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 사순절 2 <믿음은 □□ 이다.>
시 22:23-31; 창 17:1-7, 15-16; 롬 4:13-25; 막 8:31-38

오늘 하늘뜻펴기 제목은 -믿음은 □□ 이다-로서 공란으로 비어 있습니다. 제목을 정하기 위해 4개의 본문 말씀을 두고 묵상을 하였습니다. 분명히 창세기와 로마서의 말씀은 믿음의 조상이라 일컬어지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다루고 있고, 마르코복음서는 이와는 반대로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베드로의 잘못된 믿음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주제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단어들이 생각이 나면서 어느 하나로 결정하지를 못하였습니다. 믿음의 정의는 다양할 수 있으니 이번에는 여러분 스스로 정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었습니다.


이것이 또 post-modernism 의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는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를 찾아가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이미 여러분은 믿음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을 갖고 계실 것입니다. 한 단어로 정리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그러나 지금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를 하나 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의 성서 말씀과 하늘뜻펴기를 통해 이 단어가 어떻게 바뀌는지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늘뜻펴기가 끝났을 때, 여러분의 답이 바뀌지 않았다면, 하늘뜻펴기에 문제가 있었거나 여러분 자신의 닫힌 마음에 문제가 있습니다. 저 또한 매 주일 하늘뜻펴기를 준비하지만, 준비할 때의 말씀 이해와 끝났을 때의 말씀 이해가 같다면 그건 제 자신에게 문제가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그건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말씀이 아닌 죽은 말씀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교회 생활이나 예배에 있어 역사적 전통이 전해준 예전과 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을 담고 있는 그릇입니다. 그 그릇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매우 서서히 변해갑니다. 그러나 그 그릇의 내용물은 매일 매일 새롭게 바꾸어져야 합니다. 출애굽기에서 애굽을 떠나 광야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라는 하늘에서 내리는 하얀 가루 떡을 주어다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 음식물은 매일 매일 새벽에 나가 거두어야 했습니다. 하루치 이상은 허용되지를 않았습니다. 설사 누군가가 이틀치를 거두었다 하더라도 그 다음날이 되면 이미 상해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이 광야 만나 이야기는 육의 양식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영혼의 양식에 관한 말씀이라고 이해합니다. 육의 양식은 하루 안 먹어도 괜찮지만, 영의 양식은 하루라도 걸러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길을 순례에 비유하여 어느 한 곳에 머물지 말아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우


흔히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성서에서 유대인들이 그리고 오늘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로가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 부르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이 아닌 우리들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부를 때에는 왜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되는지에 대해 분명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의 삶에서 정말 믿음의 본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오늘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로는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된 이유를 “그는 나이 백세에 이르러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이 되어 이제는 아기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믿음을 가지고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끝내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굳게 믿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창세기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얘기를 읽어보면 사도 바울로의 이 얘기는 사실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던 사람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 애굽에 내려갔다가 바로 왕이 자기 아내를 탐내자 아내라고 하면 자기를 죽이고 빼앗아갈까봐 누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거기다 생물학적으로 아내 사라에게서 더 이상 아이를 기대할 수 없게 되자 그는 하갈이라는 아내의 몸종을 통해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얻어 상속자로 삼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결코 사도 바울로가 말한 것처럼 하느님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미래를 향한 가능성의 나그네]


저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히브리서 기자가 11장 믿음장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그를 불러 장차 그의 몫으로 물려주실 땅을 향하여 떠나라고 하실 때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사실 그는 자기가 가는 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떠났던 것입니다. 그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서도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천막을 치고 나그네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며 머물러 살았습니다.” 저는 우리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사도 바울로가 말한대로 백세에 아들을 줄 것이라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한 것으로 믿었던 득(得)의 믿음보다는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대로 나이 75세에 은퇴하여 편히 쉬어야 할 나이에 평생을 걸려 이룩해 놓았던 모든 업적들을 뒤에 놓고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과감히 떠나는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의 손(損)의 믿음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학 1학년 때에 안병무선생님의 [역사의 증언]이라는 조그마한 문고 책자를 읽었습니다. [역사와 해석]의 전편입니다. 이 책에서 아브라함을 ‘도상의 나그네’라 부르며 ‘미래를 향해 열린 가능성의 사람’으로 해석하는데서 진한 감동을 받았었고, 그때 이후로 이 ‘미래를 향한 열린 가능성’이란 단어는 저의 신앙생활에 있어 화두가 되었습니다.


