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아 23:1-6 시편 23, 에페소서 2:(11-16) 17-22, 마르코 6:30-34 (53-56)


[양심과 법적 잣대 사이의 괴리감]


요즘 전화를 받다보면 주로 ‘어디에 있느냐?’ 또는 ‘분가교회는 언제부터 하냐?’라는 말을 안부인사로 듣게 됩니다. 서울에 있느냐, 아니면 강정마을에 있느냐? 제 남편이 제주도를 무척 사랑해서 그곳에서 사는 것이 꿈이라 아직까지도 종종 제주도에 가서 살자는 말을 하곤 하는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 제주도에 가서 살아....하던 제가 달에 한번꼴로 가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분가교회는 언제부터 하냐? 장소는 어디냐?라는 인사말을 들을 때마다 향린교회의 분가교회를 향한 관심도가 어느 정도 높은지 체감을 하게 됩니다.
지난 주일은 제가 분가교회 가정예배 때문에 본교회 예배 참석을 하지 못했는데, 어떤 분들은 제가 구속이 되어서 못나온 줄 알았다고 하는 분도 계시더군요. 징한 재판의 과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그 과정을 여러번 지나오신 분들이 계십니다만, 오라가라하는 재판의 횟수도 횟수지만 피고인의 신분으로 적용되는 법적 잣대와 공소내용 등이 터무니없이 억울할 경우 정말 홧병이 날 수 있겠구나...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요즘입니다.


재판이란 “사법 기관이 법률에 근거하여 소송(訴訟)에 대한 공권적 판단을 내려”, 판결, 결정, 명령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법의 잣대에 비추어 판단하는 것인데, 이 법의 잣대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판사는 법의 기준을 과연 정의에 두고 있는 것일까? 등을 생각해보게 합니다. 법은 분명 약자들을 보호하는 정의와 보살핌의 도구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강자, 권력자들이 법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도구로 삼았을 때 상대적으로 약자인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피폐해 지는지는 여러 경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개개인의 사상까지 판단하겠다고 하는 국가보안법이 얼마나 악법인지 저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몇차례의 재판 과정을 지나야 형량이 정해지겠지만 강정마을 덕에 다양한 범죄를 저지른 전과자가 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검찰의 기소장에는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피고인들은 공모하여 민군 복합형 관광미항 건설공사 현장 펜스 바깥쪽에서 주변에 있던 위험한 물건인 주먹보다 큰 돌들을 위 공사현장 펜스를 향해 던지고 발로 펜스를 걷어차 위 펜스 70장 수리비 시가 1386만원 상당을 손괴하였다”, “공사현장 펜스를 손괴하여 구멍을 낸 후, 그 구멍으로 위 공사현장 내부로 들어가 속칭 구럼비 바위 해안가에서 굴삭기 조정석 바로 밑에 앉아 기도를 하며 찬송가를 불렀다. 이로써 피고인들은 다중의 위력을 행사하여 민군 복합형 관광미항 시공사인 주식회사 삼성물산과 대림산업 주식회사의 공사업무를 방해하고 출입이 금지된 장소에 무단으로 출입하였다”.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을 위반했다 것입니다. 굴삭기 앞에서 한 일이라고는 굴삭기 기사분에게 호소한 일, 기사분이 굴삭기에서 내려오고나서는 굴삭기 옆에 앉아 찬송하고 기도한 것 밖에 없는데 이를 다중의 위력을 행사했다고 검찰을 저희 목회자들을 기소하였습니다. 심지어 기도하겠다는 저희들을 대림산업에 고용된 보안원들-용역들-도 기도회를 마치도록 기다려 주었던 상황이었습니다.
대체 폭력의 주체는 누구입니까? 목회자들이었습니까? 물론 대법원 판결에서 조차 강정마을에서의 해군기지 건설 공사는 합헌이라고 했다지만, 그렇다면 그 법률적인 판단이 정말 옳은 것인가? 아니면 대법원이 권력의 하수인이 되어 그 구미에 맞는 판결을 내린 것입니까? 


