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뜻펴기'(설교)를 문서로 정리한 것입니다.
성령강림주일/팔레스타인/이스라엘 평화주일
성령의 역사는 인류가 하나되는 일
시 104:24-34; 행2:1-21, 롬 8:22-27; 요 16:4-15
[성령강림절의 유래]
실은 지난주가 교회력이 정한 성령강림주일이었지만, 지난주는 교회 수련회를 가졌기에 오늘 성령강림주일을 지키면서 세례식과 성찬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성령강림주일의 본래 이름은 오순절이었습니다. 히브리 노예들이 모세의 영도 아래 애굽의 압제로부터 벗어난 해방의 날인 과월절 혹은 유월절로부터 오십일 째가 되는 날로 이 날은 본래 모세가 야훼 하느님으로부터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날이자 보리의 첫 수확을 드리는 감사의 절기였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따르면 예수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이 날은 부활 예수께서 40일을 자신들과 함께 계시다가 승천하신 이후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이 임하였고 이때로부터 교회는 이날을 성령강림주일로 지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강림을 경험한 이후부터 저들은 흩어지지 않고 함께 모여 기도하고 떡을 떼며 공동체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함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교회운동이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날은 교회의 생일이 되기도 합니다.
[성령에 관련한 논쟁들]
우선 ‘성령’이라는 단어는 ‘영적생활,’ 혹은 ‘영성예배’라는 말과 더불어 성서적으로 신학적으로 많은 논쟁을 수반하고 있습니다. 성령 곧 거룩한 영은 동시에 거룩하지 못한 영을 전제하고 있고 영은 또 육, 몸, 정신, 마음, 혼이라는 개념들과 함께 한마디로 정리할 수 없는 폭넓은 개념입니다. 보통 성령을 단순하게 이해하여 영은 거룩한 것이고 육은 악하고 더러운 것으로 단정 짓게 되는데, 이러한 영육이원론은 지금까지 수많은 신자들을 현혹하게 하는 이단의 믿음으로 변질되어 갔습니다. 거기다 교회는 수많은 논쟁을 통해 ‘삼위일체’라는 교리를 주장하고 있어 성령은 단순한 영적 존재가 아니라 또 한분의 하느님으로 예배의 대상이 되어 왔기에 성서에도 기록되어 있고 교회의 목사들이 흔히 말하는바 “성령에 충만하십시오” 혹은 “성령을 받아라” 라는 말은 곧 “하느님에 충만하십시오” 혹은 “하느님을 받아라”로 직역이 되는데, 이런 말이 과연 가능한지에 대해 질문이 생깁니다.
더구나 남한의 대부분의 교회를 비롯해서 세계의 신흥적인 교회들은 대체로 이렇게 성령충만과 성령의 은사 특히 방언과 치유를 강조하는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이 많은데, 이런 교회운동들이 개인적 차원에서는 신앙의 확신을 심어준다는 점에서는 좋은 점이 있는 반면에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기복주의, 개인주의, 타계주의 신앙으로 흘러 수많은 문제점을 만들어내고 결국은 교회가 사회로부터 비판받고 외면당하는 오늘의 현실에 이르고 만다는 점에서 많은 자기 성찰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초기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두고 수많은 논쟁과 갈등을 겪어 왔고, 결국 이를 보다 못한 로마의 황제는 나라가 극심한 분열 을 일으키자 교부들을 니케아로 불러들여 하나의 일치된 교리를 만들어내도록 압박을 하여 결국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구분하자고 하던 아리우스파는 정죄를 받고 니케아신조를 통해 예수는 하느님의 단 하나의 독생하신 분으로서 참 하느님이자 동시에 참 인간이라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아타나시우스파의 주장을 교리를 확정하고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신학자들은 모두 권력의 힘으로 몰아내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이단으로 정죄된 이집트의 콥트교회는 교회로부터 이탈하고 네스토리안 교파는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4세기의 교회는 예수의 신성에 대한 논쟁을 해결하고 나자 이제는 그렇다면 성령은 누구인가? 성령은 성부 하느님으로부터만 출원하는가 아니면 성부 하느님과 성자 하느님으로부터 동시에 출원하는가를 두고 수많은 논쟁과 갈등을 하게 됩니다. 이 또한 결국 칼케돈 회의와 사도신조라는 고백을 통해 성령 하느님을 고백하고 삼위일체 교리를 확정지었지만, 이 논쟁은 끝내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라는 분리를 가져오게 만들었습니다. 동방교회는 성령은 성부를 통한 성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왔다고 하는 성령을 성자의 하위로 보지만, 서방교회는 성령은 성자와 성부 두 분에게서 동시적으로 나온다고 보아 성령을 성자와 동일한 차원으로 보았습니다. 전자의 대표적인 신학자는 그레고리 리사이고 후자의 대표적인 신학자는 어거스틴입니다.
