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성령의 거듭남

사 6:1-8; 롬 8:12-17; 요 3:1-17


[니고데모의 불안]


‘바리사이파 사람들 가운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다인들의 지도자중 한사람이었다.’ 여기서 ‘지도자’로 번역된 희랍어 원어(archon)는 다스리는 자란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7장에 가면 더 확실히 알 수 있지만, 그는 산헤드린이라고 하는 70명으로 구성된 유대의회라는 최고결의기관의 한 일원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입법부의 국회의원이자 행정부의 고위관료이자 동시에 모세 율법에 정통한 교수이자 법관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한 인간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높은 자리에 까지 도달한 사람입니다. 지위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지혜에 있어서도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밤에 찾아옵니다. 밤에 찾아왔다는 말은 삼중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몰래 찾아왔다는 의미가 있고, 두 번째는 세상을 어둠으로 그리스도를 빛으로 말하는 요한복음 1장 서언에서 본다면, 그는 세상과 율법에 속한 옛 사람이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고, 세 번째로 그는 예수의 무덤을 제공한 숨은 제자 아리마대 요셉과 같이 숨은 제자였다는 의미도 함께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이야기만 갖고 본다면 그가 밤에 찾아왔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백성들로부터는 지혜 있는 사람으로 존경을 받고 있지만, 실상은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그를 이어서 언급하는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과 더불어 예수를 만나 변화된 대표적인 두 인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전자는 상류계층을 대표하고 후자는 하류계층을 대표합니다.


오늘 요한복음 본문은 니고데모와 예수가 함께 나눈 얘기를 깗은 몇 문장으로 간추려 소개하고 있지만, 이는 핵심적인 부분만을 발췌한 것이고, 실상은 밤을 세워가며 많은 얘기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의 말씀을 보다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니고데모가 예수를 찾아왔다는 이 단순한 명제에서 예수를 만나기 위해 며칠 몇날을 고민해야 했던 그의 불안과 절박감을 동시에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서의 이야기를 바로 이해하는 길은 성서 속의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니고데모와 같은 사회적 위치에 있다면 저는 결코 예수를 만나는 일 따위의 모험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도대체 내가 뭐가 아쉬워서 예수라는 젊은이를 찾아가 지혜를 구해야 합니까? 예수라는 젊은이는 도대체 그 출신부터 문제입니다. 유대 사람들이 사마리아 출신 다음으로 경멸하는 갈릴리 출신에다 그의 직업은 아버지를 따라 목수로 알려져 있고 그의 주위에는 나의 동료들이 가장 경멸하는 세리들과 어부들 곧 죄인들로 들끓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몰래 만난 사실을 동료들이 나는 비난과 손가락질을 받게 될 것이고 지금까지 공들여 쌓아 올렸던 모든 지위를 한 순간에 잃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니고데모가 들었던 가장 두려운 이야기는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성전 제사를 위해 장사하던 사람들을 내어 쫓고 야훼 하느님께만 드리는 거룩한 화폐를 담은 책상을 뒤집어 업을뿐더러,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는 엄청난 선언이었습니다. 이 얘기를 들은 동료들은 예수를 미친놈, 신을 모독하는 불한당 나아가서 체제를 위협하는 아나키스트 무정부주의자로 여기고 있습니다. 요즘 ‘종북주의’라는 말이 지면을 뒤덮고 있습니다만, 여기서 ‘북’을 내가 몸담고 있는 남의 현 체제를 부정하고 뒤집는 사람 그리고 ‘종’은 이를 추종하는 사람을 말한다면 예수는 ‘북’이 되는 것이고 니고데모는 ‘종’이 되는 것입니다. 엊그제 고등법원은 주한미군철수와 관련하여 북의 지령을 받았다는 죄목으로 74세의 범민련 이규재의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에게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3년6개월의 중형을 때렸습니다. 주한미군철수가 지금 남한의 체제를 부정하는 것으로 판단했다면, 남한의 체제는 미국의 식민지 체제임을 판사가 증명한 셈입니다.