오히려 공권력을 이용하여 불법을 행사하고 불법을 합법화시키고 있는 현장에서, 양심의 자유에 따라 인간의 존엄 그리고, 가치의 내면적 기초가 되는 윤리의식과 사상에 따라 아닌 것에 대해 아니다라고 저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폭력행사로 호도하는 것은 공권력의 윤리의식과 사상이 무엇을 기초로 하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미 강정마을 주민들 중 많은 분들이 재판장을 오고갔고, 벌금형으로 떨어진 액수만도 3억원이 넘었습니다만, 이런 식의 공권력 폭력이라는게 어디 하루이틀 일 입니까? 


이 예배실에서도 상영한 바 있는 용산참사의 기록을 재구성한 다큐멘터리 ‘두개의 문’ 관람객이 5만명을 넘어섰습니다. 다큐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관객석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만큼 깊은 침묵으로 뒤덮였습니다. 밀어붙이지 않았다면 생기지 않았을 비극이었습니다. 목숨을 잃은 6분의 죽음은 농성장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아 현재 구속되어 있는 분들 때문이 아닙니다.


용진교회를 기억하시지요? 두물머리 근처의 100년 역사의 기장교회이며, 2010년에는 릴레이 40일 기도회가 이어졌습니다. 두물머리 지역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작금지 가처분이 기각되었는데도 국토해양부는 행정대집행 계고장을 보내고 자진철거를 하지 않으면 강제철거를 하겠다고 포크레인을 들여왔습니다. 북아현동 재개발 지역도 그렇습니다.


작년 여름 바로 곁에 있었던 마리에서 익히 보아왔던 장면들이, 전국곳곳, 그러니까 4대강 지역은 물론 골프장을 만든다고, 자전거 도로를 만든다고, 현대식 고층빌딩을 짓겠다고, 심지어는 항구를 짓는다며 온 나라 사방팔방을 굴삭기로 다파헤쳐 놓았는데, 이게 어떻게 정상적인 나라의 행정집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해고는 살인이라고 몇 백일, 몇 천일을 외쳐도, 그야말로 이미 사람들이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지 않는 것 처럼 보입니다. 무슨 똥배짱입니까? 이 정권이 똥배짱을 부리니 자기 맘대로 법인카드 쓱쓱 긁어대는 부정투정이 사장 역시 눈하나 꿈쩍 하지 않습니다. 추운 겨울 중증장애인활동가들이 국가인원위원회를  점거했었 때, 승강기와 난방 등을 중단하는 반인권적인 사람이 장을 맡아서는 안된다고 그렇게 호소를 해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직을 연임시키는 등, 뭐하나 의롭다고 편들어 줄만한 것이 눈꼽만치도 없는 이 정부의 임기가 얼마남지 않았다며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은 사실 그때까지 뭔짓을 해도 방조하겠다는 말 밖에 여겨지지 않습니다.


강정마을에서의 비폭력 직접행동으로 인해 추방당한 엔지 젤터라는 영국인 활동가가 있습니다. 노벨평화상 후보에도 올랐었지요. 1999년 엔지 젤터는 스콧틀랜드에 있는 핵잠수함에 잠입해서 컴퓨터 장비를 밖으로 던졌습니다. 이런 직접행동으로 100회이상 체포된 경험이 있는 엔지는 “체포와 투옥, 그리고 전과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이 함께하였고 이는 저항의 움직임을 강화시켰다. 사람들은 도덕성과 법 사이의 관계에 대해 깨달았고, 국가와 군대의 자산이 전쟁범죄를 위한 준비를 위해 사용될 때에는 그 자산을 파괴하는 것이 정당화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라고 증언한 바 있습니다. 핵잠수함 컴퓨터 장비를 훼손시켜 기소된 엔지에게는 무죄가 선언되었습니다. 왜요? 더 큰 해악을 막기 위한 행동이라는 것이 인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판결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군사기지 뿐 아니라 돈방석 기지를 쌓는 이 정부를 언제까지 관용으로 대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우리들 양심과 법적 잣대 사이의 괴리감을 두려움을 떨쳐버리는 것으로 극복해야 하지 않겠냐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시민들을 보호하는 법이 아니고 권력자들을 비호하기 위한 법으로 전락했을 때, 그리고 법조계 조차 법을 정화할 수 있는 자정력을 상실한 것으로 보이는 이 때, 불법과 탈법을 일삼는 공권력의 폭력을 어떻게 멈출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당하고 있을 셈입니까?


