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6(종려주일)

호산나와 라마 사팍타니

118:19-24; 50:4-9a; 빌립 2:5-11; 111-11, 15:25-37

 

[성전 숙청의 본질]

 

오늘은 40일 사순절의 마지막 여섯 번째 주일이며 종려주일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갇혀 있는 토요일까지를 고난주간이라 부릅니다. 마가복음을 비롯한 복음서들은 여기에 총력을 기울려 이 한주간의 삶의 이야기가 예수님의 3년간의 하느님 나라 복음 운동의 전체 이야기에 3분지 1에서 절반을 차지합니다. 분량뿐만이 아니라 각자가 전하고 있는 예수 신앙과 그리스도 신학의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오늘 예루살렘 성에 입성을 하고 월요일에는 당시 유대사회의 모든 것의 중심인 예루살렘 성전을 숙청하는 사건을 일으켜 죽음을 자초합니다. 성전 숙청이란 단순히 성전 뜰에서 좌판을 깔아놓고 장사하는 서민들을 내어 쫓은 사건이 아닙니다. 성서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는 핵심은 먼저 성서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서 당시의 말씀과 행동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성전 뜰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란 오늘날의 시장 상인들이 아닌 성전 제물용 희생동물을 파는 독점 상인관리들이요, 성전에서만 통용되는 화폐를 바꾸는 일종의 성전 관리인들입니다. 희생제물과 십일조를 비롯한 성전세 징수는 종교적으로는 야훼 하느님의 축복을 대체하는 유대교의 핵심계명이었으며, 경제적으로는 이렇게 하여 축척된 부를 통해 예루살렘의 경제를 좌지우지 하는 금융의 본산이 되었고, 정치사회적으로는 이 돈의 일부를 로마정부에 조공으로 바침으로 로마의 식민지지배 체제를 지지하고 옹호하는 귀족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따라서 종교와 정치, 경제, 문화 모든 것의 중심인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케 한 일은 단순히 오늘의 교회를 개혁하는 행위를 넘어 사회지배 체제의 상징인 청와대와 국회의사당과 검찰과 법원과 금융가의 부조리를 모두 숙청하고자 하는 나아가 미군 주둔의 부당성까지도 고발하는 사회정치적 혁명 사건이었습니다.

 

로마 총독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의 성전숙청 사건은 단순히 유대교 안에서의 서로 다른 신념과 교리를 가진 집단들의 충돌이 아니라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는 정치적 반역 행위였습니다. 여기에 왜 예수가 유대의 종교법에 따라 돌에 맞아 죽지 않고, 로마의 정치범으로 십자가에 처형당했는가 하는 이유에 해명이 되는 것입니다. 성전 숙청 직후 대제사장 가야바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이 (예수)를 그대로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1148) 현재 정치와 군사를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자치를 허용 받고 있는데, 만약 이 예수를 그대로 둔다면 로마가 자치권을 빼앗고 직접 통치를 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예수님의 성전 숙청 행동을 결코 종교적 이단행위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로마 정부를 적대하는 정치적 행위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이번 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드렸는데, 전통적으로 이 고난주간에는 매일같이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서는 그간 별로 날짜나 요일에 구별 없이 예수님의 행적을 전하여 왔는데, 마지막 주간에는 요일별로 시간별로 자세히 서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하루 일어난 사건 하나하나가 신앙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요즘은 보통 성금요예배로 한번 모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성찬예식을 행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성찬 예식 대신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세족예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족식을 시행하려면 여러 가지로 번거롭기에 대부분의 말로만 언급하고 지나갑니다. 그런데 세족식은 성찬예식 못지않은 중요한 신앙적 교훈이 담겨 있고 이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해야 하는 예전입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는 세족식을 행하는 성목요예배와 성찬식을 행하는 성금요예배를 번갈아가며 진행하여 오고 있습니다. 올해는 교회에서는 목요일에 모여 세족식을 행하고 금요일에는 천안 디아코니아 평화와 영성의 집에서 진행되는 십자가 예식에 참석합니다. 목회자마당에 설명되어 있는 대로 목요일 예배뿐만이 아니라 금요일 비아 돌로레사라는 십자가 14처 예식에도 참예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오늘은 마가복음의 두 개의 본문, 곧 종려주일 본문과 십자가 죽음의 본문 두 개를 동시에 선택했습니다. 고난주간을 영어로는 라틴어의 고난당하다라는 뜻을 가진 passio에서 파생한 Passion Week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영어의 passion은 고난이라는 의미뿐만이 아니라 열정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연히 일어나는 교통사고와 같은 그런 고난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대한 열정 그 나라와 그 의를 이루고자 하셨던 그 열정으로 인한 고난이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일요일의호산나의 군중의 함성과 금요일의라마 사박타니의 예수님의 단발마의 외침 사이에서 십자가의 죽음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죽음으로 이룩하시고자 하셨던 하느님 나라 실현에 대한 열정을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재현]

