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25일

밀알 희생과 하느님의 영광

렘 31:31-34, 시 51:1-12; 히 5:5-10; 요12:20-33


사상이나 철학 혹은 역사에서 아주 획기적인 변화를 꾀하는 발상을 요즘은 패러다임의 변화라는 말로 쓰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적 사고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코페르니쿠스가 살던 1500년대 당시 사람들은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지동설을 처음으로 과학적으로 증명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천동설에서 지동설에로의 주장은 단순히 잘못 알고 있었던 하나의 자연 사실을 수정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는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당신이 지금 알고 있는 부모님은 당신을 낳은 진짜 부모님이 아니다라고 할 만큼의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구원론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인간이야 말로 창세기 1장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형상을 띈 으뜸가는 창조물로써 온 우주의 중심이요 만물의 주관자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태양이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를 중심으로 아침에는 활동하라고 빛을 비춰주고 밤에는 휴식하라고 그 빛을 감추는 일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중심의 세계관이 하루 아침에 깨져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과학자이지마나 동시에 성직자로서 이를 발표하면 본인이 어떤 일을 겪을 것을 알았기에 아주 어려운 수학 공식을 덧붙여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도록 만들었고, 이 또한 자신의 죽음 직전에 책으로 발표하였습니다. 50년이 지나 이를 근거로 지동설을 주장한 부루노는 화형을 당하였고 이후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에서 마지못해 자신의 주장을 접고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했다는 말은 증명할 수는 없지만, 역사에 유명한 독백이 되었습니다.


지동설은 단순히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혼란시킨다는 명목뿐만이 아니라, 성서가 말하는 하느님의 우주 창조를 부정하는 얘기가 되기 때문에 교회는 매우 민감하게 반응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실은 중세 가톨릭에 반대했던 루터마저도 여호수아서 10장 13절의 태양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성서 구절에 근거하여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래오를 ‘벼락출세한 점쟁이’라고 혹평을 하였습니다. 가톨릭이 지동설을 주장했던 과학자들을 종교재판에 회부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몇 해 전부터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라는 명칭 대신에 제1성서와 제2성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래된 계명이라고 부르는 구약성서 안에도 새롭게 주시는 신약의 말씀이 있고, 새 계명이라고 부르는 신약성서 안에도 옛 계명에 속하는 구약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예레미야의 본문 말씀은 구약 성서에 속한 말씀이지만, 그 내용은 실로 신약 성서의 핵심을 전하고 있는 말씀이고 이는 동시에 구약 성서 전체에서 본다면 구약의 말씀을 송두리째 뒤집어 없는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의 말씀입니다.


[율법에 기초한 구원론의 결함]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이 기록된 책으로 인간 구원에 관한 책입니다. 우리가 구약 신약이라 구분해서 부르는 것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구분하는 시대적 명칭이기도 하지만 이는 구원의 방식에 대한 구별이기도 합니다. 구약 곧 옛 약속 혹은 옛 계명이라고 부르는 구원의 방식은 무엇입니까? 그건 곧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시내산에서 전해준 율법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구원이 임한다고 하는 조건부의 방식입니다. 이는 인간의 복종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점과 믿음에 따른 행동과 실천이 강조되기에 좋긴 하지만, 근본에 있어 인간의 행위가 전제된다는 점에서 구원의 주체성이 하느님이 아닌 인간으로 옮겨가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마음이 바르지 못한 이기적인 신자가 하나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율법의 계명은 열심히 지키는 것입니다. 교회 출석도 잘하고 헌금도 잘하고, 나름대로 봉사도 하고 전도도 합니다. 이런 것들을 지키면 구원을 주겠다고 약속했으니 하느님 편에서도 어쩔 수가 없게 된다는 점에 문제가 됩니다. 말로만 했으면 그때 말한 것은 그런 뜻이 아니라고 해석의 문제라도 제기할 수 있겠는데, 아예 돌에 새겨 버렸으니,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돌에 새긴 모세의 십계명은 이것은 하라, 저것은 하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매우 구체적인 것 같지만, 동시에 인간을 자기 성찰이 필요 없는 종교적 노예로 만들고 맙니다. 그런데 이 노예화는 많은 경우 계명을 지키지 못해 구원을 포기해버리도록 만들어버리는 오류도 일으키지만, 때로는 자신이 완전하다고 하는 오만의 오류도 일으킵니다.


