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이 바라시는 기적

시편 145,10-18; 2 열왕 4,42-44; 에페 3,14-21; 요한 6,1-12

 

지 연 화/김 대 현 교우

 

 

 

안녕하세요? 저는 지연화라고 합니다. 작년 1월부터 남편과 함께 향린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처음 향린에 와서 평신도 설교를 하는 것을 보고 많이 흥분 되었었는데, 제가 이 자리에 있다니..... 지금 많이 떨립니다.

성경 안에는 많은 기적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에도 몇 가지의 기적이 보입니다. 엘리사가 보리빵과 곡식으로 백 명이나 되는 사람을 먹게 한 이야기, 오병이어와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의 모습입니다. 그 외에도 성경 안에는 믿기 어려운 기적의 사례들이 많습니다. 그 기적을 믿든, 안 믿든 간에 솔직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면, 혹시라도 하는 마음으로, 나에게도 이런 기적이 일어났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사는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사실, 창조주이며 모든 능력을 가진 자의 입장에서 보면, 기적이라는 것이 인간의 입장과는 달리 그렇게 대단한 일도 아닐 것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수많은 기적들을 만드시는 것은, 그 기적을 보고알게 되는 인간들에게 뭔가 하시고 싶은 얘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은 기적을 그렇게 많이 일으키시면서도 요한복음 627절엔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라고하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는데 힘쓰라고 합니다.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줄 것이고, 그것을 위해 할 일은 하느님이 보내신 이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 내용에는 기적만 바라보는 잘못된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영생과 구원”, “사랑과 정의에 대한 내용들과 하느님이 보낸 이를 믿으라는 믿음에 대해서도 얘길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에페소서 말씀을 보면 바울은 교회를 통해 성도들에게 속사람의 능력으로 강건해지길 바라고 있습니다(에페 3,16). 믿음으로 성도들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기를 바라며(에페 3,17), 사랑으로 굳게 서기를 바랍니다(에페 3,17). 절대적인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알기를 기도하는 겁니다(에페 3,18).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만으로 알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말씀과 순종, 체험 속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바랄 때 가능하다는 얘길 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영적성숙을 위한 기도가 말씀을 통해 삶의 모습을 바꾸고 상대를 바꾸며, 하느님이 바라는 사랑의 기적이 일어나게 된다는 겁니다. 하느님은 저의 변화를 통해서도 주변을 바꾸며, 사랑의 기적이 만들어지는 경험을 하게하곤 합니다. 저의 변화에도 관심을 보여 주시는 거죠.

저는 몇 년 전 부터 서울역에서 노숙인들을 상담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서울역에는 지금 이 시간에도 잠잘 곳이 없어서 배회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작은 공원이 편할 것 같으나 그곳은 어둡고 사람이 적어 폭행이 일어나도 말려줄 사람이 없으며, 아픈 곳이 별안간 생겨도 도와줄 사람이 없어 더 위험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곳이 그나마 안전하겠거니 하고 광장이나 주변 공원에 박스를 깔고 잠을 청하곤 합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은 그곳에서 내어쫒기고 있습니다. 공공장소에서도 노숙인은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으로 취급받거나, 공원 주변의 높은 빌딩이나 아파트에 사는 몇 몇 분들의 경우, 공원을 자신의 앞마당쯤으로 생각하는지, 노숙인이 잠자고 있는 모습을 보면 어떤 형태로든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듯 민원을 제기하곤 하는데, 그런 그들의 이기심에 화가 나기도 합니다. 그렇게 쫓겨서 잠자리를 옮겨 다녀야 하는 사람들은 소외와 폭력과 무관심으로 만들어지는 상처 속에서 무척 힘들어 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삶을 포기하거나 외면하곤 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기 두려운 것일 겁니다.

