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현현(顯現)과 우리의 체현(體現)

50,1-6; 열왕 2,1-12; 고린 4,3-6; 마르 9,2-9

 

한 문 덕 목사

 

 

[때가 찼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60년마다 한번 씩 오는 흑룡의 해라고 결혼업체와 출산관련 업체를 비롯해서 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있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닙니다만, 임진년을 맞을 때마다 우리는 420년 전에 일어난 왜놈의 조선 침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적게는 18만 명, 많게는 100만 명의 사망자를 내고, 경작지의 66%를 파괴시킨 임진왜란으로 조선이라는 국가는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지요. 이후 여러 가지 정책과 제도를 통해 국가재건에 나서지만 그 또한 쉽지 않은 일이었고, 결국 개화의 물결 속에 열강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다시 일본의 속국이 되고 맙니다. 남의 밑에서 종살이한 35년 동안 조선 문명을 되돌아 성찰하지 못하고 좋은 문화를 잇지 못한 절맥(絶脈)의 상처와 기회주의자들이 득세하는 가치의 전도(顚倒)는 여전히 이 땅 곳곳에 생채기를 남기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강대국 사이에서 늘 침략 당하는 이스라엘을 고난 받는 종에 비유했지만 열강들의 세력 싸움에 끼어 형제끼리 총칼을 겨누고 300만이 넘는 같은 동족을 살육해야 했던 이 땅 한반도는 함석헌 선생님의 탄식대로 수난의 여왕이라 불릴만합니다. 독재의 그늘에서도 민중들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간신히 전쟁의 폐허에서 한강의 기적이라 불릴 만큼의 놀라운 발전을 이룬 지금 우리는 또 다시 한미 FTA를 통해 미국의 경제적 속국이 되는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올해 북쪽은 김일성 주석 탄생 100주년을 맞아 강성대국의 대문을 여는 해로 만들겠다며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보고자하고, 남측은 19대 국회위원 총선거와 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습니다. 박정희가 유신헌법을 만들어 독재를 획책하려고 한 지 40년이 되는 해이고, 독재에 맞서 대통령 직선제를 회복한 6월 민주항쟁 25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합니다.

 

역사를 논할 때 만약 이렇게 되었더라면이라는 가정은 쓸 데 없는 일이지만 87년 정국에서 만약 양 김씨가 분열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뼈아픈 반성을 하면서, 우리 교단 총회의 교회와 사회 위원회를 비롯해 많은 기독인들이 21일 화요일에는 민주당사 앞에서 야권후보단일화 촉구 기독인 시국기도회를 엽니다. 지난 민주 정부 10년을 잃어버린 10이라고 부르는 자들이 후퇴시킨 민주화를 바른 궤도에 올려놓기 위한 중요한 두 번의 선거를 앞에 두고, 우리는 경쟁 속에서 타자를 짓밟아야 살아남는 살생(殺生)의 세상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서로 도와 좋은 세상 일구는 섭생(攝生)의 세상으로 갈 것인가? 하는 기로에 서 있습니다. 1%만을 위해 99%가 희생되느냐? 아니면 99%가 힘을 모아 살 만한 세상을 만드느냐 하는 것은 결국 우리 손에 달렸습니다.

 

살만한 세상이 되어, 온 생명이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누리는 것은 우리네 인생의 소원과 꿈이지만 그것은 또한 창조주 하느님의 뜻이기도 했습니다. 최근 백낙청 교수가 “2013년 체제 만들기를 말씀하시면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로 평화, 민주, 복지를 꼽았고, 평화 없이는 민주도 복지도 어렵다고 보면서, 최소한 대통령이 되려면 71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 후보가 내놓았던 예비군 폐지, 미소중일의 한반도 평화보장, 남북간의 평화적 접근을 뛰어 넘는 한반도 평화정착의 정책을 가지고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백낙청, 2013년 체제 만들기(창비, 2012)].