 

예수님은 오늘 제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십니다. 이때 예수님은 한 번도 타보지 않았던 새끼 나귀를 타고 들어오시고, 사람들은 이에 겉옷을 벗어 깔아주며,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온다. 만세! 높은 하늘에서도 호산나!” 라고 함성을 질렀습니다. 제가 지금 그 입성하시는 모습을 재현하고자 합니다. 실내라 새끼 나귀는 타지 못하고 대신 다른 것을 타고 들어오겠습니다. 지금 여러분께서는 나눠 들인 나뭇가지를 하나씩 들고 장로님의 인도 아래 연습을 하셨다가 제가 들어오면 2천년 전 예수님이 들어올 때, 성에 모여 있던 사람들과 같이 나뭇가지를 흔들면 환호를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겉옷을 벗어 깔아놓으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그러나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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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에로 복장에 어린이용 자전거를 타고 입장하다)

 

마르코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올라가야 할 것을 여러 번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처음 요한으로부터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을 때에 하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민중의 삶을 옥죄이는 저 율법종교와 예루살렘 성전 체제를 깨트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과격한 행동은 민중의 폭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날은 자신들의 조상들이 애굽의 압제로부터 벗어난 날을 기념하는 과월절 해방의 축제 날이었고, 그 이전에도 민중 폭동이 자주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마치 기미년 31독립운동을 순종의 장례에 맞춰 시작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로 인한 희생이 너무나 크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어린 시절이었을 때에 갈릴리 세포리스라는 도시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로마군은 2천개의 십자가를 마을 입구 양쪽에 세운 다음 어린이와 여인을 포함한 모든 마을 사람들을 처형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성전을 숙청하고 이 잘못된 지배 체제에 대해 바른 소리와 행동을 보여야 했지만 동시에 군중 반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이는 예수의 중요한 관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중요한 관심이기도 했습니다. 마가복음 142절에 보면 저들은 몰래 예수를 잡아 죽일 것을 궁리하면서 백성들의 소동을 두려워하여 축제 기간만은 피하고자 했다고 말합니다.(2) 어느 독재자나 마찬가지이지만,로마 또한 자신들의 지배에 반역하는 무리들은 매우 잔혹하게 처단했습니다. 기원전 71년에 스파르타쿠스가 주도한 노예 반란이 있었는데, 이때는 무려 로마로 들어가는 아피아가도에 무려 6천개의 십자가를 세워 모두를 죽이기도 했습니다. 로마군의 폭행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유대 지도자나 예수는 어찌 하든 민중 폭동만은 피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은 예루살렘 성안에 오래 전부터 파다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그 소문이란 그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야일 것이라는 소문입니다. 그리고 기관원들의 사찰은 오늘 우리 시대에만 있었던 일이 아니고 예수님 또한 사찰 대상 1호였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가 사람들을 이끌고 이번 과월절 축제 기간에 올라온다는 것입니다. 이 소문은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세상을 바꿀 기대와 설렘을 불러일으켰지만, 현 체제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기득권자들 통치자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위협이요 공포였습니다.

