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506_하늘뜻펴기 / 내 사랑 안에 / 임보라  
찬169장, 사망의 권세가 / 찬 85장, 구주를 생각만해도 (3,4절 무반주 합창), 국찬 235장, 주 내게 말씀하시니
사도행전 8:28-35 ; 시편 22:25-31 ; 요한의 첫째 편지 4:11-16 ; 요한의 복음서 15:1-8 (다함께 요한의 첫째편지 4:11-12)

[마음열기]


동영상 “이 사진을 보고 무엇을 느끼는가?(비우게 하소서2) ” 


5월은 여러 의미를 담은 달입니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 이웃종교의 축제일인 부처님오신 날, 오늘날까지도 계속 진행 중인 518민중항쟁 기념일이 있습니다. 올 5월18일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중 22번째로 이 설움 많은 곳과의 이별을 택하신 분의 49제가 있습니다. 
저희 교회는 여기에 더해 창립59주년기념주일과 전교인수련회 일정까지 있기에 달력이 이미 빼곡하게 차있습니다.
오늘 하늘뜻펴기의 여는 말을 대신하여 함께 본 동영상은 어떠셨습니까?
‘임보라 목사는 매번 하늘뜻펴기가 너무 무거워....’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만, 새 달 5월을 열면서 우리들이 무엇을 성찰하며, 또 무엇을 실천하며 살아야갈까를 되새기게 해주는 영상이라고 여겼기에 선택했습니다.
 
인디언 달력이라고 알려져 있는 것이 있지요. 본디 인디언Indian은 인도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Aboriginal people, 원주민, 선주민이 맞는 말입니다. 원주민 달력에서 5월은, 게을러지는 달(아시니보인 족), 구멍에다 씨앗 심는 달(동부 체로키족), 큰 잎사귀의 달(모호크 족, 아파치 족), 오래 전에 죽은 이를 생각하는 달(아라파호 족) 등으로 불립니다. 원주민들이 불이는 이름에는 지혜가 담겨 있어 여러모로 생각해 보게 하는데요. 한때 유행하던 원주민식 이름 붙이기(생년월일로 조합)를 해보니 제 이름은 ‘날카로운 바람의 전사’였습니다. ^^

[제대로 사랑 한번 해보자!]


대부분 이 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부르지만, 기왕 부를 바에야 ‘제대로 사랑해보는 달’ 이라고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사랑이야기 만큼 사람들이 귀를 쫑끗 세우는 이야기도 없고, 또 사랑 이야기만큼 흔한 이야기도 없습니다. 뉴스, 드라마, 소설, 음악, 영화, 심지어 사람들이 흔히 하는 뒷담화에 이르기까지 서로가 만나고 헤어지고 하는 이야기에 대해 사람들은 열광하고 때론 광분 합니다.
‘타자를 이상화’시키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보다 높은 가치를 매기며 느끼게 되는 로멘틱한 감정을 기초로 싹트는 것이 전통적인 사랑에 대한 해석인데요. 그런데 요즘과 같이 인터넷 매체가 발달된 사회에서는 또 다른 방식, 소셜네트워크인 SNS와 같은 매체를 통해서 보게 되는 사진, 프로필, 글 등으로 상대에 대한 상상력을 발동시키며 사랑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통적인 사랑의 방식 -일종의 신비감-과 비교해 볼 때,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많은 정보가 있어서 로맨틱한 끌림 자체가 약화된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일본에서 시작된 말이기는 합니다만, 취미활동에 적극적이나 이성과의 연애에는 소극적인 ‘초식남’, 연애를 포기한 여성을 일컫는 ‘건어물녀’라는 신조어가 생겼습니다.

이 흔한 사랑 이야기는 성서에도 반복됩니다.

대신 제 아무리 주변의 강요가 있다할지라도 일상의 연애는 내가 사랑하기를 포기하거나 소극적이어도 된다는, 그런 선택이 가능한 사랑이지만, 오늘 성서본문은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은 ‘?φε?λομεν(opheilomen)’ ‘마땅하다/해야 한다/must, ought to’라는 강제성을 띄고 있습니다. 이유도 분명합니다.
물론 여기 앉아 있는 분들이 모르는 새로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셨고, 제물로 삼으셨고, 성령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그러나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그분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은 사랑보다는 미움을, 용서보다는 다툼을, 하나됨 보다는 분열을, 진리보다는 잘못을, 믿음보다는 절망을, 빛보다는 어둠을, 자기를 버리기 보다는 얻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사랑할까? 어떻게 하면 서로 사랑하는 것을 마땅하다고 여기게 할 수 있을까? 살아생전 예수의 고민 또한 이것 아니었습니까? 이는 비단 종교인들만의 고민이 아닌 온 인류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생명-평화권은 사랑실천의 근본]

