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남북 분쟁과 남남 갈등

욥 38:1-11; 시 107: 1-3; 23-32; 고후 6:1-13;막 4:35-41


[이상한 곳, 희한한 곳, 기이한 곳]


날카로우면서도 따뜻한 사색의 글을 꾸준히 써오신 한신대 철학과 김영민교수는 오늘의 교회를 ‘이상한 곳, 희한한 곳, 기이한 곳’이라 지칭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단순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애정이 담긴 말이기에 우리들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좋은 글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상한 곳이 있다. 돈 몇 푼으로 인륜이 망가지는 것이 예사고, 찡그린 인상만으로 천륜에 금이 가도록 알알이, 낱낱이 자본주의 세상이지만, 수령자도 모르면서(이 불신의 세상에서 오직 믿음만으로!) 한 주에 수백 수천만원이 자발적으로 헌납되는 탈자본주의적인 곳이 수두룩하다.

희한한 곳이 있다. 시간이 돈이라 분초를 다투어 뛰어다니면서 실없는 모임이라면 누구나 기피하는 세상이지만, 엿새를 꼬박 일하고도 쉴 줄 모르고 줄기차게 매주 수백 수천명씩 한데 모여서 별 생산성 없는 프로그램을 경건하게 진행하며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곳이 있다.

기이한 곳이 있다. 온갖 원심력으로 찢겨져 마음을 한데 모을 수 없는 세상이지만, 믿을 수 없이 견고한 구심력으로 뭇사람들을 한데 모으고, 냉소와 허탈이 만연한 세상에서 열정과 광기가 살아 번득이며, 이기적 보신주의로 살벌한 세상에서 스스로 에너지를 쏟아붓고도 득의한 듯 히히거리는 곳이 있다.

그러나 정녕 이상한 일은, 그 놀라운 자산과 열정과 에너지가 여름 강물처럼 사회로 밀려들어가 정화와 연대와 정의를 위한 변혁의 힘으로 기능하지 못한 채 필경 파편처럼 분분히 날아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당연히, 실존과 구원의 문제를 사회학적으로 환원할 수 없다. 자본주의의 일차원적 실리성만으로 영성을 희구하는 개인의 정성을 재단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야말로 자기 갱신과 자기 소진이 온통 뒤섞여 있는 참으로 기이한 곳이다.

어떤 사람은 이곳을 ‘신의 무덤’이라고 비아냥거렸지만, 나는 그 비아냥에 일면 동조하면서도 그렇게 냉소적이고 싶지 않다. 이곳은 기실 내 정신의 쉼터와 같은 곳이며, 개인적으로는 서구적 근대화를 선취하도록 도와준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때 이곳 ‘교회’에 바쳤던 내 열정과 성실은 실로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으므로“ (김영민, "한국교회여, 인문세력과 연대하라”)


저는 이 글에서 “그러나 정녕 이상한 일은, 교회의 그 놀라운 자산과 열정과 에너지가 여름 강물처럼 사회로 밀려들어가 정화와 연대와 정의를 위한 변혁의 힘으로 기능하지 못한 채 필경 파편처럼 분분히 날아가 버리고 만다는” 지적에 귀를 기우립니다. 분명 예수는 우리를 향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명령을 넘어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라는 불가역적인 우리의 존재성을 밝히 말씀하셨고,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으며 이를 이 땅에 임하도록 하는 일에 부름을 받았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 성전의 벽을 허물고 세상의 낮은 곳을 향해 나아가라고 말씀하셨지만, 이 러한 예수의 정신을 무시하고 성전의 벽을 더 높이 쌓아 올리고 그 안에서 예수 천당만 외치는 자기 모순은 과연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가? 이는 과연 종교 자체의 모순인가 아니면 유독 남한사회가 갖고 있는 모순성의 발로인가? 베드로는 정녕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로마 정치권력의 중심이었던 빌립보 가이사랴 성 앞에서, 황제 가이사의 동상과 그 앞에서 엎드려 절을 하며 신으로 칭송하는 군중들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를 향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입니다.’라는 신앙고백을 했다고 복음서 저자는 분명히 증언하는데, 오늘 남한교회의 탈사회성 몰역사성은 과연 어디에서 출발하는 것인가?


