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사순절 1 사순절과 광야의 세례

창 9:8-17; 시 25:1-10; 벧전 3:18-22; 막 1:9-15


교회는 일 년을 예수님의 생애에 따라 몇 가지의 주제로 나누고 이를 반복하여 지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 그리고 이어지는 성탄절, 하느님 나라 운동의 시작을 기념하는 주현절, 그리고 사순절, 부활절, 교회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령강림절, 온 우주가 야훼 하느님의 손으로 지음받았음을 고백하는 창조절 등입니다. 그리고 흰색, 보라색, 녹색, 빨간색으로 이런 절기를 상징합니다. 대림절과 사순절에 사용하는 보라색은 고난과 기다림의 상징입니다.


[사순절과 재]


사순(四旬)절은 40일간을 뜻하는 한자어이며 세상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고 함께 동참하는 절기입니다. 지난 주 수요일인 재의 수요일로부터 부활절 전날까지의 기간을 말하는데, 일요일을 포함하면 40일이 넘습니다. 그래서 40일이라는 숫자 안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사순절 안에 포함이 되고 그래서 오늘을 사순절 첫 번째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지난 주 수요일 ‘재의 수요일’ 예배에 참여하신 분들은 경험하셨지만, 이날 저는 한분 한분의 이마 위에 재를 찍어드렸습니다. 재는 타고난 껍데기입니다. ‘아무 것도 아님,’ ‘사라짐,’ ‘허무’의 상징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지금 중요하다고 여기는 인생의 모든 것들, 업적들과 자랑들과 소유하는 모든 것, 심지어 나의 몸까지도 결국에는 한줌의 재로 돌아가고 마는 것임을 기억하면서 탐욕과 자기중심의 죄를 회개하고 고백하는 날입니다. 그래 묵상 가운데 회개기도문을 쓰고 이를 불에 태우는 예식을 가졌습니다.


본래는 종이를 태우는 것이 아니라, 1년 전 종려주일 때에 교회에서 받아두었던 종려가지를 불에 태웁니다. 종려주일은 사순절 마지막 주일을 말하며 이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입성할 때에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환호를 하였기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제자들도 그러했지만, 그들은 예수가 예루살렘 성을 들어가면 로마제국과 헤롯왕가의 불의한 지배를 청산하고 자신들이 꿈꾸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리가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예수는 ‘하느님 뜻대로 쓴 잔을 마시겠다고 하면서’ 무력하게 로마 군인들에게 항복하고 맙니다. 이때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심한 배신감과 무력감을 느껴 예수를 떠나가고 배반하고 침을 뱉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치게 됩니다. 결국 종려나무 가지에는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착각과 어리석음과 배신이 담겨 있습니다. 사제는 사순절이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에 이를 태운 재를 만들어 이마에 찍어줍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


[사순절과 신앙 훈련]


이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 신도들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모든 행위를 잠시 중단합니다. 먹는 것도 최소한의 것만 먹습니다. 하루 한 끼 단식 혹은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을 단식하기도 하고 고기나 커피 등의 기호식품을 중단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기도와 말씀 명상에 열중합니다. 더 집중하기 위해 말을 줄이고 어떤 이는 아예 깊은 침묵 속으로 들어가기도 합니다. 불가에서는 동안거와 하안거라는 제도가 있어 여름과 겨울 두 달 동안은 방 밖으로 나오지를 않습니다. 이슬람교에는 라마단이라는 한 달간의 절기가 있어 무슬림들은 아침 해가 뜨면서 저녁 해가 질 때까지 금식을 하는데, 단순히 먹는 것만 금하는 것이 아니라. 물외의 모든 음료,
흡연, 성행위 등이 금지됩니다. 이런 절제 훈련을 통해 폭력, 화, 시기, 탐욕, 중상 등을 삼감으로써 보다 깊은 신앙의 경지로 나아가고자 노력합니다.


