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永生)

107,1-3, 17-22; 민수 21,4-9; 에페소 2,1-10; 요한 3,14-21

 

한 문 덕 목사

 

 

 

말을 멈춰야 하는 자리가 있습니다. 말이 마음을 전하지 못할 때, 솜씨 있는 말이라도 그것이 상대에게 거짓과 위선으로 느껴질 때, 애정 없이 남의 결점을 떠벌리고 싶을 때, 확인되지 않은 좋지 않은 소문을 들었을 때는 가능하면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소크라테스에게 허겁지겁 달려왔습니다. “소크라테스, 들어보십시오! 당신 친구에 대한 좀 안 좋은 이야기입니다만……”, 소크라테스는 급히 그의 입을 막았습니다. “잠깐만요! 제가 먼저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당신이 지금 내게 말하려고 하는 이야기가 진실하다고 생각합니까?” “글쎄요.”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사실 그 말이 진실한 것인지는 확신이 안 듭니다.” “-, 그래요. 그렇다면 당신이 말하려고 했던 것이 친절하고 애정이 담긴 내용입니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실은 그 반대지요.” “그러면 조심해서 이야기해야겠네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지요. 그 이야기는 꼭 필요한 이야기입니까?” “아니오. 꼭 필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소크라테스는 힘 있게 말했습니다. “그럼 좋아요. 당신이 내게 말하려고 했던 것이 진실하지도 않고, 친절한 이야기도 아니고, 더욱이 불필요한 말이라니, 집어치우는 게 좋겠소.” 여러분의 말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이 일상에서 하시는 말은 진실하고, 친절하며, 필요한 말들입니까?

 

오래도록 떨어져서 서로를 그리다가 만나게 되면 말에 앞서 반가운 미소와 함께 서로 얼싸안게 됩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제대로 뉘우치는 사람은 가슴이 먼저 저리고 눈물이 나지, 입에 발린 말로 용서를 구걸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어 큰 슬픔에 빠진 사람 앞에서 할 말을 잃은 우리들이 마지못해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입니다.

 

이렇게 말은 우리네 삶을 다 표현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말을 꼭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권력으로 진실을 가두거나 왜곡시킬 때, 무고한 이가 누명을 써서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불의와 부정을 일삼는 무리들에게 준엄한 경고를 해야 할 때는 꼭 말을 해야 합니다. 최근 제대로 뉴스데스크”, “Reset KBS 뉴스”, “뉴스타파와 같은 곳에서 제대로 된 말들을 듣게 되어 속이 시원합니다. “고맙습니다.” “당신, 덕분이에요.” “큰 힘이 되었습니다.” 진심을 담은 말 한마디는 우리 삶에 큰 힘과 위로와 영양소가 됩니다. 정곡을 찌르는 스승의 말 한마디가 제자의 삶을 바꾸고, 양심에 따른 증언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이렇게 말이 멈춰야 하는 자리도 있고, 말이 꼭 필요한 자리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또 다른 종류의 말이 있습니다. 분명 말이 멈추는 자리임에도 울려 퍼져 나온 말입니다. 거대한 자연의 경관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터져 버린 감탄의 언어, 너무나도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 가운데서 흘러나오는 탄식의 언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고 금기마저 초월해 내는 사랑의 언어, 의식 저편에서 늘 꿈틀거리는 존재를 가리키는 예술의 언어가 그러합니다.

이러한 많은 말들 가운데 성서의 말씀들은 어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에페소서의 본문의 첫 마디를 보겠습니다.

 

여러분도 전에는 죄와 잘못을 저질러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단순한 한 문장으로 시작하지만 이 말 속에는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이 담겨 있을까요? 이런 말로 편지를 주고받았을 때 이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죄와 잘못으로 죽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5절에 보면 잘못을 저지르고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라는 말씀도 있는데 여기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 주었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지금 저의 하늘뜻펴기를 듣는 여러분도 그러하겠지만 이 편지의 발신자나 수신자 모두 이 구절이 생물학적인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말한 죽음은 무엇이고, 다시 살아났다는 말은 또 무엇일까요? 도대체 어떤 경험이 삶과 죽음을 오갔다고 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이 말은 정말 살기보다 죽고 싶었던 사람들의 삶이거나, 아니면 살았지만 죽음과 다름없는 삶을 살았던 이들의 고백은 아니었을까요? 이런 고난 속에서만 하느님의 은총은 빛나는 것일까요?

