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리타 쿰

지혜 1:13-15; 2:23-24; 시 30:1-4; 막 5:21-43; 고후 8:7-15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이라는 질문에 대해서 많은 답들이 있고 톨스토이는 평생에 걸쳐 성서로부터 플라톤 노자 공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성찰의 글들을 모아 매일매일 읽을 수 있도록 분류를 하여 무려 천 쪽이 넘는 달하는 방대한 책으로 펴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영화로도 제작이 되어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희랍인 죠르바>와 <최후의 유혹>이라는 작품을 비롯하여 여러 소설과 시를 남긴 그리스의 대표적 작가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답처럼 간명하면서도 명쾌한 답은 드문 것 같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인생이란 어두운 자궁에서 태어나 어두운 무덤으로 가는 것이고, 삶이란 이 두 어둠 사이의 짧고 빛나는 순간' 이다." 만약 그가 영어로 말하였다면 이 두 어둠이란 womb과 tomb이 되고, 만약 그가 그리스어로 말했다면 mnema와 metra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을 것입니다. 역시 작가답게 매우 짧고 위트 있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동시에 인생을 이 두 어둠 사이의 빛으로 설명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놀라운 성찰의 힘이 엿보입니다. 여러분이나 나나 지금 이 어둠과 어둠 사이에서 빛의 존재로 만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90세 어떤 사람은 50세 길다면 길고 짧다면 한없이 짧은 이 순간에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에 만족하십니까? 또 만약 한 달 후에 여러분의 인생이 끝이 난다 가정하고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무어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지금 그 일을 당장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나라가 왔다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오늘 밤 이를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지난 주 저는 20대 신학생 시절로부터 미국생활 그리고 지금에까지 끈질긴 인연의 끈을 이어오고 있는 아주 가까운 후배 목사가 갑작스레 뇌출혈로 쓰러져 사경을 헤매이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밝고 큰 목소리로 통화를 주고받았던지라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모습이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파주에서 특별한 목회를 하시는 분이시고 저희들이 영성단식훈련을 할 때, 효소를 공급해주시는 분이시고 여러분 가운데 몇 분은 그분의 목회 현장도 가보신 분들이 계십니다. 자연스레 인생에 대해 그리고 죽음에 대해 또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도대체 죽음은 무엇이고 삶이란 무엇인가? 나의 죽음은 언제 불현 듯 찾아올 것인가? 그는 내가 멀리해야 할 원수인가? 아니면 내가 가깝게 지내야 할 나의 친구인가?


학문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철학이나 종교는 모두 삶과 죽음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하는 노력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죽음에 방점을 찍으면서 절대 신을 통해 해답을 찾고자 하는 믿음에 기초하면 종교가 되고, 삶에 방점을 찍으면서 인간과 이 세계 안에서 이성에 기초하여 해답을 찾고자 하면 철학이 됩니다. 종교와 철학은 같은 물음을 갖고 출발했지만, 종교는 죽음은 인간의 이성적 노력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지상너머의 영원이라는 차원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철학은 이성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은 그 진위를 판단할 수 없기에 영원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판단이 되어 죽음 이전의 삶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종교와 철학은 상호대립적이라기보다는 상호보완적입니다.


