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의 부활 전승과 비틈

고전 15:3-8; 118: 21-24; 10:34-43; 요한 20:1-18

부활이란 다시 산다란 말로 만물이 약동하며 자연이 푸름을 되찾아가고 꽃이 피는 계절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열대지방에 사는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부활절은 기후와 별 관계가 없고, 남반부에 사는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부활절은 추위가 다가오는 가을의 계절입니다. 우리같이 북반부에 살면서 4계절을 경험할 수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부활절이 봄과 함께 온다는 것은 하나의 축복입니다.

 

[신앙의 양극화]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고 이를 신앙적으로 되살려내는 주일입니다. 그런데 부활은 인간의 이성을 뛰어 넘는 신비와 초월의 영역 속에 있습니다. 누군가가 부활을 경험할 수는 있지만, 이를 우리 모두가 이해하여 받아들일 수 있는 이성의 논리로 설명해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동정녀 탄생과 더불어 언어와 논리로 풀어나가야 하는 설교가에게 있어서는 어려운 과제입니다. 성서가 증언하는 대로, 오늘 바울로 사도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하는 방식대로 누구누구에게 부활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라고 선포하면 되겠지만, 문제는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이러한 교회의 일방적인 논리에 대해 현대인들이 점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한 예로 5년 전 유전생물학자 리차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이 출판되어 지금까지 근 수십 만부가 팔려나갔고, 지금도 이와 비슷한 종류의 종교를 비판하고 무신론을 대변하는 책들이 끊임없이 번역되어 판매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종교서적은 덜 팔리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신앙서적 또한 예전에 비해 많이 팔려나가고 있습니다. 요즘은 개신교의 서적 보다는 가톨릭과 불교 서적들이 더 많이 팔려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양극화 현상은 경제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세계에서도 일어나고 있다고 봅니다. 최근 미국 사회를 보면 무신론자와 반종교인이라 할 수 있는 초월적 명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동시에 늘어나고 있습니다. 교회가 지켜온 어떤 교리나 전통에 매이지 않으면서 신앙을 가지려는 사람들과 신을 부정하는 양극단의 현상이 크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경향이 이미 남한에도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남한은 개신교는 분명 줄고 있지만, 가톨릭과 불교를 합하면 종교인의 숫자는 오히려 늘고 있고, 정확한 통계 자료는 없지만, 무신론에 관련한 책들이 팔려나가는 추세를 감안하고 반(anti)종교인들의 활동이 점점 거세지는 것을 보면 신앙의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부활의 역사성]

 

저는 예수 부활을 직접 경험한 적은 없습니다. 가끔 꿈속에 흰옷을 입은 서양인 모습의 젊은 예수를 본 적은 있지만, 그건 꿈속에 본 것이고 또 역사적 예수는 금발의 머리와 파란 눈의 서양 백인이 아니었으니 내가 본 예수는 진짜 예수가 아닙니다. 저는 부활 예수이든 역사적 예수이든 눈으로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공기를 눈으로 보지는 못하지만, 바람에 잎사귀가 흔들리는 경험을 통해 공기가 있음을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는 부활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믿음의 길을 걸어간 초기 제자들의 변화된 모습을 통해, 부활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이천년 전에 일어난 예수님의 부활을 여러분에게 증명해 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제자들은 모두 도망을 갔는데, 무슨 이유였는지는 모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예수를 전파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목숨이 아까워 3년을 동고동락하며 주님이라 고백했던 스승을 버리고 도망을 갔던 사람들이 다시금 돌아와 이제는 예수를 죽인 사람들을 향해 당신들이 죽인 갈릴리의 예수는 부활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죄를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십시오라고 소리를 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에 권력가들이 그런 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입을 틀어막고 때리고 감옥에 가두고 죽이겠다고 위협을 해도 그들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죽음이 두려워 도망을 갔던 제자들이 며칠이 지나지 않아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었는데, 그 이유를 저는 부활 예수 외에는 다른 방식으로 설명해 낼 수가 없습니다. 그게 한두 명이라면 정신착란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는데, 집단적으로 일어났고 그들이 인간의 역사를 변혁시켜 나갔는데 이를 예수 부활 이외에 다른 방식으로는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후 로마제국의 핍박 아래서도 부활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계속 늘어났고, 칼과 굶주린 사자 앞에서도 그 신앙을 지켜온 것을 보면 그건 분명 부활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20세기 들어 기독교를 박해하는 공산주의 국가들이 많았지만, 그 믿음이 계속 이어져 온 것을 보면 거기에도 분명 우리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한 개인이 예수 부활의 진정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이를 말할 수는 있지만, 세계사 전체로 본다면 예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부활 전승과 여성 제자]