[공감과 연민의 감퇴]


중덕바다에서 공사 중인 배 위에 있던 7m높이의 크레인 위에 올라가 공사를 멈추게 했다는 이유로 얼마 전 또한명의 강정지킴이가 구속되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매우 독실한 기독청년입니다. 구속은 부적절한 것이다 라는 것을 밝히는 구속적부심 재판장에서 저는 인상깊은 변론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쓴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성숙된 사회이다’ 그리고 ‘위험을 무릎 쓴 행동을 왜 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살필 줄 알아야 한다’. 공권력을 행사하는 자들, 법 잣대로 판단한다는 자들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우리에게 주어진 예레미야서의 말씀을 읽으며 차분하게 조근조근한 말투로 변론을 하던 그날의 변호사님의 음성을  떠올렸습니다. 


“이 저주받을 것들아, 양떼를 죽이고 흩뜨려버리는 목자라는 것들아, 야훼의 말을 들어라. 내 백성을 칠 목자들에게 이스라엘의 하느님으로서 말한다. 내 양떼를 돌보아야 할 너희가 도리어 흩뜨려서 헤매게 하니, 너희의 그 괘씸한 소행을 어찌 벌하지 않고 두겠느냐!”


전쟁과 살인이 끊이지 않았던 다윗 왕조을 정통으로 보았던 것은 역사관의 한계라고 봅니다만, 이어지는 본문을 통해 ‘현명한 왕으로서 세상에 올바른 정치를 펼칠 이’를 기대하던 당시가 대체 무슨 희망이 남아있는 것인가? 싶은 오늘날 이 절망의 시대보다는 좀 더 나았던 것일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쓴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것은 물론, 양떼를 돌보아야 하는 목자가 되려 양떼를 죽이고 흩뜨러버리는 시대는 권력자가 좌지우지하는 세상에서는 되풀이되는 역사이지만, 대체 예레미야는 현명한 왕을 기다릴 수 있는 희망을 대체 어디서 보았을까? 궁금합니다. 
동시에 정통성을 운운하는 것을 좋아하는 극우 근본주의자들에게 이 구절은 어떻게 읽혀질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구절을 박근혜씨를 뒷받침하는 구절로 해석하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자 더운 날,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습니다. 


“5·16이 오늘의 한국이 있기까지 초석을 만들었다고 본다”라는 발언으로 한 주간 시끄러웠습니다. “저같이 생각하는 모든 국민은 아주 잘못된 사람이냐”, “저 뿐 아니라 저같이 생각하는 국민들도 많이 계시고, 달리 생각하는 분도 있다”며 “그러면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역사에 대한 몰이해는 더 큰 재앙을 가져올 수 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모르는데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박근혜씨의 발언 이후 스탈린의 외동딸 스베틀라나이의 자서전에 남긴 말이 회자되었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독재자였고, 그 독재에 침묵했던 나는 공범자다. 아버지의 모든 과오를 안고 남은 여생을 속죄하며 조용히 살아가고 싶다.”
역사적 과오를 되물림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해도 시원찮을 판에 이미 역사적 판단이 내려진 사안에 대한 인정조차 하지 않겠다는 사람, 아니 어떤 판단이 내려져있는지 조차 모르는 듯한 사람은 절대로 지도자가 되어서는 않됩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폭정의 시대는, 폭정을 휘두르는 방법 또한 더욱 교활해져만 갑니다. 이렇듯 참 목자없는 양의 신세가 얼마나 괴롭고 힘든 하루를 살게 하는지 잘 아는 사람들일수록 그저 가만히 있어서만은 안되겠습니다.  