 

[새끼 나귀를 탄 이유]

 

이윽고 애굽의 군대를 홍해 바다에 수장시키고 자신들의 조상들이 노예생활에서 해방받은 모세 출애굽의 자유와 해방 사건을 기념하는 성대한 과월절 축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설렘에 들뜬 사람들은 이른 아침부터 거리에 나와 예수 일행을 기다립니다, 점점 떠들썩한 소리가 가까워 옵니다. 드디어 그 모습이 모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도대체가 말이 안 됩니다. 새끼 나귀를 타고 뒤뚱뒤뚱 넘어질 듯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군중들은 물론이요 잔뜩 긴장했던 로마 군인들마저 웃음이 터져 나오는 장면이었습니다. 호산나라는 함성은 왕이 등극할 때,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입성할 때 부르던 백성들의 환호였습니다. 더구나 다윗은 가장 강성한 유대왕국을 세웠던 왕이었기에 악랄한 로마의 식민지배에 시달려온 민중들은 이제나저제나 다윗왕의 재현을 고대했습니다.

 

외치는 함성은 호산나다윗의 자손이요 찬미받으소서입니다. 그런데 새끼 나귀를 탄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칼도 창도 없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야고보의 어머니가 예수께 와서 이런 부탁을 합니다. “성에 입성하시면 자신의 아들 둘을 하나는 오른편에 다른 하나는 왼편에 세워달라고 부탁합니다.” 우의정 좌의정의 권력의 자리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제자들 또한 이런 자리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죽을 것이라는 예수의 예언에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강력하게 반발했고, 결국 가룟 유다 또한 예수를 파는 파렴치한 행위를 저지르고 맙니다. 돈에 눈이 먼 것이 아니라, 예수가 먼저 자신을 배반(?)한 일에 대한 분노의 표시였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가 마르쿠스 보그와 존 도미닉 크로산이 지은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은 이 장면을 이렇게 말합니다.

 

시기 30년 어느 봄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두 행렬이 있었다. 때는 유대교에서 일 년 중 가장 신성한 절기인 유월절의 첫날이었다. 첫 번째 행렬은 초라한 행렬이었으며 다른 행렬은 로마 군대의 행렬이었다. 동쪽에서는 예수가 추종자들의 환호를 받으며 새끼 나귀를 타고 감람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예수는 나사렛이라는 한 시골 마을 출신으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농민들이었다. 그들은 갈릴리에서부터 남쪽으로 약 100마일 떨어진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맞은편의 서쪽에서는 이두메와 유대와 사마리아를 다스리는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제국의 기병대와 보병들을 이끌고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저들은 서북쪽으로 약 60마일 떨어진 가이사랴 해변으로부터 왔다. 예수의 행렬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었으며, 빌라도의 행렬은 로마 제국의 권력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오늘 성서 본문에는 빌라도의 제국의 군사 행렬이 기록되어 있지 않는 것은 이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예수님의 우스꽝스러운 행렬 반대편에서 진행되고 있는 또 다른 행렬 곧, 말을 타고 창과 칼을 들고 들어오는 로마군의 행렬을 함께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새끼 나귀 속에 담겨 있는 정치적 풍자를 읽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권력과 풍자]

 

