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신앙과 나눔공동체

시 133:1-3; 행 4:32-35; 요한 20:19-26; 요일 1;1-7

[세상 정치와 하느님 나라 정치]


우리가 이 땅에 하느님의 정의 평화 생명의 바른 정치가 펼쳐지기를 위해 열심히 기도해왔으니 총선 결과에 대해 한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교우 여러분이 선택한 후보자나 당이 다 다를 수 있으니 선거 결과가 좋다 나쁘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애굽의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시키시어 저들로 하여금 하늘이 원하는 전연 새로운 인간 역사를 펼쳐나가시도록 인도하신 야훼 하느님, 그리고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시어 세상 권력가들을 비판하셨던 예수님을 우리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신앙에 비추어 볼 때, 서민 복지나 남북의 평화적 공존보다는 재벌들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한미FTA를 찬성하고 불필요한 제주해군기지 건설 찬성으로 중국과 미국의 각축을 불러일으키고 멸북적대 이념으로 분열을 조장하고 공포심과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새누리당이 다시금 과반이 넘는 제 일당이 되었다는 점에서 아직도 우리 국민들의 수준이 이정도 밖에 되지 않는가 하는 점에서 많은 아쉬움이 남는 총선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바라시는 하느님 나라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기는 어렵겠지만, 8개월 후의 대선에서는 세계 7위의 경제국가 4만불 국민소득이라는 사기성 공약을 남발하고 언론을 권력의 힘으로 장악하고 양심의 소리를 내는 선량한 국민을 사찰하는 그런 지도자보다는 사회적 약자의 인권과 서민 복지를 먼저 생각하고 진정한 참여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그리고 이 땅의 영구적인 평화를 위해 민족 주체의 자기 성찰과 품격 있는 대통령이 선출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부활절 두 번째 주일을 맞는 4개의 성서 말씀은 모두 공동체의 주제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흩어진 제자들을 하나로 묶어 세상을 이끌어가는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탄생케 했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부활 신앙은 단지 한 개인의 영생 신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욕심과 탐욕 경쟁으로 얼룩진 세상을 향해 무엇이 진정한 삶의 길인가를 몸으로 보여주는 나눔의 교회 공동체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평화와 용서의 선언]


요한복음서의 말씀은 이에 분명합니다. 부활예수가 처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어지는 말씀 또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평화 샬롬은 하나의 인사이면서 동시에 로마제국이 지배하는 차별 폭력의 구조 안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 그 목표에 대해 분명한 제시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하시는 말씀이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가 용서받을 것이다.’입니다. 용서는 반목과 시기로 인해 갈라지고 쪼개진 사회를 하나로 만들어가는 첫 번째의 길입니다. 용서의 능력이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부활 예수님의 선언은 당시로서는 매우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믿음에 따르면 용서는 야훼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었고 이 용서의 선언은 성전 제사를 통한 제사장만이 선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용서 능력의 선포는 예루살렘 성전과 율법에 매이지 않는 새로운 평신도 신앙공동체의 출발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의 여러 가지 상실 중에서도 우리가 가장 심각하게 느끼는 것은 공동체 정신의 상실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모두가 가난했지만, 이웃끼리 정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지금으로 보면 별 것도 아닌 음식이지만, 당시로서는 뭔가 특별한 음식을 한번 만들면 옆집에 이를 갖다 주는 심부름을 많이 했고, 가끔 뜻하지 않게 옆집에서 온 잔치음식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김장 김치를 하면 함께 모여 김치를 담구고 조금씩 나누었습니다. 음식 준비를 하다 뭔가 모자라면 시장을 가서 재료를 사오는 것이 아니라 옆집에 가서 얻어다 쓰곤 했습니다. 작년에 혹 여러분이 옆집 사람들과 나누어 먹은 적이 있다면 한번 손을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무너지는 이웃 공동체]


사실 저는 한 번도 없습니다. 제가 사는 사택은 모두 6집이 한 동에 옹기종기 모여살고 있는 빌라이니 잘만하면 매우 가깝게 지낼 수 있겠는데,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9년을 넘게 살고 있는데, 한 집은 정확하게 누가 사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두 집은 가족이 몇 명인지 확실히 모릅니다. 문이 맞닿아 있는 옆집과는 지난 겨울에 수도관이 얼어 물을 얻느라고 얘기를 해본 것 외에 대화가 전혀 없습니다. 간혹 차를 몰고 빌라 골목을 나오다가 걸어가는 사람을 보면 제가 도심으로 가니까 같이 타고 가지 않겠느냐고 얘기를 해보고 싶은데, 별 이상한 할아버지 다 있네 하는 반응을 보일까봐 그냥 지나칩니다. 실제 한 두 번 그렇게 얘기했다 퇴짜만 맞았거든요. 사실 저는 제가 그렇게 골목길을 걸어갈 때, 옆에 자가용이 지나가면 최소한 지하철역까지라도 같이 타고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거든요.