[영혼불멸과 부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제1성서인 지혜서는 잘못하면 잠언서로 착각할 수 있지만,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런 책이 성서에 있어나 하고 의아해 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히브리 성서에 포함되지 않아 개신교회에서는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고 이를 외경이라 부르지만, 유대인들이 기원 전 2세기 경에 70인역이라는 헬라어성서를 펴내면서 이를 포함시켰고, 로마가톨릭이 이에 기초한 Vulgate 라는 라틴어성서에 포함시켰기에 가톨릭에서는 정경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런 종류의 책들이 막카베우스를 비롯해서 7권이 더 있습니다. 대체로 이 책들은 시대적으로 보자면 제1성서와 제2성서 사이에 놓여 있으며 알렉산더대왕에 의해 지중해 연안의 모든 나라들을 하나의 거대한 제국의 문화권으로 형성하는데, 이러한 거대한 권력의 힘에 기초한 세상 제국에 대해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가운데서 씌어졌습니다. 지혜서는 흔히 솔로몬의 지혜서라 불리지만, 실상은 솔로몬왕과는 전연 상관이 없고 주전 50년경 아프리카 북쪽 꼭대기 알렉산드리아라는 애굽 지역의 한 유대인 선생이 저술한 책입니다. 알렉산드리아는 당시 헬라문명의 중심지였습니다. 이 도시에 살고 있던 많은 유대인들이 박해를 받자 조상들로부터 전해진 신앙과 관습을 버리고 세상을 좇아가자 이에 저자는 인간 권력 중심의 사고와 물질에 기초한 사상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아닌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야 말로 인간을 구원으로 이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서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지상의 통치자들이여 정의를 사랑하여라, 정직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순진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아라.” 오늘 본문의 말씀도 당시 썰물처럼 밀려오는 거대한 헬라 문명권에 대한 저항의 외침입니다. 플라톤에 기초한 그리스 철학적 종교는 영혼불멸설을 갖고 있습니다. 더러운 육신은 땅에 묻혀 사라지지만, 깨끗한 영혼은 불멸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신이란 영혼을 담는 용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에 지혜서는 인간 영혼이 불멸하긴 하지만, 그 불멸성은 인간 영혼 그 본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의로운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하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성서는 기본적으로 육신과 영혼을 분리하고 육은 유한하기에 더럽고 영혼은 영원하기에 깨끗하다는 영육이원론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활을 얘기할 때에도 언제나 몸의 부활을 얘기하지 영혼의 부활만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물론 오늘 본문 말씀에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을 불멸한 것으로 만드셨다”는 구절이 영혼불멸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여기서 강조하는 부분은 이어지는 후반부 “자신의 본성을 본떠서 인간을 만드셨다.”는 구절입니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불멸이 아니라, 하느님의 형상을 띠었으니 하느님이 원하시는 바, 곧 정의를 행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당시 세상 제국의 가르침은 오직 세상 통치자 황제만이 신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고 그래서 그만이 신의 대행자라는 것이고 그만이 불멸하다는 것이고 그래서 그는 미이라로 보존되었습니다. 황제가 신으로 추앙받는 절대 권력의 시대에서 모든 이들이 다 신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고, 또 우리는 모두 신의 자녀로 평등할뿐더러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는 가르침은 매우 혁명적인 사고입니다. 저는 이 혁명적인 사고가 바로 기독교를 오늘날까지 이어오도록 만들어온 생명력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고대 애굽 종교에도 유일신 가르침도 있었고, 십계명보다 더 잘 만들어진 18계명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일종의 국가종교였기에 현실적 계급과 이에 기초한 차별을 전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노예로부터 출발한 성서는 애초부터 잃을 것이 없었기에 보다 과감한 생각을 펼쳐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1성서에서 부활이나 영생에 관한 분명한 인식이 있었는가에 대해서 신학자들의 의견은 대체로 부정적입니다. 본래 유대교에서는 영혼불멸 사상이 없었습니다. 영혼불멸 사상은 후기 유대교에서 애굽이나 페르시아 헬라 종교의 영향으로 도입이 되었습니다. 그래 예수님 시대에 크게 두 개의 종교지도자 그룹이 있었는데, 이중 조상들의 전통을 중시하며 현실 정치에 참여했던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고,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던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를 인정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 영혼 불멸의 사상이 담겨 있는가는 다시 한번 물어보아야 합니다. 흔히 우리는 부활이 영혼 불멸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복음서를 읽어보면 부활은 영혼 불멸과는 사뭇 다르다고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남기신 마지막 가르침은 ‘우리의 영혼은 불멸하니 이 더러운 육신을 벗어버리고 이 잘못된 세상을 떠나 우리 모두 하늘나라에서 만나자’가 아니라, ‘이 땅, 변두리에 밀려 살아가는 힘없고 가난한 자들의 억울함이 가득 차 있는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것이었고 ‘이는 나의 몸이다, 이는 새로운 사랑의 계약으로 맺은 나의 피다. 이를 기억하고 행하여라’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주었듯이 너희도 서로의 발을 씻어주어라.’ 영혼불멸이 아닌 오히려 우리 몸 썩어지는 육신에 대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오늘 마르코복음 본문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두 여자 이야기]