[역사적 예수와 문자]


제임스 로빈손이라는 미국의 성서신학자는 예수 당시의 나사렛이란 동네는 주민 200명 정도인 아주 작은 촌락에 불과했다고 말합니다. 주민 200명이라면 예수님의 가족만 해도 여섯 일곱은 되었으니까 30가구 정도의 마을을 말합니다. 요즘말로 하면 강원도 산골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학교가 없었고, 따라서 예수는 당시 95%의 백성들이 글을 읽지 못했듯이 예수 또한 문맹이었을 것이다. 요한복음 7장 15절에도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는 질문이 나옵니다. 물론 예수께서 글을 읽을 수 있음을 암시하는 성서 구절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4장에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나사렛회당에 들어가 이사야서를 펴서 읽었다는 구절이 나오고 12세 때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율법학자들과 논쟁하는 얘기도 나오고, 요한복음 8장에도 군중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묻습니다. 모세 율법에는 남자도 함께 죽이라고 되어 있는데, 왜 이 이야기에는 남자 얘기는 없는지, 달리기에 능해 도망을 쳤다고 판단이 되는데, 하여간 흥분하여 돌을 든 군중들이 예수에게 묻고 있습니다. ‘자 이 여인을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용서해 주라 하면, 율법을 무시했다는 죄목으로 함께 돌로 쳐 죽일 셈입니다. 이때 예수께서 고개를 숙이고 땅에 뭔가를 쓰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십계명을 썼다는 해석도 있고, 마음의 음욕을 품어도 이미 간음죄이다를 썼다는 해석도 있고, 성난 군중들의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한 일종의 제스처였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가 글을 읽고 썼다는 기록들은 로빈슨의 주장에 의하면 사실의 기록이라기보다는 교회공동체가 후대에 만들어낸 믿음의 기록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모하메드도 학교를 다닌 적이 없는 글을 모르는 문맹이었습니다. 지금은 글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만, 2천년 전에는 소수의 귀족계층과 문서를 다루어야 하는 특수 직업에 속한 사람들만의 전유물이었습니다. 도대체 읽을 책이 없는데 글을 배워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고 당시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 꼭 성서를 읽어야만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옛날 사람들의 기억력은 오늘 우리들과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로 높았기에 성서의 말씀들은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자신의 남편이나 아내 혹은 자녀의 전화번호를 말할 수 있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저부터 아내 전화번호 기억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전화기에 입력되어 있으니 외울 필요가 없습니다. 저도 30대에는 교우들의 전화번호 2,30개는 외우고 다녔습니다. 외우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그냥 몇 번 걸다보면 저절로 머리속에 입력이 되었습니다. 성경이 귀할 때에는 성경말씀을 외우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이슬람교에는 수 백쪽에 달하는 경전을 글자 하나 안 틀리고 외우는 암만들이 수백 명이 있다고 합니다. 옛날 어르신들은 심청전 춘향전 같은 판소리를 굳이 배우지 않아도 몇 번 들으면 몇 대목은 그냥 따라서 하셨습니다. 글을 읽을 줄 몰라도 말입니다. 더구나 히브리어로 기록된 제1성서의 말씀은 지금은 모음이 붙어 있지만, 본래 모음이 없습니다. 외우지 않으면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어렸을 때부터 랍비 학교를 다녔다면 이사야의 글을 읽을 수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글을 읽은 것이 아니라, 들어 기억하고 있는 성서 이야기를 말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판단일 것입니다.


지금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당시 최고의 지위와 부와 명예를 지니고 있었던 니고데모가 냄새나고 무식한 저 밑바닥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돌아다니는 갈릴리의 저 불한당 아나키스트 예수를 만나는 일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모험이 없이는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고, 그는 자신이 그간 해결하지 못한 신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맞바꾸기로 한 것입니다. 죽느냐 아니면 다시 태어나느냐의 최종 주사위를 던진 것입니다. 그래서 죽는다면 죽으리라. 이사야가 오늘 성전에서 야훼의 모습을 보고 나서 “큰일 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라고 하는 자기 성찰에 기초한 생사의 고백이 먼저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나이 75세에 미지의 세계를 향해 자신의 남은 생애를 투신하였듯이, 모세가 나이 80에 새 역사의 주춧돌을 놓았듯이 니고데모 또한 하늘의 부름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은 것입니다. 선택받은 유대민족의 한 구성원으로서 하느님 나라에 자동무임승차하기를 거부하고, 야곱마냥, 에스더마냥 죽으면 죽으리라! 감히 하느님께 도전장을 낸 것입니다. 이것이 물과 성령으로 인한 새로나기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이런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모험 없이, 결단 없이 지금의 자기를 버림 없이 그 위에다 신앙의 축복, 거듭남을 위해 기도하고 노력합니다. 그건 애초 단추를 잘못 낀 일입니다. 예수를 따라 자기 십자가를 지기 위한 전제가 있습니다. 그건 ‘자기를 부인하고’입니다.