 
창립 60주년이 되는 내년을 준비하면서 기념사업위원회 산하 각 위원회가 여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만, 그 가운데 그동안 향린교회가 대내외적으로 발표한 정책과 선언을 검토하는 위원회에서 요즘 평화통일, 예배, 교육, 환경-농촌, 비정규직노동자, 성 소수자 등의 주제를 짚어보고 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구체적인 향린 활실천 선언문이 탄생되리라는 기대를 해봅니다. 
지난 주일에는 평화통일을 주제로 모여 강정구 선생님의 발제를 들었습니다. 여러 말씀 중에 [생명평화권]이 기본권인 자유시민권과 사회경제권 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생명-평화권은 인권의 핵심이며 다양한 진보영역 가운데 으뜸가는 영역이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1977년 한 프랑스 법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1세대 인권은 자유의 가치를 말한다면, 2세대 인권은 평등, 그리고 3세대 인권은 우애라고 했습니다. 이 우애에는 발전권, 평화권, 환경권, 인류의 공동유산에 대한 소유권, 커뮤니케이션의 권리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애, 또 다른 말인 사랑을 위해서는 다양한 권리들이 지켜져야 비로소 참 사랑이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말로만 사랑한다 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여기에서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무력이 동원되는 분쟁은 끊이지 않고 그 결과 많은 사람과 동물은 물론 자연까지도 살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사랑과는 정반대의 길을 꾸준히 걷고 있는 우리들 삶, 이 지구의 종말이 앞서 본 동영상처럼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아 보입니다.
우애를 실천하기 위한 국제법이 있다 해도 이 법들이 얼마나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때 무기력함을 갖게 됩니다.

적극적으로 비폭력을 실천하고, 모든 형태의 폭력을 거부하고, 특히나 가장 착취당하고 취약한 사람들을 향한 폭력, 아동과 청소년을 향한 폭력을 포함하여 신체적·성적·심리적·경제적·사회적 폭력 및 모든 형태의 폭력에 대한 거부해야 하며, 타인과의 공유를 위해 내 시간과 물적 자원을 공유해야 한다.

이는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이 평화 문화 건설을 위한 실천행동 선언을 위해 2000년에 한목소리를 낸 것인데 그 이후인 오늘날까지 여전히 착취를 당하던 사람들, 아동과 청소년, 그리고 위에 열거된 모든 사유의 폭력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국제법과 여러 가지 선언에 담긴 내용들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약자보호법의 정신과 맥을 같이 합니다. 임금체불하지 말고, 이자도 받지 말고, 저당물 잡지 말고, 안식년이 되면 노예를 해방하고, 땅 사용도 중지하고, 빚을 탕감해주고, 마침내 50년째 되는 희년이 되면 땅을 본래대로 돌려놓자고 했습니다. 토지를 매매하거나, 잉여재산을 상속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물신주의 사회와의 가름선을 확실하게 긋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미 기독교는 이러한 분명했던 가름선들을 모두 잃고 말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복음의 포도나무 가지 이야기는 다시금 하느님과 우리 사이만이 아닌 우리들 모두가 서로 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붙어있어라, 떠나지 말라’ 는 말씀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왠지 안도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스스로 하느님께 딱 붙어있어야 하는 것에는 열심을 내는데, 우리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는 크게 관심 없다는 것에 있습니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해봐야, 겨우 한집에 사는 피붙이들만 떠올릴까? 혹은 나 하나만 잘 붙어 있으면 나머지 피붙이들은 덩달아 잘 붙어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의 핵심은 ‘서로 사랑하라’에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 우리는 정작 잿밥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이죠.
13절로 이어지는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구절은 살짝 뛰어넘고서는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만 눈에 들어옵니다. 그 앞의 전제인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도 들릴랑말랑 작은 목소리로 읽습니다. 


[와락, 껴안아 주는 품이 되기 위해]


지난 사순절 특강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볼까요? 여러 주제들이 있었고, 그 주제들은 <사회적 폭력>의 문제를 신앙인으로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으로 향해 있었습니다.
오늘은 어린이주일이니 어린이도 생각해야겠고, 청소년들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버이주일이기도 하니 어버이도 생각해봐야 지요. 