유다의 지도자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을 언급하시는데 첫 번째로부터 네 번째까지의 하느님과의 관계를 묻는 계명은 말씀하시지 않고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다섯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의 이웃과의 관계를 묻는 계명만을 언급합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어려서부터 저는 이 모든 것을 다 지켜 왔습니다.’ 당당하게 답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도 기다렸다는 듯이 ‘너에게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있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이 사람은 가진 것이 많아 무척 괴로웠다고 말합니다.


이 사람은 이웃과의 수평관계인 믿음의 실천에서는 흠이 없었지만, 하느님과의 수직 관계에서는 부족했던 것인데, 스스로는 ‘아 십계명 그건 어려서부터 다 지켜온 일입니다’하는 신앙의 교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1성서 곧 구약이 말하는 계명 실천에 근거한 구원론의 결함입니다.


[은혜에 기초한 구원론의 결함]


그래 이러저러한 결함을 가진 계명 실천에 기초한 구원론 대신에 내세우는 구원론이 마음에 새겼다고 하는 은혜의 구원론입니다. 예레미야의 말씀과 같이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모두 조건없이 용서하시고 그 죄악을 더 이상 기억도 하지 않으시고 그냥 우리를 향해 너희는 나의 백성이니 무조건 구원하시겠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때 사람들은 ‘아니 내 죄가 그렇게 큰데, 하느님께서 무조건 용서하신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며 더 열심히 살아갑니다.’ 이미 죄로 죽었던 몸이라 치고 두 번째 주시는 거듭난 삶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갑니다. 이것이야 말로 무조건 용서 무조건 구원을 선포하셨던 하느님의 기대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 모두가 이런 생각을 갖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구원은 맡아 논 당상이라 생각하고 자기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얌체들이 있기 마련이고, 또 처음에는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열심히 살아가던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그 열기가 식어가는 법인데, 게다가 주위의 얌체 신앙인들이 자신보다 더 폼나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힘이 빠지게 되고 예전에 열심히 하였으니 지금은 이 정도 해도 하느님께서 다 이해해주시겠지 하는 타협하는 신앙인으로 자기도 모르게 변해가는 것입니다.


전반적으로 본다면 지금 한국교회의 문제가 어디에서 출발합니까? 바로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께서 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신 사실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이 온다고 하는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사도들의 가르침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이를 문자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구원을 향한 구체적인 실천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살이에서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이나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별다른 차이를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일요일에 산에 가는 대신 교회 간다는 것과 유행가를 즐겨 부르는 대신 찬송가를 부른다는 것 외에 삶에 큰 차이가 없습니다. 물질 욕망, 명예와 권력 추구에서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그 대상이 다를 뿐이지 내용에 있어 차이는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을 말하고 이웃에 대한 봉사와 희생을 말하지만, 삶에서 보여주는 감동은 별로 없습니다.


지금 예레미야를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에 하느님의 구원에 관한 말씀을 주셨다는 은혜 구원의 가르침은 구원이 인간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구원의 주체성이 하느님께 있는 것은 옳지만, 인간의 약점이 너무 많아 이를 좇아가지 못한다는 점이 문제가 됩니다.


