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 59주년 기념주일

아름다운 관계가 세상을 구원하는 헤세드이다

시편 98; 사도 10,44-48; 요일 5,1-6; 요한 15,9-17

 

이 해 학 목사

 

 

 

창립59주년을 맞이하신 향린교회 교우 여러분들에게 하느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길 빕니다. 호주에서 한 백인 여자의사가 참사람 부족이라는 원주민을 만났습니다. 그 원주민들은 그 백인 의사를 무탄트라고 부릅니다. ‘변종이라는 뜻입니다. “참사람부족은 자연과 더불어 호흡을 하지 못하고 자연의 운행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의 성품을 닮은 인간들끼리 서로 다투고 경쟁하고 싸우고 죽이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반역이요 모독인데 이런 일들을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변종들이 지구촌을 점령하여 오염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더 이상 참사람부족이 살 수 없는 세계가 되었으며 후손들이 신음하며 고통을 겪는 비극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서 자녀를 낳지 말자는 결정을 하더라는 겁니다. 마르간 모건의 무탄트의 메시지란 책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변종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아니 광란의 시대를 사는 겁니다. 남쪽에 사는 사람들은 피부미용과 살빼기, 꽃미남과 미녀 만들기 성형수술, 별의별 강장제에 삶의 무게를 싣고 사는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몇 백 킬로만 북으로 올라가면 우리 동족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고통 속에 있는 북쪽의 형제자매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것을 자기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이 한 가지 착각 때문에 이기주의적 향락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구의 영향입니까?

 

그 시대의 문화는 주류 종교의 가치관이 책임지는 것입니다.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조선시대에는 유교가 그 시대의 중심 가치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종교가 썩으면 그 국가가 함께 썩어 망하는 것을 역사가 증명합니다. 오늘 우리시대의 주류 가치인 기독교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크고 화려한 교회, 웅장하고 성령운동을 하는 교회는 많이 있지만 그 교회들의 공통점이 역사의식과 정의감 그리고 공동체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고통의 현장, 고난 받는 현실과의 관계가 없습니다. 이런 교회는 금송아지 앞에서 흥분의 도가니에 휩싸여서 모두가 함께 벌거벗고 춤추는 미신에 빠집니다. 자신들에게는 길을 갈 수 있는 능력이 없고 오로지 이 송아지가 우리의 길을 안내할 것이라는 뜨거운 믿음으로 광분했던 사람들에게 모세의 십계명 돌 판이 떨어졌을 때 미신과 우상의 환상은 깨지게 됩니다. 그리고 온 교우들을 동원해서 쌓은 바벨탑교회는 결국 혼란으로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선지자들이 경고하고 싸운 바벨탑의 우상적 신앙으로 교우들을 몰아내고 있습니다. 그 말은 반생명적 문화를 조장하는 진원지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통로를 막고 역사를 거꾸로 돌리면서 넓은 길로 자랑스럽게 가는 한국교회의 모습에서 무탄트 교회, 진리의 변종을 보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우리 향린교회가 있는 것은 정말 소중한 일입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이 시대에 이런 교회를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변종의 시대에 깨어있는 향린교회 여러분들의 고통과 애로를 생각합니다. 우리 목사님께서 청계천에서, 시청 앞에서, 평택 대추리에서, 용산에서, 제주 강정마을에서, 쌍용 자동차회사 앞에서 늘 고난 받는 현장에 동참하시는데 교우로서 따라 갈 수도 없고 따라가지 않을 수도 없고 해서 마음이 불편하고 생활에 쫓기면서 힘드시지요?

 