아까 ‘제대로 사랑해보는 달’이라 하자고 습니다만, 청소년들과 어린이들 자살 소식이 끊이지 않습니다. 학교폭력 근절 대책이라고 정부에서 내놓는 안들은 왜 폭력이 학교 내로 퍼지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빠져 있습니다. 교사가 학생한테 맞았다는 자극적인 뉴스는 나오지만, 정작 왜? 그런 상황이 되었는지에 대한 진단은 없습니다. 무조건 학생들 탓을 합니다.

가정의 달이라고 부르짖지만, 정작 가정이라는 이름의 테두리로 묶여 있는 사람들이 왜 서로 돌아볼만한 여유조차 없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없습니다. 빼앗긴 여유, 부족한 나눔에 대한 원인분석이 빠지니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그 집 문제로만 치부되지요. 겨우 이벤트식 단합대회를 한번씩 하면서 맛난 것 먹고, 좋은 곳에 여행가는 것으로 서로 위안을 삼으며 넘어갑니다. 그래도 우린 가족이잖아! 하면서 말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서로 돌아보지 못한 채 아픔만 깊어지는 가정들을 보게 됩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아프고, 어른들은 어른대로 아프지만, 정작 서로가 왜 아픈지, 어떤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지 잘 모르고 삽니다. 그러나 제가 속사정을 들어보고 난 후 생각해보건데, 대개 아예 몰라서가 아니라 왜 아픈지를 돌아보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내 눈 앞에서 보이는 말과 행동은 내가 미처 보지 못한 수많은 일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결과를 담고 있는데 이 모두를 세세히 살펴보기에는 정말 너무 바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매일 봐도 알까말까 하는데, 하물며 일주일에 한번, 혹은 한 달에 한두번 보는 교우들끼리 서로 알아가며 돌아본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설사 매주일 만나다 해도 겉으로 보이는 것과 속에 담고 있는 것의 갭이 얼마나 큰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많은 주의력과 깊은 애정이 필요합니다. 


한 집 사는 가족들이 서로를 제대로 돌아보기 위한 해법 하나를 대보라고 한다면 저는 우리 이웃들의 트라우마를 헤아리며 그들의 아픔을 공감하는 기회를 갖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객관성을 겸비한 새로운 눈을 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정작 내 피붙이를 비롯하여 팔이 안으로만 굽는 사람들만 들여다보면 정작 서로가 안고 있는 문제의 실마리를 제대로 알기 힘들다는 말씀입니다. 아이들을 내 자식으로만 여기면 결코 보이지 않는 문제들이,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을 품다보면 내 아이를 한걸음 떨어져 새롭게 만날 수 있습니다. 부모도 마찬가지겠고요. 내 아이가, 내 부모가 어디 내 아이만 되고, 내 부모만 됩니까? 우리 이웃의 아이는 남의 아이이고, 독거노인은 남의 부모입니까? 
 

사회구조의 폭력에 의한 트라우마로 상처 깊은 이들을 다독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이를 실천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잘 알려진 정신과 의사인 정혜신 선생님이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 특히 어린이들을 어루어 만져주는 심리프로젝트인 [와락]을 통해 비정규직 노동자의 아픔은 그들만의 문제, 당사자 한사람만의 문제가 아닌 그 한사람을 둘러싼 모든 사람의 아픔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잘 알려진 얘기로, 정혜신 박사가 ‘늦게 와서 미안하다. 당신들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왔다” 몇 마디 했을 뿐인데도 ‘장대 같은’ 노동자들은 눈물을 쏟았다’ 고 하지요. ‘“공장 지붕에서 사수대를 하고 있을 때, 경찰이 물대포를 쏘면서 헬리콥터를 타고 들이닥치는데, 너무 무서웠습니다. 도망가고 싶었어요.” “그런 일을 당한 뒤 아내한테 화를 내고 아이들을 때리기도 했습니다. 내가 이거밖에 안되나, 그런 자괴감 때문에 너무 힘듭니다.” 자신을 소개할 때, 노동조합 무슨 간부다, 옥쇄파업 때 어떤 역할을 했다, 민주노총 지역협의회에서 어떤 직책을 맡고 있다… 이렇게밖에 말할 줄 모르던 남편들이 파업할 때 무서웠다고 얘기하며 눈물 쏟는 모습을 처음 본 아내들도 뒤에 앉아 함께 울었다.’는 이야기가 ‘고통을 외면하는 사회는 불행하다’는 제목의 하종강 선생님의 칼럼에 소개 되었습니다.