오늘 사순절 두 번째 주일을 맞아 예배 후에 갖는 특강 시간에는 오늘날의 고령화 사회를 향해 가는 노인세대의 아픔들을 살펴보게 됩니다만, 사실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청년 때의 열정과 미래를 향한 열린 태도를 갖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체로 나이가 들어갈수록 과거에 매이게 되어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내고 창의적이기 되기보다는 과거의 경험을 자주 얘기하게 됩니다. 그래 오래된 교회가 정체되어 갑니다. 그런데 향린교회는 다릅니다. 처음 향린교회에 오신 분들이 놀라는 첫 번째는 향린교회는 진보교회로 알려져 있기에 젊은이들의 교회인줄 알고 찾아옵니다. 그런데 와서 보니 나이 많으신 분들이 의외로 많은 것에 놀랍니다. 그리고 스스로 묻습니다. 나도 저만한 나이가 되어서 저만큼 열린 태도를 갖고 살아갈 수 있을까?


향린교회가 늘 새로워질 수 있는 것은 나이는 늙어도 생각은 언제나 젊은이 못지않는 열정과 미래지향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는 어르신들 때문입니다. 오늘의 주인공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와 같이 80, 90이 넘어도 오늘에 머물지 않고 열린 마음을 갖고 미래의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던지려는 점에서 저는 항상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보통의 경우 나이가 들면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연로하신 부모님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건강일까요? 죽음일까요? 아니면 외로움일까요?


[어느 부모님이 자식에게 보낸 편지...]


내 사랑하는 아들 딸들아 언젠가 우리가 늙어 약하고

지저분해지거든 인내를 가지고 우리를 이해해 다오.

늙어서 우리가 음식을 흘리면서 먹거나 옷을 더럽히고,

옷도 잘 입지 못하게 되면,

네가 어렸을 적 우리가 먹이고 입혔던 그 시간들을 떠올리면서

미안하지만 우리의 모습을 조금만 참고 받아다오...

늙어서 우리가 말을 할 때, 했던 말을 하고 또 하더라도

말하는 중간에 못하게 하지 말고 끝까지 들어주면 좋겠다.

네가 어렸을 때 좋아하고 듣고 싶어 했던 이야기를

네가 잠이 들 때까지 셀 수 없이 되풀이하면서 들려주지 않았니?


훗날에 혹시 우리가 목욕하는 것을 싫어하면

우리를 너무 부끄럽게 하거나 나무라지는 말아다오.

수없이 핑계를 대면서 목욕을 하지 않으려고 도망치던

너를 목욕시키려고 따라다니던 우리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니?

혹시 우리가 새로 나온 기술을 모르고 무심하거든

전 세계에 연결되어 있는 웹사이트를 통하여

그 방법을 우리에게 잘 가르쳐다오.

우리는 네게 얼마나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는지 아느냐?

상하지 않은 음식을 먹는 법, 옷을 어울리게 잘 입는 법,

너의 권리를 주장하는 방법 등...


점점 기억력이 약해진 우리가 무언가를 자주 잊어버리거나

말이 막혀 대화가 잘 안될 때면 기억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좀 내어주지 않겠니?

그래도 혹시 우리가 기억을 못해내더라도 너무 염려하지는 말아다오.

왜냐하면 그 때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너와의 대화가 아니라

우리가 너와 함께 있다는 것이고, 우리의 말을 들어주는

네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란다.


또 우리가 먹기 싫어하거든 우리에게 억지로 먹이려고 하지 말아다오.

언제 먹어야 하는지 혹은 먹지 말아야 하는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단다.

다리가 힘이 없고 쇠약하여 우리가 잘 걷지 못하게 되거든

지팡이를 짚지 않고도 걷는 것이 위험하지 않게 도와줄 수 있니?

네가 뒤뚱거리며 처음 걸음마를 배울 때

우리가 네게 한 것처럼 네 손을 우리에게 빌려다오.

그리고 언젠가 나중에 우리가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

우리에게 화내지 말아다오.

너도 언젠가 우리를 이해하게 될 테니 말이다.

노인이 된 우리의 나이는 그냥 단순히 살아온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생존해 있는가를 말하고 있음을 이해해 다오.


비록 우리가 너를 키우면서 많은 실수를 했어도

우리는 부모로써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들과

부모로써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삶을 너에게 보여주려고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언젠가는 너도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랑한다...내 사랑하는 아들 딸들아~

네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너를 사랑하고 너의 모든 것을 사랑 한단다.


사실 육신의 건강이라는 것은 숫자놀이에 불과합니다. 30년 건강했다. 40년 건강했다. 그건 찰나라는 시간 속의 순간이라는 상대적인 차이, 그것뿐입니다. 강철같은 몸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한줌의 재로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정신의 건강이요 영혼의 건강입니다.