그리고 또 이 교회가 늘 사회적 약자나 역사를 바로잡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 장소로 쓰이고 세상에서 손가락질 받고 신문이나 언론에서 부정적으로 표현되는 그런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것이 좀 꺼림직한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것뿐입니까? 교인들이 사찰을 당하고 도청당하고 학교에서 불이익을 당하고, 해고되고, 군대에서까지 향린교회 다니는 이유로 잡혀가고 하는 고난의 가시밭길 속에 있는 이 교회가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몰려올 때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역사 변화에 도전하며 참여하는 향린교회 성도로서 힘들고 피곤한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좁은 길로 가라 그것은 생명길이다.” “넓은 길 부러워하지 말라 그것은 곧 죽음의 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이름 때문에 너희가 비방을 받고 고난을 당 할 때 기뻐해라 모든 예언자들이 그런 길을 걸어왔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향린교회 성도 여러분들! 참 잘 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좁은 길을 걸어가는 거룩한 성도들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요한복음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 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벗이라 부르겠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를 택하셨는데 그 이유는 우리를 벗으로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벗이란 무엇입니까? 친구이며 동반자입니다. 함께 길가는 사람이요, 생사고락을 나누는 존재입니다. 책임을 함께 지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종은 벗과 다릅니다. 종은 자기가 없습니다. 자기 삶의 목적도 자기 성장도, 자기 자주성도 없습니다. 늘 계급관계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시키는 대로 일하는 존재입니다. 자기를 책임지지 않는 의존된 존재요 결코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지 못합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좋은 교회는 어떠한 교회인가요? 훌륭한 목사님을 따라 모든 신도들이 땅 끝까지 같이 가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 한사람들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들을 교육시키고 훈련시킨 목사가 훌륭한 목사입니다. 목사님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창의력을 가지고 사회와 세계에 대하여 책임을 지며 고난에 동참하면서 성장을 해야 합니다. 다가오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주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고 위기에 대처할 능력을 배양시켜주는 교회가 훌륭한 교회입니다. 성도들이 권력과 고난, 운명에 굴종하지 않고 창조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능력과 믿음을 키워주는 교회가 훌륭한 교회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을 한 사람 한 사람, 소중하게 안아서 그들이 자유인이 되도록 하는 것,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자기가 살고 있는 자기 삶의 터전 세상을 정의로운 세상으로 바꾸는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여기에서 감응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가치관이 다르기에 성령 안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다릅니다.

 

교회의 생명공동체 됨을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 내가 온 것은 생명을 주려하고 그 생명을 풍성하게 하러 왔다.”(10) 라고 말씀하셨는데 생명관계는 서로의 소리를 들어주고 이름을 불러주는 것입니다. 아픔과 기쁨, 슬픔, 외로움의 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 겁니다. 그 사람의 독특함, 그 사람의 가치, 하늘이 준 존엄성을 가진 그의 이름을 불러주면서, 서로 믿고 서로를 살려가는 관계, 이것이 생명관계입니다.

 

우리 교회가 거대한 건물을 짓지 않아도 좋습니다. 큰 재산을 확보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많은 신도들이 모여들지 않아도 좋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서로와 서로를 바라보며 하느님께서 보내준 소중한 사람으로 서로를 살려주는 기운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맞이한다면 우리 안에서 생명의 희열인 기가 뿜어 나옵니다. 그것이 기쁨이며 성령의 감동감화입니다. 성도의 기쁨은 소유나 쾌락이 주는 행복, 오감의 만족이 주는 행복(Happiness)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바른 길을 가는 자부심과 그 나라의 큰 뜻을 따르는 기쁨(Joy)인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의 기쁨이 터질 때에 우리는 새 노래로 노래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현상이 주님과 소통하는 깊은 내면의 묵상이나 기도 속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우리 서로가 서로 속에서 불가능한 것이 가능하게 하고,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이루어지게 되는 기적을 경험하면서 온 몸이 전율하는 가슴으로 통하는 그 힘, 신비한 에너지를 봅니다. 저는 그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말해왔습니다.

 

이런 성령의 역사는 개인에게서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도 변혁의 힘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리나 사도신경을 외워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심령 안에 진리의 울림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감응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체험을 통해서 세상 또한 변화가 옵니다. 역사적으로도, 문화 속에서도, 그러한 울림이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역사, 오천년 이상을 지켜온 많은 전쟁 속에서 우리 민족이 백의민족으로 홍익인간 정신을 안고 내려올 때까지는 그 많은 울림을 주는 선각자들이 있었고 그 선각자들과 함께 이 세상을 서로 상생의 세상으로 만들어가는 조상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배달민족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90년에 베를린에 갈 때 비행기 안에서 허준에 관한 책을 읽었습니다. 허준 이야기에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허준은 자기의 신분을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자격시험을 보러가는 중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병을 고쳐달라는 어떤 사람의 부탁을 받고 인술을 행하느라 지체를 합니다. 저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의 성공의 기회를 포기하는 허준에게서 하느님을 보았습니다. 허준에서 진정한 사랑을 보았고 참 사람을 만났습니다. 허준의 생명을 위한 관계 맺음에서 저는 하늘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빅터 유고><레 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은 은촛대를 훔쳐서 다시 감옥에 갈 위기에 처했을 때 금촛대를 주면서 그를 격려한 신부님에게서 하느님을 봅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당신들이 나를 판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을 살리기 위해, 나를 에집트로 보내기 위해 당신들을 이용한 것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하느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참 사람이 되는 것은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 줄기에 붙어있는 것 같이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하느님께 붙어 있을 때 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붙어 있으면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나무는 선악을 구별하여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열매를 맺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누구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좋아서 신이 나서 감사해서 기뻐서 하느님께 붙어 있는 것입니다. 붙어 있는 것이 사람이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가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 사람이, 참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참사람의 자리를 회복하는 그러한 신앙운동이 지금까지 우리 교회의 선각자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습니다. 그런데 내가 참사람으로서 사람을 하느님같이 대접하는 바로 그 순간에 우리들의 변화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섭리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역사 속에서 우리 교회를 통해서 섭리하고 계신다는 확신을 갖습니다. 이것이 헤세드입니다. 헤세드는 하느님의 자비, 은혜, 긍휼과 더불어 하느님의 섭리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룻기 2) 헤세드는 관계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랑, 자비, 긍휼, 하느님의 섭리를 의미합니다.

