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교회로서의 향린

시편 1; 행 1:15-17, 21-26; 요일 5:9-13; 요 17:11-19


시편 1편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좋아하는 시입니다. “복되어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며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아니하고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를 사람. 그에게 안될 일이 무엇이랴?”


우리 모든 신앙인들이 바라는 것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그건 복을 받는 것이고 그 복이란 다름 아닌 하는 일마다 척척 잘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말하는 복 그것은 부를 남보다 많이 소유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 부란 것은 전체 규모가 한정이 되어 있어 누군가가 많이 가지면 누군가가 적게 갖게 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치 부풀어 오른 풍선과 같아 한쪽이 튀어 나오면 그 반대쪽 어딘가는 들어가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양쪽 다 같이 부풀어 오르면 좋겠는데, 그게 한계가 있어 터지게 마련이라 임계점에 다다르면 뺏고 빼앗는 경쟁을 통해서만이 욕망이 충족되는 것입니다.


경제학자들은 그 임계점이 국민소득 2만 불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2만 불까지는 그런대로 서로서로 잘 사는 것이 가능한데, 그 다음부터는 상대방의 것을 내가 뺏어 먹는 경쟁이 아니면 더 이상의 욕망 충족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경제규모가 커지더라도, 세계라는 시각에서 보면 그건 제 살 깎아먹기요 빈부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 한쪽에서는 파티를 계속 열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계속 자살하는 사람이 늘어가는 부조리가 일어나게 됩니다. 수천 명의 해고자를 불러오고 22명의 자살자를 불러온 쌍용자동차가 신규채용을 하면서도 약속했던 해고자의 복직이 안 되는 이유도 그런 것입니다. 신자유라고 불리는 오늘의 자본주의 사회는 대상만 달라졌을 뿐 누군가의 희생을 필요로 하는 부조리한 사회가 된 것입니다.


[미국과 남한]


OECD 국가 중 소수의 부자들이 부를 차지하는 편중률이 가장 높은 나라가 미국이요 그 다음이 남한입니다. 이 말은 미국이 불평불만이 가장 높은 나라라는 말이요 가장 불안정한 나라라는 말입니다. 다른 나라에 비해 시위가 적어 평온한 듯이 보이지만, 실은 그건 겉의 모습이 그러할 뿐이고 총기살인이 제일 높은 나라가 미국이고, 감옥에 있는 죄수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가 미국입니다. 비율이 아닌 숫자로 따져도 미국은 죄수가 가장 많은 범죄국가 중 하나입니다. 20년 전에는 19세에서 25세 사이의 흑인 남성 중 대학생 숫자보다 감옥 안에 있는 숫자가 더 많다는 얘기를 했는데, 지금은 LA 같은 도시의 경우 아예 흑인남성 19세 이상 30세 미만의 인구 중 절반 이상이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 아닙니까?


이는 미국사회가 갖고 있는 부조리한 사회경제체제를 말해주는 결과이지, 흑인들이 인종적으로 백인들보다 더 과격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많은 경우 흑인들이 손쉽게 돈을 버는 방법으로 마약을 취급하는데, 그 수요자는 주로 백인들입니다. 뉴스에서는 컬럼비아나 멕시코 같은 나라를 마약범죄가 높은 나라라고 하는데, 사실은 고가의 미국 백인들의 수요가 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요를 단절시키면 공급은 자연히 줄어들기 마련인데, 공급이 많아서 수요가 줄지 않는다는 억지 논리로 먹고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남미의 농민들을 범죄자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않는다고 하는데 지금 남한은 뭡니까? 이런 범죄 국가 미국을 사모하고 짝짝꿍하여 전시작전통제권 다 내주어주고 해군기지 지어주고 자유무역이라는 교묘한 이름으로 경제주권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세계 최강 미국은 제 살길 찾기 위해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데, 이를 경제용어로 바꿔 말하면 FTA입니다.