이러한 신앙 훈련은 본래 기독교 안에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전통이 많이 사라졌고, 특히 개신교에서는 성서의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침묵과 명상기도의 좋은 신앙의 훈련 전통을 너무 소홀히 하고 말아 오늘날 특히 남한에서의 개신교의 타락 현상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성서문자주의의 해독]


얼마 전에도 전남 보성에서 기독교인 광신도 부부가 귀신을 내어 쫓는다고 10살, 8살, 5살의 어린 세 자녀들을 굶기고 가죽 끈으로 때려 죽인 일이 있었습니다. 언론에서는 이분을 목사라고 말하지만, 신학교를 다닌 적이 없고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이 아니니 목사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다닌 교회가 ‘형제단’이라고 불리는 이단 종파인데, 목사없는 평신도교회를 지향하고 있는지라 스스로 목사라 불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감기에 걸린 자녀를 굶기고 때려서 죽게 한 이유는 순전히 성서 말씀을 믿고 따른 죄 밖에 없습니다. 언론을 보니 본래는 이분이 자녀들을 매우 사랑하여 자유분망하게 키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나이 많은 여성신도 한 사람이 잠언서의 23장 13, 14절의 말씀 곧, “아이에게 매 대기를 꺼리지 말아라. 매질한다고 죽지는 않는다. 아이에게 매를 대는 것이 그를 죽을 자리에서 건지는 일이다.”를 지적하고 매를 대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라고 말하자 그렇게 따라 하기 시작했고, 결국은 병을 가져온 악령을 내어 쫓는다고 아이들을 굶겨 때려서 죽인 것입니다. 게다가 죽었는데도 부활할 것이라고 믿고 그 시체를 방치하였다는 것입니다.


언론에서는 이 아버지가 매우 포악하여 아이들을 때려서 죽인 것으로 말하는데, 사실은 그냥 마구 때린 것이 아니라 가죽혁대를 잘라 눕혀놓고 엉덩이에 39번의 매질을 하였습니다. 제가 확인 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하루 39번씩 닷새에 걸쳐 때렸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39번이라는 숫자는 언론에서 들은바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후서 11장 24절에 사도바울이 전도하는 중에 유대인들에 붙잡혀서 매를 맞은 기록이 나오는데, “나는 여러 번 감옥에 갇혔고 매는 수도 없이 맞았고 죽을 뻔한 일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를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몽둥이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에 맞아 죽을 뻔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 핍박받은 여러 일들을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왜 39번을 때린 것일까요? 38번을 때리든가 아니면 41번을 때리든가 하지 않고. 당시 유대인들에게 40은 야훼 하느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거룩한 숫자였습니다. 그래 노아홍수도 40일 광야생활도 40년 그 외에도 40이라는 숫자가 자주 등장합니다. 이는 모두 야훼 하느님께서 친히 역사를 움직이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분도 39번을 때린 것인데, 이는 때린 것이 아니라 실은 안수 기도를 한 것입니다. 미국에 가면 Christian Science Church라는 간판을 자주 보게 됩니다. 번역하면 ‘크리스챤 과학교회’이기에 과학자들이 모이는 교회같지만, 실제는 복음서의 예수님의 치유사역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모든 병은 귀신이 붙어 생기는 것이니까 기도로서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다고 믿는 신앙집단입니다. 그래서 현대의학을 거부하여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고 약도 먹지 않습니다. 그래 아까 보성의 어느 광신자처럼 자녀들의 병을 기도로 낳게 하겠다고 하다가 죽는 경우가 생겨 종종 부모의 신앙과 사회적 책임의 경계에 대한 논란을 야기합니다.


이는 성서의 구절 하나하나는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한자도 폐하거나 더할 수 없고, 씌어있는 글자 그대로 믿고 사는 것이 바른 신앙이라고 하는 문자주의로 인한 병폐입니다. 마르코복음 마지막 부문에 가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사람에게는 기적이 따르게 될 것인데 내 이름으로 마귀도 쫒아내고 여러 가지 기이한 언어로 말도 하고 뱀을 쥐거나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것이며 또 병자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미국 남부 도시의 어느 지역에 가면 이 성서 말씀을 그대로 믿고 실천하는 교회가 있는데, 뭐 세례를 베풀거나 예수이름으로 기도를 하거나 방언을 하거나 병자에게 손을 얹으며 기도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데, 이 구절 중에 뱀을 쥐거나 독을 마셔도 괜찮다는 구절은 문제를 야기합니다.