[은혜 구원론의 역사적 배경]


여기서 우리는 이 말씀이 나오게 된 역사적 배경을 고려해야 합니다. 예레미야서에서 말씀하시는 이 무조건적인 구원 선포는 당시 시대적 상황이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나라는 망하고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습니다. 저들이 믿었던 야훼 하느님은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책임을 자신들이 율법의 말씀을 지키지 못한 결과로 받아들였습니다. 구원의 희망은 사라졌습니다. 율법에 근거한 구원론에서는 더 이상의 해결책은 없습니다. 백성은 단순히 삶에서만 도탄에 빠진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도탄에 빠져버렸습니다. 율법을 폐기하지 않고서는 희망을 말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예레미야는 공동체적인 율법의 무효를 외치고 각자의 마음에 새긴 말씀이라는 개인의 주체적인 신앙으로 대체한 한 것입니다.


그래 오늘 본문 34절에 “다시는 이웃이나 동기끼리 서로 깨우쳐주며 야훼의 심정을 알아드리자고 하지 않아도 될 것이며,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내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리라.” 사람들이 매우 성숙하여져서 가르치지 않아도 무슨 일이 옳은 일이지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인지를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만, 이 말 또한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무시하면 배울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오해될 소지를 갖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 인간이 무엇을 몰라서 악을 저지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 사회를 보아도 배운 사람들이 더 큰 범죄를 저지릅니다. 마치 예수님 당시의 율법교사들과 같이 법을 말하는 검사, 판사들이 더 큰 범죄들을 법망을 피해가며 교묘하게 저지르고 있습니다.


[은혜 구원론과 한국교회의 병폐]


2천년 세계 교회운동에 비추어 볼 때, 지금 한국교회가 지나치게 하고 있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세요? 해외 선교, 예 이것도 지나칩니다. 자기가 몸담고 있는 나라가 세계 제일의 자살률 국가요, 유일한 분단국가에, 비율로 따지면 세계 최고의 군사비 지출로 인해 한반도 전체가 화약고로 변해가고 있음에도 자기 나라 바로 세울 생각은 없이 해외에 나가 교회만 세우면 된다는 식의 선교는 땅 끝까지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선후 관계를 따지지 않고 해석한 잘못입니다. 해외에서 복음전파에 헌신하시는 선교사님들을 제가 비난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해외 선교 필요합니다. 저도 한때 멕시코 선교사로 나설 생각을 갖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태석신부님을 비롯하여 오지의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선교사님들 정말 많이 계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태복음에서 부활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이 선교명령을 마치 예수 신앙의 최종 목표인양 혹은 신앙의 전부인양 몰아간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현지를 방문해보면 한국 선교사님들의 지나친 교회확장 중심의 물량선교로 인한 부작용이 너무 큰 것입니다. 지난 주 제가 인도 방갈로에서 있었던 세계교회협의회 여성부가 주최한 모임에 갔었는데, 그곳에서 인도교회협의회 부총무께서 저에게 특별히 세 번에 걸쳐 기회 있을 때마다 부탁하십니다. 지금 현대중공업이 인도에다가 거대한 제철공장을 지으려고 하는데, 이로 인해 인도의 마을 100개가 파괴당할 위험에 처해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주민들의 거센 반대로 교착상태에 있는데, 한국교회가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도에 가 있는 선교사님들은 이렇게 인도 민중들이 당하는 아픔에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부작용이 어디에서 시작했는가 하면 그건 지나친 문자주의적인 성서 공부에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하나의 단적인 예로 제가 다녀 본 나라들 가운데서 회중석에 성경책을 펴놓도록 선반을 붙여놓은 교회는 한국교회가 유일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50년 전 옛날 의자이고 이건 아마 한국교회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골동품 수준이 되었습니다만, 설교 시간에 성경에 줄을 치고 기억할만한 중요한 내용을 기록하는 일 결코 나쁘지 않습니다. 문제는 앞뒤가 바뀐 것입니다. 공부를 하는 이유는 바로 믿기 위해서이고 바로 믿는 이유는 바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앎과 삶이 하나로 묶어지는 공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대부분 앎에서 그치는 성경지식용 공부로 그치고 있고, 그 해석에 있어서도 QT 라는 이름하에 지나치게 개인중심의 감상적 해석으로 흘러가 버렸습니다.


