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안다는 것은?
시 23; 행 4:5-12; 요한 10:11-18; 요한일서 3:16-24


[목자와 목사]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편 23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오늘 요한복음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나는 ‘착한 목자’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부활절후 4번째 주일인 오늘을 착한 목자 혹은 선한목자 주일이라 불러왔습니다. 예수님은 착한 목자이시고 우리는 그를 따르는 양이라고 하는 비유적 표현은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듭니다. 저 예배실 뒤에도 윤임자권사님께서 그린 그림이 걸려 있는데, 목자이신 예수께서 잃은 양을 찾아 품에 안고 돌아오시는 저 그림을 볼 때마다 저의 마음은 평온해집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은 착한 목자요 우리는 양이라고 하는 이 관계 상징어가 오늘날의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고 있습니다. 목사라는 말은 소나 말을 친다는 의미의 칠 목(牧) 자에 스승 사(師) 자를 붙여서 만들어낸 용어입니다. 영어로 목사를 흔히 pastor라고 부르는데, 이 단어는 목장을 뜻하는 pasture에서 나온 말입니다. 저는 교인을 돌본다는 칠 목 자를 쓰는 것도 부담이 되지만, 거기다가 왜 또 스승 사 자입니까? 그냥 사람 인자를 써서 목인(牧人)이라고 하든가 아니면 목사를 흔히 하느님의 종이라고 부르니 놈 자(者)를 써서 그냥 목자(牧者)라고 하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을 합니다.


물론 지금은 제 나이가 60에 가깝고 햐얀 수염도 있어 그런대로 스승이라는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지만, 30대 초반에 스승 사 자는 상당한 짐이었습니다. 집사는 일 사(事) 자를 쓰고 있고 권사는 선비 사(士)자를 쓰면서 왜 목사만 스승 사(師)자를 붙였는가?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셨고,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의 고백을 ‘날마다 죽노라’ 하고 고백하였듯이, 사자를 붙일 바에는 차라리 죽을 사(死)를 붙이는 것이 오늘 말씀에도 부합하는 성서적인 표현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예전에는 목사들이 안경을 쓰는 사람이 많았기에 눈 목(目)자에 넉 사(四) 자로 해석하기도 하고, 때로 교회 안에서 부정을 저지르기도 하여 눈 목자에 죽을 사(死)를 붙여 눈이 죽은 사람이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미국에서는 직업적인 의미에서는 pastor라고 부르지만, 목사를 부를 때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pastor 라는 칭호 없이 그냥 이름을 부릅니다. 우리말로 하면 ‘헌정씨’ 이렇게 부릅니다. 일본에서도 목사라는 칭호는 있지만, 부를 때는 선생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선생이란 표현은 목사에게만 붙이는 특별한 칭호는 아닙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목사라고 부를 때에 거기에 스승이라는 높임보다는 단순히 칭호로 부르는 것을 알지만,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목자와 양]


그런데 목사의 사자가 스승 사든 선비 사든 일 사든지, 칠 목자 또한 부담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나는 착한 목자라고 하셨는데, 저는 착하질 않거든요. 그런데 저는 이것이 여러분에게도 부담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목자가 되면 여러분은 양이 되어야 하는데, 교인들 또한 양들이 목자를 따르듯이 무조건 따르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양은 겁이 많고 멀리 내다보지를 못합니다. 바로 앞 30센티 밖에 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목자가 앞장을 서서 가야 그 뒤를 따르고 다른 양들은 모두 앞서가는 양의 꽁무니만 보고 좇아갑니다. 반대로 소 떼는 뒤에서 워워 하며 몰아야지 앞에서 몰면 따르지도 않을 뿐더러 잘못하면 뿔에 받힐 수도 있습니다. 현대교회에서 목사와 교인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비유하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평신도교회를 지향하는 향린교회는 말할 것도 없지만, 요즘은 일반 교회에서도 목사가 앞서게 되면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다고 하는 비판이 많습니다. 전통을 중시하고 권위가 살아 있던 예전 시대에는 목사와 교인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표현하는 것이 그런대로 의미가 있었지만, 전통이 약화되고 권위가 사라진 포스트모더니즘의 현대 교회에서는 목자와 양의 관계보다는 목자와 소의 관계로 표현하는 것이 더 옳은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요즘은 광우병 때문에 소도 좀 문제가 됩니다만...