요즘 다시금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병하여 시청 앞에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모임이 시작했는데, 소고기 수입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보통 8개월정도 된 소고기를 먹습니다. 그때가 제일 고기 맛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로 수입하는 2년 넘어 30개월에 가까운 소들은 젖을 짜기 위해서 혹은 새끼를 낳기 위해서 기르는 소들입니다. 미국사람들은 질기고 맛이 없다고 먹지 않는 고기입니다. 예전에는 주로 애완용 동물들의 먹이감으로 소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게 돈이 되는 것입니다. 그중 우리가 제일 만만한 겁니다. 설렁탕 곰탕이라고 해서 국물로 해서 먹으니 좀 질겨도 상관없습니다. 게다가 창자는 같다가 순대 만들어 먹지, 발바닥은 갖다가 우족탕이라고 해서 먹지, 무릎뼈, 엉덩이뼈 갖다가 감자우거지탕이라고 해서 발라 먹지, 꼬랑지는 이름도 그렇고 모양도 이상하여 쳐다보지도 않는 것들인데, 한국 사람들은 소꼬리곰탕이라 하여 비싼 음식으로 칩니다. 자기들은 예전에 통째로 다 갖다 버리는 것들인데, 우리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다 먹거든요. 그래서 FTA가 시작이 된 겁니다. 우리가 데모한다고 소고기 수입이 중단될 것 같아요. 이명박정권 지금 폭로된 것 말고도 비리가 많은데, 많은 정보를 미국에서 쥐고 있습니다. 그러니 국민이 뭐라고 아우성을 쳐도 고양이 앞에 쥐 마냥 꼼짝 않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남한이 한미 FTA를 오래 진행하다보면 애초에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미국의 희생양이 되어 백성들 다수는 더 깊은 가난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를 향해 게을러서 가난하다고 합니다. 그러면 가난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열심히 일합니다. 그러면 더 나아질 줄 알고... 여러분 10년 전보다 지금 우리가 더 열심히 일합니까? 더 적게 일합니까? 더 열심히 일합니다. 그런데 엊그제까지 비정규직이 8백만이라고 하더니 이제는 9백만이라고 합니다.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더 많아졌습니다. 더 열심히 일하면 형편이 나아져서 정규직이 더 늘어가야 하는데, 왜 반대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정규직은 다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태평양 넘어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경제규모로 보면 저들이 상전이고 우리는 종이잖아요. 상전이 지 것 먼저 챙기지 종 살림살이 챙겨줄 것 같아요. 그리스 경제가 어려움에 처하면 세계가 공평하게 주가가 떨어져야 하는데, 왜 우리나라만 제일 큰 폭으로 떨어집니까? 우리나라가 그리스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상관이 있습니다. 미국 주식자본가들은 그리스에서 손해보는 것만큼 어디에선가 그 손해를 메꿔야 하는데, 그중 남한이 제일 만만한 겁니다. 주식환차 세금이 제일 적지, 마음대로 샀다 팔았다 할 수 있지, 여러분 열심히 일하면 뭐합니까? 재주 열심히 넘으면 뭐합니까? 돈은 주인이 다 챙기고 있는데.


[법을 되새기는 일]


오늘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않아야 하고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을 한 개인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이 시편은 공동체의 노래입니다. 복 있는 개인을 넘어 공동체 나라로도 해석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은 성경을 밤낮으로 읽고 묵상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는 초등학교 학생들을 위한 해석입니다. 적어도 고등학생이라면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되 머리로 그치는 묵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곧 약자를 위한 정의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법을 되새긴다는 말은 입으로 머리로 읽었던 법을 삶으로 행동으로 온전히 새긴다는 말입니다. 오늘 시편 1편에서 말하는 ‘복’이라는 히브리어 단어 ‘아쉬레’는 ‘아솨르’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인데, 이 단어는 ‘똑바른 길로 나아가다’란 뜻입니다.