물론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서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끝이 없습니다. 인간이 죽도록 노력해도 다할 수 없는 것이 개인의 인격수양입니다.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는커녕, 제가(齊家)는커녕, 수신(修身)만 평생해도 온전히 이룰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성서가 주로 개인 묵상을 통한 수신하는 책으로 전락이 되어 버렸습니다. 본래 성서가 그런 책이라면 저도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만, 그러나 본래는 그런 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서는 야훼 하느님과 한 집단과의 신앙관계를 핵심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히브리라 불리는 노예집단이 애굽 제국의 폭정으로부터 탈출하는 얘기로 시작하여 이스라엘과 유다라는 나라를 세우고 예루살렘 성전을 통해 야훼 하느님의 신앙을 지켜나가다 바빌론 제국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이어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 그리고 알렉산더 제국의 지배 그리고 이어서 로마 제국의 지배를 계속하여 받습니다. 그간 꾸준히 독립국가를 이루어보려고 몸부림을 치지만 약소민족으로 그 힘의 한계는 뚜렷하여 계속 핍박을 받게 되었고, 그래서 정치적 독립은 포기하고 대신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종교적 자치집단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라는 사람이 갈릴리라는 지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민중운동을 펼쳐 가시던 과정에 성전을 숙청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이 일이 결정적 원인이 되어 신성모독죄와 민중소요 죄목으로 빌라도 총독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아 십자가 처형을 받으셨지만, 사흘만에 부활하시어 제자들을 통해 그 운동을 계속해서 펼쳐나가신다는 사회 집단과 민족이 늘 중심에 놓여 있는 말씀의 책입니다. 개인의 신앙과 인격 수양을 위한 말씀들이 있지만, 이는 모두 그가 몸담고 있는 사회가 정의와 평등을 기초로 한 평화의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서에서 야훼 하느님은 모든 개인들에게 축복을 베푸시는 분이시지만,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상황 속에서는 항상 약자 편에 서시어 강한 자를 내리치시고 강한 제국들을 멸하시어 약소국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하시는 평화의 하느님으로 나타나십니다. 이것이 성서가 보여주는 큰 맥락입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는 이런 전체 맥락은 다 놓쳐 버리고 작은 것만 보면서 누가 옳으니 누가 그르니 하며 다투고 있습니다. 개인 구원이냐 사회 구원이냐 하는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개인 없는 사회도 없고 사회 없는 개인도 없습니다. 개인과 사회는 한 몸입니다.


[예수와 세상(코스모스)]


오늘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큰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래도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이 자기 희생을 강조한다는 점에는 모두 동의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위한 희생인가 하는 점에서 생각이 갈라집니다. 대체로 개인과 개인간의 관계의 사적인 용서와 희생, 또는 교회를 위한 사랑과 나눔 정도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밀알의 희생 곧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하느님의 영광과 연계되어 계속 나타나는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어떤 단어인가요? 그건 ‘세상’이라는 단어입니다.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 ‘지금은 이 세상이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제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나게 되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죽음을 앞두고 적대하는 대상은 ‘세상’입니다. 희랍어로 이 세상은 cosmos입니다. 이는 그리스적 세계관에 기초한 조화가 이루어진 질서 있는 세상을 말하는데, 이는 신으로부터 그것도 제우스로 시작한 여러 신들이 서열을 따라, 그리고 왕, 귀족, 자유인, 이것도 남성이 먼저 그리고 여성, 노예, 힘이 강한 동물, 그리고 약한 동물들 순으로 상하구조가 정해진 그런 질서를 말합니다. 일종의 계급사회의 질서 그리고 여기에 기초한 조화로운 세상을 성서는 코스모스 곧 세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 알고 있다시피 이 코스모스적 세상 안에는 조화와 질서라는 이름하에 힘을 가진 자들이 힘없는 사람을 누르고 착취하는 사회적 폭력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때로는 이것이 국가의 이름으로 진행됩니다. 지금 요한복음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은 바로 이러한 사회의 폭력구조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한 알의 밀알이 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겠다고 하는 신앙의 다짐, 중요합니다. 사순절은 바로 그러한 다짐을 새롭게 하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 광야에 거하는 기간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위한 것이냐 하는 그 목적이 잘못되어 있다면 이 다짐은 어리석은 다짐이요 하지 아니함보다 못한 희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살면서 가장 허망할 때는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꿈을 못 이뤘을 때가 아니라, 피땀 흘려 이룬 꿈이 정작 자기가 바라는 게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라고.”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했는데, 하늘나라 갔더니 예수님께서 ‘그것은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니었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면 얼마나 허망할까요.


