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됨의 운명

에 2:1-5; 시 123: 고후 12:2-1-; 막 6:1-13


[평신도의 참 뜻]


평신도라는 말은 교회 목회를 전담하는 목사와 구별하기 위해 쓰는 단어이지만, 이 단어는 잘못하면 평범한 신도의 줄임말로 오해가 되기도 하고 평범한 신도가 있으면 특별한 신도가 또한 있어 그래서 장로는 특별 신도로 자신들은 평신도로 오해하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저는 그래서 이런 오해를 줄이기 위해 오래 전에 목사는 교회 목회자로, 교우 여러분들은 생활 목회자라고 쓰자는 의견을 제시하였지만, 별로 일상화되지는 않고 있고, 권리를 주장하는 <평신도 목회>라는 말은 좋아하지만, 책임과 의무가 강조되는 실상 <평신도 목회자>라는 말은 별로 즐겨 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목사에게는 목회라는 용어를, 교인들에게는 사역이라는 용어를 붙여 구분하기도 합니다만 이도 적절한 용어는 아닙니다. 목회도 사역이고, 교인들이 하는 일도 단순히 어떤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를 돌보고 있으니 목회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베드로 사도는 우리 모두를 향해 “여러분은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라고 선포했습니다. 이 사제를 다른 성서번역에서는 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 흔히 여러 목사님들이 자신들을 향해 기름부음을 받은 종이라는 표현을 씀으로 신도들과 구별하고 설교하는 단상에는 기도하는 장로 외에는 올라오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너무나 고루하고 예수님의 정신에도 어긋나는 일입니다. 오히려 목사들만이 기름부음을 받은 종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 목사들의 경우 자기 말에 스스로 취하여, 중세시대에 왕이 절대 권력을 휘두르듯이 교회 안에서 군주 행세를 하다가 도가 지나쳐 여러 가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교회 분란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목사들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아닌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방편으로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사회적 책임을 유기하는 달콤한 말씀에 너무 현혹이 되다보니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 스스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여 어느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을 충실히 선포하는 참 교회인지를 잘 판단하여야 합니다. 그저 꿩 잡는게 매다라는 식으로 이리저리 몰려다니니까 목사들도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이상한 일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종?]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런 식으로 자신들만이 특별한 하느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특권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서기관들, 율법학자들입니다. 예수께서는 저들을 뭐라 비난하셨나요? “하늘나라의 문을 닫아 놓고는 사람들을 가로 막아 서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못 들어가게 한다.” 고 비난하셨고, 황금에 눈이 어둡고, 물질의 십일조는 율법의 말씀으로 강조하면서 정의와 자비 그리고 신의와 같이 더 중요한 율법의 말씀들은 실천하지 않는, 속은 더럽고 겉만 깨끗한 회칠한 무덤으로 비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저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저주받았다고 말하는 죄인들, 병자들, 약자들이야 말로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이자 하느님 나라의 주인임을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말은 성령의 인치심을 받았다는 말로 목사만 기름부음을 받은 종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기름부음을 받은 종입니다. 하느님께서 목사 안수할 때 쓰는 기름 따로 장로 안수할 때 쓰는 기름 따로 권사 따로 집사 따로 교사 따로 찬양대원 따로 부장 따로 직급에 따라 따로따로 등급이 다른 기름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꼭 같습니다. 제1성서 시대에는 사제를 세울 때에는 진짜로 뿔에 기름을 넣고 이를 머리에 부어서 사람을 세웠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을 히브리어로 옮기면 뭐가 되지요?(메시야) 헬라어로 옮기면 뭐가 되지요?(그리스도)