 

그래 저는 오늘 예수 부활을 전함에 있어 부활을 믿으라고 강요하기 보다는 오늘의 본문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에서 전해 준 예수 부활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알아 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제목 또한 약간은 신학적인 냄새를 풍기는 요한공동체의 부활전승과 비틈이라고 붙인 것입니다. 우선 요한은 다른 세 복음서의 저자보다 더 분명하고 그리고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예수 부활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얘기는 토마라는 제자의 경우입니다. 부활 예수께서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셨는데, 이 자리에 없던 토마가 이 얘기를 듣더니 나는 직접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으로 만져보기 전에는 믿을 수가 없다.’고 예수님의 부활을 강하게 부정합니다. 얼마 후 토마에게 부활예수가 나타나서 몸을 만져보도록 합니다. 그러자 토마는 주는 하느님이십니다.’라는 성서 전체에 딱 한번 등장하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물론 여기서 예수는 닫힌 문을 열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옴으로 예수 부활의 몸은 육은 육이로되 우리의 육과는 다른 형태의 육신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요한복음은 다른 세 개의 공관복음서보다 후대에 씌어졌고, 예수를 바라보는 그 관점이 매우 다릅니다. 처음부터 예수를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로고스(말씀)라 말하고 이 신적 로고스가 육신을 입어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도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는 어떤 인간적인 고민이나 고통이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십자가 죽음을 통해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매우 정리가 잘 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4개의 복음서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부활의 얘기를 전하고 있는데, 그중 공통적인 것 하나가 있는데, 그건 첫 번째로 예수 부활을 목격하고 증언한 사람이 여성이라는 것입니다. 당시에 여성은 숫자에 포함하지 않는 남성의 절대적인 사회적 지위, 초대교회에서 남성제자들이 갖고 있었던 지도적 위치를 감안할 때, 여성을 예수 부활의 첫 번째 증언자요 목격자로 말하는 것은 상당히 파격적인 것으로 이것 하나만으로도 예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증언자가 여성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4개 복음서가 모두 동의하지만, 그 여성이 누구냐 하는데 있어서는 복음서마다 사람 이름도 다르고 숫자도 다릅니다. 그건 그 공동체가 갖고 있는 여성 지도력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에 등장하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마르코복음에 등장하는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다른 여자들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공동체의 각기 다른 여성 지도력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막달라 마리아는 빠짐없이 첫 번째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아예 이 막달라 마리아를 무덤가에 간 유일한 여인으로 말합니다. 이건 초기에는 여러 여성들이 서로 지도력을 나눠 갖고 있다 시간이 흘러 막달라 마리아로 집중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요한공동체만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막달라 지방 출신의 마리아는 누구인가요? 영화로도 나온 다빈치 코드나 최후의 유혹 같은 작품에서는 이 막달라 마리아를 예수의 연인으로 그리기도 합니다만, 마르코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일곱 귀신을 쫓아낸 여인으로 말합니다. 20세기 초 이집트 사막 지역에서 발견된 나그하마드라는 3세기의 기독교문서 중에는 토마복음서도 있고 유다복음서도 있는데, 이중에는 마리아복음서도 있습니다. 이 복음서에 따르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이해하는 일에 있어 남성제자들보다 매우 탁월하여 수제자라 일컬어진 베드로보다 앞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질투를 느낀 베드로에 의해 교회 주도권 싸움에서 밀려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4복음서에 나타난 막달라 마리아의 위치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유일한 여성으로 막달라 마리아가 언급되고 있는 사실을 감안하면 충분히 그러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2천년이 지났지만, 교단에 가보면 여전히 남성들만의 독차지입니다.