 

이 땅의 민주화와 평화와 통일, 그리고 생명 가꾸기에 애써온 우리 교회도 어느 덧 60살이 됩니다. 여러 가지로 변화하고 또 변화를 요청받는 사회와 더불어 우리 자신도 지난 세월의 성찰과 미래를 향한 준비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안팎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에 회갑을 지나 새로운 발걸음을 향하는 향린교회가 하느님의 뜻을 잘 이어가려면 무엇보다 좋은 정책들과 그것들을 실현할 사람이 절실히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저는 본문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늘말씀을 통해 정책과 사람을 세울 기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시대를 준비하는 자의 길]

 

오늘 제1성서 본문 또한 우리와 비슷한 고민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엘리야가 하느님의 곁으로 가버린 지금 엘리야와 함께 하셨던 하느님의 영은 계속 이어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1성서 본문은 야훼께서 엘리야를 회오리바람에 태워 하늘로 데려 가실 때가 되었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엘리야나 엘리사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떠날 때를 알고, 엘리사도 그 이후를 준비해야 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길갈에서 베델로, 베델에서 예리고로, 예리고에서 요르단으로 갑니다. 그리고 길을 떠날 때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남아 있으라고 하지만 엘리사는 선생을 따라 계속 갑니다. 그리하여 결국 엘리사는 엘리야의 승천과 함께 하느님과 맞대면하게 되고 그가 그렇게 바라던 엘리야의 영검을 물려 받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이 짧은 본문에서 우리는 엘리사가 엘리야의 고별여행에 함께 함으로써 미래를 준비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길갈은 베델의 북쪽 사마리아의 언덕에 위치한 곳으로 여호수아가 야훼 하느님의 약속에 따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 중요한 요충지의 역할을 했던 곳이자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표시로 할례를 받았던 곳입니다. 베델은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은 곳이며(창세 12:8), 야곱이 하느님을 만나 천상을 오르락내리락 했던 곳이며(창세 28:11-19), 대대로 하느님의 뜻을 물었던 제단이 있는 곳(판관 20:18, 왕상 12:29)이었습니다. 예리고 또한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부터 다윗왕국으로 들어가는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예리고 평야 여호 4:13). 그리고 요르단 강은 바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느냐? 못 가느냐? 하는 마지막 관문이었습니다. 모세가 에집트에서 나와 갈대바다를 갈랐듯이, 여호수아가 요르단을 갈랐듯이(여호 3:14-17), 엘리야도 요르단강을 갈랐습니다. 그러니까 엘리야와 엘리사가 함께 간 곳은 모두 야훼신앙을 공고히 했던 장소이고, 특별히 야훼 하느님이 행하신 구원 역사의 기억들이 아로 새겨진 곳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사가 하느님의 영을 이어 받는다면 그도 요르단 강을 갈라 야훼의 구원역사를 이뤄내야 했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와 함께 이런 곳들을 다닌 때는 아합왕이 죽은 지 2년이 지나고 그 뒤를 이은 아하지야왕도 죽었지만 이스라엘은 여전히 바알의 잔재들로 가득하였고, 야훼 신앙은 어디에 있는지 희미하기만 할 때였습니다. 엘리사는 가는 곳마다 물었을 것입니다. 야훼 하느님 앞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야훼 하느님의 예언자는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엘리야가 떠난 뒤 과연 나는 그의 뒤를 이어 야훼 신앙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물음이 깊어질수록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라 야훼의 흔적을 보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야훼 하느님과 직접 대면하기를 원했습니다. 깊은 근원과 만나는 것! 거짓된 자아를 버리고 참된 자기의 모습에 직면하는 것! 창조의 의미를 깨달아 역사의 부름 앞에 서는 것! 그 모두가 참으로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엘리사는 그 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두가 책상 앞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직접 몸으로, 발로 갔다는 점 또한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엘리사가 엘리야의 아들임을 자처하면서(두 몫을 달라고 하는 것은 맏아들에게 주는 몫이다. 신명 21:17), 그렇게도 받고 싶었던 엘리야의 영험한 능력이란 무엇이며 야훼신앙과 야훼의 구원역사란 어떤 것일까요? 이것은 제1성서가 보도하는 엘리야의 전승을 시대적 상황과 연결 지어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민중의 희망을 담지한 예언자, 엘리야]