[이름짓기]


오늘 창세기 본문에서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나이 99세에 다시 나타나시어 이전의 축복의 약속을 상기시키시며 ‘너는 내 앞을 떠나지 말고 흠없이 살아라.’고 부탁하십니다. 그의 삶이 얼마나 남았다고 그런 부탁을 하셨을까요? 인생은 길이가 아니라 굵기로 결정된다는 깨달음을 주시고 계십니다. 그리고는 그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사래에서 사라로 바꿔 부르라고 하십니다. 개신교에서는 이런 전통이 없습니다만, 가톨릭교회에서는 세례명을 사용합니다. 저는 이런 전통은 좋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름 안에 어떤 정신적인 힘이 담겨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매우 신중하게 짓습니다. 음양오행에 기초한 성명학이라는 학문도 있습니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내용보다는 부르기 쉽게 혹은 기억하기 쉬운 이름을 짓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빵굽는 사람이라는 Baker, 신발장이라는 Shoemaker 시계장이라는 Watchmaker 열쇠장이라는 Locksmith 장사꾼이라는 Seller 등등 과거 조상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가를 보여주는 성씨를 아무렇지 않게 씁니다.


이외에도 3월 March 4월 April 겨울 Winter 여름 Summer 사과 Apple 돌 Stone이라는 단어 그대로를 성으로 쓰기도 합니다. 이름도 Jim Tom Mary Becky 등등 부르기 편하게 짓습니다. 물론 최근에는 우리도 순 한글로 부르기 쉬우면서도 뜻이 담긴 이름을 짓기도 합니다. 하늘 바람 새길 한길 산 세찬이 온누리 등등. 민족마다 이름 짓는 일이 독특한데, 이를 비교하는 책을 내면 매우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미국 사람 이름 중에는 여러 재미난 이름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를 보면 성은 King입니다. 마틴 루터 킹목사와 친척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왕씨 성입니다. 그런데 이분의 이름이 Nosmo입니다. 미국에서는 성이 뒤로 가니까 합쳐서 부르면 No SmoKing이 됩니다.


[엘로힘과 야훼]


성서는 이름을 매우 소중히 여깁니다. 그 안에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 이름이 나오면 그 이름의 뜻풀이가 나옵니다. 성서에는 하느님을 부르는 두 개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히브리어로 하나는 엘로힘이고 다른 하나는 야훼입니다. 엘로힘은 창세기 1장에서와 같이 하느님이라고 번역이 되고 야훼는 창세기 2장에서와 같이 공동번역을 빼놓고는 여호와라 번역하고 최근에 나온 성경은 ‘주’라 번역해 놓았습니다. 사실 이 번역 하나만으로도 남한 교회가 얼마나 시대에 뒤떨어진 교회인지를 말해줍니다. 엘로힘은 엘의 복수명사로서 엘은 중동지역 일반에서 불리는 신을 지칭하는 일반명사입니다. 그리고 엘은 단독으로 쓰이기보다는 다른 명사와 더불어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는 전능한 신이다.’라는 문장은 히브리어로 ‘엘 샤다이’입니다. 문자적인 뜻은 ‘산들의 신’입니다.


야훼라는 명칭은 모세가 호렙산에서 신으로부터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시키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들은 이름입니다. 모세가 물었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때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이 ‘야훼 아쉐르 야훼’ 였습니다. 흔히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니까 야훼라는 말은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초월적 존재이다. 나는 규정될 수 없는 존재이다. 곧 나는 이름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신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야훼는 일단 이름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달리 호칭할 수 없어 그냥 야훼라고 부르는 것이지, 야훼가 신의 이름은 아닙니다. 야훼는 약한 자들의 고통의 소리를 듣고 이를 견디지 못해 강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자유와 해방을 뜻하는 종교적 상징 언어입니다. 하늘과 땅을 구분 짓는 표상 언어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르코복음 본문에서의 예수와 베드로의 대화 장면은 너무나 유명한 구절입니다. 조금 전까지도 베드로를 칭찬했던 예수가 갑작스레 돌변하여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고 통렬하게 비판하신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려진 성서구절입니다.


어느 날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필립보라는 도시를 향하여 가고 있었습니다. 이 도시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어떤 도시인지 분명합니다. 가이사랴는 로마 황제를 뜻하고 필립보는 당시 로마의 꼭두각시로서 갈릴리 지방을 다스리던 헤롯대왕의 아들 이름입니다. 이 도시는 로마황제를 칭송하기 위해 세운 도시입니다. 도시 정중앙에는 로마황제의 상이 우뚝 서 있고 그 앞에는 로마의 신전이 있습니다. 도시사람들은 이 신전에 나아가 황제의 치적을 노래하고 로마의 영원한 통치를 기원했습니다.