요즘 여러분이나 저나 신문이나 뉴스 볼 때마다 그럴 겁니다. 어쩌다가 이 사회가 이렇게 되었나. 한숨만 푹푹 나올 것입니다. 도대체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이 계속 터져 나오는 저축은행의 비리사건들, 이것들은 모두 권력계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명박정권 측근들의 뇌물 비리 사건들, 안 되는 일이 없어 상왕, 영일대군에 만사형통이라는 별명을 얻은 대통령의 형 이상득의원의 비리, 오죽 급했으면 운전기사가 보낸 가짜 돈다발 사진 협박에 입막음조로 5천만원을 주었을까요? 몇 십 년 전에 영국의 어떤 사람이 백 명의 정치인들에게 성탄절을 앞두고 이런 글을 보냈다고 합니다. “다 폭로되었다. 빨리 피신하라.” 그랬더니 한 사람도 런던에 남아 있지 않았다는 예화가 있습니다.


정치인 경제인들을 그렇다 치고 가장 깨끗해야 할 종교계는 어떠한가? 작년에는 한기총을 비롯하여 개신교 대형교회 목사들의 권력 다툼이나 비리 문제만 나올 때만 해도 그저 우리 문제이겠거니 했는데, 요즘은 스님들의 억대 도박판 모습을 보면서 떡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습니다. 이 사회가 갈 때까지 다 갔구나 하는 체념만이 들었습니다. 이게 다 뭡니까? 서민들은 단 돈 십만원 이십만원이 없어 자살을 고민하고 있는데, 저 사회 뒷면에서는 수억 수십억원의 정체불명의 돈 보따리들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뭐 북한 사회의 독재체제가 어쩌구저쩌구 손가락질할 때가 아닙니다. 이 내가 몸담고 있는 사회 곳곳이 썩어 문 들어져 가고 있는데, 무슨 남 손가락질입니까?


[악인과 선인의 차이]


악한 자의 길은 멸망에 이르나 의인의 길은 보살피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오용되는 경우가 자주 생깁니다. 왜냐하면 권력자들은 모든 수단방법을 동원해서 자기들이 의인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모든 언론을 통해 제주해군기지는 ‘민항’이라고 선전하고 ‘무역항’이라고 주장하고 과연 크루즈배가 입항이 가능한지 시뮬레이션 하자고 그러면 그건 본래 협의가 안 된 부분이라고 거절하고 제 멋대로 하면서 자기 하는 일이 옳다고 억지를 피웁니다. 국가고 개인이고 자기 틀린 것은 차이라고 말하고 다른 사람의 차이는 틀렸다고 말합니다. 누가 정말 의인이고 누가 정말 악인입니까? 잣대가 무엇입니까?


지금 악인과 의인을 구별하는 이 시인의 눈에는 두 나무가 보입니다. 한 나무는 시냇가에 심겨진 종려나무이고 다른 한 나무는 광야에 심겨진 선인장 나무입니다. 시냇가에 심겨진 종려나무는 항상 푸르고 철을 따라 열매를 내기에 길손 나그네들에게 그늘을 제공하고 먹을 것을 공급합니다. 반면 광야의 선인장은 누가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가시를 돋습니다. 메마른 곳의 나무들이 맺는 열매는 겉은 멀쩡한데 속은 비어 있습니다. 인생도 그러합니다. 어떤 인생은 항상 웃음이 있고 정이 넘치고 뭐든지 가진 것이 있으면 나누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그 주위에는 항상 사람들이 맴돕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조그마한 일에도 자주 화를 내고 불평을 입에 달고 삽니다. 가시가 돋아 있어 사람들이 가까이 하길 꺼려합니다.