성서 구절로만 본다면 분명 성령은 하느님의 창조 때로부터 존재하신 분이셨습니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창 1장 1, 2절) 공동번역은 ‘기운’이라고 번역하지만 다른 번역에서는 이를 ‘하느님의 영’ 혹은 ‘하느님의 신’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2성서 곧 예수 이후의 교회운동 특히 바울에게 있어서 이 성령은 ‘예수 부활의 영’ 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로마서 8장 9절에 “사실 하느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면 여러분은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성령’과 ‘그리스도의 성령’이란 단어를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리적으로 누구의 주장이 옳은가 하는 문제는 어떤 성서 구절을 인용하느냐에 따라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현재도 여호와의 증인교나 유니테리안 교회는 이러한 성자 하느님 그리고 성령 하느님의 삼위일체 교리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서 어디에 삼위일체라는 말이 있느냐는 반문을 제기하지만, 우리가 예배 마지막에 함께 하는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의 축복기도의 구절에서 하느님, 예수 그리고 성령이 함께 나오고 있고, 마태복음의 마지막 말씀 곧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의 말씀에도 분명 삼위일체 교리를 뒷받침하는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리들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그러나 이러한 교리적 논쟁을 해결하지 않을 때에 일어나는 혼란은 겉잡을 수가 없어 로마 황제가 경험했던 것처럼 교회 나아가서 나라 전체를 분열 속으로 몰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여러 이단들은 순진한 교인들을 현혹하고 집단적으로 교회에 등록을 하여 기존교인들을 몰아내고 통째로 교회를 접수하는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는 아예 정문 앞에 ‘신00 교인들은 출입을 금지합니다.’라는 팻말을 걸어놓고 있을 지경입니다. 따라서 그간 교회가 전연 불필요한 교리 논쟁 싸움을 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논쟁은 끝이 없을뿐더러 어떻게 보면 모두가 탁상이론들이어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는 별 관련이 없습니다. 예수께서도 지난 2천년간 교회가 다투어온 피의 교리 논쟁을 보신다면, ‘아 내가 괜히 갔었구나’ 하고 후회하실지 모릅니다.
[성령의 교리 논쟁을 넘어]
중요한 것은 성령을 삼위일체 교리에 따라 믿느냐 믿지 않느냐 보다 성령은 창조의 영으로 역사 변혁을 가져오게 하는 하나의 기운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병무선생같은 분도 성령의 인격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성령은 사건을 일으키는 하나의 기(氣)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세도 호렙산에서 야훼 하느님의 영을 만난 이후 파라오의 권력에 맞설 수가 있었고, 예수 또한 성령에 사로 잡혀 광야 40일 기도생활을 통해 사탄의 유혹과 시험을 물리치셨고, 성령이 임하자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의 희년선포를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 은총의 해라고 하는 것은 희년을 말하는 것으로 이 50년째가 되는 희년에는 노예는 모두 자유를 주어야 했고, 빚이 있다면 그 빚도 모두 탕감을 해주어야 했고, 땅을 정당하게 샀다 하더라도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주도록 하였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이런 얘기를 주장한다면 미치광이로 오해받거나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종북주의자로 국가보안법으로 걸어 감옥에 가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시대는 로마가 유대를 식민지로 삼았던 시대이니 이는 곧 로마의 식민지 지배 자체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로마는 전쟁 포로들을 노예로 삼았고, 모든 땅을 빼앗아갔기 때문에 이 성령에 사로잡혀 말씀하신 선포는 곧 국가반역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교회의 하느님 나라 운동은 과연 정의로운 사회를 추구하는 일반적인 사회운동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 체험 곧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히지 않는 하느님나라 운동 곧 사회 운동은 인간 스스로를 절대화하는 이념에 사로잡히게 되는 잘못을 범하게 되고, 반대로 역사성 곧 사회적 책임이 전제되지 않는 성령 체험 혹은 하느님 체험은 신비주의로 빠져들게 됩니다. 