[남한 교회의 자기 분열증]


한때 남한 개신교회를 대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두 원로목사님의 발언이 최근 언론에 회자되고 있는데, 기사를 읽으면서 저는 이분들이 과거의 그 목사님들이 맞는지 혼란이 생겼습니다. 여의도에 세계 최대의 교회를 세운 조모 원로목사는 자기 가족들의 비리를 파헤쳐 고발하는 장로들의 집단행동에 불쾌감을 드러내면서 후임 담임목사에게 말하기를 ”계속 이런 식으로 하면 교단을 탈퇴하여 교회를 차리겠다.“ 이 말 한마디에 수십 명의 장로들이 수년동안 해오던 활동들을 일순간에 접었습니다. 도대체 80세에 가까우신 노목사가 자신이 세운 교단과 교회를 탈퇴해서 또 하나의 교회를 시작하겠다는 것은 무슨 심보인지. 돈벌이를 생명으로 여기는 장사꾼들도 시장의 윤리를 지키거늘, 신뢰와 정직을 생명으로 목사가 옳지 않은 방식으로 자신의 문제를 감추려했다는 점에서 같은 목사로서 낯이 뜨겁습니다. 그의 가족들이 교회헌금을 전용한 비리금액이 이천억원에 이른다고 하니 우리가 재벌이나 정치권력가들을 비판하기가 부끄럽습니다.


또 한명의 K모 원로목사님. 그가 평생을 섬겼던 C 교회는 동양 최대의 석조 건물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목회경험이 전혀 없는 은행원 아들에게 담임목사 자리를 세습시킨 최초의 대형교회이자 YS 전임대통령의 출신교회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간에도 이런저런 얘기로 시끄러웠는데, 이번에 95세의 아버지 원로목사께서 기자회견을 열어 세습한 일을 회개하면서 이어 아들에게 말하기를 올 4월로 만 70세가 넘었으니 올해 12월 31일자로 교회에서 은퇴할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그냥 촉구가 아니라, “교회의 설립자로서, 원로목사로서, 아버지로서 명령하였습니다.” 보통의 목사들은 만 70세가 되는 생일을 맞으면 그게 법이 정한 정년 70세라고 이해를 하여 다들 은퇴를 하는데, 그 교단은 70세 정년은퇴란 만 71세가 되는 생일 직전까지를 말한다는 법리 해석을 내린바 있는데, 아들 목사는 이에 근거하여 내년 4월 만 71세가 되는 생일 전날까지 담임목사직을 계속하겠다고 답변을 하였습니다.


이 두 분은 혈연으로는 부자지간이지만, 아들 목사가 설교 시간에 그간 20번도 넘게 아버지가 일본의 야쿠자 칼잡이를 보내 자기를 죽이려고 했다는 얘기를 공공연하게 할 만큼 철전지 원수지간이 되었는데, 그러고도 단상에 올라 예수 복음의 핵심인 사랑과 용서와 화해, 일치의 성서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것인지, 저로서는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앞서 말한 여의도의 그 교회마냥 이 교회도 헌금이나 재정 상황을 도대체가 알 수가 없고 교회 자산이 2조원가량 한다는데, 그 어느 누구도 실상을 아는바가 없고, 교인 한 두 명만 있어도 교회 홈피를 만드는 인터넷 시대에 교회 홈페이지가 없는 유일한 대형교회라고 합니다.


이 부자목사의 관계는 그렇다 하더라도 아직도 5천명 이상의 교인들이 매주일 그 목사의 설교에 아멘을 외치고 헌금을 드리고 있으니, 김영민교수의 ‘이상하고 희한하고 기이한 곳’이라는 지적은 전연 틀림이 없습니다. 엊그제도 젊은 사람이 모이는 토크쇼에 갔는데, 교회의 용어인 ‘간증’ ‘성령’ 등등의 단어들이 비웃음의 재료로 사용되는 조롱의 현장을 목도했습니다. 교회가 신의 현현의 장소가 아닌 ‘신의 무덤’이 되어버린 오늘의 모순이 과연 세계적인 현상인지? 저는 종교 일반이 갖는 탈역사성, 물질기복성, 이기성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로되, 도를 넘는 이런 현상은 남한에서만 있는 독특한 현상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이 현상들은 과연 어디에 그 뿌리가 있는 것인가? 참 신앙과 믿음은 언제나 자신을 신 앞에 세워 놓는 자기 성찰을 하는 것이 기본인데, 이 기본을 깡그리 무시하고 자신이 신의 자리에 올라서서 자신을 비판하는 모든 세력을 악으로 사탄으로 몰아가는 이 자기 분열증은 과연 어디에 근거하는 것인가?