엊그제도 경기도 화성에서 살인강간사건이 생겼는데, 도와달라는 외침에 경찰의 허술한 대응은 물론 이웃사람들이 모른 채 한 것이 더 큰 사회적 문제입니다. 미국 뉴욕의 아파트 골목에서도 길에서 한 여인이 강도를 만나 도와달라고 소리를 쳤는데, 당시 이를 창문으로 내다본 십 여가구의 아파트 주민 중에 한 사람도 경찰에 전화를 걸지 않아 사회적 논란거리가 된 적이 있습니다. 이유인즉 경찰서에 전화를 걸면 나중에 증인으로 재판에 나서야 하는 일들이 귀찮아지기 때문입니다. 남을 돕는 사랑과 희생의 공동체정신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이 현상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지하철 버스 안에서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모임이나 회의에 가도 제각기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하거나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습니다. 엊그제는 지하철에서 건너편에 앉아 있던 한 젊은이가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자리에 우산을 놓고 내리기에, ‘어이 저기 우산’ 하고 손을 들어 얘기했지만, 이 친구가 귀에는 리시버를 꽂고 일어서서도 계속 스마트폰 화면만 들여다보더니 그냥 내리고 마는 것입니다. 부부가 잠자리에서 하루 일에 있었던 일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각자 페이스북과 트위터 검색을 한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조차 대화가 사라졌습니다. 바보상자라는 TV보다 스마트폰이 가정을 더 위험하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TV는 가족을 한 자리에 모아 놓기라도 했는데, 이제는 한자리에 앉을 기회도 사라진 것입니다.


인터넷 공간을 통해 새로운 이웃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이 이웃은 관심과 주제가 같은 사람들, 곧 자기들의 필요에 의해서만 만나는 이웃입니다. 자신이 드러내고 싶은 정보만 공개하고 나누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삶의 아픔이나 고통은 전연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누군지도 모르지만 아파하기에 무조건 도움을 베푸는 사마리아인의 희생적 사랑은커녕 옆집 이웃끼리도 삶을 나누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웃이라는 말 자체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자주 만나지 못하는 사촌보다 가까이 사는 이웃이 더 가깝다는 이웃사촌이라는 말은 국어사전에서만 등장하는 고전어가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의 구원 공동체]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역할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순간, 우리는 싫든 좋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한 구성원이 됩니다. 교인 등록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헌금이나 봉사와 같은 책임을 감당하지 않는다 하고, ‘나는 하느님은 사랑하지만, 교회는 싫어한다.’ 하며 예배 참석을 거부한다 해도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순간 그를 당신의 구원의 자녀로 인치시는데, 하느님은 구원을 사적으로 그만이 아는 방식으로 비밀스럽게 펼치시는 분이 아니라 교회라는 신앙공동체를 통해 구원을 펼쳐나가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면 가족이 없을 수 없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신앙의 가족이 없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교회를 다니다보면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만납니다만, 우리가 가족을 선택할 수 없듯이 교회 안에서의 형제자매 또한 선택할 수 없습니다. 만약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들만 만나고 대화를 한다면 그건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단체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신앙공동체는 아닙니다. 부활을 증언하는 공동체는 더욱 아닙니다.