권력자들을 정면으로 비판하면 감옥행입니다. 그래서 민중들은 권력자들을 풍자화하여 틀어 말합니다. 개그에도 이런 풍자가 담겨 있습니다. 영어로는 패러디라고 하는데, 요즘은 말로만이 아니라, 컴퓨터 그래픽 조작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권력의 너무 폭력화되면 풍자도 할 수 없습니다. 70년대 박정희시대에는 살인적인 폭력이 너무 횡횡했던지라 그저 유언비어 형태의 언어만 조심스럽게 돌아다녔습니다. 그저 일본 천황에게 혈서로 충성을 맹세한 다가키 마사오라는 일본 만주군 장교가 박정희임을 드러내기 위해 일본군 모자를 씌워놓는 정도였습니다. 김지하의 오적이란 시는 풍자시로 유명했지요. 제가 다니던 신학대학에서 70년대 대학축제 명칭을 바보제라고 바꾸었는데, 이를 본 담당형사가 벽보를 마구 찢더군요. 우리 스스로를 바보라 부르는데 그는 왜 화를 냈을까요? 그게 우리들 자신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자신들을 비웃는 풍자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80년대 소위 민주화가 일어나면서 한동안 풍자가 유행했습니다. 대통령을 돌이라, 물이라 쥐라 불렀습니다. 지금은 다 잊어버렸습니다만, 한동안은 대통령이 방구를 뀌었을 때, 아첨하는 부하의 각기 다른 반응을 통해 권력의 실체를 풍자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고스톱 게임에 저들의 독재 행태를 패러디한 새로운 룰을 만들어내어 마음껏 즐겼던 것입니다.(예 오공비리 등) 예수님은 풍자의 대가였습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찾아내면서 자신의 눈 안에 있는 들보를 발견하지 못한다는 이 소리도 바리새인들의 위선에 대한 풍자였고,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킨다는 말씀 또한 부자들의 탐욕을 풍자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입을 벌리고 낙타를 통째로 삼키는 장면을 한번 연상해 보세요. 너무나 웃기지 않습니까?

 

영문학을 전공했던 미국의 여성신학자 샐리 맥페이그는 은유 곧 풍자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좋은 은유(풍자)는 충격을 던지고 서로 다른 것을 결합시키며, 관습을 뒤집고 긴장되게 하며, 함축적으로 혁명적이다. 이러한 면에서 상징적이고 성례전적인 사유는 제사장적 특징을. 은유(풍자)적인 사유는 예언자적 특성을 지닌다. 전자가 이미 현존하는 질서의 통일성과 완성을 기다린다면, 후자는 앞으로 실현되어야 할 변화의 가능성 질서와 통일성을 시험적으로 투사한다.”(재인용 함석헌의 종교시 탐구김경재 저 2012. 29, 괄호는 필자의 첨가) 분명 예수께서 아무도 사람을 태워본 적이 없는 초짜 새끼 나귀를 타시고 들어오신 사건은 로마 제국의 권력의 상징인 말을 패러디한 정치적 풍자극이었습니다. 여기서 힘없는 민중들은 현 체제의 억압으로 벗어나는 카타르시스를 느꼈으며 이 카타르시스는 저들에게 새로운 하느님 나라를 대망토록 하는 예언자적인 열정과 혁명성을 품게 하였던 것입니다.

 

[두 개의 큰 소리] - ‘호산나와 라마 사박타니

 