남한교회의 성령체험은 거의 후자에 속하고 그것도 인격의 변화라는 자신의 내면생활의 점진적인 변혁에는 관심이 없고 방언과 치유라는 즉각적으로 남에게 드러나는 가시적 현상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성령 체험이라는 말 자체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성령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펼친 복음의 역사를 계속 이어가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2장 본문 말씀과 같이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하느님의 영, 곧 성령에 사로잡히지 않고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의 대화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바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모두 하느님께 예배드리러 왔습니다만, 만약 우리가 계속 세상의 생각 곧 세상의 영에 사로잡힌 채,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이 과연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내일은 아침부터 어디어디를 가야하고 누구누구를 만나야 하고, 만나면 이런 얘기를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 자리에 앉아 있고나서 집에 돌아가 ‘나는 오늘 예배를 드렸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하였듯이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드려야 한다.” 오늘 우리가 하느님께 진정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왔다면 분명 우리는 세속의 영이 아닌 하늘의 영에 가득 차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느님의 영, 성령에 충만한 상태, 거듭남의 사람이 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를 따라다니고 예수의 기적을 체험하고 예수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제자들마저도 저들이 진정한 변화를 이룬 것은 예수 승천 이후 성령을 체험한 이후였던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2장의 말씀은 교회의 탄생을 알리지만 동시에 성령은 역사를 변혁하며, 이끌어가는 역사의 주임을 알리고 있고, 교회는 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종말론적인 공동체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순절 방언사건의 의미]
오늘 말씀에서 성령이 임하자 갈릴리 어부 출신의 제자들이 외국어를 말했다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가 말하는 기술적 언어를 말하는 것일까요? 그 숨은 의미가 무엇인가요? 우리가 십년 이십년에 걸쳐서 배워야 하는 영어를 단 순간에 말하게 되었다는 언어의 습득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서로 다른 지역에서 왔기에 배경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목적하는 바가 다른 사람들이 곧 소통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소통하게 되었다는 마음과 마음이 하나로 묶어지는 그래서 하나의 목적을 향한 새로운 인간 집단의 역사가 시작하고 있다는 선포인 것입니다.
언어 자체로만 말한다면 그리스 마케도니아 출신의 알렉산더 대왕은 이미 서른 살의 나이에 지중해 연안의 유럽과 아프리카와 중동을 하나의 언어가 통하는 제국으로 만들었습니다. 곧 거대한 헬라제국을 형성했고, 예수의 제자들이 활동하던 시대에는 헬라의 뒤를 이어 로마제국이 언어뿐만 아니라, 법까지도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이미 언어와 문화와 법으로 하나의 세계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사도행전 2장에서 일어난 외국어 방언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헬라와 로마제국이 이룩한 저들의 언어는 하나였고, 다른 민족들이 말은 통하였지만, 그건 지배자의 언어였다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출신과 피부의 색깔을 넘어 신의 딸과 아들로 동등한 인격적 존재로 인정받고 하나 되는 그런 화해와 소통의 언어가 아니라 인간의 소유 욕망을 채우기 위해 더 많은 것들을 착취하고 빼앗는 지배자의 언어였던 것입니다.
성령강림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난 방언의 역사는 지금 우리가 교회에서 흔히 말하는 상대방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언어가 아니었습니다. 그건 하나의 꿈, 하나의 이상을 갖게 만드는 화합의 언어였습니다. 제국들의 통치와 욕망으로 갈기갈기 찢어진 인간의 마음들을 정의와 평화와 생명 그리고 평등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대망으로 치유하는 언어였습니다. 신의 자리를 탐내 바벨탑을 쌓아 올렸던 제국들이 인간들을 네편 내편으로 갈기갈기 찢어놓아 상대방을 적으로 여겼던 시선을 아! 저들도 하느님의 형상을 띠고 있는 신의 자녀임을 알게 하는 깨달음의 언어였던 것입니다.