시편 133편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오면서 절로 한 무리가 되자 기뻐하며 부르던 찬양입니다. “이다지도 좋을까, 이렇게 즐거울까! 형제들 모두 모여 한데 사는 일!” 오늘 여러분이 저 골목길을 들어오면서 이런 감격을 갖지 않으셨나요. “이다지도 좋을까, 이렇게 즐거울까, 향린의 형제자매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친교 나누는 일”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애처로워 하와를 만들었다고 합니다만, 아마 하느님도 외로워서 아담을 만들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함께 사는 일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고 일심동체를 노래하는 부부였지만 선악과를 따먹은 죄를 서로에게 떠넘겼고, 형 가인은 동생 아벨을 시기심으로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에서와 야곱 형제도 장자 축복권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다투었고,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요셉은 형들의 질투로 노예로 팔려갔다.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형제들 모두 모여 한데 사는 일 실제 살아보면 즐거운 일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툼도 있고 갈등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함께 모여 살아가야 합니다.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 고난과 역경은 함께 지고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된다는 것이 관계를 맺어가는 일이듯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나와 당신’(I and Thou)이라는 책을 쓴 신학자 마틴 부버는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고 말한다. 우리 모두는 창조주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음을 고백하고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관계 위에서 그리고 관계를 키워나가는 공동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이 전하는 말씀도 분명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그것을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목적은 우리가 아버지와 그리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친교를 여러분도 함께 나눌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작았을 때는 이 친교를 나누는 관계가 매우 끈끈하지만, 교인이 많아지면 전체를 담는 공동체 의식은 희미해지고 대신 조직이 이를 감당합니다. 그러다보면 세심하게 서로를 돌보는 자발적인 관계가 아닌 조직의 목표 달성을 위한 비인격적이고 의무적인 관계가 대신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그러다보면 사랑은 식어지고 불평과 비판만 늘어납니다. 여러분은 가족이 정말 가족이라는 생각을 품는 때가 언제인가요? 밥 먹을 때입니까? 아니면 여행을 함께 떠났을 때입니까? 제가 경험하는 것은 가족 중 한 사람이 아파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래서 가족이 그 병상에 둘러서서 손을 잡고 기도할 때입니다. 그때 비로소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기름과 이슬]


시편 133편은 바람직한 공동체를 향한 두 개의 그림을 보여준다. 첫 번째 그림은 ‘아론의 머리에서 수염 타고 흐르는, 옷깃으로 흘러내리는 향긋한 기름입니다.’ 출애굽기 29장에는 아론을 비롯한 제사장들을 임명하는 지침서가 실려 있다. ‘성별하는 기름을 가져다가 아론의 머리 위에 부어라 이렇게 너는 그에게 기름을 발라 일을 맡겨라.’ 기름은 하느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성가대의 아름다운 찬양이 울려 퍼지고 제사장 아론의 머리에 부어진 기름이 수염으로 옷깃으로 흘러내릴 때에 하늘의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참석한 사람들의 마음은 모두 따스함과 영혼의 풍성함으로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히틀러치하에서 그의 독재에 항거하며 형제공동체 실현을 위해 삶을 바친 본 훼퍼목사님은 이렇게 썼다. “어떤 사람의 됨됨이나 그만의 영성과 경건이 우리 공동체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형제됨을 결정하는 것은 그리스도 존재 자체이다. 그리스도가 그러했듯이 우리 또한 서로를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고 우리는 서로에게 하느님의 신비를 전해주는 거룩한 존재이다. 그리스도인은 그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해주는 다른 그리스도인을 필요로 한다. 그가 확신을 잃고 낙담할 때마다 몇 번이고 그에게는 다른 그리스도인이 필요하다. 그는 혼자서는 바로 설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이 본훼퍼목사님의 얘기에 동의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교회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나는 당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알리시기 바랍니다.


시편 기자가 그리는 두 번째 그림은 ‘헤르몬 산에서 시온 산줄기를 타고 굽이굽이 내리는 이슬’입니다. 헤르론 산은 이스라엘 북쪽의 2,700m 높이의 마치 백두산과 같습니다. 산에서 비박을 해본 사람이면 아침 이슬이 얼마나 강한지를 경험합니다. 마치 간밤에 비가 온 것 같습니다. 건조하고 황량한 유대 땅에 신선함과 영양분을 공급해주는 헤르몬 산의 아침 이슬은 땅의 풍성한 결실을 가져다줍니다. 모든 생물은 저마다의 성장의 속도와 각기 다른 열매를 맺습니다. 꽃은 저마다의 아름다움이 있어 이를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는 성령의 아침 이슬로 나날이 새로워지는 하나의 꽃입니다. 꽃들이 서로를 쳐다보면서 저 사람은 오늘 어떤 모습으로 피어날까를 기대하는 것은 신앙의 신비입니다. 가족이 지루할 수 없듯이 교회 구성원 또한 지루할 수 없습니다.


아론의 수염까지 흘러내린 기름은 서로를 하느님의 사제로 여기는 성도의 교제를 상징하고 헤르몬 산의 아침 이슬은 이 성도의 교제가 매일매일 새롭게 변화하며 성장해가는 기쁨을 상징합니다. 기름과 이슬을 노래한 시편 133편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그곳은 야훼께서 복을 내린 곳, 그 복은 영생이로다.“ 사람들은 천국에 가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설명해보라고 하면 마음껏 먹고 자고 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디 가서 한번 한 달만 그렇게 쉬어보실래요. 보통은 한 주도 견디지 못해 뛰쳐나올 것입니다. 영생의 축복은 형제자매가 함께 어울리는 일 바로 그것입니다.


