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난 이

시편 92,1-4, 12-15; 에제 17,22-24; 2 고린 5,6-17; 마르 4,26-32

 

한 문 덕 목사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함께 읽은 성서 구절의 앞부분입니다. 원어에 좀 더 가깝게 직역을 한다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입니다. 아기로 태어나서 성인이 되기까지 몸이 자라듯 정신과 생각도 변화를 겪습니다. 우리의 하느님 인식조차도 변화를 겪습니다. 이영일/김은미 집사님의 아들 해솔이가 5살 때 일입니다. 교회에 간 해솔이가 교회에 도착하자마자 이층에 막 뛰어 올라가서 한 바퀴 돌아보고, 다시 3층에 가서 한 바퀴 돌고, 4, 그리고 옥상까지 가서 교회를 샅샅이 살피고는 목사님께 가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목사님, 하느님은 어디 계세요? 아무리 찾아봐도 교회에는 하느님이 없네요.” 하느님은 어디 계신 걸까요? 지난 주 저의 둘째 아이가 4층에서 식사하시는 조 목사님의 모습을 보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아빠 친구, 예수님이 밥을 먹고 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떤 모습인가요?

 

성령강림주간을 보내면서 지난 주 조 목사님의 하늘뜻펴기에 이어 오늘 저는 영으로 거듭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또 거듭나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바울 사도는 어느 날의 체험을 통해 박해자에서 전도자로 급격한 변화를 하였습니다. 물론 그의 급격한 변화는 오래된 고민의 결과였을 것입니다. 특별히 스데반의 죽음 앞에서(사도 7:58, 8:1 참조), 그리고 첫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을 통해서 열정적 유대인이었던 바울의 마음은 이미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겠지요. 그리고 오늘 고린토 교회에 쓰는 편지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 말을 그리스도교 신앙과 관련하여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지, 오늘 저는 이 물음을 함께 묻고 그에 대해 나눠 봄으로써 거듭남의 의미를 새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일상의 작은 대내외적 환경의 변화와 적응을 위해 실은 매번 새롭게 변하고 있습니다만, 오늘 바울 사도가 말하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은 이전과는 크게 다른 존재의 질적 변화를 말하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16절에는 우리는 더 이상 세속적인 표준으로 판단하지 않는다고 하고, 7절에는 보이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산다고 말하며, 8절에는 주님과 함께 머문다면 죽어도 좋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들은 이전의 삶에서는 찾을 수 없는 어떤 비약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들을 통해서 두 단계의 거듭남을 말해 보고자 합니다. 첫 단계는 세속적 인간에서 종교적 인간으로의 변화이고, 두 번째 단계는 종교적 인간에서 그리스도인으로의 변화입니다. 물론 이 단계는 편의상 나눈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이 어딘가에 늘 존재하고 또 이 사이를 왔다 갔다 할 것입니다.

 

[세속적 인간에서 종교적 인간으로]

 

첫 단계의 거듭남 즉 세속의 인간에서 종교적 인간으로의 변화는 어떤 계기나 사건을 통해서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발생합니다. 오늘 제1성서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제키엘서 17장에는 독수리에 의해 심겨진 포도나무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마리의 알록달록 한 깃털을 가진 독수리가 레바논의 송백 끝에 돋은 순을 따서 장사가 성행하는 무역국가의 상업도시에 심습니다. 그러자 거기에서 포도나무가 움이 터서 자랐는데, 포도나무는 뿌리를 땅에 튼실하게 박고, 자라난 덩굴은 독수리를 향해 뻗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깃털이 많은 큰 날개를 가진 다른 독수리가 나타나자 아까 움이 났던 포도덩굴 중에 일부가 새로 날아온 독수리 쪽으로 넌출을 뻗어서 거기에서 물을 빨아 들이려고 하더랍니다. 포도덩굴이 두 마리의 독수리에게 뻗어 간 것은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함이었지만 결국 동풍이 불어오면 바싹 마르게 될 것이라고 에제키엘은 예언합니다.