자녀들 역시, 학교에서 ‘아빠가 쌍용차에 다니는 사람 손 들어봐.’‘다행이다. 지금 공장 안에서 파업하는 사람들은 다 빨갱이들이다’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했는데, 향린교회 다니는 것만으로도 아직도 ‘빨갱이’소리를 들어야 하는 우리지만, ‘빨갱이’라는 단어가 담고 있는 그 무게는 쌍용차에 다니고 있는 아버지를 둔 친구들 가슴에는 큰 대못 몇 개를 박을 만한 아픈 말이었습니다.


해고노동자의 부인인 이자영(34)씨라는 분은 “내가 파업 일으켰어?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게 나 때문이야?” 소리 지르는 남편을 이해하면서도 더 이상의 죽음을 막겠다고 한진중공업으로 뛰어가는 남편을 원망하며, 평택을 떠나 있기도 하고 방황도 했다고 합니다.
“내가 일으키는 감정이 비판, 분석 없이 다 그럴 만하다고 수용을 받고 나니까 제 스스로 그릇된 생각들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었어요. 저도 저를 돌보려 노력 많이 했고. 그러니까 이제 다른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라고 말합니다. 
아직 홀로 움츠려 있는 이들에게 나오라는 말 대신 “찾아가겠다”고 전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나는 힘이 없는 상황인데, 사람들이 ‘힘내세요!’하고는 떠나버리는 게 전 너무 힘들었어요. 계속 숨어서 힘들어하시는 가족들에게도 저희가 찾아갈게요. 손 잡아드릴게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고통의 한 복판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였다는 고백입니다. 고통 속에서는 그 고통만으로 허우적대기 일쑤인데, 그 고통 속에서 다른 생명으로 관심이 확장되었다는 고백은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이렇게 [와락]을 시작으로 장기적 투쟁현장에서 직면하게 되는 여러 상황에서 얻게 되는 트라우마의 치유, 그리고 이 사회 속에서 또아리를 틀고 있다가 덤벼드는 다양한 폭력, 상실, 차별, 편견으로 인한 상처를 어루만지기 위해 트라우마 치유센터 ‘사람.마음’도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마음’에서는 폭력, 상실, 차별, 편견으로 인한 마음의 고통은 ‘정신질환’이 아니다! 라고 해방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비우게 하소서]


다시 질문해 봅니다.
어떻게 사랑할까? 어떻게 하면 서로 사랑하는 것을 마땅하다고 여기게 할 수 있을까?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대안은 무엇인가요?

기독교가 이렇게 욕을 먹는 시대가 또 오겠나 싶을 정도인 요즘, 하느님의 말씀을 쫓아 산다는 우리는 사랑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하시는 그분께 무어라 말씀드려야 할까요? 


어린이주일, 어버이주일에 절대로 읽혀지지 않는 말씀이 있지요.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의 축복도 백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마르코 10:29-30)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가 14:26)


내가 비록 매일 호의호식 한다해도, 종종 누군가에게 시혜적인 사랑을 베풀면 그 정도로 되는 것 아닐까? 라고 누군가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옵니다.
서두에 본 동영상의 나레이션대로 불쌍하다고 생각할게 아니라 미안하다는 맘을 갖기 위해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비워야 하는 걸까요?

내 형제를 아프게 했습니다.
내 자매를 울렸습니다.
내 자식을 굶주리게 했고,
내 생명의 동반자들을 학대했습니다.
그러한 제가 통렬히 참회하게 하소서.


아프게 하고, 울리고, 굶주리게 하고, 학대한 그래서, 참회해야 하는 무리들 중에 내가 있습니다.
'난 그런 적 없습니다, 난 억울합니다! '가 아니라 간접적으로, 암묵적으로 동참한 일에 대해 참회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거듭남의 의미를 이해하고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몸으로 느끼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어라.’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편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너에 의지해서만 내가 존재한다는 관계의 삶이
생명평화의 길이라는 생각을 가슴에 새기십시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때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는 진리를 마음에 새기십시오.
그물코처럼 얽혀 존재하는 생명의 실상을 생각하십시오.


상대를 존귀히 여기며 절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면서
삶의 예배를 이어가십시오.


한주간도 당당한 하느님의 사람으로 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