[남북 화해와 기독교의 사명]

오늘이 한국전쟁 발발 62년이 되는 기념 주일이기에, 많은 교회들은 예수의 복음 정신에 따라 남북화해주일로 지키지만, 동시에 상당수의 교회들은 화해와 용서를 말하는 대신 625를 잊지 말고 공산주의자들인 저 북의 원수를 척결하자는 복수와 응징의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전면전이 시작되었지만, 실상은 한반도는 1945년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 지배로부터의 해방과 더불어 동시에 미국과 소련에 의한 38선을 경계로 한 분단점령이 시작되었고, 이 분단으로 인한 남북간의 통일 국지전은 1950년 그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었고 결국 3년간의 치열하고 지루한 한반도 안에서의 국제분쟁은 3백만 이상의 희생자를 만들어내고 나서야 휴전이 되었습니다. 이 휴전협정 서명에는 북조선과 미국과 중국의 대표들이 했습니다. 여기에 남한은 미국의 종속국가로 보았기에 서명권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북한이 지금도 남한이 아닌 미국을 대상으로 평화협정을 체결하자는 요구를 끊임없이 하고 있는 것은 타당한 주장입니다.


통일을 논의하기에 앞서 내년이 휴전협정 서명 60년인데 기필코 그 이전에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어야 하는 과제가 우리에게 놓여 있습니다. 내년 10월 부산에서 열리는 세계교회협의회 총회는 이 평화협정 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휴전이란 말은 말 그대로 잠시 쉬는 것이기에 그 이후 어느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느냐는 비난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운동경기는 스포츠맨 쉽이라는 게 있고, 심판이 있어 후반전 시작 벨소리와 함께 경기가 재개되지만, 전쟁이란 상대방을 죽이느냐 아니면 내가 죽느냐 하는 목숨을 걸고 하기에 그런 신사적 행위는 결코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휴전중인 전쟁의 개전은 어느 편에서도 통보없이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스포츠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엄밀히 말하면 휴전이 아니라 계속 전쟁 중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625후에 태어난 전후세대가 아니라 전쟁 중에 태어나서 전쟁 중에 인생을 마치는 한평생 전쟁을 치르다 죽어가는 전쟁 세대 다른 말로 하면 다시는 태어나고 싶지 않은 불행한 인생을 살다가는 것이고 그건 여러분도 예외가 아닙니다.


[남북관계의 현실]


그간 남북정부는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전쟁의 공포심을 끊임없이 불러일으켜 왔습니다. 북은 60년이 넘게 미국에 의해 실제로 군사적 위협을 받아왔으니 공포 속에 살아온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남쪽 정부는 이제는 월등한 경제력과 군사력 거기에 국제적 지도력을 갖고 있으니 꼭 그렇게 할 필요도 없는데, 천안함 침몰 사고를 비롯한 농협 해킹 사건 등등 그 진실을 밝히기 어려운 일들은 모두 북쪽의 소행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결국 과학적 지식도 일반 상식도 무시한 북 어뢰에 의한 천안함 침몰 조작 사건은 남북관계를 저 깊은 수렁 속으로 빠트려 버렸고, 이로 인한 연평도 포격사건과, 공공연한 남과 북의 군사적 위협과 비난은 그 도를 넘어버렸습니다. 그래 남과 북의 백성들은 서로를 향한 비방과 욕설이 난무하여 도대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를 알 수 없어 진짜로 늑대가 나타나 소년이 외친다 하더라도 여전히 술잔을 들고 ‘위하여!’를 외치는 착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60년이 넘게 여러 정권이 지나갔지만, 독재정권의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정권 내부의 비리 사건이 터지면 꼭 간첩단 사건이 함께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연의 일치치고는 그 시기가 너무나도 절묘해서 감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전쟁이나 범죄 혹은 사랑하는 이와의 급작스런 결별이나 자연재해를 당하면 인간들은 정신적 외상을 입게 되는데 이를 심리적 용어로 ‘트라우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인간이 경험하는 최악의 트라우마는 무엇일까요? 이는 고문입니다. 고문의 목적은 상대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라기보다 한 개인의 정신을 폭력으로 짓밟아 양심에 반하는 언행을 하게 만들고 가해자에게 굴복하게 만듦으로써 한 개인의 가치와 인격을 철저하게 파괴시키는 행위입니다. 간첩단 사건에는 그 실상은 시대에 따라 가지가지이지만, 고문이 항상 따라다닙니다. 엊그제 김진숙선생이 비정규직 문제를 다루는 한 토크쇼에서 그가 85호 크레인에 올라가 있을 때, 자기에게 올라오는 음식물을 경찰 용역들이 점검하는데, 자기가 내려 보는 가운데 경찰 용역들이 음료수병의 물을 비닐봉지에 부었다가 거기에 침을 뱉어 다시 병에 넣어 올렸다고 합니다. 이것 또한 한 사람의 자존심과 인격을 견딜 수 없도록 만드는 고문입니다.