 

저는 오늘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특히 요한복음서가 말하는 영생(永生)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노파심에서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성서언어와 비슷하게도 하늘뜻펴기의 언어 또한 말할 수 없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말하는 것이기에 수학의 언어처럼 딱 떨어지는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제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과 듣는 여러분의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말 사이의 교감을 통해 살아계신 하느님의 존재의 향기가 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에페소서에서 말하는 삶과 죽음이 단순히 생물학적인 삶과 죽음이 아니라면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영생(永生) 또한 생명의 무제한 연장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들은 잘 알아야 합니다. 비그리스도인이나, 아니 교인인 경우에도 영생에 대해서는 요한복음서가 말하는 영생보다 영혼의 불멸이라고 하는 그리스 철학의 사유에 더 익숙한 경우가 많습니다. “영혼불멸 사상은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지만 요한복음이 말하는 영생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육의 몸을 입고 오신 하느님 즉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에 가장 큰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 계열과 달리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사도계 계열의 공동체들이 역사적 예수와의 친밀성을 권위의 근거로 삼았던 반면, 요한 공동체는 예수의 삶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활동을 이어 나가는 것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예수가 했던 활동들을 동일하게 실천해 냄으로써 예수와 하나 될 뿐만 아니라 하느님과도 연합한다고 믿었습니다. 때론 예수보다 자신들이 더 많은 일들을 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가지고 있던 공동체였습니다. 따라서 요한공동체의 강조점은 영혼의 불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지금 살아계셔서 활동하시는 영원하신 하느님의 활동에 우리가 동참하는가! 였습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서가 말하는 영생이란 공관복음서에서 말하는 하느님 나라와 맥을 같이 하며, 바울의 편지들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영생을 문자적 의미로 이해하여 자꾸 육체적 생명의 영원한 연장으로 느껴진다면 그 말을 참된 삶이라고 바꿔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즉 요한공동체는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느님의 활동에서 참된 삶의 맛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말하는 참된 삶이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언제 이게 진짜 사는 맛이지!”하는 것을 느끼는지요? 어르신들에게 죄송한 이야기지만 저도 나이가 조금씩 먹어가면서 깨닫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무척 단순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가장 핵심적인 상징인 십자가 하나로 모든 것이 설명됩니다. 즉 타인을 위해 자신을 얼마나 내어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진보적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보수적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모태신앙이다.’ ‘나는 오래된 그리스도인이다.’ 등등 그리스도인 앞에 많은 수식어를 달 수 있겠지만 궁극적인 순간에 얼마나 자신의 것을 내어줄 수 있으며, 그렇게 내어 주는 것이 곧 행복임을 느끼고 그 행복을 마음껏 누리는가가 참 그리스도인의 표지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남은 제자들은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성만찬 예식을 하기 시작했는데, 제자들은 점차 그 종교적 예식이 주는 주술적인 황홀경으로 빠져 들어 갑니다. 종교적 제의의 반복 속에서 예수는 숭배의 대상으로 바뀌어 가고, 하느님 나라 운동의 생생함도 형식과 제도 속에 묻히어 갔습니다. 그럴 때 요한공동체는 참 생명이란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는 예수의 행동을 이어 나가는 데 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가식적이지 않고 대가를 바라지도 않으며 그저 사랑 그 자체의 속성으로 사랑하는 것! 그런 모습을 예수에게서 보았고, 그렇기에 바로 그런 예수를 알고 그가 간 길이 옳다고 믿고 신뢰하여 그를 따르는 것이 곧 영생임을 요한공동체는 깨달았습니다. 예수를 어둔 세상에 빛으로 오신 하느님의 독생자라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한 목자라고, 열매를 맺게 해주는 포도나무라고 고백했던 것은 바로 예수가 걸었던 그 삶을 현재에서도 재현하는 이들의 삶에서 터져 나온 감탄의 언어였던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는 말의 속뜻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향린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구원받으셨습니까? 지금 영생을 누리고 계십니까?

 