 

예언자 엘리야! 그는 누구입니까? 엘리야가 하느님 곁으로 간 지 900년이 흐른 뒤 예수 시대에도 여전히 엘리야는 민중의 희망을 간직한 기억 속에 언제나 되살아납니다. 말라기서에서 세상 마지막 날이 이르기 전에 다시 올 사람으로 예언된(공동번역 말라기 3:22-24) 이래 불의한 자가 잘 되고, 의인이 고통당하는 무법천지의 세상이 되어, 이놈의 세상 확 뒤집어 지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을 때마다 엘리야는 다시 등장합니다.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활동하며, 낙타 털옷을 입고, 가죽 허리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로 음식을 삼은 것도 영락없는 엘리야의 모습이며,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마르 1:4)고 외친 요한의 뒤를 이어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고 선포하신 예수에게서 많은 이들은 엘리야의 모습을 되새깁니다(마르 6:14-15). 오늘 제2성서 본문, 산 위에서 변모하신 예수 곁에도 이스라엘에 그와 같은 예언자는 다시 없었다.”(신명 34:10)는 평가를 받는 모세와 함께 엘리야가 나타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엘리야의 무엇이 이렇게 거의 천년이 가까운 시간동안 민중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게 만든 것일까요? 여러분이 엘리야와 관련되어 아는 모든 제1성서의 사건들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122일 조 목사님의 하늘뜻펴기에서도 잠깐 언급이 되었습니다만 엘리야가 활동하던 시기의 이스라엘은 철기문명을 자랑하는 페니키아와의 교역으로 어느 시대보다 풍성한 때였습니다. 요르단 동편의 암몬, 그 남부의 모압, 그리고 에돔과 유다를 속국화시켰고, 북으로 갈릴리 북부 지역 끝의 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다마스쿠스 왕국과의 국경인 시리아 남부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군사력도 막강하여 앗시리아의 서방 원정에 대항하여 싸울 만큼의 국력을 자랑하였습니다. 왕실에서 대규모의 예언자와 사제 집단을 양성했을 정도로(왕상 18:19) 비교적 잘 짜인 관료제를 운영하였고, 돈이 잘되는 밀, 기름, 포도만 대량으로 생산하는 집약식 농업을 관철시켰습니다. 국가의 성공을 이룬 오므리 왕조는 자신들의 치적을 공고히 하고자 대대적인 건축사업을 하여 세련된 건물을 지었고(지금 북이스라엘에 남아 있는 유적은 모두 이 때의 유적일 확률이 높음), 국가의 지원에 힘입은 대규모 제의를 열어 왕조의 찬란한 성공신화를 찬양하게 하였습니다. 이 모든 성공지상주의를 떠받치고 있는 신화가 바로 바알 신앙이었고, 특히 사적 소유 개념을 더욱 세밀하게 발전시킨 페니키아식의 바알?아세라 신학이 보편적으로 적용되어 국가 팽창주의와 왕의 사유재산 팽창이 정당화되었습니다. 나라가 잘 되는 것은 좋은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물론 그 나라의 대다수의 백성에게 득이 될 때만 그러한 것이지요. 그런데 오므리 왕조의 국가 성공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권력을 동원하여 왕이나 귀족들이 소농의 토지를 몰수하는 일이 숱하게 일어났고, 집약식 농업으로 인해 이것저것 조금씩 여러 가지를 심는 혼합농법을 주로 하던 소농들은 살 길을 잃었으며,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이나 부역에 동원되어야 했던 대중들의 고통은 나날이 더해 갔습니다.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 시돈에 속하는 마을 사렙다의 과부 이야기도 이 시대의 양극화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철기문명을 바탕으로 지중해 무역 시장을 형성하여 부를 이룬 페니키아 왕국의 문명에 속해 있는 과부가 뒤주의 밀가루 한 줌과 병에 남은 기름 몇 방울로 마지막 빵을 만들어 먹고 아들과 함께 죽으려고 했다는 사실에서 아합왕가가 섬기던 페니키아 산() 바알?아세라 신이 누구의 편이었는지를 알 수 있으며 바로 그 과부를 살려준 것이 야훼의 예언자 엘리야였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 보아야 합니다.