오늘 읽어드린 마르코복음 본문 말씀은 열두 해를 하혈증으로 고생하던 한 여인이 의사의 도움으로 가산을 다 탕진하고 병이 더 심해지던 가운데 예수의 소문을 듣고 군중 속에 들어가 몰래 예수의 옷자락을 만지면 낫겠다는 믿음을 갖고 만졌더니 그의 병이 다 나음을 입었다는 얘기와 야이로라 하는 회당장의 열두살 난 딸이 병으로 죽었는데, 예수께서 그의 손을 잡고 ‘소녀야 어서 일어나라’(탈리타 쿰) 하고 말함으로 그를 살려내셨다는 이야기가 함께 엮어져 있습니다. 한 얘기를 시작하다가 다른 얘기로 건너갔다가 다시 처음 시작하는 얘기로 돌아와서 결론을 맺는 이 문학적 방식을 ‘샌드위치용법’이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하면 ‘쌈밥용법’이라고 하여도 괜찮을 듯 합니다. 이 이야기 방식은 마르코가 아주 좋아하는 방식인데, 그 뜻은 이 두 얘기를 따로따로 읽지 말고 한 얘기로 읽어달라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얘기가 11장의 성전 숙청과 말라버린 무화과나무 이야기입니다. 잎이 무성한 나무인데 열매가 없었다. 그런데 성서는 그때는 철이 아니었다. 그런데 예수는 이를 저주해서 말라버리게 했다. 말이 안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전과 관련지으면 이 얘기가 하나의 비유로 쓰인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 본문의 이 두 얘기를 어떻게 한 얘기로 이해해야 할까요? 이런 것은 긴 성서공부 시간을 통해 말씀을 먼저 묵상하고 대화를 통해 풀어가야 하는데, 이렇게 선포형식의 하늘뜻펴기 시간에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오늘 말씀을 조금이라고 집에서 묵상하고 오셨다면 쉽게 답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집에서 미리 읽고 오셨는지 한번 알아보는 의미에서 질문을 계속 합니다. 이 두 이야기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첫째 열둘이라는 숫자입니다. 두 번째는 대상이 모두 여인입니다. 열둘은 유대교를 상징하는 것이니까,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유대교 아니 이미 사망 선고를 받았던 유대교를 예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당시 유대교에서 인간 취급을 하지 않던 여인과 소녀를 대상으로 하였다는 점에서 유대교를 살리긴 살리지만, 전통적 방식이 아닌 전통을 뒤집어엎는 근본적이고도 혁명적인 방식으로 살려낸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두 얘기의 공통점은 아니지만, 이 둘을 함께 비교하면서 얘기를 더 진행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열두해를 하혈증으로 고생했던 이 여인을 A라 부르고 12살 난 소녀는 B라고 부르겠습니다. A와 B 이 두 여인의 이름은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여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집에서는 막내 혹은 끝순이라고 불리고 밖에서는 야이로의 딸, 선천댁, 순천댁이라고 불리기는 했겠지만, 호적상에 기록이 되지 않았으니 이름이 없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A 여인은 12년을 병으로 고생하여 가산을 다 탕진한 그래서 남편도 자식도 모두 떠나버린 홀로 죽음으로 마감해야 할 죽는다 해도 누구 하나 눈 깜짝하지 않을 그런 쓰레기 취급을 받는 여인입니다. B 여인은 12살 소녀이지만, 회당장이라는 당시 동네의 가장 부유하고 가장 존경받는 사람을 아버지로 두고 있어 사랑과 보호를 받고 자란 여인입니다.