그래서 TV 화면으로 예배 실제 모습을 보았는데, 이게 예수님의 부활 직후에 말한 발언이라, 부활절 아침 예배시에 목사가 커다란 독사를 항아리에서 꺼내 앞에 앉아 있는 신도에게 전하면 계속해서 이를 옆 사람에게 전달을 합니다. 물론 이때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합니다. 제가 보는 그날은 죽는 사람이 없었는데, 아나운서 얘기가 이 전에 뱀에 물려 죽는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실제에 있어 성서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과 광신의 차이는 참으로 경계선을 긋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비둘기의 상징성]


오늘 마르코 본문 말씀에서도 우리가 이런 문자주의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르코 복음서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처음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에게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에서 성령을 비둘기로 착각합니다. 그래 예수님 세례를 받는 성화에는 항상 비둘기가 등장합니다. 주보 맨 앞에 있는 향린교회를 상징하는 로고에도 그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비둘기 자체가 아닙니다. 비둘기의 어떤 속성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흔히 비둘기를 평화의 상징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비둘기도 관찰을 해보면 다른 새들과 하나 다름없이 먹이를 갖고 싸우고 서로 쪼아대며 엄청 싸웁니다. 평화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평화집회에서 비둘기를 사용하는데, 그것은 색깔도 하얗고 다른 새와 달리 집단 사육이 가능하고 이를 큰 바구니에 곳에 담아 한꺼번에 공중으로 날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것은 맞지만, 오늘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모양으로 내리셨다는 구절을 평화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성령을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둘기로 표현하는 이유는 딴 데 있습니다. 무엇이지요? 인간들이 비둘기를 왜 기르기 시작했을까요? 식용은 아니고, 관상용인가요? 관상용으로 키우기에는 너무 크지요. 새장에 넣어둘 수 있는 새는 아니니까요. 집으로 돌아가는 본능을 이용해서 통신용으로 쓰였습니다. 중앙에서 지방으로 명령을 하달할 때 특히 시간을 요하는 군대에서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모양으로 내려왔다는 말은 하느님의 명령이 직접 내렸다는 말입니다.


[찢어짐의 사건]


그리고 우리가 주의 깊게 들여다보아야 할 단어는 비둘기와 연결된 ‘하늘이 갈라지며’라는 단어입니다. 희랍어 동사
skizo의 뜻은 ‘찢어진다’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과 루가복음은 이 구절에서 다른 희랍어 단어 anoigo를 사용하여 ‘하늘이 열리고...’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마르코 저자가 ‘하늘이 찢어지고’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깊은 의도가 숨겨 있습니다. 이 단어가 마르코복음서 15장에서 다시 한 번 등장을 하는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에 큰 소리를 외치시게 되고, 이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둘로 찢어졌다고 말하니다. 저자 마르코는 이 두 장면을 매우 의도적으로 그러니까 매우 신학적으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장면은 각각 예수님 사역의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 둘의 장면에 흔하지 않게 사용되는 동사가 함께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선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말은 하느님의 법궤가 놓여 있었던 일 년에 단 한번 욤키퍼 날, 대 속죄일에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말인데,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이제는 더 이상 야훼 하느님이 예루살렘 성전 안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당시에는 야훼 하느님을 만나려면 예루살렘 성전에 나와 제사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곧 휘장이 찢어졌다는 말은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 전통, 교리 안에 갇혀 있는 종교 체제가 무너졌다는 말입니다. 이제부터 야훼 하느님은 성전이라는 장소에 매이시는 분이 아니라, 고통당하는 민중들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곧 요한복음이 서두에서 외치는 바,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리하여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시겠다.’는 민중 속의 부활예수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찢어졌다는
skizo라는 매우 강력한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가 숨겨 있습니다.