 

8501로 싸워 이겼다는 전설이 녹아 있는 가르멜산은 페니키아와 이스라엘의 접경지대에 있는 산입니다. 바알과 아세라 예언자들과 대결하는 엘리야의 모습은 진정 1%를 대변하는 자들과 99%를 대변하는 자의 싸움이었습니다. 성서는 엘리야가 대대적으로 이긴 것처럼 보도하고, 엄청난 학살이 벌어진 것처럼 묘사하지만 이것은 그만큼 민중의 기억 속의 기득권을 향한 분노가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 뿐, 실제로 엘리야는 이 사건 이후 바로 이세벨에게 쫓겨 가야 하는 신세가 됩니다. 민중을 대표하여 민중의 편에서 야훼의 예언자로서의 열정을 불살랐던 엘리야! 그러나 야훼는 그 열정과 성공의 정점에서가 아니라 모든 힘이 다 빠져 완전 절망의 나락으로 빠졌을 때에서야 잔잔하고 미세한 음성으로 찾아 오신다는 것을 알았고 느꼈던 예언자였습니다.

 

[엘리야의 뒤를 잇는 엘리사]

 

엘리사가 오늘 엘리야에게 전해 받은 야훼의 영은 바로 이집트에서 고통당해 울부짖는 히브리 백성을 찾아오신 바로 그 영이었습니다. 늘 홀로 고독하게, 바알?아세라를 추종하는 왕실과 싸웠던 엘리야와는 달리 엘리사는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 수 있을 만큼의 토지 소유자였고(왕상 19:19-21), 수넴 여인을 위해 왕이나 군사사령관에게 청탁을 할 수 있을 만큼(왕하 4:13)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후를 왕으로 등극시키고, 시리아의 하사엘을 세워 오므리 왕조의 몰락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여, 중앙 예언자로서 왕을 자문하는 역할을 맡고, 예후의 손자인 여호하스 왕에게 존경을 받으며 그에게 승리를 예언해 주기도 하던 이가 엘리사였습니다(왕하 13:14-21).

 

그러나 엘리사 또한 엘리야처럼 희망을 상실한 민중들에게 새로운 샘물을 솟아나게 만드는 이였으며(왕하 2:19-22), 계속되는 기근 때문에 대다수의 백성들이 절망의 상황에 놓여 있을 때에 야훼 신앙을 통해 희망의 끈을 놓지 않도록 도와 주었고(왕하 4:1-7), 아이를 잃은 수넴 여인을 찾아가 아들을 살려 줌으로써, 경제적으로는 부유하지만 또 다른 고통으로 삶의 의미를 상실한 이들을 위로합니다(왕하 4:8-37). 도끼하나로 나무를 해서 생계를 유지하던 이가 도끼를 잃어버리자 그것을 찾게 해 줌으로써 가난한 백성들이 최소한의 경제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었고(왕하 6:1-7) 시리아 왕의 군사령관인 나아만 장군을 고침으로써 하느님의 무한하신 은총은 이방인과 유다인 상관없이 내린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왕하 5:1-27). 차별을 없애는 발걸음을 내딛는 노력이지요.

 

[이 땅의 현실과 우리의 과제]

 

2012년 이 땅은 엘리야와 엘리사가 살았던 시대와 공간으로부터 엄청난 거리와 간격이 있지만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사적 이익을 챙기기에 혈안이 된 정부가 하는 행태나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겪는 상황은 어찌 이리도 비슷한지 모르겠습니다.