에페소서의 저자는 죽음의 삶을 극복해 내고 하느님의 작품으로 거듭난 이들에게 편지를 쓰지만 어쩌면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들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풍성한 생명의 삶을 누리지 못하고 여전히 죽음을 살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에페소서 저자는 죄에 얽매여 있는 것이 곧 죽음의 삶임을 말하면서 그 증거로 두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는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고 허공을 다스리는 세력의 두목이 지시하는 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둘째 또한 하느님의 뜻보다는 본능적인 욕망을 따라서 육정에 끌려 살았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허공을 다스리는 세력이란 무엇일까요? 그리고 본능적인 욕망이 뭐가 문제이지요? 성서는 이 세상의 모든 권세를 잡은 자가 사탄이라고, 하느님의 영을 거스르는 악령이라고 말하지만 과학문명을 이룬 개명된 인류가 사는 이 시대에는 악령이니 사탄이니 귀신이니 하는 것들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또한 육정으로 표현되는 인간의 본능적 욕망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인간은 죽기보다는 살고 싶고, 불안보다는 안정을 누리고, 홀로 있기 보다는 어딘가에 소속되어 함께 있고 싶고, 또 타인으로부터 존중받고 싶어 하는 욕구를 타고 납니다. 슬픔과 기쁨, 공포와 불안, 화와 놀라움 같은 감정도 타고 납니다. 그러니 이런 것들을 죽음의 표시로 볼 수 없습니다. 에페소서에서 삶과 죽음이 문자 그대로의 삶과 죽음이 아니었듯이 허공을 다스리는 세력이라는 말과 육정이라는 말 또한 재해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월터 윙크라는 신학자가 <사탄의 가면을 벗겨라>,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이라는 책에서 잘 밝혔듯이 성서가 말하는 사탄을 오늘날의 언어로 번역해 보자면 그것은 한 개인이나 소수의 힘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거대한 사회구조적 악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겪으신 지난 4년의 세월이 바로 그러합니다. 예를 들자면 최근 속속들이 밝혀지는 민간인 불법사찰의 진면목을 보십시오. 국민이 주인이라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현 정권의 부실을 지적하는 동영상 하나를 올렸다고 국무총리실에서 국민을 내사하고 사찰하여 경찰서에 자료를 제보하고, 검찰은 이를 받아 죄 없는 사람을 온갖 누명을 씌워 죄인으로 몰아 붙였습니다. 이런 사실이 밝혀지자 청와대와 국무총리실이 입을 맞춰 모든 증거자료를 인멸하였습니다. 최근 민간인 불법사찰의 증거인멸 당사자인 장진수 주무관이 밝히는 내용들입니다. 또 한 현역 국회위원의 친일행적을 나무라는 네티즌을 그 국회위원의 남편인 판사가 검사에게 전화를 걸어 압력을 행사합니다. 기소청탁으로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권력을 이용하여 건전한 시민을 벌 주는 재판을 합니다. 국가가 행하는 정책이라는 명목하에 사업 타당성도 없고, 주민의 의견도 무시한 채, 400년 된 공동체 마을을 분열시키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보다 더 오래 살았을 하느님의 창조물을 폭파하는 나라가 바로 현재의 대한민국입니다. 정부와 검찰, 경찰이 공권력을 남용하여 벌이는 일들입니다. 공권력이 진정한 공적 권력이 되려면 그들이 사용하는 힘은 반드시 사랑과 정의를 포함하여야 하고 사랑, 정의, 힘은 서로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상황은 사랑과 정의 없는 폭력이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이런 나라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사실은 산 것이 아니고 죽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러한 거대한 사회구조적 악에 직면하여 한 개인은 참으로 무력하게 당하고 마는 것이 현실이고, 에페소서가 말하는 허공을 다스리는 세력은 바로 이런 것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페소서는 바로 우리가 이런 세력에 가담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을 성찰하게 합니다.

 

사실 그동안 우리는 남을 지배하고 싶은 욕망으로 힘을 과도하게 추구한 나머지 사랑과 정의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무노조를 원칙으로 가지고 있고, 산업재해로 노동자가 죽어나가는 것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삼성이지만 이 기업은 대학생이 가장 들어가고 싶은 기업이고 많은 국민이 세계에 내놓을 기업이라고 자랑하지 않습니까? 동네에서 검사나 변호사가 나왔다면 그것만으로 자랑이 되는 것이 우리네 문화 아니었습니까? 참다운 학문에 대한 열정을 가르치기 보다는 학벌 좋은 학교에 가는 것이 부모의 바램이었고,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을 가문의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 우리 국민의 일반적 분위기 아니었나요? 힘을 부리는 자리에 사랑과 정의, 평등과 평화, 인권과 참된 가치가 함께 녹아 있는 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있었던가요? 고요히 앉아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면 우리 또한 알면서도 또는 알게 모르게 에페소서 저자가 말하는 대로 오늘날 하느님을 거역하는 악령의 지시대로 살았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주 수요일 사순절 특강에 오신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의 말씀을 들어보니 고속도로에 하이패스가 생기면서 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고 하고, 지하철에 티켓을 판매하는 기계가 생기더니 표 파는 이들이 전부 비정규직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조금 더 편하게, 경제적으로 조금 더 부유하게라는 마음을 가지고 살 때 우리는 알게 모르게 누군가의 생존을 위협하는 짓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난 해 교회의 날 행사에 강사로 온 김규항 씨가 지난 이명박 정부가 우리들에게 끼친 가장 큰 피해는 우리로 하여금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막은 것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정권이 들어서서 모든 분야에서 후퇴했기 때문에 그냥 가만히 있어도 이명박보다 나으니까 진보적 지식인을 비롯하여 대다수의 사람들이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하지 않게 했다는 것이지요. 참으로 옳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에페소서로 돌아가 이제 육정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위에서 말씀 드린 대로 본능적으로 타고난 우리들의 욕망과 감정은 사실 그 자체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도한 욕심에 오염되거나, 무지에 의해 나 아닌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방향으로 표현될 때는 하느님의 진노를 살 수밖에 없다고 성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1성서 본문을 기억해 봅시다. 오늘 제1성서 본문은 자유를 찾아 떠난 이들의 광야 이야기입니다. 자유에는 마땅히 책임이 따릅니다. 자유는 모험을 감수하는 도전 속에서만 성취되는 것이며, 자유는 익숙한 것으로부터 과감하게 뛰쳐나올 때 얻을 수 있는 것임에도 히브리 백성은 충분히 그것을 알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의 노예생활이 끔찍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유를 쟁취하는 작은 어려움 앞에서 무너지고 맙니다. 개인이 자유로운 주체가 되어 스스로 살아내야 함에도 모세와 하느님께 핑계를 대며 그들을 대항하여 불평불만을 털어 놓습니다.

