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부름과 정치 권력
아모스 7:7-15; 에페 1:3-14; 마르코 6:4-29


[향린교회의 특징]


사람마다 자기만의 특징이 있듯이 교회들도 저마다의 특징들이 다 있습니다. 향린교회가 가진 특징이 여럿 있지만, 아마도 가장 두드러진 분야는 국악예배와 사회선교라고 생각합니다. 정관 제정이라든가 교인 500명이 넘으면 분가를 하고, 생활목회자(평신도) 하늘뜻펴기와 목사/장로임기제, 예산 30% 선교비 배정 등 또한 자랑스러운 부분입니다만, 이런 일들은 이제는 여러 교회들도 하고 있고, 또 어떤 분야에서는 우리보다 훨씬 더 잘하는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분가만 하더라도 한 두 교회가 아닌 여러 교회를 분가한 교회들도 있고, 현재 우리가 추진하는 것과 같이 일부 교인이 나가는 형태가 아니라 아예 한 번에 4개로 분가한 경우도 있었고, 최근 분당의 한 대형교회는 앞으로 10년 내에 교인의 반 이상 75%의 교인들을 다른 교회로 가도록 하겠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이 교회는 학교 강당을 빌려서 예배를 드려오다가 최근 650억원을 들여 교육관 빌딩을 구입했는데, 이 또한 10년이 되어 원금상환을 마치게 되면 이를 되팔아 모두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신선한 충격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30% 선교비 지출 또한 50%를 넘어 하는 교회들도 있고 목사장로 임기제 또한 여러 교회들이 실시하고 있어 이런 일들은 이제 더 이상 향린교회만의 자랑거리는 아닙니다.


그래 현재 향린교회를 향린교회답게 만드는 가장 큰 특징은 {국악예배}와 {사회선교}입니다. 국악예배는 다른 교회들이 쉽게 시작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앞으로도 향린교회의 자랑으로 오랫동안 유지가 될 것입니다. 20년 가까이 국악예배를 드려오면서 저변확대를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우려 왔고 수천 권의 국악찬송가가 배포되었습니다만, 기독교 자체가 서양문화의 틀 안에서 전해졌고 아직까지는 서구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어 서구에 대한 환상이 깨어지기 전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서양교회에 갔는데 우리 가락의 노래를 부르면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하듯이 서양인들이 우리나라의 예배를 참여하면서 왜 우리 것을 부르지 않고 자기들 노래를 부르고 있는 점에 대해 매우 의아해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찬송가가 될 수 없다고 여기는 아리랑을 자신들의 찬송가에 넣어 부르고 있습니다.


저는 음악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서양 교회의 다양한 음악을 접하면서 우리 국악찬송도 좀 더 다양화되고, 그리고 테제음악과 같이 단순하면서도 깊은 종교적 영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그런 찬송가가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을 길러내어야 하고 장기적인 후원이 필요합니다. 국악예배는 우리의 통일 후를 생각한다고 하면 이는 정말 소중한 자산입니다.


그리고 우리 향린교회의 또 하나의 특징은 사회선교입니다. 사회선교라는 말은 다른 교회들도 많이 사용합니다만, 저희 교회가 말하는 사회선교는 보다 폭이 넓습니다. 정의 평화 생명이라는 하느님 나라 가치에 기초하여 사회적 약자 곧 국가권력이나 사회집단으로부터 부당하게 인권을 유린당하는 자들을 위한 정의의 선교, 민족의 자주와 통일을 위한 평화의 선교, 그리고 자연 환경보존을 위한 생명의 선교를 말합니다. 지금 저희 교회는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라’와 ‘제주해군기지건설을 반대한다’는 현수막과 ‘민중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세입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현수막이 걸려 있습니다.


국가보안법 철폐는 홍근수목사님 때로부터 지속적으로 외쳐오고 있고 남한 내에서는 유일한 공개 현수막입니다. 국가보안법은 인간을 이념의 노예로 삼아 인륜의 도리를 파괴하는 악법 중에 악법입니다. 말이 국가보안법이지 실은 권력안보법입니다. 권력을 비판하는 정당한 소리들을 빨갱이라는 올가미로 뒤집어 씌우고 자갈을 물려왔습니다. 유엔의 회원국으로 수많은 나라들이 대사를 파견하고 있지만, 남한은 북조선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접촉을 일절 금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국가 대표끼리 만나면 정상회담이라고 말합니다. 한편으로는 반국가단체라고 백성들을 졸라매고 다른 한편에서는 정상회담이라고 축하하는 모순의 극치를 보여주는 법이 바로 국가보안법입니다.