 

송백나무의 연한 순을 따서 심었는데 포도나무가 나왔다는 것 자체가 이 이야기의 비유적 성격 특히 알레고리적 성격을 잘 드러내 줍니다. 여기서 나오는 독수리들은 바빌론과 이집트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포도나무는 당연히 유다이지요. 기원전 597년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예루살렘에 쳐들어와 유다의 여호야긴 왕을 비롯하여 그의 신하들, 장군들, 기술자들, 지식인들을 모두 바빌론으로 끌고 갑니다.(왕하 24:10-16) 그리고 가난한 이들만 남은 유다 왕국에는 여호야긴의 삼촌이었던 마따니야를 시드키야로 개명시켜 왕으로 세웁니다.(왕하 24:17) 그런데 후에 시드키야는 이집트에 기대어 바빌론 왕에게 반기를 들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은 다시 전쟁에 휩싸이게 되고, 시드키야는 자신이 보는 앞에서 아들이 살해되고 자신은 눈이 뽑힌 채 바빌론으로 끌려가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에제키엘은 이 사건을 비유로 빗대면서 시드키야 정권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강대국 틈에 끼어 약소국으로 사는 유다 입장에서 바빌론에 기댈 것인지, 이집트에 기댈 것인지는 매우 중요한 외교적 사안이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처럼 바벨론에게 멸망당하는 것을 기정사실화 한 이도 있었겠지만, 이집트에 기대어 독립을 꾀하려는 무리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국제정치적 상황판단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만 에제키엘은 오늘 본문을 통해 이들이 결국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묻지 않고 성급하게 강대국의 힘에 의존한 것은 아닌 지 되묻고 성찰하게 합니다.

 

강대국 사이에 낀 작은 나라가 가장 고민해야 하는 지점은 백성들의 생명과 안전, 평화입니다. 민족적 우월감 내지 국수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 자칫 잘못된 판단을 하다가는 전쟁이 나게 되고, 그 때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결국 민중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국가 간의 전쟁은 지배세력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맞지 않아서 생기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전쟁을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지금 이 나라도 보수언론을 내세워 현 정부가 계속 북쪽의 심기를 건드리고, 그것을 이용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획책을 부리고 있는데, 이러다가 어느 누구라도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면 애꿎은 백성들만 죽어나는 것입니다. 강대국 틈에 끼어 우리의 문제를 스스로 풀지 못하고 외세를 끌어 들여 원하지 않는 전쟁까지 치루고, 아직도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반식민지 상태에 있는 우리로써는 깊이 새길 문제입니다.

 

에제키엘은 바빌론으로부터의 구원은 이집트의 원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야훼 하느님을 지향하는 신앙, 즉 세계의 힘의 논리를 뒤집는 새로운 성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확고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높은 나무는 쓰러뜨리고, 낮은 나무는 키워 주며, 푸른 나무는 시들게 하고 마른 나무는 다시 푸르게 하는 이는 바로 야훼라고 선포합니다. 왜냐하면 야훼 하느님이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강대국도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에제키엘은 가르치고 있고, 유다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은 거룩하신 창조주 야훼 하느님만을 의지해야 한다고 곳곳에서 강조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우리는 창조자가 아니라 피조물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세상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때로는 우리조차도 이 사실을 쉽게 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스스로 자기 자신의 창조주와 주, 즉 자신의 소유자가 됩니다.

 