 

1성서 본문에서는 이 불평불만 때문에 하느님께서 불뱀을 보냈고, 많은 사람들이 이 뱀에 물려 죽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본문을 문자 그대로 보지 않습니다. 오늘 성서에 불뱀이라고 표현된 말은 분노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평불만이 점차 극대화 되어 분노에 이르렀고, 자신에 대한 성찰이 없고 타인에 대한 애정 없는 분노는 남을 죽이고 자신도 죽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감정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잘 살고 싶은 욕구를 비롯해 다양한 욕구가 있습니다. 그럼 이런 감정들과 욕구들을 여러분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사용합니까?

 

봉쇄 수도원인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평생에 걸쳐 그 많은 욕망과 욕구를 하나로 모아 하느님 사랑에만 사용하도록 노력합니다. 우리가 모두 다 그런 수도사가 될 필요는 없지만 우리는 우리의 욕망과 감정을 생명을 살리는 일에 사용할 수도 있고, 남은 죽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으면서, 혹 때로는 남을 괴롭히면서도 자신만의 과도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상처 받은 내 마음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 쉽습니다. 따라서 계속 이어지는 이런 상처의 연결고리를 끊으려면 누군가는 자신의 상처를 잘 보듬어야 합니다. 자식의 행동거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 잔소리를 쏟아 부으면서 다 널 위해 하는 말이야라고 말하는 부모가, 잠깐 잔소리를 멈추고 자신을 먼저 성찰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은 그 이도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가 자신도 모르게 자기의 아이에게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받은 상처를 잘 보듬어 삶의 다양한 경험 중 하나로 승화시킬 수 있다면 동일한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헨리 나우엔 교수는 그 유명한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책을 써 내기도 했지요. 자유를 향해 떠난 길에서 겪어야 하는 수고가 불평불만이 될 수도 있지만 책임 있는 주체적 인간을 만들기도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요한복음서에서 세상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죽인 곳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를 거부한 어두운 곳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악한 곳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원래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처음 세상을 만드실 때 악하게 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얼마나 흡족하셨는지 참 좋다라고 감탄사를 연발하셨지 않습니까? 비록 그리스도인은 아닐지라도 우리의 이웃과 친구들은 처음 아름답고 선하게 창조되었던 세상을 회복하기 위해 참으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상담가와 정신과 의사 선생님들은 우리들의 잘못된 육정을 바로잡아 주시고, 수많은 사회학자들과 시민운동가들은 권세 잡은 자들과 대결하여 영생에 이르려는 쉼 없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제자들은 무엇을 해야 하나요? 우리 모두가 어릴 때부터 익히 알고 있던 구절, 오늘 우리가 다같이 읽었던 구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예수님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제가 알게 된 하나의 사실은 누구보다 예수님은 선하신 하느님을 신뢰했고, 또 그 선하신 하느님이 만드신 이 세상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악이 넘쳐나는 것처럼 보여도 세상 구석구석마다 하느님의 섭리와 사랑이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음을 매 순간 느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당신을 거역하는 이 세상을 하느님이 그렇게도 극진히 사랑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가 아들을 보낸 이유도 세상을 혼내주러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하여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 우리는 이 패악한 세대에서조차 어떻게 희망을 놓치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을 노래할 수 있을까요? 지난 주일 청소년부가 주관한 학부모 초청예배에 저도 참석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학부모들과 청소년부 교사들의 간담회가 이어졌습니다. 큰 주제는 “‘내가 왜 교회에 가야 하냐?’고 묻는 청소년에게 뭐라 대답해 줄 것인가?”였습니다. 청소년 인권을 생각하는 부모로써 막무가내로 강제로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청소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해 주고, 충분한 설명이 되어 청소년이 자발적으로 교회에 올 수 있게 해야 할 사명이 학부모와 교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딱히 어떻게 대답해 주어야 할지 난감해 하는 순간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향린교회에 와야 하는 것입니까? 왜 우리 어린이 청소년들이 또 청년들과 우리들이 교회에 와야 하고, 여기에 와서 무엇을 배우고 또 무엇을 경험하고 무엇을 만들어 내야 합니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학부모로써 아이들이 꼭 교회에 올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여기서 교회라고 하는 것은 꼭 건물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른 종교교육이 이루어지고, 참된 삶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공동체가 있다면 거기에 반드시 와서 함께 동참해야 합니다. 저는 그런 곳을 교회라고 부르겠습니다. 교회에 오면 삶의 중요한 가치를 아는 만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고, 온갖 지식정보의 습득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뭔가를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모름의 가치를 아는 것이지요. 존재도 중요하지만 내 자신이 무()에서 와서 무()로 간다는 것도 배웁니다. 다른 말로는 하느님으로부터 와서 하느님 품으로 가는 것입니다. 요즘 대학입학시험만을 준비하는 입시 위주의 교육에서 배우기 힘든 인문학적 자기성찰 능력을 배우고, 남과 경쟁하여 남을 누르고 높이 올라가는 것보다 함께 잘 사는 법에 대해서도 알게 됩니다. 작은 일에 감사할 줄 알고 존재의 신비를 깨달아 늘 기쁨과 감탄이 넘쳐나지요. ‘내가 맘 놓고 기댈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에 대해 깊이 사색하고 도전한 결과 작은 고통에서 큰 고통에 이르기까지 잘 견뎌내고 극복하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홀로 있을 때에도 외롭지 않고 고요함 속에 참된 고독의 깊이를 맛보게 됩니다.”