이 법은 본래 일제가 독립군을 색출하기 위한 법령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하여 이승만, 박정희군사독재 시대에 정적을 때려잡는 법으로 이용하여 왔습니다. 빨갱이로 처단한 많은 사람들이 무죄로 선고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김대중대통령은 자신이 이 법으로 인해 사형까지 당할 뻔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법을 어쩌지 못했고, 노무현대통령 또한 자신이 법률가로서 이 법은 박물관으로 보내야 한다고 했지만, 정작 정치적 힘에 밀려 손을 놓고 말았습니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천안함에 부정이 있다고 믿고 있지만,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이놈의 법 때문입니다. 아무도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못하는 이 국가보안법의 폐기를 주장하는 향린교회의 외침은 바로 이 남한 사회의 양심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입니다. 우리 교회 또한 단순한 구호로만 그치지 말고 국가보안법의 모순과 폐해를 국민들에게 알려 이를 폐지하기 위해 지속적인 실천 행동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주해군기지 그것이 정말 실재하는 북의 침입을 위한 기지라면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북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남쪽 끝에다 해군기지를 만드는 것은 이곳을 지나가는 미핵잠수함이나 항공모함을 위한 것입니다. 민간용 크루즈 항도 함께 만든다고 합니다만, 그건 다 대국민 속임수입니다. 강정은 바람이 워낙 심하게 불어 일 년에 3분지 일 밖에 배를 댈 수가 없습니다. 미국이 같은 목적으로 스코틀랜드에 또 하나의 해군기지를 계획하고 있는데, 주민들의 반대가 워낙 심해 시작도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저 미국의 똘만이 남한만이 여기에 꼼짝 못하고 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8월 초에 만 명이 참여하는 제주평화걷기가 있는데, 함께 참여하여 기필코 이를 막아내도록 하십시다.


또 하나의 현수막인 민중생존권 문제도 요즘 용산참사의 실상을 그린 [두 개의 문]이라는 영화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작년 이곳 명동 3지구의 마리사태를 통해 자본가들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폭력의 실상을 매우 생생하게 경험했습니다. 우리 또한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남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얘기가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지난 당회는 장기발전위원회 안에 재개발대책위원회와 미래건축위원회를 신설하였습니다. 60주년을 맞이하면서 분가뿐만이 아니라 명동 향린교회의 미래도 보다 구체화할 수 있도록 비전을 제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간 수많은 작은 교회들이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자본의 힘에 밀려 쫓겨나갔는데, 우리가 똘똘 뭉치기만 하면 이는 얼마든지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뒤에는 정의의 하느님 야훼가 계시고 또 그간 우리가 함께 했던 수많은 정의의 힘들이 있기에 조금도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렇게 얘기하지만, 이곳에서 향린교회를 지켜가는 일은 단순히 우리 교회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이 땅의 약자들을 위한 정의의 선교의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다른 교회들이 전연 하지 않는 사회 정의를 위한 선교 활동들, 약자들 편에 서다보면 재벌과 맞서야 하고 그러다보면 재벌을 비호하는 현 정치 권력에 맞서게 될 때가 많습니다. 강정, 재능, 쌍용의 문제는 분명 우리 사회의 양심을 묻는 가장 핵심적인 사항이고 예수께서 지금 계시다면 당연히 이런 현장에 함께 하실 것입니다만, 대다수의 교회들이 이런 문제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래 제가 무슨 기독교를 대표할만한 사람도 아니지만, 이런 현장에 가면 목사님들이 보이지 않아 자연적으로 기독교를 대표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그러다보니까 몸은 하나인데, 오라고 하는 곳이 여럿인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현장에 참여하는 일이 힘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저는 이 일이 바로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인 것을 알기에 기쁨으로 참여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임보라목사도 강정해군기지를 반대해서 제주에 갈 때마다 몸으로 저항하다 지금 3건의 재판이 진행 중에 있고 교우 몇 분도 함께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또 여러분이 신도회별로 재능 기도회에 참석함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여러분이 다 바쁘시지만, 교회가 깊이 관여하고 있는 몇 개의 사회선교부분에 있어 최소한 하나정도는 직접 참여를 하고 그리고 건강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권사님들과 어르신들은 뒤에서 기도로 후원하는 그협력 조직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사회부원 한 두 사람이 여러 일에 관여하다보면 탈진하는 일이 간혹 생기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짐을 나눠지라는 사도 바울로의 말씀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러기 떼는 멀리 날아갈 때 V 자의 편대를 이루고 젊은 기러기는 앞에 서고 맨 앞은 가장 힘이 많이 들기에 서로 교대하면서 그리고 뒤에 있는 나이든 기러기들은 까악까악 하면서 응원을 합니다. 그러다가 한 마리가 병이 들어 날수가 없게 되면 건장한 두 마리가 함께 거하면서 치료를 돕는다고 합니다. 격려하고 사랑을 나누는 기러기 떼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목회운영위원회에서는 교회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교우님들을 참여토록 하기 위한 방법을 논의 중에 있습니다. 앞으로 접촉이 오면 이사야와 같이 “예 전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 이제야 전화하시는 것입니까? 뭐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라고 답하기를 부탁드립니다.