[부활신앙과 공동체]


부활신앙이란 바로 이 영생의 축복을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4장은 영생의 축복을 누리는 자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명하십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전에 일러준 하느님의 약속을 기다려라.“ 이 약속은 성령강림의 약속이었습니다. 120명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할 때 그들은 성령을 받고 담대함을 얻어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단지 말로만 전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과 같이 ‘그 많은 시도들이 다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들은 놀라운 기적을 나타내며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신도들은 모두 하느님의 크신 축복을 받았다.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서 그 돈을 사도들 앞에 놓고 저마다 쓸 만큼 나누어 받았기 때문이다.’ 생활공동체로 살아간다는 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목표이지만,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 소유를 내어 놓는 일, 땅과 집은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아나바다 나눔 행사 하나를 해보아도 이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우리는 경험합니다. ‘이 물건을 내놓을 것인가, 말 것인가?’ 지금 당장은 안 쓰고 어쩌면 계속 안 쓸 수도 있지만, 그래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부활을 증언하는 일이요 부활을 증언한다는 일은 곧 자신의 육의 생명 이후의 또 다른 영원한 생명을 믿는 일이기에 세상 물질에 매이지 않는 것이야 말로 내가 예수 부활을 제대로 믿는지 믿지 않는지를 판가를 해주는 잣대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부활 공동체이기에 세상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리는 사람들의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만, 요즘은 어찌된 영문인지 세상 것에 더 집착하고 부자가 되고 오래 사는 것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여기는 오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성서의 말씀과는 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매해 국민소득은 조금씩 올라가지만, 동시에 자살자가 계속 늘어나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현재 남한의 자살자는 세계 최고 하루 평균 50명을 넘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부자로 만들어주겠다는 현 정권 이 들어선 이후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살이란 먹을게 없고 입을게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노숙자가 자살합니까? 아닙니다. 자살은 많은 경우 경제적 이유라고 하지만, 실은 혼자라는 외로움 때문입니다. 먹고살기가 힘들다기보다는 상대적 박탈감 때문입니다. 삶이 힘들어서 자살을 한다면 전쟁이 일어나면 사람들이 자살을 해야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결사적으로 살기 위해 애를 씁니다. 자살은 부자나라에서 그리고 평온할 때 더 많이 일어납니다. 사소한 문제에도 자살을 시도합니다. 왜냐하면 혼자 문제를 당하는 사람은 그 문제가 엄청 크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세계 최고의 자살률 배후 조정자?]


저는 세계 최고의 자살률 이면에는 남북대결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느 나라에서 지금 이 시대에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공개적으로 ‘주위에 수상한 사람을 발견하면 112로 신고하세요’라는 방송을 하는 나라가 또 어디에 있습니까? 이 방송을 들으면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눈동자를 돌려 어떤 놈이 수상한가 생각하게 만듭니다. 한 두번이 아니라 평생 이런 소리를 들으면 모두가 수상한 놈이 되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 신문에 난 조그마한 어촌으로 주말 여행을 갔었는데, 이른 아침 동네 뒷산에 올라갔다 숙소에 돌아와서 조금 있으니 경찰이 와서 마을 사람들이 저를 신고했다고 하면서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하더군요. 다시는 그 근처에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 입구에 ‘수상한 사람 신고하세요’.라는 현수막이 붙어 있었으니 그분들로서는 당연한 행동이었지요. 지금도 가끔 그런 구호를 봅니다만,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아는 이웃도 다시 보자.” 여러분 서로서로가 믿지 못하고 서로를 의심하도록 만드는 이런 사회가 정상적인 사회입니까? 비정상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비정상적인 사회를 정상적인 사회로 여기고 희희닥거리며 스마트폰이나 들여다보며 살아가는 그 나라 사람들은 정상인가요?


어떻게 해야 할지 저도 고민이 큽니다. 이렇게 하늘뜻이라고 선포만 하고 내려오면 다 되는 것인지. 그리 크지도 않는 교회에서 수년동안 예배를 드리지만, 이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고 설사 이름은 안다 하더라도 저 사람이 최근 무슨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지, 기도 제목은 무엇인지 전연 모릅니다. 사랑을 나누는 교회공동체니, 네 이웃을 내 몸과 사랑하라는 말씀은 공허한 메아리로 잠시 마음 한구석을 울리고는 사라집니다.