그러나, 서로의 처지를 돌아보고 아파하고 함께 저항할 수 있는 힘을 모아내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질 수 밖에 없는 함정이 있습니다.
‘연민, 공감의 망각'.
compassion fatigue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자연스럽게 혹은 억지로라도 희미해지는 기억을 일컫는 심리학 용어입니다. 엄청난 재해가 덮친 후 몇 개월이 지나면, 그리고 몇해가 지나고 난 후 사람들의 관심은 이미 다른 이슈로 옮겨가 있는 현상을 말합니다. 몇해전 4.3제주항쟁 이야기와 함께 기억투쟁이라는 말을 하늘뜻펴기에서 한 적이 있는데 기억하실런지 모르겠습니다. 기억 투쟁의 반대가 공감의 반대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앞서 언급된 모든 일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되려 성인으로 그 세대를 거쳐온 사람들마저 기억이 가물가물한 분들이 많아 보입니다.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정권의 탄압이 어느 정도였는지 적어도 그 시대를 거쳐 온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을 법한데도 죽은 박정희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전두환이 활개치며 돌아다니는 일을 원통하게 여기지 않고, 그냥 가만 두는 것은 감퇴정도가 아니라 망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궁, 돌봄의 근원]


성서는 감퇴하거나 망각하지 않는 공감과 연민으로 생명바람을 몰고 온 이들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절정이 바로 예수이지요.
예수의 사역은 결코 감퇴하거나 망각되지 않는 연민과 공감 사역이었습니다. 그의 전 생애, 그리고 그가 하는 모든 일들의 바탕에는 연민과 공감이 깔려 있었습니다. 그는 단지 말로 가르치는데서 머무르지 않고 현장에서 직접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얘들은 저리가!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어린이들을 기쁨으로 맞이했고, 모두가 손가락질하며 멀리하고 싶어하던 멸시받는 이들을 품어주었습니다. 병고침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나았다!라는 선언을 통해, 또는 직접 만져주는 치유사역을 펼쳤습니다.


compassion은 측은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히브리말로는 ‘레하밈(rehamim)’인데 ‘rehem'은 자궁이라는 말입니다. 자궁 안에 있었을 때를 기억하는 분들 계십니까? 명상을 할 때 종종 자궁 안에 있는 나를 상상해보라고 권할 때가 있습니다. 춤명상에서 이렇게 주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몸을 동그랗게 감아 안고 그 중 몇몇은 엄지손가락을 빨기 시작하면서 자궁 안에 있는 태아시절로 돌아갑니다. 끝나고 나서 그 느낌을 물어보면 십중 십 너무나 편안했다고 합니다. 이 자리에 앉아계신 분들 중 자궁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자궁은 평균 아홉달동안 생명을 품고 있는 곳입니다.


생명을 감싸 안아주는 품은 측은지심과도 연결됩니다. 마르코 6장에서 예수의 이 측은지심을 건드린 것은 바로 ‘목자없는 양’과 같은 민중들이었습니다. 저마다 채워지지 않는 기본적인 욕구들이 있다는 것을 그들을 대할 때마다 느끼셨겠지요. 양은 이리로 가자 저리로 가자, 하는 정도로는 움직이지 않는 동물이라고 합니다. 목자가 없으면 양들을 일단 누워있으려고만 한다고 합니다. (사람도 비슷하기는 합니다. 우리 집에도 양 여러마리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일단 누워있으려고만 한다해서 폭력적으로 양을 다루어서도 안될 것이며, 이제 목자없는 양과 같은 불쌍한 처지에 있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필요한 목자는 단순히 어느 한사람만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보통 교회에서 가르치듯이 선한 목자되신 예수를 따르면 만사형통이라는 단순한 레토릭 또한 더 이상 이 시대에 통용되지 못합니다. 