향린 40주년을 맞아 그러했듯이 60주년을 맞아 예언자적인 교회로서의 위상을 다시 한 번 이 사회에 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단순한 행사뿐만이 아니라 기존의 조직들이 다시 한 번 힘을 모으는 갱신운동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분가교회도 좀 더 빨리 진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분가의 시기나 장소 조직에 관련해서는 지금까지 계속 논의하여 오고 있고 오늘 김추령집사님 댁에서 따로 예배를 드리면서 논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만, 내년 5월 60주년을 맞아 분가교회가 진행이 된다고 하면 교회 내적으로 매우 어수선한 분위기가 형성이 되어 60주년 행사를 제대로 치루지 못하게 되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올해 안에 분가를 하고 내년 5월에 가서는 분가교회 설립 예배를 통해 이를 축하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향린교회도 몇 개월의 시간을 통해 내부 조직을 다시금 다져내어서 60주년을 행사를 잘 치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와 아모스]


오늘의 본문 아모스는 정의의 예언자로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나 야훼가 선고한다. 이스라엘이 지은 죄, 그 쌓이고 쌓인 죄 때문에 나는 이스라엘을 벌하고야 말리라. 힘없는 자의 머리를 땅에도 짓이기고, 죄 없는 사람을 빚돈에 종으로 팔아넘기고, 미투리 한 컬레 값에 가난한 사람을 팔아넘긴 죄 때문이다.” 이게 3천년 전 저 팔레스타인 땅에서만 일어난 일일까요? 지금 남한 인구 상당수가 빚을 지고 사는데, 그저 몇 십만원의 사채로부터 수 억원의 은행융자의 빚을 지고 살아갑니다. 엊그제 뉴스시간에도 나오더군요. 사채업자들이 몇 십만원의 빚을 갚지 않는다고 와서 폭력을 행사하고 힘없는 여인들에게 몸을 요구하는 파렴치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빚 독촉에 시달려서 자살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비싼 구두는 몇 백만원도 하지요. 그러니까 빚돈에 죄 없는 사람을 종으로 팔아넘기고 사람의 가치가 신발 한 컬레보다 못하다는 아모스의 외침은 바로 오늘의 우리 시대를 고발하는 얘기입니다.


이런 구절도 나옵니다. “바른 일 하려는 사람은 하나도 없구나. 궁궐에는 권력으로 남을 등쳐먹는 자들뿐이다.”(3장 10절) 여기서 ‘궁궐’을 ‘청와대’로 바꾼다고 해서 문제가 됩니까? 이명박대통령의 형 이상득씨를 비롯한 청와대 실장 관료 20명 가까이가 현재 비리에 걸려 감옥에 갇혔거나 재판중입니다. 여러분 이것도 정치검찰이 막다막다 어쩌지 못해 기소한 최소한의 사람입니다. 청와대는 지금 일종의 범죄 집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는 말이 그대로 실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뇌물 비리 액수라는 것이 그저 신문에 난 그만큼이라고 보시면 안 됩니다. 언제나 청와대에 관련해서 신문에 나는 비리 기사는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만은 기억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이를 누가 바로잡아야 합니까? 국회의원들이 바로잡아야 합니까, 검찰이 바로 잡아야 합니까, 법관들이 바로 잡아야 합니까? 여러분 이 사람들이 다 한 통속인 것 아시잖아요? 범죄 사실이 분명하여 검찰이 고발해도 국회의원들이 나서서 보호하잖아요. 검찰은 또 뭡니까? 위장전입 두건에 다운계약서 3건과 이에 따른 세금탈루 거기다 저축은행 로비에 연관되어 있는 검사를 검찰의 대표로 대법관 후보로 내세웠습니다. 자기들 나름대로는 그중 가장 깨끗하다고 해서 이 사람을 내세웠다고 보는데, 가장 깨끗한 사람이 이정도이니 다른 사람은 어떠하겠습니까? 이게 오늘의 검찰의 실상입니다. 또 다른 대법관후보는 크레인에 올라가 한진중공업 해고를 이 사회에 고발했던 김진숙지도위원에게 하루 백 만원의 벌금을 매겨 모두 3억원의 벌금형이 쌓였는데, 이분이 교회 사건을 다루면서 법정에서 서로 화해하는 기도를 하도록 하고 아멘으로 응답한 기독교인 판사라고 하니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부산과 울산을 성시화하는 발언을 하였다고 하는데 서울시를 성시화하여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발언을 한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는 성시화운동 기도회에서 만나 서로의 의기가 투합하지 않았을까 그런 추측을 해봅니다.