[바벨탑의 언어]
언어가 흩어졌다는 말은 소통이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뱀으로 묘사된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선악과는 단순히 선과 악을 아는 이성적 판단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나 지금이나 선과 악은 이성적 판단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도덕적 영적 판단은 주로 경전을 인용하는 종교인들이 합니다만, 종교인들도 힘이 있는, 쉽게 말해 교회의 크기에 따라 진위가 결정이 됩니다. 사회적 법적 판단은 법관들이 합니다만, 그것 또한 어떤 대통령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느냐에 따라 제각각입니다. 그러니까 선과 악의 판단 배후에는 언제나 권력이 숨어 있습니다. 곧 선악과를 따먹는다는 것은 자기만의 독점적 권력을 갖는다는 말입니다. 따먹었습니다. 그때부터 인간과 인간은 단절이 일어납니다. 불통이 생기고 갈등이 일어나고 급기야는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쟁투가 벌어집니다.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 우리는 영원한 하나라고 노래하던 사람도 어느 순간, 저 사람 때문이라고 자기 책임을 전가하는 남남이 되고 맙니다. 선악 그거 지내놓고 나면 사실 우스운 것입니다.
바벨탑으로 인한 언어 혼잡은 바로 욕망과 권력의 문제였습니다. 지금 남한과 북한이 말이 안통해서 총을 들고 싸웁니까? 지금 남한의 진보와 보수는 말이 안통해서 싸웁니까? 지금 국회의 야당과 여당은 말이 안통해서 싸웁니까? 지금 통진당은 말이 안통해서 당권파와 비당권파로 나뉘어서 싸웁니까? 지금 이맹희씨와 이건희씨는 말이 안통해서 싸웁니까? 욕망과 권력을 내려놓기 전에는 죽어도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누가 내려놓겠습니까? 여러분이라면 내려놓겠습니까? 바로 여기에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 구속의 근본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모든 영광을 내려놓았습니다. 그것도 십자가의 죽음의 자리에까지 내려가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언어]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일어난 방언은 전연 새로운 언어였습니다. 영국의 아동심리학자인 퍼넬러피 리치 박사는 어머니들에게 지혜를 나눠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한 엄마가 자기 딸이 아주 어린 나이에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자랑했고 딸의 재능을 그 자리에서 보여주었습니다. 성공적인 조기 교육의 한 사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리치박사는 그 아이가 비범한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잠시 침묵한 후에 그 엄마에게 ‘언어의 기술보다 더욱 고귀할지도 모르는 다른 귀한 것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엄마는 그게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리치 박사는 “만일 당신의 딸이 덤불 속에 갇힌 나비를 구출해 주거나, 자신에게 못되게 한 친구가 눈물을 흘릴 때 그 눈물을 닦아준다면 아이는 더욱 비범할 수 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재인용 [깨달음의 하나님] 최성철 북성재 2012. 109쪽)
그래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임한 성령의 언어는 전연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는 새로운 언어였습니다. 그래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자기 것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는 힘이 사라졌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임을 선언했습니다. 모르던 사람들이 예수 안에서 하나의 가족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신앙운동을 방해하고 박해하는 국가권력에 저항했습니다. 잡아다 때리고 옥에 가두어도 우리가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옳은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옳은가? 하며 저항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탄식합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오늘날 지구환경의 문제를 다루는 학자들은 이 구절을 인용하여 인간의 자연의 착취를 고발하는 성서 이야기로 자주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과연 2천년 전 사도 바울이 인간 구원을 넘어 자연 구원에까지 이르는 깊은 통찰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습니다.
저는 여기서 그가 말하는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는 피조물“이란 당시 로마제국의 군사적 지배 아래서 신음하던 모든 약소민족들의 아픔의 소리와 당시 로마제국의 경제건설을 책임졌던 노예들의 신음소리를 두고 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로마를 관광하며 거대한 콜로세움을 비롯한 웅장한 건축물에 감탄을 하고 사진을 찍습니다. 그러나 그 건물을 세우기 위해 동원되어야 했던 수십만의 노예들,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감시하고 조금만 잘못하여도 가차 없이 죽였던 역사적 사실들을 우리는 간과합니다. 노예들은 주인의 생명을 지키는 의무가 있었는데, 만일 주인이 피살되면 그 휘하의 노예들은 주인의 목숨을 보호하지 못한 책임으로 전원 살해되었습니다. 한 예를 타키투스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네로황제 치하의 원로원 의원이었던 페다니우스 세쿤두스가 정적에 의해 피살되었을 때, 그와 한 지붕 아래 살던 400명의 노예들 또한 전원 살해되었습니다. 당시 로마 인구의 약 3분지 1 가량이 노예였다고 말합니다. 만약 노예가 모자라면 그들은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침입하여 남의 자식들을 포로로 잡아오면 되었습니다. 소수의 강자가 약자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드는 당시의 폭력적 상황을 바울은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오순절의 성령강림 사건은 바로 이러한 착취와 핍박의 시대가 끝나고 모든 백성들이 하나의 형제와 자매로 지내는 사랑과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평화를 향해]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이면서 동시에 저희들은 세계교회협의회가 선포한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평화주일로 지킵니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많은 분들이 알고 있습니다. 로마가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쫓아낸 이후 2천년이 지나 이곳을 지배하고 있던 영국 그리고 미국의 힘에 의해 1948년 유엔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두 나라로 분할하여 두 개의 국가를 세우고자 하였는데 이에 동의하지 않은 팔레스타인을 제외하고 결국 이스라엘만 나라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팔레스타인과 중동의 이슬람의 국가들은 이후 이스라엘과 4번의 큰 전쟁을 했고 그 이후 수없는 작은 전쟁으로 일관되어 왔습니다. 지금 우리는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기에 제1성서에 나타난 아브라함 그리그 그의 후예들을 현재의 이스라엘 사람들로 착각하여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경향이 많습니다만, 이는 잘못된 이해입니다.