지난 주 제가 목회생활 중 처음으로 하늘뜻펴기를 하면서 선물을 주는 깜짝쇼를 했는데, 갑자기 생긴 몇 개의 차를 소비하기 위한 방식으로 채택한 것이고, 2년 전 세계교회 성서 본문 읽기(렉셔너리)를 채택하면서 목사가 단상에서 일방적으로 전하는 하늘뜻펴기가 아닌 쌍방의 대화식의 하늘뜻펴기를 위해 미리 본문을 읽고 질문 혹은 깨달음을 보내달라고 했는데, 처음에는 몇 분이 열심히 하더니 이제는 거의 하는 분이 없어지고 말아, 이를 회복하기 위한 방식으로, 깜짝쇼를 한 것입니다. 이런 것은 한번만으로 족한 일이고 그것도 갑작스레 차가 몇 봉이 생겨서 한 일이었기에 더 이상 할 생각이 없었는데, 지난 주 한 젊은 여성분이 예배가 끝나고 밖에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시더니 저에게 CD 5장을 건네면서 하시는 말이 ‘오늘 설교 중 선물 주는 일은 처음 보았는데, 너무 좋았어요. 이건 평화를 주제로 제가 만든 CD곡들인데, 다음 주에도 이렇게 하시게 되면 제 CD를 선물로 주셨으면 합니다.’ 선물도 선물이지만, 한두 분은 목사님 오늘은 그 선물 때문에 졸지 않았네요. 하시어서 두 번 째 선물 행사를 합니다. 혹 여러분들 가운데서도 이런 행사용 선물이 있으면 가져오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좋은 일에 쓰도록 하겠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을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옮기면? 제1성서 시대에는 이렇게 기름부음을 받아 세운 3 종류의 직분자가 있었는데,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런데 실제로 기름부음을 받지 않았으면서도 메시야라고 불리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지요? 이사야 45장 1절에 보면 “야훼께서 당신이 기름 부어 세우신 고레스에게 말씀하신다.” 고레스왕은 페르샤제국의 왕으로 바벨론제국을 무너뜨리고 바벨론에 포로로 붙잡혀 왔던 유대인들을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한 사람입니다. 그가 좋은 일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속국들의 환심을 사기위한 정치적 배려였지, 그게 무슨 하느님의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그런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성서는 그를 향해 기름부은 종 메시야라는 가장 거창한 칭호를 갖다 붙였습니다. 너무 아전인수식의 해석입니다. 바벨론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무자비한 침략자들이고 객관적인 역사에 의하면 이는 단지 바벨론 제국에서 페르샤의 제국이라는 또 하나의 지배자로 이름만 바뀐 것이지 고레스 왕으로부터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오고 백성들의 삶이 윤택해지는 그건 하느님의 나라가 온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페르샤 국민들이 이 글을 읽는다면 별 미친놈들 다 있구만, 아니 우리나라의 왕을 무슨 유대인들이 믿는 신 야훼가 기름 부었다고?


[사람됨의 운명]


사실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말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자라는 의미가 있어 특권층인 듯이 보이지만, 실상은 자신의 개인 의지는 없는 오직 하느님만의 뜻과 의지만이 그를 통해서 나타난다는 의미가 더 깊게 담긴 표현입니다. 신앙의 권리보다는 책임이 훨씬 강조된 말입니다. 오늘 예언자 에제키엘에게 하느님은 명령하십니다. “너 사람아 일어서라.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여기서 ‘너 사람아’ 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앞 1장에서 야훼 하느님의 매우 웅장하고 거룩한 모습을 설명한 다음, 이에 대비하여 인간들의 유한함과 연약함을 상기시키는 말입니다. 히브리 언어로 보면 ‘너 사람아’라고 번역된 단어는 ‘아담의 아들(ben adam)’입니다. 아담은 흙으로부터 빗어진 인간을 말합니다. 에제키엘을 아담의 후손이라고 부른 직후 이어서 하느님은 기운을 불어넣으시어 일으켜 세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창세기 2장에서 흙으로 사람을 빚은 다음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살아있는 영을 만드셨다는 말씀과 동일합니다. 이는 에제키엘 너는 육으로 본다면 보잘 것 없는 사람이지만, 나의 말씀이 너 안에 들어가면 너는 용기 있는 하느님의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 이는 창조 사건을 기억하게 함으로 야훼 하느님께서는 이 바벨론 이국 땅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로로 붙잡혀 있는 적지에서 재창조의 사건이 일어날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아는 대로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을 그발강가로 부르시어 골짜기에 즐비하게 널려져 있던 마른뼈들이 하나의 군대로 일어나는 환상을 보여주시고, 분단된 북왕국과 남왕국이 하나의 통일된 국가로 부활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 속에 우리가 잘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선택한 백성을 이렇게 부릅니다. “그들은 조상 때부터 오늘까지 나를 거역하기만 하였다. 그 낯가죽이 두꺼운 자들, 그 고집이 센 자들, 그런 자들에게 너를 보낸다. 본래 반항하는 일밖에 모르는 족속이라 듣지도 않겠지만, 듣든 안 듣든 내 말을 전하라.”