한 개인을 생각해 봅시다. 개인의 삶에서 이뤄지는 노력에 의한 작은 성공은 자신감을 낳습니다. 작은 성공이 연속적으로 이뤄지면 이 자신감은 점점 확대되고 어느 새 제 힘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게 됩니다. 청계천 공사가 좀 되는 것 같으니까 바로 대운하, 사대강 사업을 벌이는 것처럼 말이지요. 이 자신감이 타자와 비교되면 타자를 깔보고 무시하는 일이 식은 죽 먹기처럼 됩니다. 자신만 옳은 사람이 됩니다. 한 부분만을 잘했음에도 다른 모든 부분까지도 자신이 남보다 더 낫다고 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큰 성공의 경험은 그 경험만을 절대화하는 오류에 쉽게 빠집니다. 바로 수주대토라는 일화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만 시간과 상황의 변화에 따라 해결책과 방법이 달라짐에도 과거의 어떤 경험을 절대화하여 그것에 고착됩니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하면, 이번에는 자기보다 좀 더 센 것처럼 보이는 다른 것의 힘을 빌려 제 문제를 풀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제 문제가 풀릴 지는 모르지만 어느 새 자신은 남의 종이 됩니다. 오늘 세계의 많은 인간들이 하고 있는 일이 이와 같습니다. 돈의 힘을 빌어서, 권력의 힘을 빌어서, 또는 매스 미디어와 같은 평판의 힘을 빌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다 보니 그 모든 것에 매여 종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쯤 말하면 속으로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양심이 있고, 나는 언제나 내 스스로를 성찰하는 주체적인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싶은 분이 계실 것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소크라테스의 조언에 따라 나는 스스로를 늘 비판해 왔다고 말해도 우리의 구부러진 마음에서 시작해서 그 자리에서 끝나는 양심은 우리를 해방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아무리 성찰한다 하더라고 양심이 시작하는 자리도 자기 자신이고 양심이 최대한 파악하는 자리도 우리 자신이기 때문에 그 이상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자신에서 시작해서 자신에서 끝납니다. 그래서 양심을 끝까지 밀고 나갔던 한 인간, 루터는 자신의 죄를 다 고백하고 그 죄책을 없애기 위해 무릎으로 수많은 계단을 기어 올라갔지만, 그가 계속해서 보았던 것은 여전히 남아 있는 죄들이었습니다. 성찰할수록 죄가 더 많이 보입니다. 그래서 후회는 가능하지만 해방은 불가능하며, 과거의 회상을 통한 유추는 가능하지만, 낯선 미래에 자신을 던지는 모험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문제의 원인인 나 자신에게서 해결책을 찾기 때문에 해결은 이루어지지 않고 심각한 악순환이 계속 됩니다. 한 대 맞으면 두 대를 때리는 우리를 모습을 보지 못하고 계속 상대방을 때림으로써 정의를 실천한다고 생각하는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보라는 것이 예언자의 비판의 목소린 것입니다.

 

여기에 또 한 가지를 더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우리는 개인으로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종적으로는 첫 인간 아담으로부터 연결되어 있고, 횡적으로는 현재 이 지구별에 살고 있는 생명들과 연결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만들지 않은 자연으로부터 많은 것을 빼앗아서 우리들의 목숨을 연장해 왔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문명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렇게 만든 문명의 자식으로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들지 아니한 것으로 우리의 삶을 유지하듯이, 한 개인이 만들지 아니한 죄악의 삶의 구조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기도 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잘못된 사회적 편견에 물들고, 그것으로 인류의 악의 구조를 굳세게 하여, 후손에게 물려 줍니다.

 

그래서 개인의 한계가 드러나는 자리, 또 사회적 죄악의 늪에서 헤매는 자리, 죽음의 절망이 아른 거리는 자리에 맞닥뜨린 이는 자신의 존재의 유한성을 깨닫고, 세속적 인간에서 종교적 인간이 됩니다. 즉 자신이 창조자가 아닌 피조물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나가고, 절도 가고, 천지신명께 정한수를 떠다 놓고 빌기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와 이데올로기는 이렇게 해서 생겨났고, 물질문명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종교인구가 줄어들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세속적 인간에서 종교적 인간이 되었다고 바울이 말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 뿐입니다.

 

[종교적 인간이 믿는 하느님]

 

이 단계에 있는 사람들이 믿는 하느님이란 임시변통의 하느님이 됩니다. 평상시에는 저 하늘에 계시다가 인간이 삶의 어려움에 처했을 때 잠깐 내려와서 도와주고 가시는 하느님 말입니다. 아마도 대다수의 한국 교인들은 여기에 머물러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한국 사람에게 그리스도교 교회는 러일전쟁 당시의 피난처로, 무너져 내리는 구한말 강대국인 미국에 기댈 수 있는 매개체로, 전쟁과 개발독재의 상흔을 치유하는 위로처로 작용해 왔습니다. 70-80년대 부흥회와 기도원 운동, 폭발적인 치유집회 등이 이런 맥락을 잘 보여줍니다. 급격한 변화의 1세기 동안 사회의 공적 영역이 국민을 전혀 보호해 주지 못할 때, 그나마 보호막을 씌워준 곳이 교회였고, 거기서 대부분의 한국교인들은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이 단계에 있는 분들은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깨닫는 분들입니다. 자신의 힘과 권력으로 남을 내리누르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어찌 보면 상처 입고 다치고 삶의 무게에 힘겨워 하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이 여기에서 시작되어 여기에서 그친다면 우리의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약함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동안 불안이 존재하는 곳에서, 자신의 한계가 느껴지는 곳에서, 고난과 고통이 발생하는 곳에서만 그것의 해결을 위해 하느님을 부르고 찾아왔습니다.