오늘의 우리 현실이 이러한데 이 사회의 잘못된 것을 누가 바로 잡아야 하는 것입니까? 교회가 바로 잡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아모스 당시 성전이 그걸 하지 못했습니다. 재벌과 권력자들의 편에 섰습니다. 그래 아모스 예언자가 당시 성전 곧 오늘의 교회를 향해 하느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하지 않습니까? “너희의 순례절이 싫어 나는 얼굴을 돌린다. 축제 때마다 바치는 분향제 냄새가 역겹구나. 너희가 바치는 번제물과 곡식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 거들떠보기도 싫다. 그 시끄러운 찬양의 소리를 집어치워라, 거문고 가락도 귀찮다.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흐르게 하여라.”(5장 21-24절)


[아모스는 생활목회자]


교회가 바르게 서고 바른 말을 외쳐야 하는데, 자기 성장에만 매몰되어 부패에 일조하고 있으니까, 야훼 하느님은 교회마저 외면하시겠다는 것 아닙니까? 예배고 찬양이고 헌금이고 다 집어치우라고 말씀하고 있잖습니까?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십일조를 드리기 위해 환전하던 상들을 뒤집어엎고 희생제사용 동물을 파는 봉사자들을 채찍을 들어 쫓아냈고, 결국 하시는 말씀이 “이 성전 허물어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바른 소리를 교회가 외쳐야 한다고 하면 누가 해야 합니까? 목사가 합니까? 이럴 때 평신도라고 뒤로 빠지지 마세요. 뒤로 빠지면 진짜 평범한 신도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아모스가 당시 제사장이었나요?


아모스를 향해 제사장 아마지야가 말합니다. “이 선견자야 당장 여기를 떠나 유대나라로 사라져라. 거기 가서나 예언자 노릇을 하며 밥을 벌어먹어라.” 이 말은 너는 그럴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너는 별 볼일 없는 평신도라는 말입니다. 그래 아모스가 대답합니다. “그래 나는 본시 예언자가 아니다. 나는 그냥 양을 치는 목자요 돌무화과를 가꾸는 농부이다. 그런데 야훼 하느님의 영이 갑작스레 나에게 임해 나는 그분의 분부에 따라 왔을 따름이다.” 신학교를 나오고 목사 안수를 받아야 예언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 제사를 담당해야 하는 사제는 그런 교육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그런 교육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누구라도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히면 아모스와 같은 예언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려고 미리 정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죄에서 구출되었습니다.” 이 구출은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가는 승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구출은 세상으로부터 자유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는 자유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성령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이 자유는 바로 세상의 가치에 매몰된 내가 아닌 세상의 가치를 거슬러 올라가는 저항의 자유, 정의의 외침을 말합니다.


[세례요한과 헤로데 그리고 예수]