[씨앗 신앙과 열매 신앙]


선택받은 자들 또한 쉬이 교만해질 수 있다는 경고의 말씀을 듣게 되고, 또 저는 여기서 말씀을 전파하는 자의 사명을 깨닫습니다. 듣든지 안 듣든지. 현대 시대는 뭐든지 일의 결과를 숫자로 말합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몇 킬로그램이냐? 학생은 점수로? 회사원은 이익이 얼마를 남겼는지? 건강은 콜레스트롤 수치로, 집은 가격으로, 현대인들은 뭐든지 숫자로 표시되는 결과로 성공의 진위를 판단합니다. 최근에 어떤 목사님이 제가 보기에도 아주 좋으신 분이시고 내부에도 큰 문제가 없는데,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책임을 느끼고 사임을 하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교인들로부터 보이지 않는 압력을 받았겠지요. 교회마저 세상적 수치에 사로잡힌지 오래입니다. 아무리 인품이 훌륭하고 사랑이 넘쳐나는 목사라도 교인이 늘지 않으면 그건 능력 없는 목사이고 또 교인이 늘어도 헌금이 늘지 않으면 인정받기가 힘듭니다. 신앙마저 질이 아닌 양으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하느님은 에제키엘에게 말씀 선포의 책임을 맡기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놈들, 어차피 말을 안 듣는 놈들이다. 그러나 듣든지 안 듣든지 내가 저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가서 전하라. 너는 씨앗만 뿌려라. 결과는 내가 책임지겠다.” 에제키엘은 여기에 대해 거역할 수 없습니다. 이 명령은 하나의 운명으로 다가옵니다.


우리의 신앙이나 목회도 이런 태도가 필요합니다. 열매에 연연해하지 않고 나는 오직 씨를 뿌린다는 자세. 결과에 대해 연연하지 않는다면 이는 곧 신앙에 대한 운명적 자세를 바랍니다. 함석헌선생은 ‘신앙이란 남 속에서 나를 보는 것이요, 나를 위해 믿는 신앙이 아니고 장차 오는 세대를 위해 믿는 믿음이 정말 나를 구원하는 믿음이다.’라고 했습니다. 열매가 아닌 씨앗 그리고 씨?이라는 화두는 두고두고 곱씹어야 말씀입니다.


프로이드를 스승으로 모시고 함께 하다 스승을 비판하고 자신의 독자적인 학문의 길을 따라 나선 칼 융은 자서전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나는 아무도 따라오려고 하지 않고 따라 올 수도 없는 옆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러나 결심은 섰고, 그것이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의 전존재는 진부한 생활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그 무엇을 찾고 있었다.” 운명이란 숙명과 같아 거역할 수 없는 길을 말하고 이를 신앙으로 표현하면 순명이 됩니다. 운명이나 숙명은 거역할 수 없다는 점에서 약간은 비극적인 느낌이 들지만, 순명은 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같은 길을 걷지만, 전자에 비해 기쁨과 감사가 담겨 있습니다.