결국 이 두 이야기는 당시 사회의 바닥층과 귀족층의 두 계급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의 이름이 유대 사회 곳곳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좀 더 묵상해보면 병고침의 방식에서 이 두 얘기가 공통으로 전하고 있는 얘기가 하나 있습니다. 누가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병을 고치셨습니다. 그냥 말씀만으로 고치신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번 경우에는 어떻게 병이 나았나요? 둘 다 접촉입니다. 하나는 당사자인 예수 몰래 그분의 옷자락을 만짐으로, 다른 하나는 예수가 직접 손을 잡음으로 그런데 이 접촉은 모두 당시의 시대적 문화의 벽을깬 일입니다. 열두 해를 하혈하는 이 혈류병 환자는 당시 율법에 따르면 하느님에 의해 저주를 받은 자로 사람들 가운데 함께 해서는 안 되는 불가촉 죄인입니다. 12살 난 이 딸 또한 예수가 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죽어서 죽음을 함께 애도하는 사람들, 이들은 고용한 전문애도꾼들인데, 이들의 애도가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니까 그 몸은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을 자고 있다고 말하자 그들이 코웃음만 쳤다는 말은 이미 시체 썩는 냄새가 집안을 진동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더운 지방이라 시체는 빨리 부패하기에 시체 또한 만져서는 안 되는 것이 당시의 정결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이를 깨고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습니다.


[병 고침 이야기의 진실]


오늘 얘기는 단순히 병 고침의 얘기가 아닙니다. 예수는 병을 고치는 기적꾼이라는 얘기를 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A 여인은 병에서만 고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사회적 냉대와 멸시 그리고 소외로부터 회복이 일어난 것입니다. 희랍어 본문 그대로를 번역하면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가 아니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입니다. 단순히 병으로부터의 고침이 아닌 사람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고 성전권력을 가진 자들로 하여금 반발을 일으키게 하는 구원!입니다. 소녀 B의 부활 이야기 또한 소녀가 그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가에 대해서는 본문은 아무런 언급이 없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이러했습니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놀라 마지않았다.” 놀랐다는 헬라어 단어 ‘엑스타세이’라고 하는 이 단어. 그런데 여러분 복음서에서 사람들이 놀랐다는 말은 여러 번 나오지만, 이 엑스타세이라고 하는 희랍어 단어는 마르코복음에서 딱 두 번 나오는데, 한번이 오늘 본문이고 또 다른 한번은 누구 생각나시는 분 계시나요? ‘겁에 질려 덜덜 떨면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못했다.’는 구절이 어디에 나오지요? 마르코 복음 맨 마지막 구절 예수 부활 이야기에 나옵니다. 무덤가를 찾아간 여인들에게 천사가 말합니다. “자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예수께서는 전에 말씀하신대로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거기서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전하라. 그러자 여자들은 겁에 질려 덜덜 떨면서 무덤 밖으로 나와 도망쳐 버렸다. 그리고 너무도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못하였다.”


‘겁에 질려’ 아무에게도 말을 못하였다. 아니 부활은 기쁨의 소식이 아니던가요? 이 기쁨의 소식을 세상 만방에 전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 여인들은 믿음이 없는 겁쟁이들이었나요? 오히려 겁쟁이는 이 무덤에 나오지 못한 베드로를 비롯한 남성 제자들이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십자가 죽음의 마지막 자리를 함께 했던 매우 용감한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에 겁먹고 무서워했던 것일까요? 예수의 부활 자체였습니까? 아니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늘로 가시지 않고 다시금 갈릴리로 가서 저들을 기다리신다는 말 때문이었습니까?


오늘 본문 마지막 말씀도 의문이 생깁니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놀라 마지않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시고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다.” 왜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시는 것입니까? 이 기쁨의 소식은 널리널리 알려야 하는 소식이 아니었던가요? 예수께서 막는다고 해서 막아지는 것일까요? 이런 소식은 막으면 막을수록 더 널리 퍼져나가기 마련인데, 예수는 역설적으로 이를 노린 것일까요? 아니면 신학자들이 얘기했던 것처럼 마르코가 기획해낸 메시야 비밀 신학의 일부일까요? 아니면 예수를 단순히 육신의 병으로부터 해방과 구원을 가져오는 기적 행위자가 아닌 십자가 죽음을 통해 진정한 해방과 구원을 가져다주는 사람의 아들로 비쳐지기를 원했던 예수 자신의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의 마지막 결론은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놀랐고, 너무나 놀라서 입이 열렸는데, 그런데 그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얘기를 하면 그건 부활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유대사회를 혼란케 하는 불온한 얘기가 되는 것이고, 이 얘기를 계속하면 그는 빨갱이로 몰려 그 사회로부터 추방을 당하거나 혀가 짤릴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에서 마르코는 그가 평소에 별로 하지 않던 한 단어를 말합니다. ‘탈리타 쿰’(소녀여 어서 일어나라!)