[공동체 영성 예배]


사실 공동체는 숫자가 많으면 어렵습니다. 예수님도 12명의 제자를 두신 것은 그들이 서로 공동체로 함께 움직여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저도 평화나눔공동체 소모임이나 성서마당을 진행해보면 12명 정도가 서로의 나눔을 진행하기에 적절함을 경험합니다.


지난 번 분가교회와 관련한 설문 조사에서도 나왔습니다만, 교인들의 가장 큰 요구는 다양한 예배를 통한 깊은 영성의 체험입니다. 영성이라는 말이 여러 가지로 이해될 수 있지만, 영성이라는 말 속에는 거룩함의 경험이 전제되어 있는데, 거룩함이라는 ‘카도쉬’라는 히브리 단어 속에는 색다름,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움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드리는 국악예배가 남한 교회에서는 거의 유일한 예배이지만, 아무리 좋은 것도 여러 해 반복하다 보면 새로움의 기쁨과 감격이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배 형식을 자주 바꿔서는 안 됩니다. 예배는 예전이 있어야 하고 이 예전은 계속 반복되는 전통의 경험 속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변화가 좋다고 예배 형식을 자주 바꿀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60년의 전통과 수백 명이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면 예배 순서 하나 바꾸는 것만도 여러 절차와 논의가 필요합니다. 현실적으로 순서 하나 빼고 첨가하는 것도 어려운데 전혀 색다른 예배를 경험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종종 옵니다만, 작은 교회에서는 집단적으로 다른 교회를 방문할 수 있습니다만, 저희는 불가능합니다. 이전에도 그런 교회 탐방 프로그램을 운영하긴 하였습니다만, 아무래도 교인들끼리는 한 두번은 가능해도 계속 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저부터 이런 공동체 영성 예배를 위한 일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난 해 당회에서도 논의를 조금 하였습니다만, 예배 공동체를 따로 만들어 특별한 예배 형식이 있는 교회를 방문하거나 자연 속에서의 침묵 예배, 걷기 예배 혹은 떼제 음악을 통한 색다른 예배를 계획할 수도 있습니다. 일 년에 서너번은 토,일요일 1박 2일 여정으로 천안이나 무안의 디아코니아를 비롯한 특별한 예배 처소를 방문할 수도 있습니다. 우선은 제가 부목사님들이 하늘뜻펴기를 하는 한 달에 한번 이런 모임을 주도해 보고자 합니다.


저의 목회의 목표는 여러분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대의 변화에 따라 교인들의 요구도 달라지고 있는데, 이에 목회 방식도 변화해가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오늘 제시하는 예배영성공동체는 구역을 대신하는 실험적 성격도 있습니다. 이 예배영성공동체의 목적은 단지 다양한 예배 경험뿐만이 아니라, 참여하는 분들이 하나의 나눔공동체, 오늘 사도행전 4장에서와 같이 모든 것을 나누는 그런 생활공동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아는 교인의 자녀가 병원에 입원했다고 할 때, 병원을 심방하는 신앙의 가족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따라서 형편에 따라 참석했다 안했다 하면 안 되고 여기에 동의하는 교인들은 1년 동안은 한 달에 한번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에는 참석한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저는 이것이 잘못하면 교회 안에 또 다른 작은 교회가 생길 수 있는 위험이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대기 무섭다고 장 담는 일을 포기할 수 없듯이 이를 충분히 경계하면, 이러한 신앙 운동은 교회 내에서 하나의 밀알이 되어 새로운 신앙의 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이다라는 확신이 있고 향린교인들의 성숙함은 이런 정도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안식년을 맞아 다른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면 그때마다 새로운 힘과 목회 비전을 얻게 되는데, 이는 교우들에게도 마찬가지 효력를 가져올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에 동의하시고 참여하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나가시는 길에 신청서를 내어 주시거나 교회 홈피에 이름을 남기셔도 되겠습니다.


끝으로 오늘 시편 시인의 노래를 다시 한 번 읽어드림으로 하늘뜻펴기를 마치겠습니다.


“이다지도 좋을까, 이렇게 즐거울까!

형제자매 모두 모여 한데 사는 일!

아론의 머리에서 수염 타고 흐르는,

옷깃으로 흘러내리는 향긋한 기름 같구나,

헤르몬 산에서 시온 산 줄기를 타고

굽이굽이 내리는 이슬 같구나,

그곳은 야훼께서 복을 내린 곳

그 복은 영생이로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