그런데 의인과 악인은 그 출발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어디에 인생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가? 하는 작은 차이가 결국은 의인과 악인, 구원과 심판이라는 메울 수 없는 차이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 창립주일을 맞아 분가교회를 위한 약정헌금을 시작했습니다. 이름을 언급하여 죄송합니다만, 감동이 있는 얘기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현재 목포의 섬에서 한 달에 한 두번 출석하시는 김상기교우님께서 분가선교에 참여하는 마음을 담아 이런 글을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저의 선친께서는 1956년 소유 토지 600평을 매각한 금액과 캐나다 선교부를 비롯하여 목포의 10여 교회에서 모아진 성금으로 한국기독교장로회 도초 서부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런데 3년 후인 1959년 폭풍 사라호로 인해 교회가 전파되었으나 온 교우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교회를 재건축하여 섬겨 오던 중 또 다시 8년이 지난 1967년 초속 40미터의 초대형 폭풍 쎌마호로 인해 두 번째 재난을 당한 후 한국기독교장로회에 속한 교회 건립은 마음뿐 50여년의 세월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간접적이나마 교회 건축 염원의 뜻을 이룰 수 있는 향린교회 분가교회를 위한 조그마한 헌금을 약정하게 됨을 하느님께 머리 숙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분가교회 약정헌금이 그간 50년동안 간직했던 하느님 사랑의 불길을 다시금 불러낼 수 있어 감사하다는 교우님의 글이 제 마음을 진하게 울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자신이 살 집을 마련하는 것처럼 기쁜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집은 자신의 삶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머물 수 있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영원한 공간입니다. 세상에서 쉴 곳을 찾지 못한 사람들의 위로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설립에 참가한다는 것은 매우 기쁜 일입니다. 저는 모든 교우들이 바로 이러한 하느님 나라 확장에 참여하는 감격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집을 세우는 일에 참여하는 거룩한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의 역사성?]


루가복음의 후속편인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매우 중요한 역사들을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많은 것들이 생략되어 있고 초반부에는 베드로와 몇 몇 사도의 얘기들을 단편적으로 전하지만, 후반부는 거의 전적으로 사도 바울로의 얘기만을 전하고 있어 객관적인 역사 자료로 얼마만큼의 비중을 두어야 할지 의문이 제기됩니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에는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이 예수의 사도 바울로 극적으로 변화되는 다마스커스 도상에서의 부활 예수와의 만남의 얘기가 3번 나오는데, 이 이야기가 서로 상충이 되여 역사적 사실성에 많은 의구심을 낳고 있습니다. 또 오늘 본문 앞에는 부활한 예수께서 제자들과 40일을 함께 거하시다가 하늘로 올라가시는 장면이 나오고 제자들은 멍하니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으니 천사 둘이 나타나 왜 그리 멍청하게 쳐다만 보고 있느냐? 다시 오실 것이다.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얘기입니다.


물론 우리는 창세기를 비롯한 모든 성서의 말씀들, 그중에는 역사서라고 일컬어지는 이야기조차 이것이 역사적 사실을 전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전하기 위한 목적에서 기술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 이런 부분은 얼마든지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행전 본문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발견합니다. 예수를 판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초대교회는 그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하여 한 사람의 사도를 뽑게 되는데, 그 뽑는 방식이 두 사람을 두고 제비뽑기를 하는 방식입니다. 교단의 총회장 선거가 필요 이상으로 가열되자 이러한 제비뽑기 방식을 도입한 교단도 있고 장로선출에 이런 방식을 도입했다는 교회 얘기도 들었습니다만, 아직까지는 하나의 예로만 얘기되고 있지 보편화되지는 않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도 지난 공동의회에서 장로 3명을 뽑기로 하였습니다만, 결국 한명도 뽑지 못하는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사실 3분지 2 득표 방식은 후보자 일인에 대한 신임을 묻는 투표방식이고, 2인 중 한 사람을 뽑을 때는 과반수 득표 방식을 선택하여야 하지만, 저희 교회가 오랫동안 해온 전통적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해 두 명의 후보자를 두고 3분지 2 이상의 득표 방식을 고집하고 있어 한 명도 선출되지 않는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회는 목회운영위원회와 함께 장로 선출방식과 일부 신도회에서 제기한 장로 임기제 개정을 포함하여 교인들의 의견을 묻는 절차를 밟아가고자 합니다.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지만, 그중의 하나가 오늘 초대교회에서 사도를 뽑듯이 제비뽑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제비뽑기에서 뽑힌 사도 마티아에 관해서는 이후 아무런 얘기가 없지만, 여기서 떨어진 바르사빠에 관해서는 많은 이야기들이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어느 사도보다도 중요한 일을 한 사람이 바르사빠입니다. 기독교역사에서 예수 다음으로 중요한 바울로를 교회운동 안으로 불러들인 사람이 바로 바르사빠입니다. 바르사빠는 당시에는 기독교인들의 기피 대상이었던 바울로를 초청하여 다마스커스교회를 함께 섬겼고, 그리고 이 교회의 파송선교사로 바울과 함께 1차 선교 여행을 다녀왔고, 2차 여행은 마가로 인해 의견이 갈려 따로 선교 여행을 한 사람입니다. 그에 관해서는 루가가 더 이상 얘기를 전하지 않아 알 수가 없지만, 그의 행적을 보아 바울로 못지 않은 업적을 남긴 사람으로 추정이 됩니다.