성서의 배경이 되는 유대민족은 본래 양을 치던 유목족속이었기에 저들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삯꾼 목자라는 것도 목자가 멀리 출타하는 경우 목자를 임시로 고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 이리와 같은 야생동물이 달려들 경우 자신이 다칠까봐 이리떼를 상대로 싸우지를 않고 도망을 가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담임목사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돈을 너무 밝히면 삯꾼 목사라고 비난하는 경우가 종종 생깁니다. 사실 목사가 정당하게 봉급 곧 삯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삯꾼 목사는 매우 불명예스러운 표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렇지만, 목사들은 교회 재정 문제에 말려들기를 싫어합니다. 물론 그럼에도 재정에 문제가 생기면 목사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왕왕 발생합니다. 재정에 관련한 발언을 하면 삯꾼 목사가 되고 반대로 발언을 피하면 무능한 목사가 되고 마는 모순 속에 살아갑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8년 전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이전에 동의하지 않는 주민들의 투쟁이 있었고, 이들의 정당한 투쟁에 저희 교회를 비롯한 평화를 사랑하는 많은 교인들이 동참하였습니다. 그때 대추리에 교회가 있었는데, 남아서 투쟁하는 교인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건물을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나갔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비어있는 그 교회를 예배처로 사용하려고 했는데, 이를 알고 그 교회 교우가 와서(물론 정부의 압력 때문이겠지만) 우리가 사용할 수 없도록 마루 바닥을 다 뜯어내고 창문을 부셔버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이거야 말로 삯꾼 교회가 아닌가? 잃어버린 양들이 있고 국가의 폭력으로 희생당하는 주민들이 있는데, 교회가 이를 놔두고 나가다니. 그래서 저희들이 남아 있는 교인들을 위해 천막교회를 세웠던 적이 있습니다.


[목자가 양을 안다는 것은?]


오늘 본문에 보면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잘 설명해주는 말씀이 오늘 본문 앞, 3절과 4절에 나옵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다. 목자는 자기 양들을 하나 하나 불러내어 밖으로 데리고 간다.” 목자와 양의 관계를 연구하던 어떤 목사가 하루는 목자의 옷을 입고 그 목자 목소리를 흉내를 내어 양들을 우리 밖으로 불러내려고 했는데, 양들이 꼼짝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시력은 약해도 청력은 매우 강한 것 같습니다.