 
생명을 품는 자궁과 같이 품어주고 다독이고 이끌어 낼 줄 아는, 그렇게 온 삶과 정성을 다할 수 있는 예수와 같은 목자가 한사람만이 아니고, 여러 사람 필요합니다. ‘다중의 목자가 필요한 시대’라고 이름붙여 볼까요? 다중의 목자들은 양뿐만 아니라 이웃 목자들까지도 돌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눔, 살림, 돌봄의 정치라는 말이 등장하곤 합니다만 돌봄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 제일 많이 강조하는 곳은 다름아닌 교회입니다. 잘하던 못하던요.


이 시대의 건강한 교회라고 손꼽히는 몇몇 교회들은 그러한 목회적 돌봄을 목사 1인이 아닌 다중의 목자를 세워서 함께 사역을 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물론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오랜 세월 교회 조직의 기초가 되어온 구역이나 교구를 쎌, 또는 목장이라고 이름을 바꾼 것인데, 중요한 것은 쎌과 목장에서 나누는 내용들이 교리 중심의 성경공부가 아닌 삶의 나눔, 그리고 서로를 위한 기도가 중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교회들이 복음보다는 교리를 앞세우면서 믿을래, 안믿을래 라며 윽박질러 왔습니다.
교리대로 믿는다고 하면 그 다음은 헌금을 잘내야 한다는 지침이 떨어졌습니다. 헌금도 잘내겠다고 하면 교회는 목회적 돌봄을 약속했습니다. 즉 교회 ‘안’의 사람에게만 관심을 갖겠다고 선언해 온 셈입니다. 그 결과 교회 ‘안’의 사람이 무슨 짓을 하던 돌봄이라는 미명 아래 죄사함을 남발해 왔습니다.


교회 ‘안’으로만 사람을 불러 모으고, 교회 ‘안’에서만의 충성을 요구하며, 교회 ‘안’의 사람만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 교회를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교회라는 말대신 개독교라고 칭하고, 교회다운 교회라면, 참 교회답게 ‘교회의 배타적 경계를 넘어서는 사회적 돌봄’(김진호, 시민K 교회를 가다, 164쪽)을 제대로 행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자궁과 같은 교회를 일구는 것은 만인사제인 우리들이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예수 시대를 거친 초기 기독교인들의 고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상 속에서 전통이라고 추앙받는 기존의 가치체계, 그리고 제국과 야합해 가면서 수용하기 시작하는 반복음적인 사회에서 그러한 세속적인 가치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지를 기독교인의 정체성 찾기라고 여기고 몸부림을 친 것이지요. 그렇지만 이런 몸부림이 녹록치 않다는 것을 잘 알기에 아예 처음부터 포기하고 힘 있는 쪽에 붙어서 근근히 종교적 상징행위를 되풀이 하는 것에 만족하며 살기로 작심한 기독교인들 수가 더 많았다고 보여집니다. 반복음적인 일상에서 복음적 일상을 살아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오늘날 우리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최대만족을 추구하는 극대화자(maximizer)와 현실에 만족하고 사는 만족자(satisfier)입니다. 극대화자는 물건을 살 때 모든 매장을 다 돌아보고 구입 합니다. 만족자는 길을 걷다가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바로 구입을 합니다. 새로운 신입사원을 뽑을 때, 극대화자인 팀장은 ‘이 사람도 괜찮지만... 더 좋은 직원 없나’ 라고 생각하며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만족자인 팀장은 '오! 그래 이 정도면 됐어! 얼른 뽑자!' 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쪽의 만족도가 높을까요? 이론상으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어 꼼꼼하게 청바지를 구입한 극대화자의 만족도가 더 커야 할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 둘러보지 못한 상품들에 대한 미련과 불안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현실에 안주하며 마음 편하게 사는 만족자가 행복한가 하면 그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만족자들은 스스로 발전하려는 의지가 부족하다보니 그럭저럭 살아갈 뿐입니다. 이 내용은 KAIST 정재승 교수가 쓴 글인데요.
그는 행복한 만족자로 살자니 새로운 도전이 없는 지루한 인생이 되고 불행한 극대화자로 살려면  마음의 평화를 얻기 힘드니 어떻께 사는 것이 좋겠냐? 했을 때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영역에서는 극대화자가 되고, 내가 바꿀 수 없는 영역에서는 만족자가 되자.”