[고문과 ‘진실의 힘’]


우리나라에 ‘진실의 힘’이라는 재단이 있습니다. 이 재단은 70~80년대 국가권력의 고문에 의해 간첩으로 조작되어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고, 출소 후에도 간첩으로 낙인찍혀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면서 살아온 분들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뒤늦게 무죄판결을 선고받고 국가배상금의 일부를 출연하여 만들어진 이 재단은 이 땅의 인권을 보호하고 인권 피해자를 돕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분들과 함께 일하는 분들이 말합니다. 고문으로 인한 영혼과 육신에 심어진 트라우마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만큼 깊다는 사실과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고통은 인간내면의 깊은 생명력을 일깨워 새로운 삶을 잉태시켜내는 원천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분들이 단지 이전으로 돌아가는 회복이 아니라 더 의미 있고 더 가치 있는 삶을 향해 나아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진실의 힘’에서 발간하는 작은 책자에 이런 글이 실렸습니다. “우리 인생은 간첩 아닌 간첩으로 내몰려 삶이 송두리째 짓밟히고 지금도 고문후유증에 시달리며 분노와 한숨의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만일 우리가 무죄를 받아서 ‘간첩’ 아닌 우리 이름 석 자를 돌려받게 될 때, 우리는 이 사회를 향해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진심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사회에 무언가 의미 있는 메시지를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우리처럼 고통당하는 이들을 위한 활동도 해야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겨난 것이 ‘진실의 힘’입니다.”


[미국의 두려움은 어디에?]


“전쟁은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미국의 유명한 영성신학자 토마스 머튼 신부가(Thomas Merton, 1915-1968)가 남긴 말입니다. 1차 세계대전이 시작한 다음해에 태어나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고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목도한 머튼은, 전쟁광증이란 질병이 온 세계에 전염병처럼 퍼져나가고 있는데, 이 병을 가장 심각하게 앓고 있는 나라가 미국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미국이 종교적인 진리를 수호하고, 자유와 영적인 가치들을 지키기 위해서 전쟁을 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참담한 파괴의 늪으로 뛰어들고 있을 뿐이라고 안타까워했습니다. 늪이란 빠져나오려고 하면 할수록 더 깊이 빠지게 되는데, 세계의 모든 전쟁의 배후에 관련되어 있고, 지금도 10년이 넘도록 계속되고 있는 이라크와 아프카니스탄에서의 전쟁들이 이를 밝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미국은 경제대국이긴 하지만, 이 대국의 뒷면에는 무기생산공장이라는 거대한 악의 구조물이 숨어 있습니다. 경제대국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기 소비처를 끊임없이 개발해내야 하는 구조적 모순을 갖고 있습니다.


머튼은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으로서 감당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과제가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믿음이고 구원이고 축복들은 우선 ‘살아있음’이 전제되기 때문입니다. 머튼은 크리스천으로서 전쟁에 반대하는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서 먼저 갖추어야 할 조건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전쟁과 갈등의 위기는 실은 우리 자신 안에 깊이 뿌리내려 있는 ‘두려움’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자기 성찰입니다. ‘너’에 대한 두려움과 불신은 실은 ‘나’ 자신에 대한 두려움과 불신에서 시작하는데, 이 서로에 대한 불신은 하느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갖지 못하는 일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평화를 사랑하게 되면, 불의를 미워하게 되고, 세상의 폭력적 지배의지나 탐욕을 미워하게 되기 마련이다. 크리스천이라면 남에게서가 아니라 먼저 자기 자신에게서 평화를 해치는 요소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미워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으로서 ‘전쟁에 반대하는 전쟁’에서 사용해야 할 가장 강력한 영적 무기는 기도와 자기희생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욥기의 본문 말씀이나 시편 그리고 마르코복음서의 본문 말씀은 모두 하나같이 하느님의 절대성과 이 절대성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부질없는 말로 나의 뜻을 가리는 자가 누구냐?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그렇게 세상 물정을 잘 알거든 말해 보아라. 누가 이 땅을 설계했느냐? 그 누가 줄을 치고 금을 그었느냐?” 복음서의 폭풍을 잔잔케 하신 예수의 이야기 또한 하나의 기적 이야기로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가 누구신가에 대한 하나의 답을 주는 말씀이며 이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도들에 의해 운영되던 초대교회가 심각한 어려움에 봉착하였음을 보여주고 있고, 이를 해결하는 길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따름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들 겁이 많으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사실 필요 이상의 겁과 두려움은 일을 오히려 그르치게 만듭니다. 밤길을 홀로 걸어갈 때, 겁과 두려움은 작은 그림자에도 우리를 깜짝깜짝 놀라게 만들고, 점점 빨라지는 자기 발자국 소리에 스스로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습니다.


