는데, 나사를 한꺼번에 돌리지 않고 몇 바퀴를 돌리고 나서 한참을 쉬었다 또 돌립니다. 힘든 일도 아닌데 왜 저렇게 할까 하여 물었습니다. 왜 쉬느냐고? 안식일 규정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 보다 못한 저희 일행 중에 한 목사님이 대신해도 괜찮겠느냐고 물었더니 그건 괜찮다고 해서 대신 돌려주었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예루살렘의 호텔들은 안식일이 되면 엘리베이터가 모든 층에 섭니다. 혼자서 10층을 간다 하더라도 자동으로 모든 층에 서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에는 뭔가를 누르면 안 된다는 규정을 어기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행위를 무조건 어리석다거나 잘못된 행동으로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문자에 매여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분들은 그러한 종교적 철저성을 통해 윤리 도덕적으로 말하면 우리보다 훨씬 더 고귀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는 자유를 말하지만, 그것이 자유를 넘어 방종에 가까운 경우도 많고, 쾌락을 좇는 일이나 도박같은 부도덕한 일까지도 개인의 자유 선택으로 받아들입니다.


[‘거룩’의 참 뜻]


지금 교회를 다니는 우리들은 일요일을 흔히 주일(主日)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의 날’이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일요일이 부활의 날이라는 뜻에서 부르지만, 잘못하면 일요일만 주일이라는 특별한 날이 되고 나머지 육일은 주님의 날이 아닌 것으로 오해가 됩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이 6일동안 만물을 만드셨고 7일째 주일에는 쉬셨습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창조가 이루어진 6일이 더 중요한 것 아닌가요? 여기서 우리는 안식일을 거룩되이 지키라는 명령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거룩이라는 본래 히브리 뜻은 ‘따로 떼어놓다’입니다. 이는 차별이 아닌 차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일요일은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날이기에 다른 육일보다도 더 귀하다고 하는 차별로서의 거룩한 날이 아니라, 육일의 기간 또한 하느님께 예배하듯이 살기 위한 첫날로서의 차이의 거룩한 날입니다. 직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주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세리 레위의 이름풀이를 하면서 제1성서 시대에서 레위지파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 오늘날의 사제들과 성가대 예향 그리고 관리부원을 대표로 말했는데, 엄격히 말하면 예배 안에는 이 분들 외에 음향과 동영상을 담당하는 미디아팀도 있고, 안내위원, 헌금위원, 성찬위원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눈에는 안보이지만, 교사들, 4층 식당의 봉사부원, 1층의 친교부원, 주차봉사자들도 다 성전 일에 관계하는 레위인들입니다. 그렇다면 예배부만 레위지파에 속하고 사회선교부는 아닌가요? 여기서 우리는 레위지파의 거룩성 또한 다른 지파와의 차별로서의 거룩이 아닌 기능의 차이로서의 거룩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목사라고 해서 거룩한 직업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도 하느님의 소명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거룩하지 못한 직업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돈을 번다고 해서 거룩하지 않은 직업이 아니라 자신이 하는 일 속에서 하느님의 부르심 곧 소명을 깨달았다면 그게 바로 거룩한 직업이 되는 것입니다. 향린교회 창립정신에 ‘입체적 선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교인 모두가 일요일에는 하느님께 나아와 예배를 드리지만, 각자가 세상 속에서 부름 받은 직업을 통해 하느님의 사명을 행하는 전도자, 선교사와 생각을 갖고 살아가자는 의미였습니다. 저는 여기에 바로 평신도목회 혹은 평신도 사제의 깊은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자신의 직업 속에서 하늘 소명을 깨닫고 자기 안에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자부심. 이게 평신도 사제가 아니면 누가 과연 평신도 사제이겠습니까? 목회자들은 교회 안에서의 사제, 여러분들은 세상 안에서의 사제들인 것입니다. 여기에 어떤 차별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질그릇같은 존재]


사도바울로 선생은 오늘 고린도후서 4장에서 유명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당신의 빛을 비추어주셔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담아주셨습니다. 이것은 그 엄청난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빠져 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강한 생명력 그것은 예수의 죽음을 우리의 몸으로 경험하는데서 나온다는 역설입니다. 신앙은 논리로 풀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이성적 노력을 다해야 하지만, 신앙은 그 너머에 있습니다. 죽음과 생명은 함께 공존할 수 없는 상극입니다. 그런데 생명은 죽음을 통해서옵니다. 영어 표현에 No Cross, No Crown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없다는 말입니다. 어떤 역경에 처해도 거꾸러뜨림을 당하거나 찌부러지지 않는 힘은 세상을 향해서는 이미 죽은 자들에게만 임하는 하늘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이 역설을 바로 이해할 때, 안식일의 주인이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는 진리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 개개인이 안식일의 주인이 아닙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은 맞지만, 우리가 안식일의 주인은 아닙니다. 다만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의 아들은 다니엘서에 기록된대로 마지막 때에 하늘의 명령을 대신하는 분을 말합니다.


당시 손 마른 사람은 하느님의 진로를 받은 죄인으로 정죄되었기에 회당 안에 들어오는 일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침을 받기 위해 당시의 배타적인 구조를 깨고 예수님 앞에 나아온 것입니다. 말랐다고 하는 것은 죽음 직전에 처한 마지막 인간상을 뜻합니다. 세상 어디에도 호소할 데 없는 마지막 자리에 처한 사람을 뜻합니다.


그렇게 사회의 막바지에 몰린 사람들이 예수 앞에 나오는 일을 방해했던 것이 바로 하느님의 계명으로 인식되는 안식일 법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예수님의 제자들로 이를 깨기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를 깨는 일이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교회 안의 어떤 일을 바꿔내는 단순한 개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교회 구조를 바꾸겠다고 할 때, 세상 권력자들이 그 교회 없애라고 음모를 꾸미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안식일 법을 깨고 사람을 살리는 이 일은 단순히 한 생명을 회복하는 개인적 치유사건을 넘어 저들의 권력의 자리를 위태롭게 하는 사회정치적 혁명 사건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 안에 손 마른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차별과 억압 속에서 예수 앞에 나올 수 없도록 만든 구조 악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자유와 해방의 복음을 가로 막는 세력은 누구입니까? 요즘 나꼼수가 인터넷 언론을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만, 권력자들이 이들의 소리를 잠재우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고, 군인들로 하여금 이를 듣지 못하도록 하고 이들을 국가보안법에 얽어매려고 틈을 노리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평화협정 체결과 미군철수를 기조로 하는 ‘평화와 통일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압수수색하는 사건을 통해 결과가 어찌되었든 남남갈등을 고조시킴으로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강행하려는 꼼수를 두고 있습니다.


안식일 계명은 단순히 교회 안에서만 지켜지고 마는 종교적 계명이 아니라 교회 밖의 손마른 자들을 향한 사회정치적 계명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일들이 지금은 희미한 듯 보이지만, 그날이 되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듯이 분명하게 보일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생명 평화 정의의 하느님 나라를 향한 우리를 깨고 짓누르기 위해 안간 힘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들 겉의 깨어진 모습을 바라보는 대신 우리 안에 담겨 있는 예수 생명만을 바라보며 힘차게 살아가시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