그러나 여기에서 끝나면 안되고, 내가 바꿀 수 있는 영역과 바꿀 수 없는 영역의 설정을 어떻게 할 것이냐를 따져보아야 합니다. 이 시대의 딜레마는 내가 바꿀 수 있는 영역조차 바꿀 수 없다고 여기는 회의론자와 비관론자가 있다는 것, 그에 비해 자기자신조차 바꿀 수 없는 사람들이 극대화자의 역할을 자처하며 날뛰고 있다는데에 있습니다.
 

[쉼에서 비전찾기]


목자없는 양과 같은 불쌍한 우리들은 과연 희망과 비전을 어디에서부터 찾고,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저는 ‘함께 좀 쉬자’하시던 예수의 음성으로부터 찾으려 합니다. 예수를 따라 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자신이 예수는 아니다라는 자각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겸손함이 필요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어느 지점 즈음에 오면 연민이 감퇴되는 한계를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안하려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지요.


목자없는 양의 신세를 뻔히 알면서도 목자에게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웃의 목자가 되어줄 생각은 더더욱 하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극대화자가 되자니 매사에 걸리는 것이 많으니 나는 소시민답게 만족자로 살련다 하는 자신을 나는 현실주의자야, 라며 정당화시키는 비겁한 존재들입니다. 나없으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될 것 같은 독수리오형제과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가 없어도 이 세상은 잘만 돌아가니 내 대신 잘해줘 라는 배짱이과 사람도 있습니다.
극대화자와 만족자, 독수리오형제와 배짱이 사이를 상황에 맞게 넘나들 수 있는 지혜를 ‘쉼’을 통해 얻으시기 바랍니다. 혼동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너무 바쁘게 살아서 그런가 봅니다.


세차게 비가 내리고, 비가 멈추면 불볕더위가 이어지면서 삼복 더위가 시작되었습니다. 
휴가 계획으로 지친 몸과 맘을 달래고 계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휴가 없이 이 여름을 나셔야 하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쉼을 위해 한적한 곳에 가서 정말 한적하게 보낼 수 있는 분은 행운아입니다.
예수님도 한적한 곳에까지 가서 수많은 사람들을 향한 측은지심으로 주어진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쉼’은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인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필수품입니다. 쉼을 통한 비전찾기를 이 여름의 목표로 삼아보세요.


요즘 [네 가지]라는 말이 유행입니다만, 지식생태학자 유영만씨는 비전에도 네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비전을 듣는 순간 슬퍼지는 비전(悲典), 어느 누구에게도 호소력을 지니지 못하는 비전(非典), 몇 사람만 비밀리에 공유하는 비전(秘典), 비전을 듣는 순간 불현듯 바로 나의 비전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비전과 함께 꿈의 목적지로 함께 날아가는 비전(飛典).
줄여서, 슬픈 비전(悲典), 아닌 비전(非典), 몰래 비전(秘典), 함께 비전(飛典)입니다.
이 더운 여름, 아무쪼록 어떠한 형태든 ‘함께 비전’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저도 내일부터 2주동안의 여름휴가를 시작하게 됩니다. 
돌아올 때는 함께 꿈의 목적지로 날아가는 ‘함께 비전’을 찾아가지고  오겠습니다.

 

[파송사]


편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예수를 몸으로 살기 위해 애쓰다가
어느 순간 슬픔이 그대의 삶으로 밀려와
마음을 흔들고 소중한 것들을 쓸어가 버릴 때면 이렇게 되뇌이십시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우리를 되살려주시는 그분에 의지하여 새로운 주도 당당한 하느님의 사람답게 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