마태오와 루가복음의 저자가 말하는 ‘하늘이 열렸다’와 마르코 저자가 말하는 하늘이 ‘하늘이 찢어졌다’의 차이는 단지 표현 어법의 차이가 아니라, 매우 깊은 신학적인 차이가 담겨 있습니다. 열린 것은 다시 닫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찢어진 것은 다시 부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찢어진 헝겊 등은 다시 부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skizo 라는 단어는 갈대나 대나무의 쪼개짐을 말할 때에 사용되었습니다. 하늘이 찢어지고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는 말은 마치 대나무가 한번 쪼개지면 영원히 다시 부칠 수 없듯이, 역사 속에서는 결코 번복될 수 없는 유일회적인 사건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곧 하늘이 찢어졌다는 말은 그 이전에는 열린 바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비로소 예수를 통해 하늘이 열린 것입니다. 새 역사의 시작을 말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대나무가 쪼개질 때, 쫘-악- 하는 소리가 납니다. 그건 찢어짐의 고통의 소리입니다. 하늘이 찢어졌다는 표현 속에는 하느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의 고통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말씀 속에는 당신 자신을 예수 안으로 밀어 넣는 곧 자기 살을 찢는 고통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통이 다시금 십자가의 위에서 외쳐질 때, 성전의 휘장이 소리를 내며 찢어진 것입니다. 한자어에 졸(혹은 줄)탁동시라는 말이 있습니다. 새끼가 알을 깨고 나올 때에 안에서 쪼고 밖에서는 어미가 함께 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올 때 아픔이 있습니다. 새끼만 아픔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미 또한 아픔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새끼를 돕겠다고 구멍을 쉽게 내어버리면 어깨죽지에 힘이 붙지 않아 앞으로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많기 때문입니다. 모른 채 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그를 너무 쉽게 도와서도 안 됩니다. 졸탁동시,
skizo 이는 안과 밖이 동시에, 새끼와 어미가 동시에, 인간과 하느님이 동시에 겪는 아픔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찢어질 때에 하늘로부터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성전의 휘장이 찢어질 때에 예수의 죽음을 바라보던 한 로마 백부장의 입에서 이런 고백이 나왔습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 복음서 처음 하늘에서 들려졌던 그 소리가 복음서 마지막에 이르러 이제는 땅의 사람에게서 그것도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는 로마군의 지휘관의 입에서 고백하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skizo 찢어짐의 사건입니다. 하늘과 땅이 만난 사건이고 예수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이 하나 된 사건입니다. 찢어짐의 고통 속에 역사 창조가 이루어집니다.


[광야의 도전]


그런데 이렇듯 하늘로부터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거룩한 하늘 영으로 인치심을 받은 그 예수는 바로, 즉시로 광야로 나아가십니다. 아니 오늘 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뒤에 곧(지체없이)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 왜 광야입니까?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 광야는 사탄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장소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는 사탄이 집단적으로 거하는 우리말로 하면 지옥으로 가셨는데, 제 발로 순순히 걸어가셨을까요? 아니면 가시기 싫은데, 떠밀려서 가셨을까요? ‘아,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시니까 당연히 제 발로 가셨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목사님이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을 보니까 그 반대인 모양인데, 도대체 무엇에 근거해서 그런 말을 하시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그럼 나는 도대체 무엇에 근거해서 예수님은 가시기 싫은 광야로 나아가셨다고 주장하는 것일까요? 우리말 번역 ‘성령이 광야로 내보내셨다’는 표현은 마치 성령이 길 안내자가 되어 ‘아, 예수님 이쪽으로 오세요.’ 하는 식으로 읽힙니다. 그러나 여기에 쓰인 희랍어 동사 ‘
ekkbalo’라는 단어는 이후에도 여러번 나오는데, 특히 예수께서 귀신을 쫒아내실 때에 쓰입니다. 귀신들린 사람들에게서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실 때에 ‘어이 거기 귀신들, 이쪽으로 나오게’ 그런 식으로 인도하셨을까요. 아니지요. ‘네 이놈들 안 나가!“ 나가기 싫은 놈들을 몽둥이를 들어 내어쫓으셨지요. 그런 뜻입니다. 지금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어 쫓으신 것입니다. 그것도 세례를 받자마자 곧, 지체없이 왜요? 시간이 지나면 또 딴 생각이 날 수 있으니까. 여러분 뭐든지 좋은 일, 의로운 일은 생각날 때 바로바로 하셔야 합니다. 지체하면 안 됩니다. 우리 마음은 묘해서 나쁜 일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더 강해지는데, 좋은 일은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쉽게 변합니다. 왜 하느님께서 왜 우리 인간의 마음을 반대로 만드시지 이렇게 만드셨을까 참으로 불만입니다.