이제는 닷새를 뛰어넘어 금요일 십자가 사건으로 가겠습니다. 사실 이 사건에 앞서 신앙적으로 귀한 가르침이 되는 여러 사건들이 있습니다. 가장 크게는 군중과 제자들의 배반입니다. 예수께서 심문을 받던 대사제 가야바의 법정 뜰에서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이야기는 오늘 우리 자신의 나약함과 신앙의 배반을 경고하고 있으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했던 군중들이 단 며칠 만에 마음을 바꿔 예수 대신 더 폭력적이었던 바라빠를 대신 풀어주도록 요구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에게 침을 뱉고, 십자가 위에서 고통 받는 예수를 향해 다른 사람은 구해주고 자신은 구하지 못한다고 조롱하는 군중들의 배반은 우리로 하여금 군중심리가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성서는 저들이 대사제들에 의해 매수를 당했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마르코 저자는 이 대목에서 그가 의도적으로 즐겨 써온 갈릴리의 억압당하는 민중, 어느 정도 하느님 나라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다고 여겨지는 자각의 민중을 뜻하는 오흘로스라는 단어 대신에 주어진 삶에 순응하며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는 무작위의 대중을 뜻하는 라오스라는 단어를 썼으면 참으로 좋았겠지만, 이 대목에서도 여전히 오흘로스라는 단어를 씀으로써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인간들의 근본적인 노예성을 드러냄으로서 예수님의 외로운 투쟁과 고독한 죽음을 더욱 드러내고 있습니다. 요즘 대형교회들이 겪는 분규에서 담임목사님의 설교에 아멘 할렐루야로 화답하고 하느님의 종이라 칭하며 그렇게 순종하고 따르다가도 어느 순간 교회가 편 가르기에 들어갔을 때에 자기편이 아니라는 이유로 매정하게 비난하는 모습은 그리 낯선 모습은 아닙니다. 하긴 피를 나눈 형제들도 돈 몇 푼 때문에 고발하고 고소하는 세상이니 뭐 그리 놀랄 일도 아닙니다. 그것도 끼니를 잇기 어려운 가난한 동생이 놀부와 같은 못된 형을 고발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만, 우리나라 제일가는 삼성 재벌 집안 안에서 그래도 배웠다고 가졌다고 하는 일가족이 벌이는 소송이라, 돈이란 사람을 이렇게도 매정하게 만드는 것인가 하여 씁쓸하기 짝이 없습니다.

 

[부유층과 거짓말]

 

부자 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싶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는 줄 압니다. 저도 그런 사람 중 한명이구요. 그런데 부유하고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더 많이 거짓말하고 남의 것을 더 많이 가로채고 더 양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시나요?(경향 22910) 미국 버클리 대학 사회심리학 연구진은 재산 직업 교육수준을 바탕으로 사회계층을 구분한 뒤 여러 실험 과정을 통해 사람들의 행동을 다각적으로 관찰하였습니다. 결론인즉 상류계층이라고 생각하는 참가자일수록 게임에서 속임수를 쓰거나 돈을 훔치는 행동을 하위계층에 비해 3-4배 더 많이 하고, 번잡한 샌프란시스코 사거리를 관찰한 결과 고급차량이 일반차량의 두 배 꼴로 끼어들기를 하고, 그 중 절반이 건널목의 보행자를 무시하고 달렸습니다. 반면 낡고 저렴한 차량의 운전자들은 대부분 보행자를 위해 차를 멈췄습니다. 이건 잘 보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연구자 폴 피프는 말하기를 가난할수록 공동체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만큼 사회적 기준을 잘 지키는 경향이 있지만, 상류층은 자기중심적으로 특권을 추구하다 보니 더 이기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왜 재벌들이 빵집과 골목 떡볶이와 순대까지도 독차지하려 하는지 그 이유를 엿볼 수 있으며 자본주의가 사람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나만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니 하느님 나 좀 부자 좀 만들어주세요 라고 기도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더 하다는 건 잘 아시겠지요.

 

[십자가 처형]

 

예수는 3년간의 힘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홀로 쓸쓸하게 십자가 위에서 죽어갑니다. 금요일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십자가 위에 매달려 있다 돌아가십니다. 이 십자가 처형은 본래는 페르시아의 사형법으로 사람을 가장 오랫동안 최대한의 고통을 주기 위해 고안한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 처형법은 죄수를 고통스럽게 죽이는 것을 넘어서서 목격자들로 하여금 공포감을 갖도록 하는 것이 더 큰 목적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동네 언덕 위에 십자가 처형을 하면 보통은 3일간 낮에는 뜨거운 태양 아래서 밤에는 차가운 광야바람 속에서 서서히 피를 흘리며 목마름과 기아의 고통 속에서 죽어갑니다. 사람들은 그 처절한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감지만, 들려오는 고통의 소리마저 외면하기는 힘듭니다. 더구나 한밤중 바로 집 담벼락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분명하게 들려오는 신음소리는 온 동네사람을 가위 눌리게 만듭니다. 어떤 경우는 일주일씩 가기도 하였다고 하니 그동안에 갖는 공포와 불안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리고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은 오늘 우리들과 같이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엊그제까지 한 마을에서 함께 울고 웃고 지내던 지인들이었던 것입니다. 버티다 버티다 온 몸의 피와 물이 다 빠져나가 고개가 앞으로 풀썩 꺽이면 공중을 선회하던 까마귀들은 그 머리에 앉아 눈을 쪼아 먹고, 들개들은 그 몸의 살점을 뜯어먹습니다.