목자들은 보통 200마리정도의 양을 치는데, 아침에 우리 밖으로 불러 낼 때, 그 문에 서서 하나하나 나오는 대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름을 부른다고 합니다. 저는 사실 최근에 등록하신 교우님들의 이름은커녕 얼굴도 모를 때가 있어 내가 정말 목사가 맞나 스스로 질문을 하게 됩니다. 어느 대형교회 목사님은 자동차에 주유를 하면서 주인에게 자기 교회 나오라고 전도지를 주었는데, 알고 보니 자기 교회 집사였다는 얘기도 있습니다만, 교인이 많아지면 이름은커녕 얼굴도 모르게 됩니다. 목자가 아닌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자들이 어떻게 양들의 이름을 짓고 그 양들의 이름을 다 기억할까요? 물론 양들의 특징을 보고 이름을 짓는데, 그 특징이란 다름 아닌 그 양이 갖고 있는 결점을 보고 이름을 짓는 것입니다. 점이 박혀 있으면 점박이, 한쪽 다리가 절둑거리면 절둑이 등등. 저는 처음 목회를 시작하면서 목자가 양을 알 때, 그 양이 갖고 있는 결점 곧 아픔을 통해 안다는 이 주석을 읽고 상당한 감동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사실 저는 그래서 여러분의 가정을 심방하는 것을 상당히 원합니다. 왜냐하면 가정 심방을 하면 교회에서만 알던 겉모습이 아닌 속사정, 곧 가정의 어려운 사정들을 알게 되고 그러면 저는 결코 잊어버리지를 않게 되고 기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심방을 하기 전에는 그분의 잘난 모습만을 보게 되지만, 심방을 하고 대화를 하다 보면 그분이 갖고 있는 아픔의 얘기나 기도 제목을 알게 됩니다. 안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 그것은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 아는 것이고 목자가 양을 아는 것 또한 양이 갖고 있는 아픔을 통해 아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부부가 하나 되는 것을 안다고 표현합니다. 결혼 전에는 알지 못했던 상대방의 결점을 알고 이를 나의 것으로 품어간다는 점에서 부부의 하나됨을 안다고 하는 것입니다. 동정(同情)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문자풀이로 보면 같은 마음을 품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공의 기쁜 소식을 나눌 때에 같이 기뻐하는 마음을 갖게 되지만, 왜 그런지 이때에는 동정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습니다. 사촌이 밭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성공의 소식에는 같은 마음이 되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반대로 실패하거나 아픔의 소식을 들을 때에 사람은 진정 함께 같이 아파하는 마음을 품게 되고 이때에 동정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우리가 서로를 안다는 것은?]


요즘 5월말에 있을 전교인수련회를 앞두고 준비위원들이 모여 계획을 짜고 있는데, 이분들이 주제를 [쉼과 소통 “나, 너, 우리”]라는 매우 짧고 강렬한 단어를 선택하고 주제에 관련한 성서 구절을 선택했는데, 그 구절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일서의 말씀입니다. 핵심 구절은 16절로부터 18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렸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나 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마음 문을 닫고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이 그 사람 안에 머물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우리는 말로나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


어제 제게 조금만 소포가 날라 왔습니다. 보니 양말 두 컬레가 들어있고 편지가 있는데, 어느 시골교회에서 건축헌금이 모자라 건축이 중단되었으니 도와달라는 호소였습니다. 모르는 교회면 이 정도는 지나칠 수 있고 크게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습니다. 때로는 자녀들의 병원비를 도와달라는 편지도 받습니다. 가끔 감옥에 있는 분들로부터 수술비를 도와달라는 편지를 받습니다. 한번만으로 그치질 않고, 향린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를 알고 있고 그리고 제가 누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두 번 세 번 편지를 보낼 때에는 무척 괴롭습니다. 그 외에도 이렇게 도움을 요청받는 경우는 매일같이 일어납니다. 그중에는 저희 교우들도 있습니다.


말로나 혀로만 사랑하지 말로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라는 사도 요한의 말씀이 제 가슴을 못으로 찌르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통장에 예금이 있으면서 자기 형제나 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마음 문을 닫고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이 내 안에 머물겠습니까? 하는 구절이 저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프란시스라는 청년은 이 구절에 양심이 찔려 아버지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다가 제재를 당하자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고 수도자가 되었다고 하는데, 사랑을 외치는 목사라면 그 정도는 아니어도 뭔가 희생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매일같이 자신을 향해 질문을 던집니다.


교인수련회가 이 구절을 주제 구절로 선택했다면 서로를 알아가는 방식이 자신의 약점과 상처를 드러내고 이를 위해 함께 기도하는 그런 방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쉬운 일은 아닙니다. 또 말이 아닌 행동과 실천을 하여야 하니 수련회가 끝난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는 그런 마음 나눔과 물질 나눔의 자리를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지 우리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입니다.