[세 부류의 사람들]


폴 틸리히라는 20세기의 걸출한 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의 세 종류가 있다.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autonomy의 자율적인 사람, 자신의 밖 곧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heteronomy의 타율적인 사람 그리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theonomy의 신율적인 사람. 글로는 이렇게 명백하게 셋으로 나뉘지만, 사실 신앙인들이 하느님의 뜻을 좇아산다고 하지만, 정말 자신안의 욕망을 버리고 자신을 비워 그 빈 마음에 하느님의 말씀으로 채워 세상을 향해 조금도 굴함 없이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많은 경우 신율적인 인간이라고 말하지만, 그 안에는 자신의 욕망 그리고 세상의 가치들이 변형된 모습으로 숨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세상에 실패하면 신앙에도 실패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신앙의 근본이 어긋나 있는데,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 또한 변화받기 이전의 사울은 자율적이고 율법이라는 타율에 매인 인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신앙을 자기 잣대로 평가하고 이를 방해하는 일에 앞장을 서기도 했었습니다. 그런 그가 신앙의 신비 체험을 자랑함으로 분열을 일으키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도 신앙의 신비한 체험을 말하려면 얼마든지 있다. 나도 비몽사몽간에 하늘에 끌려 올라가 신비한 말을 들었다. 그런데 그는 이 일을 말하면서 이 사람을 마치 제3자인 양 ‘내가 잘 아는 그리스도 교인 하나가’ 라고 말하면서 그는 이런 신앙의 신비한 일을 더 이상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그는 자신의 약점을 자랑하겠다고 말합니다. 그에게는 끔찍한 병이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그것을 안질 혹은 시도 때도 없이 엎어지고 쓰러져서 몸부림쳐야 하는 간질병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죽은 자까지도 살려냈던 바울이 이런 예측할 수 없는 몹쓸 병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하느님의 사도로서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이 되겠습니까?


[신율적 인간의 특성-약한 것을 자랑]


그래서 그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세 번이라고 숫자를 표현했지만, 이건 완전을 뜻하는 말이지 세 번 기도하고 말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 이것이 복음 사역에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되시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지난번에도 하느님 뜻을 전하다가 갑작스레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쓰러져서 몸부림을 쳐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저의 그 모습을 보고 “자기 병도 고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다른 사람의 병을 고치고, 바울의 병도 고치지 못한 신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며 비웃고 떠난 사실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주님!” 그는 몇 달 몇 년을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큰 깨달음이 왔습니다.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사람들로부터 칭찬도 많이 받았고, 너를 따르는 제자들도 많지 않느냐? 너에게 그런 병이라도 없다면 너는 잔뜩 교만해져서 내 자리에 올라섰을 것이다. 그러니 그 병은 너의 몸에 아픔을 주는 가시가 되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너의 너 됨을 위한, 사람됨을 위한 은혜의 가시이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물론 처음부터 이런 깨달음이 왔던 것은 아닙니다. 오랜 시간 수없이 기도하고 받은 응답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그 후로 바울은 자신의 약점을 오히려 자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약점에 불구하고 기쁨을 잃지 않고, 그 약점에 감사하였습니다. 하박국 예언자가 말한 ‘때문에’가 아닌 ‘불구하고’의 신앙입니다. 불구하고 감사하는 바울의 모습을 보고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리를 깨달았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약해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모욕과 빈곤과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습니다.” 여러분 함께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로 인해 모욕을 받아본 적이 언제였습니까? 예수로 인해 빈곤해져 본적이 언제였습니까? 여러분 그리스도로 인해 박해를 받아본 적이 있었습니까? 여러분 예수 이름으로 인해 곤궁한 경험을 당해 본 적이 있으셨나요? 그리고 이런 억울하고 비참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주님을 찬양하고 하느님께 감사해보신 적이 있으셨나요?