[탈리타 쿰!]


탈리타 쿰 이는 아람어입니다. 아람어는 히브리어의 사촌 언어로 본래 유목민족의 언어였고 천년이상 말해져 왔고, 예수님 당시의 민중 언어였고 상당수의 사해문서도 아람어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이전에 알렉산더대왕의 헬라문명권이 지중해 연안 전역을 점령하고 헬라어로 통일하고 그 이후 로마가 다시 지배하면서 로마어가 공식 언어가 되었기에 장사를 하려면 헬라어를, 관직에 진출하려면 로마어를 말하는 것이 기본이었지만, 민중들은 여전히 아람어를 사용하고 있었고, 그리고 예수는 그가 살던 나자렛 마을이 당시 갈릴리의 수도인 세포리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았기에 어느 정도의 헬라어를 알았겠지만, 아람어로 민중들과 호흡을 함께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복음서의 말씀들은 헬라어로 기록이 되어 있지만, 본래는 아람어로 말해졌던 것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헬라어로 씌어지기 전에 아람어로 씌어졌다고 주장하지만, 아직까지 아람어 원전이 발견된 적은 없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또 다른 아람어를 아시나요? 에파타(열려라) 엘로이 엘로이 라마 사박타니(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또 우리말과 아주 흡사한 발음을 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아바’ 우리말로 하면 ‘아빠’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항시 사용하면서도 이게 아람어인지 모르고 사용하는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이건 무엇일까요? 알아맞히신 분에게 이 선물을 드립니다. 예 ‘아멘’입니다. 그 뜻은 ‘진실로, 꼭 그대로 되게 해주십시오. 동의합니다.’입니다.


이제 오늘 하늘뜻펴기의 결론을 맺어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성서는 영혼불멸을 얘기하는 종교서적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부활은 헬라어로 말한다면 anastasis입니다. 접두어 ana는 ‘두 번’ 혹은 ‘위로부터’ 라는 이중의 의미가 있는 접두어이고 stasis 는 일어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anastasis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두 번 일어선다.’ 곧 우리가 말하는 이 땅의 삶과는 구별되는 하늘나라 부활의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위로부터 오는 힘으로 일어선다’는 말입니다. 이전에는 나의 힘으로 일어섰지만, 이제는 내 힘이 아닌 위로부터 오는 힘 성령의 힘으로 일어선다는 말입니다. 흔히 거듭났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다시’라는 해석과 ‘위로부터’라는 두 해석 가운데 어느 해석이 보다 성서가 말하는 해석에 가깝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성서의 부활을 영혼불멸이라는 영원한 삶을 말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상당한 모순에 봉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자신이 부활하신 것뿐만이 아니라, 그가 복음운동을 하시면서 세 번 죽은 자를 부활시켰습니다. 첫 번째는 오늘 12세 소녀를 부활시켰고, 두 번째는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을 땅에 묻으러가는 장례식 행렬을 멈춰 세워 부활을 시켰고 세 번 째는 아예 무덤 속에서 썩어가는 시체 냄새가 나고 있었던 나사로를 부활시켰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들은 어디에 있나요? 또 죽었나요? 아니면 예수님과 같이 하늘나라에 날아 올라갔나요? 이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주름살도 계속 늘어났나요? 아니면 세월에 상관없이 그대로였을까요? 그리고 보다 근본적인 물음은 아니 여전히 동시대의 다른 사람들은 다 죽어가는데, 혼자 영원히 살아서 뭐 하겠다는 것입니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일이지요? 아버지는 죽어가는데, 딸 혼자 영원히 살아서 뭘 어쩌겠다는 것입니까?