저도 그분들처럼 하느님 앞에서 내 모습을 보이기가 두렵고 떨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본다는 것에 대해 외면하는 행동을 하곤 합니다. 웃고 떠들고 기분 좋은 척, 그렇게 지내지만, 그러고 나면, 마음속으론 항상 씁쓸하고 허전해져서, 더 힘들어 집니다. 그래서 찾는, 또 다른 방법이 세상거리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정보를 아는 것이 흥미롭긴 하지만, 내 속에서 나오는 두려움에 대한 간절함을 채워주지는 못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나 자신을 이겨내고 강건해보고자 나와 주변 사람들에게 솔직해지는 방법을 써보기도 합니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내 속에도 있는 것을 그대로 소리 지르고, 울부짖고, 발광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해보면 속도 시원하고 기분도 좋아집니다.

그런 중에, 올해 초부터 함께 한 노숙인 연극 팀에서 연극치료프로그램의 상담가로서 합류해 달라고 해서 참여를 했는데 사실, 제가 더 많은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노숙인! 더럽고 지저분할뿐 아니라 게으름과 삶의 의지가 없어, 거리에서 구걸을 하고 싸움을 하고 있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들을!...... 처음 만났을 때 저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참 불쌍한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 한 사람 만나 삶의 얘기를 들으면서 그네들이 노숙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자신과 가족 , 직장을 지키려고, 얼마나 노력하며 발버둥 쳤는지 알게 되었죠. 사업은 망하고, 도와주던 친척, 친구, 동료들은 등을 돌리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면서 겪게 되는 마음의 상처는 한 인간을 거리로 내몰며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들더라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길거리에 귀를 대고 또박또박 걸어가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잠들고 싶을까요? 무심코, 지나버리는 거리의 모든 사람의 상황이 단순히 게으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리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 분들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한편, 그분들을 통해서, 이 사회는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는 기회나 방법을 약자에게서 빼앗아서, 강자에게 기회를 모아 준다는 사실을 고민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또 한 가지 그분들을 통해 깨달은 것은 착한 사람이나 노숙하는 사람이나 더 나아가서는 파렴치한이나, 사형을 당해야 마땅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모든 사람은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상담을 하던 어느 날, 어느 분의 삶의 얘기를 들으면서 그분의 고뇌와 슬픔, 상처, 그리고 어떻게든 자신을 놓지 않으려는 소망 속에서 전, 나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날 참 많이 울었던 것 같습니다. 슬퍼서 운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래 모습은 같은 것이구나 하는 깨달음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노숙인과 같다는 것이 조금도 부끄럽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분들과 함께 연극을 통해 솔직하게 소리를 지르기로 했습니다. 저의 떨리는 마음에 평안을 찾기 위해서요. 저의 지르는 소리에 오히려 그 분들이 적극적으로 화답해 주었습니다.

처음엔 모임 안에서 서로의 별명을 부르자는 의견이 있어, 저는 저의 별명을 개미허리라고 지었습니다. 이유는 평생 날씬했던 적이 없는 나로서는 날씬하고 예쁜 여자를 보면 질투와 부러움이 생겨, 나도 잘록한 허리를 가져보는 것이 꿈이라고 했더니, 그 날 인물 만들기에서 나를 미스코리아로 만들어 주더군요. 그분들이.... 그 때 속으로 얼마나 기분이 좋고, 흥분되었는지...... 아마 모르실꺼예요..^^ 그리고 얼마 전 역할극에서 (어려운 집안을 꾸려가는 중에 자신의 꿈을 이루려 연극을 하겠다는 남편을 말리는 부인역을 맡았는데) 나도 꿈이 있지만 생활이 어려워, 힘들게 살고 있으니 참으라고 남편을 설득합니다. 세상에 어디 자기 꿈 하나 없는 사람이 있겠느냐며, 하지만 모두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가족의 생계를 포기하지는 않는다고 말이죠... 나는 나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남편을 말리고 있었지만 가슴이 아프더라구요. 그리고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더군요. 난 도대체 나의 비젼을 위해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가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은 작은 공간에서 자신들 속에 묻어 두었던 아픔을 다른 인물을 통해 소리를 내고 움직임을 드러냅니다. 서로가 그런 맘을 알기에 인정해 주고 감싸주죠. ,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들어주는 노숙인 연극팀을 참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평생 연극인이 되려는 것이 아닌 나에겐 근본적인 해결은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내 스스로 강건해지는 또 다른 방법으로는, 나와 사람들에게 솔직해지듯 하느님 앞에 솔직해 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처럼 우선, 나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사실은, 나나, 교회나, 이웃이나 사회가 함께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죠. 모두들 당연한 말을 하려는 구나 생각하실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수많은 말들로 귀에 익을 대로 익은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당연한 이것이 가장 힘들고 어렵고 몸이 안 따라 주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에게 솔직해 진다는 것이 뭐죠? 사람들에게 솔직해 진다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나요? 그것은 자신만의 노력, 내가 만든 성취, 내가 만들어 놓은 믿음, 등 그런 것들이 아닌, 순전한 자신의 존재를 진솔함으로 하느님 앞에 가져가 하느님을 만나는 것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조용한 방에서 깊은 묵상으로 그런 자신의 모습을 되새겨 보고, 자신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어찌 보면 어려운 얘기를 참 쉽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보려고 노력하면 하느님은 참 예기치 못한 모습으로 다가 오시더군요. 이번 역사와 해석팀에서도 고민하다 묻어 두었던 어렵고 힘들고 아픈 자들에 대한 예수의 해결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민중이라는 화두로 저의 가슴을 치셨습니다.