이 신전이 보이는 곳에서 예수는 문득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예, 어떤 이는 세례요한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엘리야 선지자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때 베드로가 선뜻 답합니다. ‘예,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이 답을 들은 예수께서는 이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다음, 하늘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러자 이에 베드로가 발끈합니다. 본문에는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그래서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고 되어 있지만, 원문으로 본다면 이보다는 훨씬 심하게 반발하였습니다. ‘우선 예수를 붙들고’라는 희랍어 본뜻은 ‘예수를 따로 불러냈다’란 말입니다. 그리고 ‘펄쩍 뛰었다’란 동사 또한 예수께서 귀신들을 내어 쫓을 때에 쓰던
epitiman이라는 동사입니다. 좀 거칠게 풀어서 말한다면, “베드로는 화가 치밀자 예수를 따로 불러내어, 아니 자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네가 십자가에 죽겠다니, 그럼 지금까지의 우리 일을 모두 수포로 돌리겠다는 말이냐? 너 지금 미쳤냐? 네가 십자가에 죽겠다고 하면 저기 저 사람들 모두 너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너 지금 우리 일을 그르치려 하는구나. 이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어. 내가 기필코 이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런 의미입니다.


이에 예수는 지금까지의 온화한 모습과는 정반대로 얼굴이 굳어지면서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소리를 쳤습니다. 3년을 동고동락한 동지이자 제자의 우두머리격인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외쳤다면 이는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과 인연을 끊겠다는 매우 단호한 태도입니다.


[하느님의 일, 사람의 일]


여기서 우리는 무엇이 하느님의 일이고 무엇이 사람의 일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원의 문제, 천국과 지옥에 관련된 이야기나 성서를 얘기하면 하느님의 일이고, 돈을 버는 세상 직업에 대해 얘기하고, 살아가는 삶의 주변 이야기를 하면 사람의 일입니까? 교회나 종교를 논의하면 하느님의 일이고, 정치나 경제를 이야기하면 사람의 일입니까? 이것은 하느님의 일이다. 저것은 사람의 일이다를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의한다면 그 기준은 십자가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의 죽음의 얘기를 하고 있고, 베드로는 그런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중요한 것은 이 십자가 지는 일이 단지 예수에게서 끝나지 않고, 우리에게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와 베드로의 갈등은 2천년전 가이샤리아 필립보 지방에서 일어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오늘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여기서 우리는 예수를 따르는 길에도 자기를 얻는 길과 자기를 버리는 길이 있고, 자기 목숨을 살리는 길이 있고 잃는 길이 있으며, 교회 안에서는 예수를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함께 고백하지만, 교회 밖을 나서면 세상 사람들을 따라 넓은 길을 가는 사람도 있고, 세상 사람들이 가지 않는 좁고 험한 길을 가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루터는 이 길을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의 신학으로 구분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교회를 나오고 예수를 믿고 고백하는 것이 과연 영광을 얻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십자가를 지기 위한 것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를 따르기 위해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자학 행위는 아닙니다. 십자가는 죽음과 수난의 상징이지만, 이 속에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희생적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교회는 그 자체로서 존립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세상을 섬길 때에만이 그 존립의 목적이 서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 예수가 믿었던 믿음 곧, 타자의 구원을 위한 십자가 희생이라는 사랑의 길을 따라 나설 때에만이 예수를 믿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제자도의 완성]


마르코복음에는 세 번의 수난 예고 얘기가 나옵니다. 오늘의 8장, 9장, 10장에 연속하여 세 번 나옵니다. 다른 얘기는 한번 나오면 되는데, 왜 십자가 수난의 예고 얘기는 3번이나 나오는 것입니까?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도 되지만, 그만큼 우리들이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 그런지 이 세 번의 수난 예고 직전과 직후에 시각장애인이 눈을 뜨는 얘기가 나옵니다. 이는 마르코 저자가 즐겨 쓰는 샌드위치 문학양식입니다. 8장 22절에는 베싸이다의 소경이 눈을 뜨는 얘기가 나오고, 10장 46절에는 예리고의 바르티매오라는 시각장애인 거지가 눈을 뜨는 얘기가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눈뜬다는 얘기가 육신의 눈 뜸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진정 우리가 걸어가야 할 참다운 인생의 길인가를 깨달아 아는 영혼의 눈뜸을 말하는 것임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베싸이다 시각장애인에게 예수는 두 눈에 침을 바르고 손을 얹어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그의 눈이 단번에 떠지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희미합니다. 다시 눈에 손을 대자 똑똑히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이야기인가요? 아니면 십자가 수난이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후에 분명히 그 뜻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입니까? 반면 예리고의 바르티매오는 단번에 눈을 뜹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눈에 손도 대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한마디를 물었을 따름이고 한마디를 대답했을 따름입니다.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선생님 제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께서는 침도 안 바르시고 손도 대지 않고 그냥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는 눈을 떴고 베싸이다 형제는 집으로 돌아갔지만, 자기 믿음으로 눈을 뜬 바르티매오 형제는 예수를 따라 나섭니다. 마르코가 그리는 제자도의 완성본입니다.