그런데 그건 그렇고, 왜 성령이 예수를 사탄들의 집합소인 광야로 내어 쫓으신 것입니까? 그 이유는 이어지는 말씀 속에 있습니다. “예수는 사십 일동안 그 곳에 계시면서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여기서도 유혹이라는 단어가 실은 매우 어색한 번역입니다. 동사
peirazo 라는 동사는 우선 죄의 유혹을 받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어려운 과정을 통과하기 위한 테스트라는 의미도 있고, 더 나아가 도전의 의미도 있습니다. 여기서의 의미는 예수께서 하늘의 영에 가득차서 사탄의 세력과의 일대 싸움을 벌이기 위해 나아가신 것입니다. 영적 전투를 벌이시기 위해 나아간 것이지 유혹을 받기 위해 나아간 것이 아닙니다. 후에 신자들 입장에서 자신들을 변호하기 위해 ‘아, 뭐, 예수님도 뭐 유혹을 받으셨는데...’ 라고 변명을 하기 위해 살짝 뒤튼 것입니다.


마태오복음과 루가복음에는 여기서 3가지의 유혹을 받으셨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마르코 복음은 이런 구체적인 내용은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광야도전에 이어 바로 이어지는 말씀 속에서, 요한이 헤롯왕의 비행을 공개적으로 비난함으로 옥에 갇히자 그를 대신하여 세상에 나와 하느님의 심판의 때가 임박했음을 알리고 회개하라는 말씀을 외치십니다. 그리곤 회당에 들어가 악령들을 내어 쫓으심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듭니다. 회당은 당시 성전에 나아가는 대신 마을 사람들이 모여 성서말씀을 배우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곳인데 어떻게 그 안에 악령이 있을 수 있나요? 회당악령 요즘말로 하면 교회악령입니다. 더구나 그 날은 안식일 야훼 하느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날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악령은 단순히 한 인간이 몸 한부분이 약해져서 생겨난 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가난한 민중들을 착취하는 로마의 정치군사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예루살렘의 종교 집단을 두고 한 말입니다. 개인귀신이 아니라 사회귀신을 두고 한 말입니다. 요즘에도 그런 귀신 많이 있습니다. 2천년 전 로마제국을 대신하여 오늘에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있고 여기에 예루살렘의 성전마냥 미국의 금융자본주의와 군사패권주의에 앞잡이가 된 교회 귀신들이 많습니다. 시청 앞에서 성조기를 흔드는 무리들, 한미FTA가 우리를 살릴 것이라고 주장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입으로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 속을 들여다보면 뭐든지 큰 것이 좋다며 돈과 최신식 무기가 자신을 보호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악령을 내어 쫓으신 것입니다.

[
광야의 세례]


오늘 하늘뜻펴기 제목은 <사순절- 광야의 세례>라고 씌어져 있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이것은 <광야와 세례>를 잘못 표기한 것으로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순절 첫째 주일로 예수님의 40일 광야기도를 다루고 있고, 이 광야 기도와 맞물려서 제1성서에는 창세기의 노아 방주 구원의 얘기 그리고 제2성서의 베드로후서의 말씀에서 우리가 받은 세례에 관련을 짓고 있습니다. “세례는 몸에서 더러운 때를 벗기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양심으로 살겠다고 하느님께 서약을 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마르코 본문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세례는 지금 베드로사도가 말하는 바, 단순히 깨끗한 양심으로 살겠다고 서약하는 물세례가 아닙니다. 그 이상입니다. 물세례를 넘어 광야의 세례 곧 악령들이 판을 치는 그 죄악의 현장 안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지난 재의 수요일부터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우리 또한 광야 안으로 내어 쫓김을 받았습니다. 예수에게 선택이 없었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어떤 선택의 여지는 없습니다. 광야에서 우리는 들짐승들과 함께 거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들짐승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동물들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안에는 이미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헤아릴 수 없는 악령들이 존재하는데, 거기에 들짐승이 더 있다고 해서 위협이 될 것은 없습니다. 들짐승의 의미는 길들여지지 않는 동물을 말합니다. 길들여지지 않았다는 말을 생떽쥐베리는 어린왕자와 여우와의 대화 속에서 ‘관계맺음’을 ‘관계’로 좋게 해석하고 있습니다만, 그런데 집짐승과 들짐승을 비교하여 말할 때, 길들여짐이란 곧 기존의 부조리한 현실에 순응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함께 거한 들짐승의 상징은 당시의 세속적 가치 곧 로마의 정치사회군사적 지배와 예루살렘 성전의 종교문화적 지배 가치에 물들지 않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이 장면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까지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사자와 곰이 송아지와 어린양과 함께 뒹굴고, 아이들이 독사의 굴에 손을 집어넣는 인간역사의 지배받고 지배당하는 정복의 역사가 뒤집혀져 강자 모두가 함께 공존하는 정의평화생명의 가치가 실현되는 그 나라의 모습’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활과 무지개]