 

2009년 가을학기 연세대학교의 한 학생이 제출한 과제물의 한 단락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고등학교 때 느끼던 이유 없는 불안과 초조함을 대학에 들어가면 없앨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입학 후 불어 닥친 칼바람에 어쩔 줄 모르고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다. 누군가가 먹기 위해 사는가 아니면 살기 위해 먹는가?’라고 묻는다면 먹히지 않기 위해 산다라고 답하고 싶다. ‘먹힌다는 의미는 잠정적인 경쟁자를 포함하여 내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경쟁자들에게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 나는 지는 것이 두렵고 낙오되기 싫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보이는 압박, 그것을 응축하고 있는, 벌레를 보는 듯한 시선이 무섭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따가운 눈초리가 느껴진다. 뭐라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가 나를 잉여인간으로 낙인찍어 버리고 아무도 나를 찾지 않게 될 것이다.... 누구나 나를 찾을 수 있도록, 아니 시장에서 나를 찾아줄 날을 기다리며 나를 관리하는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김균진외 지음/연세대학교 대학원 학술위원회 엮음,경쟁과 공존(서울: 오래, 2011), 조한혜정, 낯섦의 두려움, 캥거루족 사회235-236.]

 

나름 잘 나간다는 대학의 학생이 느끼는 공포와 불안이 이 정도라면 무엇을 더 말해야 할까요? 벌써 잊으셨는지 모르겠으나 작년 봄에는 4명의 카이스트 학생들이 잇따라 자살을 하였지요. 아니 사회적 타살이라 불러야겠군요. 엘리사가 엘리야의 뒤를 이어 야훼 신앙을 보존하려고 했던 이유는 바로 이렇게 살생이 난무한 세상을 섭생의 세상으로 바꾸려 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213일 서울시는 장애인과 어르신, 그리고 청년 문제를 대변할 무보수 명예직 부시장으로 양원태씨, 박종화씨, 김영경씨를 뽑았습니다. 다음 주에 사순절 특강 강사로 우리교회에 오게 될 김영경씨는 한국의 첫 세대별 노동조합인 청년유니온의 위원장입니다. 세대별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한 이 분의 노력도 정말 대단하지만 이런 분을 명예 부시장으로 임명해서 장애인, 어르신들과 같이 이미 사회적 약자가 되어버린 청년들의 고통을 시정(市政)을 통해 고쳐보겠다는 박원순 시장 또한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1년전 오세훈 시장은 청년유니온이 신청한 지역노조설립신고를 반려했으나 박원순 시장은 이 단체의 위원장을 비록 명예직이지만 적극 시정에 참여시킨 것입니다.

 

향린60주년을 맞아 우리가 키워낼 인물은 홀로 고독하게, 그러면서도 당당하게 참된 이상을 향해 투쟁하는 엘리야 같은 이가 되었든, 사회적 조직가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한 엘리사 같은 이가 되었든 간에 바로 이렇게 함께 살자!”는 데 동의하고 그것을 위해 애쓰는 이라는 사실에 여러분 모두 아멘하시리라 믿습니다.

 

[향린의 정책 방향]

 

그럼 이제 제2성서의 본문말씀을 통해서 향린교회가 세울 정책의 기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산상의 예수 변모 사건은 몇 가지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빛으로 가득한 얼굴로 바뀐 예수는 누구와 대화하는가?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고린도후서에서 말했듯이 예수의 얼굴에 이렇게 노골적으로 하느님의 영광이 가득한 이때는 예수의 공생애 기간에서 어느 시점인가? 베드로가 초막을 짓자고 했을 때 마르코 복음서의 저자는 베드로가 겁에 질려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는 말을 첨가함으로써 독자들에게 무슨 깨우침을 주고 싶었던 것인가?

 