오늘 마르코복음서의 본문 말씀을 보면 당시 세상이 예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말합니다. “그에게서 그런 기적이 힘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틀림없다. 아니 엘리야가 다시 온 것이다. 옛 예언자가 온 것이다.” 엘리야는 아합왕과 이세벨왕후의 부당한 정치권력에 저항하여 하느님의 정의의 목소리를 밝히 폈던 예언자입니다. 옛 예언자란 백 여년 전 헬라제국의 식민통치를 물리치고 유다왕국의 독립을 쟁취했던 유다스 마카베우스로 저는 이해합니다. 이 얘기를 들은 당시 로마의 똘만이었던 헤로데왕은 말합니다. “그가 바로 요한이다. 내가 목을 벤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요한이 왜 참수형을 당했나요? 헤로데가 자기 이복동생의 부인인 헤로디아를 강제로 빼앗아 재혼을 했는데, 이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던 세례요한을 참수시켰던 일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그가 다시금 살아났다고 공포에 쌓인 것입니다. 사실 오늘 성서 이야기에서 손님들이 모인 왕의 잔치자리에서 딸이 춤을 추자 소원을 말하라고 하고 딸이 엄마에게 물어 세례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하자 그의 목을 베어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채로??) 쟁반에 담아 주었다고 하는 이 기사는 실제의 기사라기보다는 당시의 유언비어로 정치 권력자들을 조롱하는 민중들의 해학과 한이 담긴 민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성서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질문은 마르코 저자가 이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우선 헤로데왕이 예수가 바로 세례요한이다라는 말은 예수 또한 세례 요한과 같이 국가권력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예수 또한 그로 인해 세례 요한과 같이 살해당할 것임을 예고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알기 힘든 또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가 숨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자 마르코가 즐겨하는 문학적 양식이 뭐라고 했습니까? 샌드위치 양식. 하나의 이야기를 잘라 중간 부분에 또 다른 얘기를 집어넣어 두 사건이 별개의 사건이 아닌 하나로 읽어야 함을 암시하는 문학적 양식인데, 이를 우리말로 하면 쌈밥 양식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오늘 마르코 본문을 통째로 놓고 앞뒤를 보면 바로 앞에는 지난주에 읽어 드렸던 열두 제자를 둘씩 짝지어 여러 촌락으로 파송하는 얘기가 있고, 이 본문 바로 뒤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들이 돌아와서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일을 예수께 낱낱이 보고하였다.” 12제자가 복음전도에 나갔다가 돌아온 얘기 사이에 세례요한의 죽임당한 얘기가 끼어 들어가 있습니다. 왜 이렇게 쌈밥으로 싸서 얘기를 하는 것입니까? 그냥 따로 먹어도 위속에 들어가면 섞이기는 매일반입니다. 왜 쌈으로 싸서 먹는 것입니까? 쌈밥을 먹는 이유를 아는 사람은 왜 예수께서 12제자를 파송하고 그들이 돌아온 이야기 사이에다 세례요한의 이야기를 삽입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이 말은 12제자의 파송의 운명도 세례 요한이 그러했고 스승 예수가 그러했듯이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어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제자와 사도의 차이]


그런데 제가 오늘의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전에 깨닫지 못한 또 한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왜 파송받을 때는 12 ‘제자’라고 말하고 돌아왔을 때는 ‘사도’라고고 부르는 것일까? 제자의 훈련이 다 끝나면 사도가 되는 것은 맞습니다. 그래 루가는 전편 복음서에는 제자라고 부르고 후편 사도행전에서는 사도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마르코는 왜 여기서 사도라고 바꿔 불렀나? 그리고 한번 사도라고 불렀으면 계속 사도라고 불러야 하는데, 왜 이 구절에서만 사도라고 하고 이후에는 계속 제자라 부르는 것인가?


저는 여기서 첫째 우리는 제자와 사도라는 역할은 동시적으로 임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사람은 배울 때가 있고, 가르칠 때가 있습니다. 배웠으면 사도가 되어 가르치다가도 또 배우는 제자로 돌아오기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보다 더 중요한 깨달음은 사도라는 직분은 단순한 명칭이 아니라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과 이로 인한 핍박이 맞물려 있는 정치적 죽음이 운명지워진 예언자적 직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독재시대를 경험하면서 수많은 예언자들의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문익환목사님이나 한상렬목사님과 같이 잘 알려진 분도 있습니다만, 잘 알려지지 않는 수많은 분들이 계십니다. 어제 저는 서남동목사님의 추모기도회에 참여하면서 광주 518민주묘역을 다녀왔습니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수많은 예언자들의 이름을 다시 한번 만났습니다. 무명열사라는 묘비 앞에서 죽음을 확인할 수 없어 지금도 살아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가족들의 눈물도 보았습니다. 여러분도 읽으셨겠지만, 최근 우리는 신문에서 가슴 아픈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