오늘 사순절을 맞아 우리가 광야에로 내어 몰린 이유는 우리가 꿈꾸는 하느님의 나라는 예루살렘 성전과 로마의 도시 문화 속에서가 아니라 삭막한 광야, 길들여지지 않는 광야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본문에 나오는 노아 홍수 끝에 보인 무지개는 비온 뒤에 햇빛에 물방울들이 반사되어 찬란하게 보이는 하늘의 자연현상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지개는 영어로는 rainbow입니다. bow의 본래 뜻은 활입니다, 활은 군사력의 상징입니다. 무지개와 활은 같은 모양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도시 속에서 힘 있는 자의 손에 들리면 사람을 죽이는 살상무기가 되고, 광야 속에서 하느님의 손에 들리면 구원의 상징인 무지개가 됩니다.


우리가 광야 속에서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모두 광야에로 나아가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거기에는 여분의 옷도, 웃고 즐길만한 음식도 없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의 내면을 깊이 바라다보며 하늘의 음성에 귀를 기울려야 하는 곳입니다. 광야를 히브리어로는 ‘므드바르’라고 하는데, ‘므’는 장소를 뜻하는 접두어이고 ‘드바르’는 하느님의 말씀 혹은 하나님의 법이라고 번역이 됩니다. 그러나 이는 문자적인 의미에서의 말씀이 아니라, 무에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흑암에서 빛을 만들어내신 그 능력의 말씀을 말합니다. 사념의 언어가 아닌 행동의 언어를 말합니다. 광야 ‘므드바르’ 그곳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곳이야 말로 하느님의 영이 살아 움직이는 곳입니다.


사랑하는 향린교우 여러분, 이 성화에서 보듯이 우리도 이제 예수님이 기도하고 있는 그곳으로 나아가십시다. 자신만의 향락과 평온만을 찾아가던 자기중심의 삶으로부터 벗어나 하느님이 통치하는 그 곳으로 나아가십시다. 우리가 지금 몸담고 있는 이 도시문명 속에서는 인간들의 욕망이 서로 부딪히는 경쟁의 아픔이 그치질 않습니다. 재벌과 권세가들은 약한 자들을 무자비하게 누르고 조그마한 것마저 빼앗아가고 있습니다. 어린 학생들마저 견디지 못해 친구들을 왕따시키고 폭력으로 괴롭힘으로 즐거움을 삼고, 일류대학 가지 못할 바에 공부해서 무엇을 하겠는가 좌절하며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너무 멀리가면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더 늦기 전에 우리 자신을 내려놓으십시다. 바르게 살기 위해 그리고 정말 성공하기 위해 죽는 그 순간 후회 없이 정말 잘 살았노라고 자식들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기 위해 우리는 잠시 동안 이 죽음이 난무하는 경쟁과 욕망의 도시를 떠나가십시다.


적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악령의 속삭임에 속아 주위를 향해 무차별하게 쏘아대던 죽임의 활을 내려놓고, 하늘에 펼쳐지는 빨주노초파남보의 아름다운 구원 생명의 무지개를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광야 그곳에 여러분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는 이미 예수께서 계시고 또 눈을 뜨고 주위를 돌아다보면 함께 걸어가는 길동무들이 여럿 있습니다. 이를 확인하라고 주님은 오늘 하늘 식탁을 준비하시고 주저하는 우리들을 부르십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며 성찬을 받을 준비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