헤세드는 구약성서에 잘 나오는 말인데 자주 놓치는데, 그냥 해석하면 하느님의 자비, 은혜, 긍휼, 인애 이런 말을 표현하는 또 다른 용어입니다. 룻기 2장에 보면 잘 나옵니다. 나오미는 네가 이렇게 떠나지 않고, 보아스한테 가서 대접을 받는 것이 은혜다! 하느님의 은혜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똑같은 말을 룻은 헤세드라고 고백합니다.

 

헤세드는 관계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랑,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비,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긍휼,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은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며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세계 여기저기에 있는 대형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뜨겁게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바치는 기도가 무슨 기도인가를 보면 거기에는 역사성이 없고, 관계가 없습니다. 사람과의 관계, 사회와의 관계, 세계와 관계, 자연과의 관계가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만을 위한 이기적인 기도는 외식하는 기도가 됩니다.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듣기 역겨워하는 기도가 됩니다. 관계 안에서 구체적으로 바쳐지는 기도에 하느님께서 역사하십니다.

 

4?19 의거가 김주열에게서 폭발된 것도 그렇습니다만, 제가 직접 참여했던 YH해직 노동자 투쟁도 그렇습니다. 장사장이 가발공장으로 돈을 많이 벌고 그 돈을 해외로 빼돌리면서 노동자들을 해직하려고 했을 때, 문동환 박사님을 통해 김영삼 총재의 마포사무실로 갔습니다. 그들이 민주당사에서 농성을 하자 경찰들이 진압하는 과정에 김경숙이라는 아가씨가 추락을 하였습니다. 비로소 꽁꽁 얼어 붙어있던 언론들이 폭발을 하면서 그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그로 인해서 김영삼 총재가 자격정지등의 처분을 받았습니다. 연이어 부산 마산에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불안해진 박정희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로 하여금 부산지역을 시찰하게 하였습니다. 시찰을 마친 김재규는 세상의 변화를 인식하였으며 변화를 방해하는 독재자 박정희를 저격하였습니다. 결국 그 시대에 많은 언론 종교, 공무원 모든 체제는 이 악한 독재자를 보호하고 지원하는 조직으로 다 동원이 됐습니다. 이 노동자들은 이 조직에 비하면 정말 아무 힘도 없는 개미 같은 존재에 불과했습니다만, 그들이 진심으로 자기 문제를 보고, 그리고 이 세상의 죄악의 문제에 접근했을 때 그들은 독재를 끝장내는 하느님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모든 문제들이 우리가 누구와 무엇하고 관계를 맺느냐가 우리의 삶을 결정한다고 믿습니다. 세상에 가진 사람과 힘 있는 사람과 관계하느냐 아니면 참다운 새 하늘 새 땅의 신앙과 신학, 희년의 철학을 가지고, 함께 정의와 평화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생명공동체의 관계를 만들어 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파트너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자주성이 있고 평등성이 있고 창의성이 있고 열린 관계를 가지고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인간관계가 피상적인 관계가 아니라 깊이 있는 관계를 통해서 우리가 새로운 삶을 창출해 내는 겁니다.

 

우리는 죽은 물고기가 흐르는 물에 떠내려가 듯 이 세상이 준 문화에 휩쓸려서 같이 내려갈 것이 아니라 물을 차고, 거슬러 올라가는 살아있는 물고기같이 살아 왔습니다. 우리 공동체의 문화를 만들고, 우리의 춤도 만들고 우리의 행진을 해가는 그러한 생명공동체 문화를 우리가 만들어 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런 그 공동체에 온 몸을 실어서 우리의 기백을 높여감으로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는 그런 향린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벗이라 부르겠다.” 하셨습니다. . 감격스럽습니다. 저희를 당신의 생명의 파트너로 불러주시니 이를 감당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