처음 사람도 눈을 떴고, 두 번째 사람도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눈을 뜨는 방식은 완전히 달랐고, 눈 뜬 후의 삶의 모습 또한 완전히 달랐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34절을 보면 이 말씀을 단지 지도자격인 제자들에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군중과 제자 모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수천만 개의 교회가 있고 어느 교회나 그 안에 들어가면 설교단이 있고, 그 뒤에는 십자가가 걸려 있습니다. 이 십자가는 예수의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져야 할 십자가는 없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외에 또 어떤 교회가 예수의 십자가 주위에 교인들의 십자가를 걸어놓은 교회가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많은 교인들은 십자가는 예수께서 지고 가셨으니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는 별로 생각하지 않고, 받을 영광과 축복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정반대를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자기 십자가가 따로 있고 그리고 맨몸으로 예수를 따라서는 안 되고 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 신앙의 비밀]


작은 십자가는 장식품으로 목에 걸 수도 있고, 벽에 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몸에 짊어져야 할 자기 십자가는 무거워 거치장스럽기만 합니다. 마을사람들이 홍수로 불어난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지도자가 말합니다. 여기 보이는 돌을 하나씩 들고 나를 따라오십시오. 처음에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강 중앙에 들어가자 무슨 말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물살이 세어 넘어질 지경입니다. 그런데 바위를 들고 있으니 물살에 결딜 수가 있었습니다. 무거운 바위를 든 사람일수록 견디기가 더 쉬었습니다. 십자가란 그런 것입니다. 평시에는 귀찮기만 합니다. 그러나 삶의 위기에 닥치면 십자가는 그 빛을 발합니다. 오히려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일수록 더 쉽게 위기를 이겨납니다. 여기에 십자가 신앙의 비밀이 숨겨 있습니다.


사도바울로 선생은 고린토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 1장에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이 어떤 이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어떤 이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일지 모르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곧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 말하기를 “하느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으며,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으며, 유력한 자를 무력하게 하시려고 세상에서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곧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택하셨다”고 말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여러분은 지혜 있는 자들입니까? 어리석은 자들입니까? 강한 사람들입니까? 약한 사람들입니까? 유력한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보잘 것 없고 멸시받는 사람들입니까? 분명히 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가운데서는 아무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 자랑할 것이 있다면 우리는 모두 예수의 십자가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를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그랬던 것처럼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이때 우리는 참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본훼퍼목사는 말합니다. “인간은 오직 하느님의 심판을 받은 자로서만 하느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달린 인간만이 하느님과 평화를 누립니다. 십자가에 달린 자의 형상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발견합니다. 하느님에 의해 용납되었고,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았고 화해된 것, 이것이야 말로 인류의 현실입니다.... 모든 성공은 악에서 나온다는 명제는 역사를 고발하는 자들의 영원한 탄식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역사에서 성공한 자의 대변자가 아니십니다. 물론 그렇다고 예수님은 실패자가 성공한자를 전복하기 위해 봉기하기를 원하지도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관심을 기울리신 것은 성공이나 실패가 아니라, 하느님의 심판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직 심판 속에서만 하느님과의 화해가 가능하고, 인간들끼리의 화해도 가능합니다.”(디트리히 본훼퍼 묵상. 신앙과 지성사. 70-73쪽)


이제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저의 하늘뜻펴기 마감시간이 다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이제 여러분 스스로 오늘 하늘뜻펴기 제목에 답을 달아야 하는 시간이 다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믿음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한마디쯤 답변을 해야 할 시간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했다’고 하셨는데, 과연 나를 살리는 믿음이 무엇인지 답을 해야 할 시간입니다. 이제 조용히 앞 뒤 서너 사람이 짝을 지으시기 바랍니다. 서로 조용히 손을 잡으시기 바랍니다. 말은 하지 마시고 그냥 눈을 서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한 사람씩 돌아가며 나에게 있어 믿음은 뭐뭐입니다라고 한 단어만 얘기하세요. 상대방의 답에 귀를 기우리기 바랍니다.


손을 잡은 채로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