 

이러한 신앙에 머물러 있는 사람에게 오늘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비유는 이해되기도 어렵고 매력적이지도 않기에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에제키엘의 비유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말씀하십니다. 레바논의 송백나무 대신 등장하는 하느님 나라의 징표는 예상치 못한 겨자씨 한 알입니다. 일단 겨자씨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 작아서 눈에 보일까 말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무가 아닙니다. 일종의 1년생 푸성귀입니다. 물론 크게 자라면 3미터까지 자란다고는 하지만 레바논의 송백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재배하지 않는 야생겨자의 경우는 밭을 망치는 못된 잡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겨자씨에 하느님 나라를 빗대고 있습니다. 기득권자들에게는 잡풀로 인식되는, 도덕적으로 조롱당하고, 정치적으로 미약하고 보잘 것 없는 겨자씨의 특징에 하느님의 나라를 빗대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기존의 인식의 틀을 깹니다. 온갖 새들이 깃들이는 즉 모든 나라의 백성이 안식을 누리려면 레바논의 송백나무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존의 인식이 무너집니다.

 

이 비유는 종교적 인간이 가진 기존의 모든 하느님 개념, 즉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구원의 개념, 하느님 나라의 개념을 내려놓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당신들이 생각했던 하느님 나라는 사실 십자가의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당신들의 한계와 불안과 절망,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욕망에서부터 왔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에제키엘조차도 이러한 비판을 비껴가기 어렵습니다. 에제키엘은 유다가 바빌론과 이집트 사이에서 강대국의 눈치를 보다 망한 것을 말해 주면서, 이제 야훼가 직접 통치하시는 그 때에는 온갖 새들이 깃들일 만한 송백나무가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 심겨져서 해방과 구원을 맛보게 될 것이라고 희망을 불어 넣어 줍니다. 이것은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집도 가족도 잃고 설움당하고 무시당하며 살았던 유다 백성들에게 큰 희망과 꿈을 주었을 것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에제키엘은 이 희망을 힘과 영광의 언어를 가지고 말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을 힘의 하느님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물론 힘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힘은 무척 중요합니다. 살아갈 힘이 없는 이들에게 살아갈 힘을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을 바꾸려면 변혁하는 힘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나아가기 전에 에제키엘이 말한 하느님 나라의 희망조차 바로 바빌론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의 한계와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었기에 하느님은 문제를 해결해 주는 힘의 하느님이 되었고, 결국 이 하느님이 되었습니다.

 

자연과학과 물질문명의 발달로 많은 것이 해결될 수 있는 현대에 이르러서 기존의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제는 하느님을 굳이 부르지 않아도 보험회사가 알아서 처리해 주고, 연금저축과 든든한 부동산이 피조물의 한계를 메꿔 주고 있습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 임기응변의 신을 하느님으로 여겼던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기득권의 유지와 욕망의 극대화를 위해서만 하느님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미 힘을 소유한 사람들은 이제 하느님을 들먹이면서 종교적 인간의 약점을 이용해 자신들의 부정부패와 폭력을 정당화합니다. 즉 종교적 인간들은 약자나 강자나 힘을 숭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적 인간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이제 종교적 인간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넘어갈 때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유대-그리스도교 전통 안에 있는 우리들이 고백하는 그리스도는 오늘 바울사도도 말한 대로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죽는 예수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은 인간,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의 예수, 하느님의 자리를 버리고 자신을 비워, 자신이 아닌 세상을 위해 이 땅으로 내려오신 예수(필립 2:1-11),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은 한 인간에게서 우리는 구원자 즉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달려 죽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그동안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우리 믿음의 중심에 놓지 못했던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내 문제를 풀기 위해 요청된 하느님의 전지전능이 하느님의 본질인 줄 알았으나, 오히려 하느님의 무력성, 즉 힘 없이 죽어가는 하느님에게서 미처 몰랐던 낯선 새로움, 하느님의 무한하고 자기를 끝까지 비워내는 사랑을 체험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는 정말 낯선 것이고, 이 낯설음을 통해 우리를 다시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게 됩니다.