[물, 불, 성령]


공관복음서는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말한 ‘물과 성령의 거듭남’을 세례 요한의 입을 빌려 마태복음과 루가복음에서는 ‘불과 성령’으로, 마르코복음은 그냥 ‘성령’만을 언급합니다. 공관복음서는 세례요한과 예수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 물은 요한의 몫으로 불과 성령은 예수의 몫으로 떼어서 말합니다만, 가장 늦게 기록된 요한복음은 물과 성령 모두를 예수에게 둡니다. 이는 교회가 처음에는 세례를 세례 요한의 것으로 여기고 행하지를 않다가 후에 세례 예식을 도입하고 이것은 예수에게서 시작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서 저자들은 물이면 물, 불이면 불, 성령이면 성령, 이를 각각 따로따로 언급하지 않고, 한 묶음으로 ‘불과 성령,’ 혹은 ‘물과 성령’으로 말하는 것일까요? 물과 불은 각각 어떻게 다르고 어떤 공통점을 지니고 있을까요? 물은 씻음을 의미하고 불은 태움을 의미합니다. 각각 죄의 고백과 용서를 말합니다. 물은 씻어내지만, 불은 태운다는 의미에서 훨씬 강력한 의미가 있습니다. 물은 과거로 돌아갈 여지가 남아 있지만, 불은 완전히 소멸되었기에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예수의 죄사함은 일회적이고 되돌릴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권세를 갖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흔히 교회에서 불세례를 말하면서 심령의 뜨거움을 강조합니다만, 그렇다면 물세례를 받은 사람은 심령의 차가움을 말합니까? 그건 잘못된 해석입니다. 불세례의 기본 의미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이제는 하느님이 제시하는 앞만을 향해, 새로운 미지의 세계에로 자신을 열고 나아가야 한다는 불가항력의 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입술에 불집게로 잡은 뜨거운 돌이 닿았다는 의미는 과거의 이사야는 온전히 100%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미래를 향해 가는 힘은 어디에서 옵니까? 이미 자신을 지탱해온 과거의 힘들은 과거의 죄와 함께 모두 사라졌습니다. 이제 이 힘은 위로부터 와야 합니다. 이 미래를 새롭게 열어가는 창조의 영이 곧 성령입니다. 니고데모는 하느님 나라를 보기를 원했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했습니다. 자신은 거듭났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지나고 나면 또 과거의 자기입니다. 자꾸만 반복되는 자신을 바라보며 죽기 전에 구원의 깨달음을 얻고자 고민하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들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람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듯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그러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람과 성령. 이 두 단어는 히브리어로 표기하면 모두 하나의 단어 ruah 하느님의 숨이 됩니다. 하느님의 숨에 쏘이는 그 사람은 하늘에 속하기에 삶의 궤적이 어디를 향할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불안합니다. 그러나 그 불안은 그냥 바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김이기에 세상을 넘어서는 희망과 세상에 맞서는 용기로 곧 전환됩니다.


‘하느님 나라를 어떻게 하면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답변을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니고데모는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와야 한다는 말입니까?’ 하고 반문합니다. 적어도 중학생 정도만 되어도 이해할 수 있는 얘기에 노학자가 이런 어리석은 질문을 한다는 것은 논리상으로도 맞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비논리를 풀어내는 논리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희랍어 부사 anothen입니다. 이 부사는 ‘두 번’이라는 뜻과 ‘위로부터’라는 이중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위로부터’ 오는 힘으로 나야한다. 는 의미로 얘기를 했는데, 니고데모는 두 번으로 이해했는데, 이는 니고데모의 어리석음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과 문자에 매인 유대교의 어리석음을 폭로하고자 하는 것이 저자의 의도입니다.