 

그런데 성서 특히 부활 기사를 보면 여성이 핵심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남성 제자들의 경우는 예수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고, 모두 도망을 갔던 반면, 여성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주위에 머물러 있었고, 부활의 첫 증언자와 목격자가 됩니다.

 

[부활전승과 지도력의 갈등]

 

그런데 오늘 요한복음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를 말하면서도 은근히 그의 여성 지도력을 폄하하는 장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은 누구누구인가요? 막달라 마리아와 베드로 그리고 다른 제자. 이 세 사람은 모두 요한의 시대에 교회의 지도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 부활을 두고 이 등장인물들 사이에 묘한 갈등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우선 막달라 마리아가 혼자 무덤을 찾았다가 그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보고 놀라 이를 알리자 두 명의 남성제자가 무덤으로 뛰어갑니다. 한명은 물론 베드로입니다만, 다른 한명은 예수가 사랑했던 다른 제자라고만 나옵니다. 이 제자가 누구인가? 복음서 끝에 가면 자신을 요한복음을 쓴 사람이라고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있고 전통적으로 이 제자는 사도 요한이라고 말합니다만, 21장이 후기에 첨가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신학자들 사이에는 다른 견해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베드로와 이 제자 사이에 묘한 경쟁 관계가 나옵니다.

 

우선 두 사람이 무덤을 향해 동시에 뛰어갑니다. 이는 주님을 향한 그리움의 마음이 동일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제자가 먼저 도착합니다. 이는 달리기를 잘 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 더 진했다는 것을 에둘러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도착했지만, 무덤에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무서워서 들어가지 않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당시 지도자로 추앙받고 있었던 베드로에 대한 예우 차원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먼저 들어가 빈 무덤을 확인하자 다른 제자도 따라 들어갑니다.

 

그런데 8절을 보면 묘한 구절이 나옵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들어간 건 베드로가 첫 번째인데, 베드로가 믿었다는 구절은 없고 다른 제자가 보고 믿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사실 여기서 믿었다는 표현은 예수 부활을 믿었다는 말로 해석이 됩니다. 아직까지는 마리아도 무덤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지 믿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다른 제자는 부활 예수를 직접 보지 않고 믿은 첫 번째 사람이 됩니다. 여기서 토마에게 하신 말씀,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말씀이 실은 은연 중 이 다른 제자에게 하신 것은 아닐까요. 이 다른 제자가 이 글을 쓴 장본인이니 이는 스스로를 은연중에 높이고 있습니다. 지도력 갈등 관계의 표현이 아닐까요?

 

요한복음 마지막 부분에 가면 부활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하시자 따라나섰는데 베드로가 뒤를 돌아다보니 거기 이 다른 제자가 뒤따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래 베드로가 예수께 묻습니다. ‘주님 저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께서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 베드로와 다른 제자 사이에 묘한 경쟁 심리를 읽을 수 있습니다.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여성이 빈무덤의 첫 증언자이면서 동시에 부활의 첫 목격자입니다. 루가복음에서는 첫 증언자는 여성들로 나오지만, 목격자는 엠마오를 내려가는 두 제자입니다. 그러나 한 제자의 이름은 글레오파라는 남성 이름을 언급합니다만, 다른 한 제자에 대해서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음으로 여성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루가복음은 다른 복음서들에 비하면 여성에게 훨씬 우호적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막달라 마리아는 빈 무덤의 증언자일뿐 부활을 처음으로 믿은 사람은 다른 제자임을 말하고 있고, 이후 마리아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부활 예수를 만나는 첫 목격자가 됩니다만 아쉬움이 남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마태오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여자들에게 자신의 몸을 만지는 것을 허락한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만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물론 아직 하늘 아버지께로 올라갔다 오지 않았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만, 이것 또한 남성 토마에게는 만지도록 허락을 하고 여성 마리아에게는 만지지 못하게 한 것 또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는 여성차별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품게 만듭니다.