 

그전의 우리는 심지어 양심의 성찰까지도 나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남을 위한다고 할 때도 낯선 이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릿속에서 또 내가 느끼는 대로 남을 판단하고, 남을 위한다면서 내 방식대로 무엇인가를 해 왔습니다. 황금률이라고 불리는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보편 윤리도 결국은 나를 중심으로 삼고 타자를 생각하는 것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비우고, 그 자리에 남을 세우는 역지사지의 정신을 가져보려고 했으나 그것조차도 또한 인간이 생각한 윤리와 도덕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인과응보의 합리적 상호성에 근거한 이웃 사랑을 넘어서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끼리끼리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전혀 새로운 인간을 봅니다. 바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입니다. 십자가에서는 인과응보의 합리적 상호성이 깨집니다. 죄 없는 자가 죄인을 위해 죽습니다. 십자가에서는 끼리끼리의 이웃 사랑이 아닌 원수 사랑이 드러납니다.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우리는 나로부터가 아니라 바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날 때, 비로소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봅시다.”(히브 12:2) 이제 불안과 절망이 아닌 삶의 중심에서, 기적이 베풀어지는 곳이 아닌 일상에서, 약한 곳에서가 아니라 강한 곳에서, 힘을 요청하는 자리가 아니라, 힘 없이 고난을 당하지만 사랑이 충만한 곳에서 하느님을 만납시다. 신앙 안에서 약한 자가 되지 말고 강한 자가 됩시다. 악한 일에서는 어린 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됩시다.(고전 14:20) 하느님께 달라고만 보채지 말고,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아 어른답게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해 봅시다.

 

누군가 씨앗을 뿌립니다.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지만 씨를 뿌린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땅은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여 싹이 돋고 이삭이 패고 알찬 낟알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은 내가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음에도, 내 스스로 내게 생명을 부여하지 않았음에도, 내가 존재할 필연적 이유가 없음에도 내가 살아갈 수 있다는 놀라운 은총을 깨닫습니다. 실수와 무지와 의존성, 망각, 비겁함, 허영, 뇌물에 넘어가고 유혹에 빠지기 쉬운 우리의 나약함에서 발생한 모든 고난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우리가 살아 있다면 그것 자체가 하느님의 은총일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자 하이데거는 존재를 생각하면 할수록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느님은 어디 계신가요? 1층에서 4층까지 교회를 두루두루 구석구석 찾아봐도 하느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주님은 언제나 우리들 곁에서 우리와 함께 식탁을 함께 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고린토 교인에게 보내는 바울 사도의 편지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너에게 자비를 베풀만한 때에 네 말을 들어 주었고, 너를 구원해야 할 날에 너를 도와 주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 자비의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 우리는 무슨 일에나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일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난과 궁핍과 역경도 잘 참아 냈고 매질과 옥살이와 폭동을 잘 겪어 냈으며 심한 노동을 하고 잠을 못 자고 굶주리면서도 그 고통을 잘 견디어 냈습니다. 우리는 순결과 지식과 끈기와 착한 마음을 가지고 성령의 도우심과 꾸밈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느님의 능력으로 살고 있습니다. 두 손에는 정의의 무기를 들고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언제든지 하느님의 일꾼답게 살아 갑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 없는 자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것 같으나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또 아무리 심한 벌을 받아도 죽지 않으며 슬픔을 당해도 늘 기뻐하고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린토의 교우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숨김없이 다 말하였고 내 마음은 여러분에게 활짝 열려 있습니다.(2 고린토 6:2, 4-11.)

 

사랑하는 향린교우 여러분! 거듭난 여러분의 삶은 어떤가요? 저는 여러분에게 숨김없이 다 말하였고, 제 마음은 여러분에게 활짝 열려 있습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평안히 가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함께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힘차게 세상으로 걸어가십시오.

자신이 곤궁 속에 있을 때 하느님에게 나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느님이 곤궁 속에 계실 때,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고난이 아니라, 건강과 능력 안에서

죄가 아니라 행동에서 하느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