[남한의 종북논쟁과 미국의 맥카시 공산주의 논쟁]


오늘 남한 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종북몰이 논쟁은 1950년 2월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깊어가던 시기에 미국 국회 연설에서 자기 손안에 국무부에서 일하고 있는 205명의 공산주의자들의 명단이 있다고 소리쳤던 맥카시의원의 빨갱이 논쟁과 비슷합니다. 용기 있는 기자들에 의해 이는 결국 거짓으로 밝혀졌지만, 그날 이후 미국 사회는 빨갱이 공포에 휩싸였고, 625의 전쟁은 바로 그러한 공포의 와중에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우리는 그런 공포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일제 때에 독립군과 그 동조자들을 색출하고 핍박하기 위한 만들어진 식민지 보안법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현재의 국가보안법은 국민 위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제목은 국가보안법이지만, 실상은 정권보호법입니다. 그래 남한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이 무기를 수입하는 나라가 되어가고 있고, 동시에 무기를 생산하고 이를 수출하는 주요 국가로 부상하고 있습니다만, 어느 누가 이를 나서서 비판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를 비판하면 평화주의자가 아닌 북을 동조하는 빨갱이로 몰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칼을 쓰면 칼로 망한다는 말씀을 하셨지만, 제품이 만들어지지 않아 설계도만 보고 F35전투기를 도입하든 아니면 다른 전투기를 도입하든 국민이 낸 세금으로 구입하지만, 그건 국민의 뜻과는 전연 상관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무기는 박물관 전시용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쓰기 마련이고 현대식 무기들은 모두 대량 살상무기이기에 한번 씌어졌다 하면 이 나라는 절단이 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625는 우리 어찌 원수를 잊으랴 하며 복수를 다짐하는 날이 아니라, 다시는 이러한 살육의 불행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하는 날이자, 과거의 원수를 향해 화해의 손을 내미는 날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광화문에 가면 복수를 다짐하는 펼침막과 사진들이 이곳저곳에 널려 있습니다. 625의 비극보다 더한 비극을 부추기는 위험한 전쟁미치광이들이 그 힘을 모아가고 있습니다만, 그 반대편에서 이를 막아서야 할 기독교의 평화운동은 지지부진할 따름입니다.


[통일은 언제 가능할까?]


통일에 관련하여 말한다면 현재 남한의 다수의 젊은이들은 경제적인 부담이 된다는 이유로 통일을 원하지 않고 있지만, 이는 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소수의 북한 주민들이 남쪽으로 넘어오고 있어 우리는 북쪽 주민들이 경제적 이유로 흡수통일을 희망하리라고 추측하지만, 그건 착각입니다. 2009년 1월부터 8월까지 접경지역 북한 주민 1,000여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북한 붕괴시 중국과 통합을 원하는 숫자가 40.1%로 가장 높고, 두 번째가 31.5%의 자력갱생이고 남한과의 통일을 원하는 사람들은 27.1%로 가장 낮습니다. 접경지역에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평양의 중앙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북한 주민들 가운데 남한과의 흡수통일을 원하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통일은 결코 쉽게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양쪽이 부단히 자기를 내려놓고 상대방을 인정하는 오랜 시간의 열린 대화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진심 어린 교류를 통해서만이 오는 노력의 산물임을 우리는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통일 의식을 계속 다짐하기 위해 우리는 지난 몇 년 동안 625를 기억하면서 남북나눔헌금을 약정하여 왔습니다. 최근 새롭게 분가선교헌금을 약정하여 우리의 정성을 드리고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이 일을 중단할 수는 없겠습니다. 분가교회 또한 우리의 생명이 담보되는 한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지,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난다면야 그런 일들이 다 무슨 소용이 되겠습니까? 제가 바라는 것은 여러분의 기도이지 헌금의 액수가 아닙니다. 우리가 모아야 얼마나 모으겠습니까? 일 년을 모아야 겨우 3천만원정도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남북나눔헌금에 모두가 참여를 하고 그리고 하루에 한번 통일을 위해 기도를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냥 입으로만 기도하는 것은 낯 뜨거운 기도가 될 것이니 하루에 커피 두 잔을 사먹는다면 이중 한잔만 먹고 한잔 값 2천원을 매일 모으든가 아니면 오늘같이 더운 날 차가운 물 한 병 사먹는 대신 수돗물로 입을 추기고 이 물 값 천원을 매일 모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어느 이산가족처럼 하루 한 끼를 굶고 드리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야만의 시대를 넘어]