 

[시인 마르코]

 

예수는 다행히 3시간 만에 돌아가셨고, 그리고 그의 시체를 안장하고자 하는 숨은 제자들의 도움으로 그런 비참한 상태는 모면하십니다. 사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부활로 빨리 건너 띠고 싶지만, 부활이 정말 부활다우려면 우리가 좀 더 예수님의 죽음과 그 고통에 다가설 필요가 있습니다. 4복음서 전체에서 십자가 위의 예수께서는 일곱마디를 외치시지만, 그중 마르코가 전하는 이 단 한마디가 가장 처절합니다. “엘로이 엘로이 라마 사박흐타니저자는 이 대목에서 그 죽음의 처절함과 외로움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헬라어 대신 예수께서 사용하셨던 아람어로 전합니다. 마르코는 가끔 사건의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아람어를 그대로 사용합니다. 탈리타 쿰(소녀야 어서 일어나라) 에파타(열려라) 엘로이 엘로이 라마 사바크타니를 희랍어로 읽는다면 이렇게 됩니다. “오 떼오스 무 오 떼오스 무, 에시스 티 에그카데리페스 메십자가의 외마디의 외침을 전하기에는 좀 길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말 번역에는 사박타니로 번역되어 있습니다만, 보다 정확하게 읽으면 타니입니다. 저는 이 에 강조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동의 언어에는 우리 말에는 없을뿐더러 흉내내기도 쉽지 않은 뱃속 저 깊은 곳에서 나오는 라는 거친 음이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쇠렌 키엘케가르 Kierkegaard는 시인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시인이란 누구인가? 격렬한 고통을 가슴 속에 품고 있으나 탄식과 비명이 입술을 빠져나올 때는 아름다운 음악으로 들리는 불행한 사람' 저는 이 마르코 저자야 말로 예수님의 탄식과 비명을 아름다운 음악으로 들은 불행한 시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헬라어로 이를 전했을 때 생겨나는 글의 번잡함을 피해 하나의 하늘 메아리 울림의 시상어로 들려지는 아람어로 전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의 이 처절한 외침에 익숙했던 마태는 이를 그대로 전하고 있지만, 동시에 예수는 그 후 마지막 숨을 내쉬면서 또 다른 소리를 외쳤다는 말을 덧붙임으로 짜박흐타니의 강조를 흐리고 있고, 루가는 지혜를 찾는 이방인들에게는 이 외침이 걸림이 되겠다 싶어 이를 아예 빼버렸고, 요한 또한 로고스의 신적 언어 곧다 이루었다는 승리의 선언으로 그 마지막 외침을 바꿔 버렸습니다. 이점에서 본다면 예수를 인자 곧 사람의 아들로 말해온 마르코복음서가 가장 인간적인 복음서라 말할 수 있으며 우리가 기대했던 대속의 구원은 결코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서에서 두 개의 외침 소리를 듣습니다. 하나는 군중들의 예수를 향한 찬미의 합창 소리 호산나로 이는 기쁨과 축제의 함성입니다. 구원과 승리의 노래가락입니다. 다른 하나는짜팍흐타니입니다. 호산나는 인간 집단의 희망을 노래하고 짜팍흐타니는 인간 개인의 실존적 고통을 대변합니다. 우리는 호산나와 짜퍅흐타니라는 이 두 소리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이 정부와 사회는 4대강과 FTA를 통해 나를 진정 행복한 부자로 만들어 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 그렇지 못한 현실 사이에서 번민하며 병과 가난의 질곡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4년 전 많은 사람들은 이명박대통령 후보자에게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돌아섰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서안의 등장 인물들과 바로 우리들 자신임을 깨닫습니다.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하다 끝내 예수를 배반하고 폭도 바라빠를 풀어주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던 그 민중들은 다름 아닌 우리들 자신임을 깨닫습니다. 도망친 제자들 또한 다름 아닌 우리 자신들입니다. 결국 엘로이 엘로이 라마 짜퍅흐타니고통의 외침은 지금도 울려퍼지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왜 예수께서 그런 버림을 받으셔야 했는지 우리의 고통은 어디에서 시작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신학적으로는 설명이 가능하지만, 그러나 그건 논리일 따름입니다. 물론 우리는 시편 221절이 엘로이 엘로이 라마 사박타니로 시작하지만, 24절에 이르면 결국은 호산나의 찬양으로 마쳐지고, 금요일을 지나 토요일의 무덤이 끝나면 결국 주일 아침 부활을 통해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돌이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확신하지만, 오늘부터 우리는 이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을 오늘의 호산나로 시작하여 금요일의 라마 짜퍅흐타니로 끝나는 성서 이야기 속에서 고난주간이 의미하는 진정한 하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바울이 말하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 곧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신 케노시의 비임 사건은 그냥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로마황제의 명령으로 인해 마굿간에서 태어나야 했고 헤롯왕의 칼날을 피해 애굽으로 도망을 가야했고, 끊임없는 살해 위협과 정부 사찰을 받다 빌라도 총독에 의해 십자가 사형 언도를 받아 채찍에 맞고 침뱉음의 조롱을 지나 엘로이 엘로이 라마 짜퍅흐타니라는 처절한 아픔으로 끝난 낮아짐이요 비임입니다. 저는 여기서 사도바울로가 말하는 무슨 일에나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을 버리고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라는 사적인 양보와 겸손으로 십자가의 공적 죽음을 대치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함석헌 선생의 흰손이란 장편시의 일부분을 인용함으로 오늘의 하늘뜻을 마치겠습니다.