물론 바르사빠의 경우에도 중간에 기록이 사라져서 그의 행적을 더 이상 알 수 없듯이 루가가 사도 마티아의 얘기를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전하지 않아 모를 따름입니다. 그러나 역사라는 것은 결국 기록이 남지 않으면 무의미하다는 점에서 제비뽑기의 결과에 대해 하나의 의문점이 남고, 더구나 부활 후 예수께서 40일동안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함께 계셨다면 그때 직접 뽑으시지 왜 승천 후 교인들을 통해 제비뽑기로 하도록 하셨을까 이것도 풀리지 않는 의문입니다. 하여간 오늘 사도행전 본문을 통해 교훈을 얻는 것은 사도로 뽑히지 않았던 바르사빠가 많은 업적을 남겼듯이 장로로 뽑히지 않았다 하더라도 지도자적인 많은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곳이 교회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교회로서의 향린]


오늘 하늘뜻펴기 제목을 ‘사도 교회로서의 향린’이라고 했습니다. 사도란 특별한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복음서에는 제자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사도행전에서는 똑같은 사람들이지만, 이제는 더 이상 제자라 불리지 않고 사도라고 불립니다. 물론 복음서에서도 간혹 사도라고 부르기도 했고, 사도행전 안에도 제자라는 단어가 나옵니다만, 전체적으로 예수와 함께 있을 때에는 배우는 제자라 불리다가 예수가 저들을 떠나 하늘로 가시고 그리고 저들에게 선교의 사명을 맡긴 다음부터는 저들을 사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향린교회가 이제 59년을 넘어 60년을 향해 가기 시작했습니다. 60년은 동양에서는 제2의 인생을 뜻합니다. 물론 지금까지도 향린교회는 이 땅 위에서 사도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해 왔습니다만, 더 한층 전진하는 사도교회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저의 집 근처에 개인병원이 있는데, 감기약 지으러 일 년에 한 두 번 가고 항상 사람이 많으니까 의사선생하고 별로 얘기할 짬도 없습니다. 그저 저는 그분이 여름이면 2-3주 문을 닫고 의료선교를 다녀오곤 하여 교회의 장로님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습니다. 엊그제 기침이 낫지 않아 약을 지으러 갔는데, 그날따라 간호사도 일찍 퇴근하고 사람이 없었을 뿐더러 3주를 계속 보게 되니까, 저보고 물어요. 예술을 하시느냐고? 이런 질문이 처음은 아니라 그때마다 저는 ‘예술’을 대강 ‘예수’라 알아듣고 예도 아이오도 아닌 중간쯤에 해당하는 ‘예 뭐 그냥 그렇지요’ 라고 답을 하곤 했는데, 그날도 그렇게 애매한 답변을 했습니다.