오늘 사도 요한이 말하는 형제자매는 같은 부모에게서 나온 혈육을 넘어 교회 공동체의 일원을 포함하여 말하고 있고 어쩌면 더 나아가 교회공동체의 일원은 아니더라도 함께 살아가는 이웃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세계 반수 이상이 하루 2천원 미만으로 살아가고 있고,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이 하루에도 수만 명에 달한다는 얘기도 하도 들어 이제는 무감각해져 있고 더욱이 이제는 형제자매지간에도 재산 다툼이 번번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잘 알다시피 우리나라 최고의 재벌 집안에서 형제간에 유산상속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형이 삼성 회장인 동생을 향해 상속을 독차지하려는 욕심쟁이라고 하자 동생이 형은 집안에서 내쫓긴 사람이라는 막말을 하는 상황으로까지 치닫고 있는데, 그런 얘기는 집안에서나 하는 얘기이지, 세상을 향해 그렇게 얘기하는 것은 자기 얼굴에 침뱉기나 마찬가지인줄을 왜 모를까요? 박정희정권 때 형이 재산에 탐이 나서 아버지의 부정을 청와대에 고발했던 일로 아버지가 집안에서 내쫓았다고 하는데, 그 형은 돈이 부자관계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는 가르침을 누구한테 배웠겠습니까? 학교선생한테 배웠겠어요? 목사한테 배웠겠어요? 이웃집 아저씨한테 배웠겠어요? 형은 아버지한테 배운 가르침을 아버지를 대상으로 한 것이고, 본인 또한 지금 그런 가르침을 따라 숨겨놓았던 유산이지만,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하면서 대법원 아니 헌법재판소까지 가겠다는 것 아닙니까? 하긴 세계적 기업 가운데 노조가 없는 유일한 기업이 삼성이고, 노조를 결성하려 하면 모든 수단 방법을 강구해서 이를 방해하고 있어 보통 독한 사람이 아닌 것은 알고 있었으나 뉴스에서 그런 얘기를 공개적으로 하는 모습을 보면서 몸만 병든 것이 아니라 그 영혼까지 병들었음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사망이라는 성서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삼성을 세계적 기업으로 일으켰다고 본인은 자랑스러워할지 모르지만, 겉으로 받은 것 말고 숨겨놓은 유산이 그것도 5천억원이라 이것도 수십 년 전 액수이니 오늘날로 하면 몇 십 조원에 가까운 엄청난 액수입니다. 나도 그 정도의 돈이 있다면 세계적 기업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회장님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이룩된 기업이지 자기 똑똑해서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젊은 여성의 몸으로 반도체 공장에서 수년간 일하다 암에 걸려 고생하고 죽어간 노동자들의 피 값으로 삼성이 세워진 것임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거 숨겨놓은 불법 재산이니 가족끼리 싸우지 말고 사회적 사회적나눔기금으로 몽땅 내놓아야 할 것입니다. 이전에도 감옥가게 생겼으니 내놓겠다고 해놓고 생색만 내고 지나갔던 적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 어떤 사람이 예수께 나아와 ‘선생님, 제 형더러 저에게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라고 부탁하자 예수께서는 ’누가 나를 너희의 재산분배자로 세웠단 말이냐?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사람이 제 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그러시면서 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부자가 많은 소출을 얻게 되어 이 곡식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있는 창고를 헐어 크게 짓자 그리고 거기에 곡식과 재산을 넣어 두어야지.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해야지. ’영혼아 많은 재산을 쌓아두었으니 너는 이제 몇 년동안 걱정할 것 없다. 그러니 실컷 쉬고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 그러니 네가 쌓아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하셨습니다.


[예수는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이번 주 화요일 5월 1일은 세계노동자의 날 122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노동의 가치를 바로 세우고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받도록 하기 위해 제정한 날입니다.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습니다만, 우리나라는 공휴일로 정하지도 않고 박정희독재정권시절부터 근로자의 날로 부르고 있습니다. 노동이란 말은 조상들이 예전부터 쓰던 말인데, 이 말이 북쪽이 즐겨 쓰는 말이라 하여 근로란 말로 바꾸었습니다. 북쪽이 쓰기에 우리가 계속 써왔던 표현마저 쓰지 않겠다는 것은 북쪽에 따라 남쪽의 입장이 휘둘리는 모양새가 되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북쪽이 어떻게 하든 남쪽이 바르다고 생각하는 일이라면 하면 되는 것이지, 상대방이 밉다고 그들이 하는 것은 하지 않겠다는 것은 미움에서 나온 일이니 결코 정당하다 말할 수 없습니다.