끝으로 [광장/구운몽] [회색인]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서울법대 출신의 작가 최인훈선생께서 올해 초 '인류 문명의 사색'이란 부제가 달린 [바다의 편지]라는 의미 있는 책을 발간하였습니다. 그분 또한 조선반도 북쪽 끝 회령에서 태어나 원산고등학교를 다니다 전쟁으로 인해 한반도 남쪽 끝에 있는 목포고등학교를 졸업한 이산가족이기에 전쟁과 이산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서 나누는 그분의 진솔한 대화의 한 대목을 전해드림으로 오늘의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긴말 접고, 이 남쪽 땅에서 단 한 사람의 초등학교 동기생도 없이 한 생애를 보내버린 한 피란민의 입장에서 이 글을 쓴다. 아직도 생존해 계실 내 일가 어른들, 내 사촌들, 내 코흘리개 때 그 동기들, 지난 전쟁에서 그대들, 목숨이나 부지했는가?

현실이 소설보다 기구하고, 역사가 연극보다 극적이고, 그런데도 누군가가 왼쪽으로 뛰라면 왼쪽으로 뛰고, 오른쪽으로 뛰라면 오늘쪽으로 뛰고, 바로 내일 전쟁이 날 테니 방독면을 사라면 방독면을 사고, 하루가 지나면 이번에는 남북 책임자가 화해하기로 했는데 만나서 악수로 할 것인지 포옹으로 할 것인지 연구 중이라면 또 그런가 하고, 이런 처지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글을 쓴다.

무서운 정치심리학적 고뇌와 정신적 고문과 정신적 착란을 겪어야 할 북의 형제들이여, 그러므로 이 글은 속 편한 자의 ‘관찰’이 아니다. 나는 그대들 곁에 있다. 나는 그대들이다. 고뇌와 착란 속의 형제들이여, 힘내자.

역사에 동원되는 인간 생물의 무리에서 역사를 만들어가는 문명 인류의 무리쪽으로 다만 한 치라도 다가서는 시대의 시작의 시작이 시작되었다고 이 시간을 응시하면서, 그러나 이렇게, 20세기의 막바지에서 한껏 목소리를 낮춰야 하는 우리 상황이, 역시 우리를 슬프게 한다. 민족 내부의 문제를 민족 내부 각 정파의 평화적인 경쟁으로 해결해야 하는 생활 형식-우리들의 가해자인 옛 식민지 상전들조차 재빨리 채택하고 번영을 누리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직도 가장 야만한 20세기의 골짜기를 헤매는 우리 모습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최인훈. <바다의 편지>, 2012. 435쪽)


이 글은 1994년 김일성주석의 죽음을 보면서 쓴 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거기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아니 615남북공동선언이니 104선언은 말할 것도 없이 노태우군사정권의 남북기본합의서조차 지키지 못하고 오히려 그 이전으로 돌아가 버린 오늘의 남북관계를 보면서 그가 갖는 인류학적 사색이 어떠할 것이라고 하는지는 굳이 들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습니다. 혹여, 우리는 인간의 탈을 쓴 한갓 짐승일 따름이라고... 말하지나 않을지...


하여, 이제 남북화해주일의 하늘뜻을 정리하며 사도 바울의 말씀으로 희망의 돛을 다시 올립니다. “우리는 무슨 일에나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일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난과 궁핍과 역경도 잘 참아냈고 매질과 옥살이와 폭동을 잘 겪어냈으며 심한 노동을 하고 잠을 못자고 굶주리면서도 그 고통을 잘 견디어 냈습니다.... 우리의 두 손에는 정의의 무기를 들고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언제든지 하느님의 일꾼답게 살아갑니다.... 우리는 아무리 심한 벌을 받아도 죽지 않으며 슬픔을 당해도 늘 기뻐하고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주보에 삽입되어 있는 남북화해주일 기도문을 다 함께 읽고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