2천년을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 어느 날 내가 옛 주인의 후손이라고 그 땅을 내놓으라고 한다면 과연 이것이 합당한 일인가요? 물론 저들 또한 본인들이 원해서 나간 것이 아니라 힘에 의해 쫓겨난 것이니 저들에게도 자신의 것이라 주장할 근거는 있지만, 마치 우리가 북조선을 향해 이거 우리 부모님이 살던 집이니 내 놓아라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60년 전의 일도 그 효력이 없거늘 무려 2천년 전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폭력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는 지난 60년 동안 아니 현재 팔레스타인 땅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계 언론을 장악하고 있는 유대인들에 의해 정보가 통제가 되어왔고 왜곡되어져 왔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6미터 높이의 장벽을 무려 700킬로에 걸쳐 세우고 있고 지금도 조상대대로 살던 팔레스타인 힘없는 사람들을 몰아내고 이스라엘 정착촌을 넓혀가고 있고, 이에 저항하여 돌을 던지는 팔레스타인 어린이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감옥에 넣고 있습니다. 일제에 저항하고 이등방문을 죽였던 기독교인 안중근을 우리는 의사로 부르지만, 이스라엘의 부당한 폭력에 몸으로 저항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 일에 쉽게 동의하고 있습니다.
제1성서에 나타난 히브리와 이스라엘민족은 오늘의 이스라엘 국가와 동일한가요? 성서에 나타난 블레셋과 아말렉은 오늘날의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동일한 민족인가요? 성서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파라오왕이 지배하는 에집트와 무바라크독재자의 후임자를 뽑는, 대통령 결선투표를 앞두고 있는 현재의 에집트는 같은 나라인가요? 만약 같다고 하는 분이 계시다면 문제는 심각해집니다.
히브리의 본래 뜻은 하나의 핏줄로 이루어진 민족개념이 아니라, 당시 중동에 흩어져 살던 노예들과 떠돌이들을 부르는 사회적 차별 용어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시작은 바로 히브리 노예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히브리는 누구입니까? 당연히 노예와 같이 억압받고 장벽에 막혀 집에도 마음대로 갈 수 없고 친척집을 방문하기 위해 원래 팔레스타인 땅으로 부여받았던 가자지구에서조차 이스라엘의 검문에 막혀 통행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야 말로 오늘의 히브리인들이요 바빌론 그발강가로 끌려간 포로들입니다. 오늘 성서의 야훼 하느님은 저들의 고통소리에 아파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또한 외세에 의해 남북분단이 되었고, 그 고통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힘에 겨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고통이 심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고통, 지금 현재 길바닥에서 강도 만나 신음하며 피를 흘리고 있는 저 중동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외면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의 통일도 우리 힘만으로 이룩하거나 유지하기 힘든 복잡한 국제정세에 갇혀 있습니다. 또 하나의 분단 속에서 신음하는 저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함께 소통하고 하나 되는 것이야 말로 오늘 성령강림절을 맞아 성령에 눈뜬 신앙운동이 아닐까요?
이제 약 5분간의 음악으로 만들어진 짧은 영상을 보면서 팔레스타인들의 아픔에 소리에 귀를 기우리고 중동의 평화 해결이 곧 우리의 분단을 극복하는 평화와 같은 것임을 깊게 이해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