파가니니는 이탈리아가 낳은 천재 바이올린니스트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열정적으로 연주를 했던 모양인지, 연주 도중 줄 하나가 끊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남은 세 줄로 연주를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 또 한 줄이 끊어지고 조금 있다 또 한 줄이 끊어졌습니다. 청중들은 이 연주야 말로 파가니니에게 최악의 연주회가 될 것을 생각했습니다. 파가니니는 잠시 음악을 멈추고 청중을 바라보더니 남은 한 줄로 완벽한 연주를 마였습니다. 바로 이 사건이 지금까지도 파가니니를 탁월한 연주가로 기억되게 합니다. 가장 낮은 줄은 G 선입니다. 물론 바흐의 작품 가운데 G선상의 아리아란 작품이 있습니다만, 이 얘기와는 직접 관련은 없습니다.


[신앙의 G 선상의 아리아]


우리는 누구나가 인생을 시작할 때 네 줄로 자기 인생을 노래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의 줄이 끊어지고, 사랑의 줄이 끊어지고, 건강의 줄이 하나하나 끊어질 때가 있습니다. 자신이 의지할만한 줄이 다 끊어지고 한 줄만 남았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 한 줄만으로도 얼마든지 G 선상의 아리아와 같은 음악을 연주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그 남은 한 줄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줄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나의 자랑 줄이 모두 끊어지고 그래서 세상의 나는 완전히 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영광을 드러내는 순간이야 말로 인생의 진정한 승리의 순간이 아닐까요? 이때에야 비로소 삶이 무엇인지, 인간됨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대니엘 고들림이란 작가는 한 할아버지가 사춘기를 보내며 인생에 대해 고민하는 손주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샘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책에서 인생의 고통에 대한 이런 지혜를 전합니다.


샘, 너는 앞으로 더 많이 잃고 다 많이 아플거다. 네가 상실감으로 아플 때 그 아픔을 잊게 해 줄 대체물을 찾지 않기 바란다. 그 아픔도 다른 모든 감정들처럼 그저 지나가는 것일 분이다. 아픔을 겪으면서 역경에 대처하는 법을 알게 될 것이다. 아픔의 건너편에서 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네게 고통을 잊게 해 주겠다거나 혹은 고통을 없애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귀 기울리지 않기 바란다. 고통은 없애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아무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법이니까 말이다. 네가 입은 상처가 아무리 깊더라도 그 상처가 아무는데 필요한 모든 치유의 힘은 ’네 안에‘ 있단다. 상처를 아물게 하려면 고통을 알아주고 이해해주고 보살펴주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이란다.


사람됨의 운명 그건 어떻게 말하면 아픔과 고통입니다. 이를 순명으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는 비결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앙입니다. 나이가 들면 왜 젊었을 때, 이 비결을 깨닫지 못했을까 하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를 찌르는 가시가 아니라 나를 살리는 은혜임을 깨달을 때, 인간됨의 운명은 하늘 부름의 거룩한 잔치로 변화하게 됩니다.


어디를 가나 존경받고 환영을 받던 예수님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는 물론 고향 사람들이 예수를 인간적 모습으로 기억했기 때문이지만, 마르코는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바로 이어서 12제자를 여러 촌락으로 파송하는 얘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고향에서 배척받은 일은 예수님에게도 하나의 아픔이자 가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을 통해 자신이 모든 촌락을 다니고자 하셨던 일을 변경하여 제자들에게 악령을 추방하는 권세를 주어 파송하는 곧 제자들과 함께 하는 동역의 길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여기에도 평신도 목회의 원형이 담겨 있습니다. 포로의 절망 가운데 살아가던 에제키엘에게 ‘너 사람아 일어서라!’는 하늘 음성의 축복이 임하였듯이, 여러분의 인생의 가시들 속에 숨어 있는 하느님의 은혜를 깨닫는 축복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약해졌을 때 내 안의 그리스도가 드러남으로 곧 참 나가 강해진다고 하는 바울로 사도의 고백이 오늘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