성서가 말하는 부활은 단순히 유한에서 무한으로 넘어가는 영원의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부활 사건이 기록된 성서의 말씀을 보면 공통된 반응이 나오는데, 그건 죽음으로부터의 일어남은 두려움의 사건이었고, 이 두려움은 부활 자체가 두려웠던 것이 아니라, 이는 당시의 세상 권력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정치적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오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은 두려움에 싸였던 것이고 예수는 이를 비밀로 하기 원했던 것이고, 예수를 따라다닌 겁이 없던 여인들조차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외친 ‘탈리타 쿰’의 역사는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서 자유를 잃고 노예로 떠돌이로 방황하며 신음하는 민중들을 일으켜 세우는 깸이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 땅에는 억압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습니다. 한 대당 수천억원이 넘는 비싼 전투기를 성능 실험도 없이 설계도만 보고 구입하겠다든지, 주민들의 동의없이 강정에 해군기지 건설을 밀어붙이고 최근에는 한일군사정보 협정까지도 청와대 주도하에 비밀리에 진행하려다가 국민들의 저항에 부딪히자 불과 한 시간 전에 이를 미루는 국무위원들이 집단 어리석음을 드러냈는데, 저는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있는 미국의 간섭과 지배력에 우리 국민들이 다시 한 번 눈을 뜨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 국민들이 아무리 허리띠를 졸라매고 성공의 가도를 달린다 하더라도 그 진짜 부산물은 우리가 아닌 제 삼자가 통째로 들어먹는 이 미국식 세계 독식자본주의 현실을 좀 알아챘으면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는 성서의 말씀을 통해 병자들이 자신의 믿음을 통해서든 아니면 친구나 가족의 믿음을 통해서든 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을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들 주위에는 많은 이들이 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고, 병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크든 작든 병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기도의 힘이 분명히 역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목사라고 해서 병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병만으로, 육체의 건강함만으로 예수에 대한 믿음을 평가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올림픽 경기에 나가 메달을 따는 선수들이야 말로 누구보다도 믿음이 좋아야 할 것입니다. 병에 관련한 믿음은 그렇게 귀결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 얘기를 좋아합니다. 30년을 불치의 병을 앓고 있으며 병세가 나날이 악화되고 있던 한 신앙인이 친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최근 하느님으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았네.’ 친구는 의아했습니다. 이어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고침을 받았네. 병으로부터가 아니라 병의 두려움으로부터 말일세.” 이것이야 말로 병에 대한 진정한 믿음의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저는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인생이란 어두운 자궁(womb)에서 태어나 어두운 무덤(tomb)으로 가는 것이고, 삶이란 이 두 어둠 사이의 짧고 빛나는 순간이다."라는 얘기로 시작했습니다. 이제 그의 얘기로 끝을 맺고자 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이는 니코스 카잔자키스가 죽기 전에 미리 써놓은 묘비명입니다. 혹 여러분의 묘비명은 준비해 두셨나요. 아니면 달랑 이름 석자만 남기시겠습니까? 그래도 그리스도인이라면, 향린교우라면 뭐라고 한마디쯤 써놓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름보다 더 중요한 말을 무덤을 찾아온 자녀들에게 그리고 손주들이 어려운 순간에 기억할 수 있는 말을 남겨놓아야 하지 않을까요? 훗날 하늘나라에서 만나 ‘왜 그때 말씀하시지 않았느냐?’는 비난을 받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그렇게 한마디라도 남길 수 있다면 예수께서 일으키신 ‘탈리타 쿰’의 부활의 역사는 오늘도 계속 반복될 것이고, 만약 아직도 준비가 되지 않으셨다면 7월 21일 주말에 있을 새로운 예배와 영성 훈련에 참가하셔서 유언장을 작성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고린도후서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본래 부요하신 예수께서 가난해지심으로써 우리는 오히려 부요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다 함께 침묵하심으로 그 부요함이 무엇인지를 깨닫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