종교체험을 한 많은 사람들이 가장 쉽게 빠지는 오류와 위험은 세속의 일상생활을 멀리하고 신비적 체험추구에만 몰입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바로 덫에 걸린 것이지요. 신비한 현상이 일어난 바로 그곳에 머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 체험의 현장에서 그와 같은 예언자는 다시 없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모세와 또 종말에 다시 세상에 올 것이라는 엘리야 예언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이란 땅으로 내려가서 하늘의 소리를 전해야 하는 사명을 가진 자들이고, 예수도 또한 그 반열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당연히 산에서 내려옵니다. 세상으로, 일상 속으로 걸어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변모 사건이 바로 예수의 첫 수난 예고 후에 벌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즉 예수가 죽으러 간다는 것을 공표한 다음 하느님의 영광이 그에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이 들려오고, 수제자들은 이제 예수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하늘의 명령이 떨어집니다. 이 때는 예수는 바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진격하기로 한 때였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이 우리가 마르코 복음이라고 부르는 책의 제목일 수 있습니다. 이미 이 책은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라 상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읽는 사람은 하느님이 직접 예수에게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한 장면을 두 번 보게 되는데 그것은 첫 번째로 세례 받을 때이고 오늘 본문인 변모사건이 두 번째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세례 받을 때는 하느님과 예수님과의 둘만의 대화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은 크게 기적 이야기와 수난 이야기의 결합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입장에서 진정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로 자신을 공식적으로 드러내는 때는 온갖 기적을 행할 때가 아니라 바로 그런 모든 기적을 뒤로 하고 십자가를 질 때라는 것입니다. 바로 죽으러 갈 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십자가에서 목숨을 내어주실 때 이방인 백부장에 의해 이분이야말로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이었음을 확증해 줍니다(마르 15:39).

 

바로 이것이 향린교회가 60년을 맞이하여 앞으로 세울 모든 정책의 기준입니다. 향린교회가 살려고 해서는 안 되고 향린교회는 죽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려고 할 때, 영광과 기적과 칭찬과 휘황찬란함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과감하게 버리고 아무도 가지 않는 곳, 그래서 거기에 가 봤자 별 볼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보존에 위협이 느껴지는 곳으로 나아갈 때, 바로 그 때야 향린에게서 하느님이 현현하시는 것입니다. 주현절 마지막 주일인 오늘 여러분이 아셔야 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주현절 다음에 왜 바로 사순절이 오는지도 아시겠지요?

 

[주님의 현현(顯現)을 우리가 체현(體現)하려면]

 

이제 알았으니 몸으로 실천하면 되겠지요. “주님의 현현과 우리의 체현이라는 오늘 하늘뜻펴기 제목에서처럼 주님이 나타나시는 자리를 알았다면 이제 그것을 우리가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엘리사처럼 직접 발로 가서 몸으로 겪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몸으로 나가서 뛸 때도 잠시 쉬었다 가는 지혜는 배우면 좋겠습니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빠르게 달리다가 가만히 멈추어 서서 무엇인가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무엇을 기다리는가 하면 자기 몸이 너무 빨리 달렸기 때문에 혹시 자기 영이 그 속도를 못 따라와서 날 놓치지 않았나 싶어 영이 올 때를 기다린다는 거예요. 우리도 무엇인가를 할 때 우리 영이 잘 따라 오는 지를 살피면서 갈 필요가 있습니다. 끼어들기를 해야 할 지 아니면 새판 짜기를 해야 할 지, 너무 혼자만 앞서 가는 것은 아닌지, 혹시 우리 안에서조차 소외되는 사람은 없는지, 거시적 측면에서도 살피고, 미시적 측면에서도 성찰해봐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세대가 세대이니만큼 오늘날은 깃발만 꽂는다고 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겪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또 한 가지 제안 드리고 싶은 것은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 자신을 희생하여 버리고 가는 길이라고 하더라도 신나고 재밌게 가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재미있을 때에 우리들의 행동이 더 잘 변화하기 때문이고 좀 더 많은 이들이 우리와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학시대에 사는 여러분이라 증거가 없으면 믿지 않으니 마지막으로 증명자료를 보여드리고 제 하늘뜻을 마칠까 합니다.(www.thefuntheory.com. Piano stairsThe world's deepest bin)

 

잘 보셨나요? 함께 사는 길에 자신을 조금만 희생하면 모두가 재밌게 살 수 있을 것이라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매 주 예배드릴 때마다 자발적으로 혹은 어쩔 수 없이 보게 되는 마르코복음 834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구절의 의미이고 이 말씀을 따른 사람들이 궁극에 가서 맛보는 것을 우리는 부활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