[니고데모의 모험과 제자상]


그런데 니고데모가 가졌던 신앙의 질문, ‘하느님을 보겠다.’는 이 생각은 당시의 시대적 사고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 왜냐하면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결코 눈으로 볼 수도 없을뿐더러 보아서도 안 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아니 하느님을 본 자는 죽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나는 이제 죽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야훼라는 그 이름조차도 입술에 올려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다만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은 모세를 통해 전해준 율법과 희생 제사를 통해서만 가능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야훼 하느님은 예루살렘 성전 안 저 깊숙한 지성소에만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니고데모는 성전 밖에서 그리고 율법 밖에서 게다가 자기 친구들이 빨갱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갈릴리의 예수를 통해서 하느님을 보고자 한 것입니다. 이보다 더 혁명적인 사고의 출발은 없습니다.


니고데모는 로마 식민지 체제에 철저하게 굴복하는 유대 지도자들의 썩은 모습을 너무나 자주 보았습니다. 이 기존체제를 뒤집는 근본적인 변혁이 오지 않는다면 유대교는 그냥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는 절박감을 갖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성전을 허물라’는 소리를 했다는 얘기를 듣고 그를 찾아온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니고데모를 성령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너는 이스라엘의 이름난 선생이면서 그런 것도 알지 못하느냐?’라며 예수에게서 핀잔을 받고 있습니다만, 이날 밤 두 사람은 유대교를 개혁하고 하느님 나라 운동을 위해 공동전선을 펴나가기로 어떤 묵약이 있지 않았을까?... 적어도 그 이후의 니고데모의 행적을 보면 그런 묵약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니고데모는 이후 두 번 더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7장에 산헤드린 회의가 열립니다. 본래는 예수를 잡아 직접 심문하고자 모인 회의였는데, 잡으러간 경비병들이 빈손으로 와서 답변하기를 ‘저희는 이제까지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잡으러 간 경비병들이 예수의 말에 감화를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렵지만, 하여간 예수 없이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간 예수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해온 중앙정보부 감찰계장의 일급보고서에 의하면 예수는 현 체제를 거부하는 매우 위험스런 사람으로 보고되었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어 빨리 처단할수록 좋다는 결론을 맺고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일이라면 목소리를 높이는 맥카시 의원이 재빨리 손을 들고 주장하기를 이 예수라는 작자는 오늘이라도 당장 잡아 법의 이름으로 처단해야 한다. 우리가 가장 중요시여기는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어기고 백성들을 오도하고 성전을 허물라 주장하고 하느님을 아빠로 부르는 이 미치광이를 빨리 잡아 처단해야 한다. 예수는 빨갱이의 두목 바알세불이다. 그를 그냥두면 우리 모두가 위험해진다. 이전에도 세례 요한이라는 빨갱이 두목을 처단하여 불온한 사상이 번져가는 것을 막지 않았느냐? 지금 처단하면 따르던 사람들도 모두 흩어질 것이다. 싹이 나올 때 잘라야지 때를 놓치면 안 된다. 이에 모든 동료들이 책상을 치며 ‘맞다. 그 말이 맞다.’ 하고 동의하고 나섰습니다. 이 상황에서 다른 의견을 낸다고 하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니고데모가 ‘잠깐’ 하면서 일어서서 좌중을 한번 둘러보더니 찬물을 끼얹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 율법에 먼저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거나 그가 한 일을 알아보지도 않고 죄인으로 단정하는 법이 어디 있소?’ 맥카시도 법대로 진행하자는 니고데모의 반론에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니고데모가 처음 예수를 찾아 나설 때의 첫 번째 행동과 마찬가지로 그의 행동을 다시 한 번 깊이 각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진리를 외치고 신념에 따라 산다고 하지만, 너도나도 돌을 던지는 그 순간 자기 몸을 던져 한사람을 변호할 만한 용기가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그 순간 우리는 고민합니다. 남들 다 하자는데, 내 혼자 반대한다고 뭐가 되겠어? 내 혼자 한다고 역사가 바뀔까?... 히틀러 정권의 유대인 학살이라는 엄청난 불의의 세력 앞에서 쉰들러는 폴란드 유대인들을 자신의 목숨을 걸고 전 재산을 바쳐 살려 내는데, 그 살려낸 사람이 폴란드 전체에 살아남은 유대인보다 많았습니다. 한사람의 보잘것없는 희생과 외침은 진리 안에서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 이후 니고데모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후 시체에 바르는 몰약을 갖고 나옵니다. 로마정부가 빨갱이로 처단하고 온 예루살렘 백성들이 침을 뱉고 저주하여 죽인 예수를 위해 바로 그날 예수의 시체를 무덤에 모시기 위해 찾아 나섭니다. 3년 동안 쫓아다녔던 제자들마저 사라진 그 골고다 현장에 몰약을 가지고 나타난 니고데모. 그야말로 진정한 제자가 아니었을까요? 역사를 바로 알려면 정사보다는 야사에 관심을 기울려야 한다고 하는데, 예수님의 제자의 반열에 끼지 못한 니고데모야 말로 진정한 제자가 아니었을까요?