 

결국 요한공동체 내에서는 예수 부활에 관한 증언을 통해 세 사람이 서로 경쟁 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예수 부활이 죽음을 이긴 신앙적인 오늘의 사건으로 이해되기 보다는 교회 내에 하나의 교리로 자리 잡아가며 누가 먼저 보고 믿었는가 하는 주장을 통해 교회 내의 지도력 경쟁의 한 방식으로 이용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의 비틈과 결과]

 

마태오복음에서는 예수를 처형했던 로마 군인들이 여전히 무덤 문을 지키고 있어 예수 부활은 십자가 죽음과 마찬가지로 국가통치 권력과의 암투를 계속 보여주고 있고, 마르코 복음에서는 부활 예수는 갈릴리로 먼저 가셨다고 말함으로써 제자들과 오흘로스 민중들에 의한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이 다시금 시작되고 있음을 선포하고 있고, 루가복음에서는 고향 엠마오로 돌아가던 제자들이 길에서 부활 예수를 만나고 나서 십자가 처형의 어둠의 세력이 지배하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등 어떤 역사의 반전을 말하고 있는 반면에 이보다 후에 기록된 요한복음은 이러한 관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점에서 요한복음이 예수 부활 전승을 비틀어 전하는 일에 일정한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당시 요한공동체가 처한 상황이 예수의 육성을 부인하는 영지주의와 싸움을 할 수 밖에 없어서 부활의 육성을 보여주는 얘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본래 예수 부활이 갖고 있었던 민중 저항으로서의 사회정치성이 거의 사라지고 하나의 개인 내면화된 믿음으로 축소되었다는 점이 불만인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대다수의 교회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이해함에 있어 이러한 요한복음의 해석에 머무는 경향이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 부활 사건이 개인의 영혼이 하늘의 어떤 공간으로 들어가는 심미적인 개인 구원 사건으로 축소되거나 아니면 삶과는 전연 무관한 교회의 전통 교리로 자리잡고 만 것입니다.

 

제자들이 부활을 경험하고 나서 가졌던 예수를 죽였던 불의한 세력에 대해 들고 일어섰던 진리의 외침, 역사의 약한 자, 눌린 자들이 주체로서 일어서고자 하는 역사 인식, 사회 변혁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외침도 없는 오늘의 대다수의 교회들을 보면서 이는 부활은 부활이되 잠자는 부활이요 죽어버린 부활이다라고 단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개인의 신앙에 국한한다 할지라도 진정 부활을 믿는다면 믿는 사람들이 병들까 걱정하고, 가난할까 걱정하고, 성공하지 못할까 걱정 근심하는 일에서부터 해방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활의 현재성]

 