 

이놈들아 갈보리에 흘렸던 피

그 피 내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 위해 네 몸 위에, 네 혼 위에, 흘려

네 피 된 산 피 말이지

 

네 만일 그 피 마셨다면야,

(, 내 살 먹어라 내 피 마셔라 않더냐?)

그러면야 지금 그 피 네 속에 있을 것 아니냐?

네 살에, 뼈에, 혼에, 얼에 뱄을 것 아니냐?

 

피는 한 방울 아니 묻고 표지만 든 흰 손,

아니 흘려서 아니 묻었구나

네 피 흘릴 맘 한 방울 없어

그저 남더러 대신 흘려 달래 살고 싶더냐?

 

대속(代贖)이라!

둘도 없는 네 인격에 대신을 뉘 하느냐?

내게 진 빚 나 모르게 너 혼자 줄치면

그 청장(淸帳)을 내 안다더냐?

 

힘은 아니 들이고 빌어 삶,

생각은 아니하고 더라만 이는 빎,

이름을 빌망정

삶을 어찌 빌 수 있느냐?

 

너 살고 싶으냐?

대들어라, 부닥쳐라.

인격의 부닥침 있기 전에

대속이 무슨 대속이냐?

 

그의 죽음 네 죽음 되고

그의 삶 네 삶이 되기 위해

부닥쳐라, 알몸으로 알몸에 대들어라!

벌거벗은 영으로 그 바위에 돌격을 해라!

 

네가 나를 믿거든 내 뜻을 온전히 이루라.

내 내 뜻을 의 안에 말해 세상에 보냈노라.

네 내 아들 믿거든 그가 되라. 그가 죽었으면 너도 죽어라.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