이러한 진정한 제자됨은 예수를 처음 찾아 나왔을 때 이미 씨앗처럼 뿌려졌습니다. 자신을 감싸고 있는 편안함을 떨치고 나올 때, 이이 잉태되어 있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삶과 유리된 형식의 종교를 거부했습니다. 민중의 고통과 유리된 자기만의 성채 안이 종교를 거부했습니다. 안식일만 거룩하게 지키면 된다고 하는 삶과 유리된 종교가 아닌 삶에 뿌리 박힌 거룩한 안식을 원했던 것이고 성전의 벽을 허물고 민중의 현장 안으로 들어가는 살아있는 신앙을 원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하늘나라로 부르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해서, 세상의 보다 나은 변혁을 위해서 보내셨다는 것이 요한복음의 핵심입니다.


물과 성령에 의한 다시 태어나기에서 성령의 창조의 역할은 쉽게 이해가 됩니다만, 물의 역할은 쉽지 않습니다. 흔히 세례 예식으로 설명합니다만, 이는 너무 단순한 해석입니다. 물에 관련해서는 바로 이어지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나옵니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신앙의 물음은 ‘어디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옳은가?’ 입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성전에서 드리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데, 어느 것이 옳은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 당신은 나의 수치스러운 과거를 아는 것을 보니 예언자가 틀림이 없는데, 답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에 예수님은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한다. 지금이 그때이다.”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네가 골방에서 드리든, 인터넷을 통해서 드리든 그건 상관이 없다. 현재의 너를 무너뜨릴 수 있는 하늘의 거룩함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대화의 주제는 참 예배였지만, 그 대화의 도구는 물이었습니다. “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그 물을 주십시오. 내가 여기 물을 뜨러오는 것이 얼마나 곤혹스런 일인지 아십니까? 육체적으로 힘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쳐다보는 그 경멸하는 시선이 힘듭니다. 저는 이 우물물을 걸어올 때마다 동네 사람 만나는 것이 두렵습니다. 아까 올 때, 멀리서 보아아니 옷차림새가 당신은 우리 동네 사람이 아닌 것 같아 제가 왔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그 물을 당장 주십시오.”


그래서 이 여인은 그 생명의 물을 마셨습니까? 마시지 못했습니까? 예 마셨습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증거가 무엇입니까? 물동이를 버려두고 그는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자기의 모든 과거를 알고 있는 동네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수군거림이 두려워 맨 날 맨 날 동네 바깥으로 맴돌던 여인이, 광야의 강렬한 태양의 열기 때문에 모두가 집안의 그늘에서 쉬고 있는 정오경에만 도둑고양이 마냥 우물가를 조심스럽게 오고가던 여인이 마을 안으로 치고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큰 목소리로 외치는 것입니다. “나의 지난 일을 다 알아 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같이 가서 봅시다. 그분이 그리스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이 여인의 당당함에 모두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이 여인의 얼굴에 번지는 평안의 미소,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당당함과 확신은 결코 사람의 의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니고데모를 통해 점진적인 깨달음과 변화를,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서는 즉각의 깨달음과 변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내용적으로는 둘 다 자신의 과거를 깨고 나갔다는 점에서 기존의 가치에 도전하고 이를 넘어섰다는 점에서 우열을 가리기 힘듭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지성인답게 점진적인 변화를 보여주고 있고, 여인은 민중답게 즉각적인 변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선불교의 화두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간 깨달음의 즉각성을 더 중요하게 여겨 왔고, 그런 자신을 은근히 자랑으로 여기는 교만을 갖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최근 저의 집 사택에 관련해서 한 일을 겪었는데, 이를 지금 설명할 시간도 없고 또 공개적인 자리에서 말하기는 힘든 부분이 있는 일입니다, 제 아내에게 얘기를 했는데, 첫날은 하나가 보였습니다. 둘째 날이 되니 그 하나 안에 감추어진 둘이 보였고 또 하루를 지나면서 다른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 안에 감추어진 셋이 보이는 것입니다. 넷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의문점들이 실타래 풀리듯이 하나씩 풀리는 것이었습니다. 아 깨달음이라는 것이 꼭 즉각적인 것만은 아니구나 하는 사실을 또 깨우쳤습니다.