부활을 믿는 자와 부활을 믿지 않는 자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미래에 어떤 일이 있을 것이라는 약속은 미래의 사건이지요. 그런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입니다.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하지만, 실상 우리에게 의미가 있고 뭔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은 현재뿐입니다. 우리는 흔히 희망과 미래를 말하면서 현재의 의미를 축소하여 마치 현재가 미래를 위해 존속하는 것처럼 착각하지만, 그러나 정작 우리가 뭔가를 할 수 있는 때는 현재뿐입니다. 저는 현재가 미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 모두가 현재를 위해 존속한다고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을 미래적 사건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옳은 이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주 총선이 가까워지면서 이명박정부의 사찰과 관련하여 그간 숨어있던 사실들이 하나하나 폭로되고 있습니다. 그럴 것이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언론 장악을 위해 힘없는 사람들을 협박하는 비열한 짓거리 곧 불법을 서슴없이 행해 온 권력자들을 보면서 저들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또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본래 권력의 속성이라는 게 그러긴 하지만, 그래도 민주정부가 들어선지 20년이 넘었으니 이제는 어느 정도 상식과 도의를 지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막가파식의 정치행태가 더 심화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나라는 언제나 상식이 통하는 나라가 될 수 있을는지 하는 의구심으로 참담한 심정입니다.

 

40년 전 미국은 이와 비슷한 워터게이트라는 사찰건으로 인해 닉슨대통령은 하야를 했고, 당시 국회의원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해임안에 찬성했습니다. 그건 정치의 유불리를 떠나 있어서는 안 되는 불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게 불법이냐 아니냐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향이 지금의 선거 국면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에 급급하여 이를 틀어막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예수 부활을 믿는 것과 이런 불의한 정치적 사건에 소리를 내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일까요? 당시의 권력가들은 예수 부활을 두려워했고 이를 억누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이런 소리를 반기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기독교인들이 사랑과 자선을 가르치고 실행하도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나 모든 것을 파괴해버리고 거기에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주는 사랑의 행위보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러한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불필요한 군사기지를 더 이상 짓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요? 악을 방조하고 나서 선한 일을 행하는 것보다 악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진정한 선이 아닐까요.

 

임보라목사께서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방해할 목적으로 적법한 절차에 따른 주민들의 동의 없이(1,900명 마을 주민 중 80명만이 참석. 그것도 대부분이 해녀들, 다른 주민들은 공청회 연락도 받지 못함.) 곧 불법으로 세워진 담벽을 돌로 깨고 다른 남자 전도사님 4명과 함께 들어갔다가 연행이 되어 하루를 유치장에서 지내고 나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정부가 하는 일을 방해하는 불법이라고 말하겠지만, 이미 정부가 불법을 저질렀고 이 기지가 평화를 위한 기지가 아니라 중국과 미국 사이에 전쟁의 불씨를 불러일으키는 기지가 되기에 이는 악에 대해 저항하는 선한 행동입니다.

 

영국의 위대한 설교가인 스펄전 목사는 길을 걸어가는 중에 새장 속의 새를 괴롭히는 불량 소년을 보았습니다. ‘그 새를 어떻게 할 적정이냐?’ ‘괴롭히다 죽이려고 해요.’ 스펄전목사는 얼른 2파운드를 주고 그 새를 사서 하늘에 날려 보냈습니다. 이틀 후 부활주일에 스펄전목사는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마귀는 인간을 마음껏 괴롭히다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독생자를 내주는 엄청난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더 이상 이 세상의 논리나 가치에 매여 있지 아니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자유인임을 선포하고 이 자유의 몸으로 이제는 나를 위해서가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이 땅 위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활은 십자가와 마찬가지로 믿는다고 하는 입의 고백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뒤를 따라 가는 행동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나 혼자만의 이익을 위한 삶을 살지 않고, 공동체를 위한 삶, 그것이 강도 만나 길에서 신음하는 한 명의 이웃이든, 1530일째 거리에서 농성중인 재능교육 해고자이든, 22번째의 희생자가 일어난 쌍용자동차의 노동 문제이든, 평화운동가들이 국가폭력에 의해 피를 흘리는 제주의 강정이든, 우리 사회의 모든 갈등의 출발인 분단의 문제이든, 원전을 포함한 지구 환경의 문제이든, 이기적 욕망을 뛰어넘는 보다 높은 가치를 위해 살아간다면 그게 바로 부활의 삶인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 민족의 부활을 염원하며 2012년 남북교회 부활절 공동기도문을 함께 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