그것은 강기훈씨의 이야기입니다. 1991년 명지대 1학년 강경대씨가 시위 도중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전국에서 항의가 잇따르고 분신정국이 이어졌습니다. 이때 5월8일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씨가 유서를 남기고 몸에 불을 붙인 뒤 투신해 숨졌는데, 박홍 당시 서강대 총장은 “죽음을 선동하고 이용하려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주장했고, 열흘 뒤인 5월18일 검찰은 김씨의 유서를 대신 쓴 인물로 강기훈 당시 전민련 총무부장을 자살방조 혐의로 구속 기소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확대하여 노태우 정권은 “유서까지 대신 써주며 분신을 종용했다”고 민주화운동 세력을 매도하고 나섰다. 강씨는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유서를 대필하지 않았다고 일관되게 주장했지만, 이듬해 7월24일 대법원은 강씨에게 징역 3년과 자격정지 1년6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 사건은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1994년 8월17일 형기를 모두 채우고 출소한 강씨에게 명예회복의 기회를 열어준 것은 노무현 정부의 과거사 정리 작업이었다. 2005년 12월 경찰청 과거사위원회는 “(김기설씨의) 유서는 김씨 친필로 보이나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고 발표했으며 과학수사연구소도 ‘김씨의 유서는 김씨 본인이 작성한 것’이라는 필적 재감정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일종의 양심선언인 셈입니다. 그리고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에 재심을 권고했고 2009년 서울고법은 “유죄의 확정판결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고도의 개연성이 인정된다.”며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20년이 넘는 강씨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 노력은 검찰과 법원의 보수 세력에 발목이 잡혀 3년이 다돼가도록 결정을 미루고 있습니다. 거짓인줄 알면서도 실형을 선고했던 권력 아부형 검사판사들이 지금도 윗자리에서 팔팔하게 살아 있으니 어찌 그 결정을 뒤집는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노동판에서 생계를 이어온 강기훈씨가 암으로 인해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남겨놓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에 살면서도 민주화운동을 위해 박정희기념관반대에 앞장서온 미국의 그레이스님 얘기를 제가 간혹 전해드렸는데, 이번에도 강기훈님의 딱한 사정을 읽고 나서는 돈 백 불을 저에게 보내면서 대신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그냥 달랑 백 불만 전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 여러분들이 5천원이든 만원이든 1층 모금함에 자유헌금을 해주시면 이를 모아 함께 전달하고 사회부와 논의하여 교회에도 한번 모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유명한 마르크스주의자인 철학교수인 벨디에브가 나치 독일에 밉상을 보여 강제노동수용소에 갇혔습니다. 그는 거기서 유대인들이 죽음의 가스실로 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느 날 독일 군인이 한 여자의 가슴에서 아기를 강제로 떼어놓았습니다. 아기엄마만 가스실로 데려가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한 수녀가 달려왔습니다. 그녀의 인자한 기도소리는 이미 수용소에 널리 알려진 마리아수녀였다. 하루의 숫자만 채우면 되었으므로 독일군인은 아기 엄마대신 마리아 수녀를 옷을 벗겨 끌고 갔다. 운이 좋게도 수용소에서 살아나온 벨디에브 교수는 말하기를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인 내가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 것은 누구의 학설이나 누구의 설교 때문이 아니다. 남을 위해 대신 죽는 마리아 수녀의 거룩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수용소에서 예수의 십자가를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향린의 60주년은 단순히 나이 먹음을 축하하는 행사가 아닌 예언자 아모스나 엘리야나 세례 요한과 같이 불의한 정치권력을 고발하고 민중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평등과 자유의 새 세계의 길을 제시하는 행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의 십자가를 말로 전하는 제자들을 넘어서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이 교회 건물 안에서 예배공동체로만 만나서는 안될 것입니다. 세상안의 민중의 한의 소리가 새어나오는 현장에서 사도로 만나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제서야 시편 기자가 노래했듯이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는 축복이 우리 안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보냄의 말>


평화나누기 -박노해-


일상에서 작은 폭력을 거부하면 사는 것

세상과 타인을 비판하듯 내 안을 잘 들여다보는 것

현실에 발을 굳게 딛고 마음의 평화를 키우는 것

경쟁하지 말고 각자 다른 역할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

일을 더 잘하는 것만이 아니라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

좀더 친절하고 더 잘 나누며 예의를 지키는 것

전쟁의 세상에 살지만 전쟁이 내 안에 살지 않는 것

총과 폭탄 앞에서도 온유한 미소를 잃지 않는 것

폭력 앞에 비폭력으로 그러나 끝까지 저항하는 것

전쟁을 반대하는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이 평화의 씨앗을 눈물로 심어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