노동(勞動)과 근로(勤勞)란 말을 한자어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일을 뜻하는 노는 두 단어에 다 있습니다. 다만 하나는 살아 움직인다는 동을 쓰고, 다른 하나는 ‘열심히’라는 근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노동이라는 말은 일을 통해 삶을 추구한다는 의미가 있고, 근로는 그저 열심히 일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노동이라는 말 속에는 일을 하는 사람의 목적과 주체성이 드러나 있는 반면, 근로라는 단어 속에는 그저 열심히 일을 한다는 표현만 있지, 무엇을 위해 일한다는 목적도 상실되어 있고, 잘못하면 너는 일의 결과에는 관심하지 말고 무조건 시키는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하는 피동성 곧 고용주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런 글자풀이에서 본다면 당연히 노동이라는 말이 옳은 것이고 근로라는 말은 타당성이 거의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화요일이 노동절이라 공휴일은 아니지만, 노조에 속한 노동자들은 이날은 쉬면서 노동절 집회를 갖습니다. 그런데 제가 목사인지라 목사가 노동자의 반열에 들어가는지 안 들어가는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흔히 노동은 육체노동을 의미하지만, 요즘은 책상에서 노동자도 많고, 교수 노조가 있는 것을 보면 꼭 육체노동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면 노동자라는 말이 산업화시대에서 자본가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시작했으니 목사가 자본가인가 물어보면 이건 또 아닙니다. 그렇다면 노동자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목사 노조를 만들면 뭔가 이상해 보입니다. 사랑과 희생을 말하는 목사가 권리를 보장받기 위한 노조를 만드는 것은 이율배반이 되고, 또 제가 노동자라 주장하면 여러분은 저와 대척점에 있는 고용주 혹은 자본가가 되는 것인데 이것 또한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그래 제가 내린 잠정 결론은 목사는 노동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본가도 아닌 중간 얼치기이다. 그래 저를 비롯해서 여러 목사들이 자발적으로 세금을 내고 있지만, 다른 노동자와는 달리 기술훈련 혜택이나 실직수당은 목사라는 이유로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예수는 직업이 목수로 당시 사회경제적 시각에서 보면 정규직도 아닌 비정규직 노동자였지만, 그를 따르는 오늘날의 목사나 신부들은 노동자보다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전체로 보면 80% 이상의 목사들이 평균 50명 내외의 교회를 섬기고 있고 정부가 정한 최저생활비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밤에 취객들을 실어 나르는 대리운전자의 상당수가 목사라고 합니다. 혹 대리 운전을 하게 되거든 그 운전자가 목사일지 모르니 술 취했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고 내릴 때에 팁도 많이 주기를 바랍니다.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