보통은 이 정도에서 질문이 끝나는데, 이분이 그날따라 무슨 생각이 들었든지 무슨 예술을 하느냐고 또 묻는 거예요. 미술이라고 할까 음악이라고 할까 그러다가 그럼 서양음악이냐 동양음악이냐? 작곡이냐 성악이냐? 자꾸 물으면 나중에는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일 년에 한두 번 얼굴을 보지만, 그래도 비공식 주치의에 해당하는 사람인데 거짓말은 해서는 안 되겠다 싶어 할 수 없이 목사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대뜸 기장 목사냐고 묻는 겁니다. 수염 기르는 목사는 기장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저도 약간 당황하면서 그렇다고 했더니, 기장 어느 교회냐고 또 묻는 겁니다. 약간 주저했지요. 할 수 없어 향린교회라고 했더니 반색을 하시면서 정말 향린교회 담임목사가 맞느냐고 반문을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그랬지요.


사실은 이런 경우 걱정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농촌지역에 가면 기장을 이단이라고 부르는 타 교단 목사님들이 많습니다. 그래 제가 향린교회 목사라고 하면 대체로 ‘그러시군요’ 하고 입을 다무는데, 말은 하지 않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눈치 챌 수 있거든요. 올 1월부터 매주 교회를 열심히 다니시고 성서공부에도 열심히 참여하시는 교우께서 전화를 했습니다. 오늘이 ‘스승의 날’인데 저의 가르침에 고마워서 전화를 한다고, 사실 이런 전화를 받아본 적이 별로 없어서 당황스럽긴 했지만, 기분은 매우 좋았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얘기가 조금 전에 자신이 이전에 몸담았던 선배 목사님에게도 스승으로서의 감사 말씀을 드리면서 지금은 향린교회를 나간다고 했더니 대뜸 당장 자기와의 인연을 끊으라고 하시면서 전화를 끊어 매우 당황했다는 얘기를 하더군요.


그래서 의사선생님 하고 제 신분 얘기를 하면서 비슷한 반응(물론 제가 고객이고 목사이니까 함부로 말하지는 않겠지만...)이 나오지 않을까 조심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의외로 한 2년 전에 돌아가신 통일 민중 운동으로 유명한 기장의 선배 목사님 이름을 말씀하시면서 외고모부라 하시면서 자신은 다른 교회를 나가지만, 향린교회를 매우 존경하는 마음으로 지켜보아왔다고 그러는 겁니다. 기분이 매우 좋더군요. 더 이상의 얘기는 없었지만, 자신이 다니는 교회가 그런 일은 하지 못해도 향린교회가 정의와 평화, 생명과 통일을 지향하는 사회선교에 앞장을 서서 일한다는 점에 내심 기독교인으로 자랑스럽게 생각을 하여 왔다는 것입니다.


[사도-부활의 증언자]


가룟유다를 대신하여 사도를 뽑을 때에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부활의 증인‘이라고.. 세 번째 본문 말씀인 요한의 첫째 편지의 말씀은 ’증언‘이라는 단어가 핵심입니다. 4절의 짧은 구절이지만, 증언이라는 단어가 6번이나 나옵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이 증언을 자기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증언은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과 그 생명이 당신의 아들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요한복음 본문 17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행하신 기도문 형태의 하늘뜻펴기입니다. 그중 핵심 구절은 이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 사람들도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이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사도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자들로서 하느님 나라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하나의 우연이고 숫자에 불과하지만, 저는 516, 517, 518이란 세 개의 숫자는 보면 볼수록 신비한 느낌을 던져 줍니다.


516은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날입니다. 이 날은 1960년 419의 민주의거로 이승만장기독재정권이 무너지고 이후 혼란 속에서 가까스로 태어난 장면민주정권을 무너뜨리고 이후 곧바로 군인으로 돌아가겠다던 혁명공약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세 명의 군인이 차례로 이 남한을 통치하는 26년간의 군사독재정권의 막을 연 날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오늘날 남한의 정치사회경제의 악순환을 만들어낸 장본인이 바로 박정희입니다.