여러분 요한복음 10장에 가면 죽었다가 나흘 만에 무덤에서 살아난 사람이 있지요? 누구지요?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 나자로. 만약 여러분에게 나자로 마냥 죽었다가 살아나는 부활의 경험과 사마리아 여인과 마셨던 것과 같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 경험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손들어 보시겠어요. (이것도 민중에 가까운 사람은 즉각 손을 들고 약간 지식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천천히 들고, 많은 지식이 있는 사람은 지나가고 나서 한번 손들어 볼 걸 하고 후회합니다.)


[역사 변혁과 참여]


무덤에서 나온 부활의 나자로 지금 어디에 있지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를 마셨던 사마리아 여인 지금 어디에 있지요? 다 죽고 없습니다. 지금 그들이 살았던 흔적 하나도 남아 있지 않는데, 무슨 죽음에서 부활을 했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를 마셨다는 말입니까? 동시대의 사람들과 다른 점이 하나 없는데. 무덤에서 나왔다 죽은 것과 그냥 죽은 것과 무슨 차이가 있고, 예수가 직접 주시는 생명수를 마셨다는 것이 무슨 자랑거리가 되는 것입니까? 이 둘의 ‘알요’ 곧 본질은 같은 것입니다.


제가 무슨 얘기를 하고자 하는지 어떤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서 즉각 깨달은 사람이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오늘 저녁에 하나 깨닫고 내일 모레쯤 또 하나 깨닫고 그리고 한 주가 더 지나 또 하나를 깨닫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모르더라도 포기하지 마세요. 힌트만 하나 드린다면 성전에서 야훼 하느님을 본 이사야는 이런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 것인가?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그가 이렇게 답합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사도 바울로는 말합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느님을 ‘어버이’라고 부르게 하시어 우리를 자녀로 삼으십니다. 자녀가 되면 상속자도 되는 것입니다. 그 상속은 단지 영광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도 함께 포함될 것이 아닙니까?


모세는 나일강물로부터 건짐을 받았고, 히브리 노예들은 넘실되는 홍해바다의 물을 건너 더 이상의 착취와 억압이 없는 자유와 해방의 새로운 길로 나섰고, 요단강물을 건너 약속의 땅 평등 복지의 나라 가나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니고데모는 바람과 같은 성령의 입김에 쐬어 유대 안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언자가 되었고, 사마리아 여인은 영생의 물을 마시고나서 사마리아에서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물과 성령’에 의한 거듭남 그것은 세상이라는 과거의 틀을 깨고 나오는 자기 변혁을 통해 하느님이 지휘하시는 새 역사에 동참함을 말합니다. 내가 여기 있지 않습니까 하는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응답입니다. 오늘은 87년 6월 항쟁의 열기가 넘쳐 흘렀던 10일 주님의 날입니다. 우리 민족의 민중해방이라는 새 역사가 시작된 날입니다. 때로 한곳에 정체해 있기도 하고 때로 뒷걸음쳐지듯이 보이기도 하지만, 이 역사는 지난 2천년동안 강물이 바다를 향해 도도히 흘러가듯이 한 번도 멈춰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향린교회 여러분이 앉아 있는 이 자리는 바로 이 6월 항쟁의 불길의 시작인 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된 곳입니다. 25년 전 5월 27일 그날 여러분이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면 여러분은 최루탄과 겹겹이 둘러 싼 전경을 거치지 않고서는 집에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오늘 오후 남산과 시청에서 이어지는 역사 되돌아보기에 함께 참여함으로 물과 성령에 의한 다시 태어남의 은혜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