끝으로 한 말씀만 드리고 제 얘기를 마치고자 합니다. 지금 남북관계가 매우 악화되어 있고, 일촉즉발의 위기의 순간입니다. 남에서는 북의 정권을 옥죄어 죽이겠다고 이전 정부가 세워 놓았던 모든 외교 관계를 끊고 군대에서는 김정일위원장의 얼굴을 사격표적지로 사용하는 비인간적인 훈련을 하여 왔고, 결국 이 때문에 연평도 사건이 생겼습니다. 그간 조금 자제하는가 싶더니 최근 북이 인공위성 실험을 하자 남쪽에서도 무슨 미사일을 공개하고 그 미사일이 김정은위원장의 집무실 창문까지 뚫을 수 있는 정확도가 있다고 하면서 미사일이 창으로 들어가는 합성사진까지 곁들여 방송을 하고 그 돈으로 농업개발을 하고 백성들이나 먹여 살리라고 야유조의 얘기를 이대통령이 했습니다. 그러자 북에서는 대규모 규탄집회를 열고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매우 강력한 언어로 현 정권을 향해 경고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엊그제 동경 남쪽 대사관 앞에서 조총련계에서 데모가 있었는데, 이는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합니다. 지금 남쪽 언론이 잠잠하고 있습니다만, 북쪽 상황으로 본다면 뭔가 터질 위기입니다. 물론 그래서 국지전이라도 일어나면 북이나 남의 정권 잡은 사람들이나 군대 집단은 모두 좋겠지요. 북은 새롭게 시작한 김정은 체제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어갈 것이고, 남은 이명박정권 임기 말에 계속 터지는 정권 핵심인물들의 권력형 비리 문제나 언론탄압 같은 문제들이 덮여 버리고 말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결국 애매한 백성들만 죽어가는 것입니다. 애써 영웅이라고 부르지만, 죽은 다음에 영웅이 되면 무엇 하겠습니까? 가족들이 영웅 칭호에 위로를 받나요? 국가 폭력이 저지르는 속임수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일에 속아 넘어가는 어리석은 인간들이 있습니다. 지금 광화문 근처에 가보세요. 여기저기 현수막들이 붙어 있는데, “제주해군기지는 나라의 주권을 수호하는 수문장”이라는 구호입니다. 이는 마치 전시작전통제권을 미국에다 넘겨주고 이는 나라의 주권을 수호하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미핵잠수함과 항공모함을 위한 기지를 건설한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데, 이렇게 국민을 속이고 있습니다. 또 625의 참상을 보여주는 사진을 일 년 내내 전시하거나 납북자 신고하라며 북에 대한 분노를 계속 키워가는 국민의식노예화 작업이 진행 중에 있습니다. 게다가 어제는 <북한 내남 위협 본때를 보여주자> <백배 천배 응징하자>는 선정 구호가 정체불명의 여성단체의 이름으로 새롭게 붙었습니다. 어느 사회에나 극렬주의자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지금 전쟁을 부추기는 미친 얘기를 하는데도, 이 나라 백성들은 거기에 대해 무감각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30센티 앞밖에 보지 못하는 양들마냥, 50센티 앞에 웅덩이가 있지만, 눈앞에 풀을 뜯어먹으며 한 발한 발 전진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 되는 것입니까? 일류 대학, 일류 기업 수많은 스펙들 새 스마트 폰, 새 차, 아파트를 비롯한 재산을 모아 놓았어도 그 생명이 끝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되는 것입니까? 전쟁은 많은 경우 우발적으로 일어납니다. ‘너 그러면 때린다.’ ‘어디 그럼 한번 때려봐.’ 그렇게 서로 어깨 싸움을 하다가 죽고 죽이는 전쟁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중학생들이 친구 죽이기 위해 괴롭히고 왕따 시키는 것 아닙니다. 반은 장난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죽음으로 끝나고 장난으로 시작한 가해 학생은 평생을 두고 후회하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국가는 국지전이라는 말로 백성들을 호도하고 있지만, 한반도와 같은 좁은 지역에서 국지전이라는 말은 일종의 속임수입니다. 한번 터지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본문에서도 우리가 보다시피, 권력자들은 본래부터 권력 외에는 관심이 없기에 온전한 사고를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백성들의 생명을 볼모로 잡아 자기 권력을 꾀하는 것 밖에는 다른 생각을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깨어 있는 백성들이 목소리를 높여야 할 때이고 특히 평화와 생명의 가치를 추구하는 종교인들의 사명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정말 ‘이대로 가면 큰 일이 일어납니다.' 내일 저녁 7시 종로 5가 기독교회관에서 모이는 한국교회협의회 화해통일위원회가 주최하는 긴급기도회에 많은 참석 바라며 계속하여 이 땅의 통일과 평화를 위해 기도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