일본제국주의가 강제로 조선을 지배하던 그 어둠의 시기에 자신의 안일을 위해 적당히 처신했던 일반인과는 달리 그는 자신이 태어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독립군들을 죽이기 위해 일본군대에 자원하고 그냥 자원할 뿐만 아니라 혈서로서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매국노 중의 매국노였습니다. 오죽했으면 그는 만주군관학교 시절의 조선식 일본인 이름인 ‘다카기 마사오’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는데,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했을 때는 이 조선식 이름을 버리고 아예 일본식 이름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꾸었을까요? 사실 그는 이름만을 바꾼 것이 아니라 그의 정신 그의 혼까지도 바꾸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해방 후 재빨리 변신하여 육군장교가 되었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여순사건 당시 배후 조종 공산당 조직책으로 체포되자 그는 동료 조직원들을 고발하여 자신의 목숨을 건졌고, 이후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서 장성이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과거가 언젠가는 세상에 드러나고 그러면 자신의 운명은 하루 아침에 바뀔 수 있다는 불안 때문에 그는 이판사판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것입니다.


그는 33년 전 궁정동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가 심어놓은 516의 어둠의 그림자는 지금도 우리 사회 곳곳에 비리와 거짓의 독버섯으로 자라나고 있습니다. 지금은 새누리당의 강력한 대통령후보로 거론되는 박근혜씨가 그의 딸이자 그와 함께 군사독재정권의 한 축을 담당했었고, 지금까지 그는 아버지의 독재로 인해 구속당하고 고문당하고 살해당한 수많은 민주인사들에 대해 제대로 된 사과를 한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516의 악령은 언제라도 전면에 나설 채비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지금의 이명박대통령 또한 본인 스스로 박정희와 같은 인물로 비쳐지기를 바랐던 사람이니 516의 악령은 지금도 살아 움직이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516으로 시작한 26년간의 군사독재를 끊고 민중민주민족의 새 역사를 만든 날이 광주 518입니다. 비록 5일간의 짧은 기간이요, 광주라는 한 도시에 국한된 일이었지만, 우리 민족사에 제대로 된 민중민주시민혁명을 보여준 쾌거의 날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광주민주항쟁 32주년 기념 주일을 맞고 있습니다. 이 떨쳐버리기 힘든 악령의 516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그러나 우리 민족의 미래사에 우뚝 서고야 말 518 사이에 향린의 창립일 517이 놓여 있다는 것은 향린의 정체성에 대한 하느님의 섭리가 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경림시인의 [햇살]이란 시


너는 햇살 햇살이었다

산다는 일 고달프고 답답해도?

네가 있는 곳 찬란하게 빛나고

네가 가는 길 환하게 밝았다??

너는 불꽃 불꽃이었다

갈수록 어두운 세월?

스러지는 불길에 새 불 부르고

언덕에 온 고을에 불을 질렀다??


향린. 이웃의 향기가 된다는 말은 산다는 일 고달파하고 답답해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넣어주고 저들의 얼굴을 환하게 만들어간다는 말입니다. 더 나아가 이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향린은 햇살을 넘어 불꽃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왔다고 했습니다. 향린교회는 세상에 불을 지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잘못된 것을 태우는 불이 되어야 하고, 사랑이 식어버린 가슴에 불을 질러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불길을 다시금 일으켜 세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된다는 말이요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된다는 말은 예수를 십자가에 죽였던 로마제국을 향해 당신들은 속빈 허깨비라는 사실을 폭로하는 일입니다. 오늘 516을 넘어 518로 이어지는 디딤돌로 부름 받은 우리는 이 어둠의 세상을 향해 다시금 외쳐야 합니다. 당신들은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 같다고... 그리고 당신의 뜻이라면 하늘 끝까지 좇아가겠노라고...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