우리의 믿음은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의 폭력적 구조를 파악하고 이에 저항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은 단순히 한 개인의 고귀한 희생과 영원한 삶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심판하고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나는’ 사회정치적인 사건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구원론에 관련하여 굳이 말하자면, 예수께서는 행위에 기초한 율법구원론이냐? 혹은 오직 예수 믿음에 기초한 은혜 구원론이냐? 하는 양자택일의 도식을 거부하시고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기초하여 세상의 폭력적 구조에 저항하는 밀알 구원론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폭력과 한 알의 밀알]


오늘도 제주도 강정마을에서는 제주 어디에도 없는 단 하나의 희귀한 바위 구럼비 바위를 깨트리고 이곳에 미군을 위한 해군기지를 세우고자 하는 불의한 폭력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의 평화를 지키는 국가 안보가 아니라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우리 땅을 또 다시 전쟁터로 만드는 일입니다. 이는 우리 민족 전체를 또 다시 죽음으로 몰아넣는 폭력의 시작입니다. 미국이 군사력이 부족하여 911의 희생이 일어나고 그 이후 수만 명의 젊은이들이 전쟁터에서 희생을 당하는 것입니까? 미군들의 희생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라크와 아프카니스탄의 수백만의 어린이들과 여성들을 포함한 민간인들의 희생 또한 있습니다. 군사기지와 신식무기가 결코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나친 군비는 경쟁을 불러일으키고 이는 결국 한계에 달하면 스스로 폭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역사가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군사훈련의 희생자들을 영웅시하는 행위 또한 국가가 저지르는 또 하나의 폭력입니다.


내일부터 무슨 핵안보정상회의라는 괴상한 이름의 세계정치지도자들의 모임이 서울에서 시작합니다. 핵은 터지면 모두가 함께 죽는 매우 파괴적인 무기입니다. 이를 지구상에서 완전히 폐지하겠다는 결의가 담긴 회의라면 모르지만, 핵보유국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일종의 패권다툼용 조정 회의임이 분명한데, 여기에 핵안보라는 단어를 쓴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게다가 현 정부와 언론은 이를 교묘하게 역이용하여 선거를 앞두고 핵원전의 불가피함을 강조하고, 남한과 미국 대통령은 내가 쏘아 올리는 인공위성은 평화용이요 상대방이 쏘아 올리는 인공위성은 전쟁용이라는 억지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북의 핵폭탄이 없어도 남의 핵원전이 폭발하면 그 피해는 같은 것입니다. 핵은 안전하다는 망상을 심어주는 핵안보라는 말 그건 오늘의 제국들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폭력입니다.


예수님의 밀알구원론은 이러한 세상의 구조적 폭력을 향해 자신의 몸을 던지면 그것이 더 확산되어 더 많은 밀알들이 만들어지게 될 것이라는 평화 믿음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또 하나의 밀알이 되겠다고 하는 밀알 신앙을 가져야지, 예수님의 희생에 기초한 영광을 누리겠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큰 착각입니다. 왜냐하면 영광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하느님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몫을 가로채면 이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도둑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야 했으며 이 신적 인간이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며 무력하게 외쳤을까를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는 과연 신의 무력함을 드러내는 말인가요? 아니면 세상의 구조적인 폭력 안으로 자신의 생명을 밀어 넣은 신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부르시는 하늘 초청인가요?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