 

저는 이런 삶을 영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1936년 미국의 미시건 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부당하게 해고된 노동자들이 가족들과 함께 시위와 농성을 벌였습니다. 그러자 회사측에서는 깡패들을 돈으로 사서 노동자들을 무참하게 짓밟았습니다. 그걸 본 시민들이 분노해서 노동자 편을 들었습니다. 사태가 점차 악화되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습니다. 경찰은 회사편을 들면서 불법적 폭력을 자행하는 깡패들을 못 본 척 외면하고 오히려 노동자와 시민들을 계속 잡아 갔습니다. 사태는 점점 악화되서 결국은 주 방위군이 투입되었습니다. 주 방위군은 현장에 가자마자 불법 폭력을 자행하는 깡패들과 경찰들에게 총구를 겨누었습니다. 국민에게 향한 폭력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때 주 방위군이 내 건 선언은 이러했습니다. “우리 군은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뉴스타파 8, 변상욱 칼럼, “공권력, 그 존재의 이유중에서) 우리는 언제 이런 군을 만날 수 있을까요?

 

우리 사회에도 할 말은 제대로 하고, 말이 멈추는 자리에서는 몸으로 보여주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나서야 합니다. 그러나 거대한 사회구조적 악과 맞서 싸울 때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지치고, 도망하고, 무력해지고, 때론 분노를 참지 못해 엄한 곳으로 그 화살이 날아가기도 합니다. 열심히 사는 이들에 기대어 그저 나는 소시민으로 적당히 살아가게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또 실망합니다.

 

그런데 바로 오늘 성서는 분명히 말합니다. 바로 그것이 죽음이요.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로써 영생을 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선하시고,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며 이 악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비우시며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학교 수업에 가면 언제나 수업 시간에 이런 인사로 수업을 시작하시는 교수님이 계십니다. “안녕하셨습니까?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가내 두루 무구하시고 평안하십니까?” 그러면 대다수의 학생들이 , 잘 지냈습니다.”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전 아니요. 이명박 정권하에서 어떻게 잘 지낼 수가 있습니까?”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학생들이 모두 웃지요.

 

그렇습니다. 이 악한 세상에서 어떻게 평안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한편으로 영생을 누려야 하고, 세상이 주는 평안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향린교우 여러분! 요즘 평안하십니까? 가내 두루 무구하시고, 별 일 없으십니까?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