마태복음 538~42절 말씀의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도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고자하면 겉옷도 내어주고,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동행하라는 말씀은 힘없는 민중들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방법임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지난번 영성공동체 훈련 때에도 그러셨습니다. 저에게는 평생 짐 같은 문제가 하나 있는데 침묵 중, 깊이 집중하는 속에서 그 무거웠던 짐이 풀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것은 내 안이 치유되는 경험 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제게 하느님에게 나가는 방법을 알려주셨던 거죠. 그것은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견을 묵묵히 기다리는 겁니다. 어떤 땐 하느님의 응답이 무슨 뜻인지 몰라 그저 기다리며 기도만 한 적도 있고, 어떤 땐 하느님의 응답이 너무 모질고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반항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나의 솔직함을 좋아 하시더군요. 어떤 사람에게도 표현할 수 없는 소리를 하나님은 원하시고 들어주시더라구요. 매번 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앞에서 솔직해진다고 하면서도 자존심을 부리는 경우가 많으시죠? 저도 그렇습니다. 어디에선가 들은 얘기로는 자존심이란 것이 마치, 미친년 머리에 꽂고 있는 꽃과 같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싫은 소리를 해도, 몸을 만지고 장난을 걸어도, 별일 없는 듯 헤헤 거리며, 웃다가도 머리에 꽂은 꽃을 건들면 화를 버럭 내고 싸울 듯이 덤벼댄다는 것이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존심이 꼭 그렇다는 겁니다. 무엇이 나에게 더 중요한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의 이웃의 모습은 어떠한지, 그 이웃들과 만드는 세상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그 안에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말입니다. 정말 자신의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것에는 감각이 둔해져 있으면서 도리어 자신을 하느님으로부터 둔하게 만드는 것에만 민감해져 쓸데없는 자존심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항상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과 사람들과 내 본연의 존재가 만나, 그 역할을 깨닫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디. 그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렇더라도 자신의 속사람을 다스림으로, 소망이 무엇이며, 우리들 안에서 이뤄지는 영광의 풍성함을 경험하며, 하느님의 역사하심으로 믿는 우리들에게 나타나는 능력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위해 각자마다 하느님 앞에서 진솔하게 솔직해 지는 자신만의 방법을 어렵더라도, 꼭 한가지씩은 만들어 보시길 바랍니다. 데살로니카전서 57절에는 좌절하거나 실망하기에 앞서 먼저 하느님께 감사하며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한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속사람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강건해지도록 말입니다. 분명, 여러분들의 솔직한 기도에 하느님께서 당신을 위로와 평안으로 맞이하실 겁니다. 사람이 변하는 기적만큼 하느님이 바라는 기적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도 여러분 자신을 통해 하느님의 기적을 만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지연화 교우)

안녕하세요? 청년신도회 김대현 교우입니다. .. 제가 이 강단에 서게 되다니 믿겨지지가 않네요. 제 소개를 간단히 해드리면 저는 순복음교회 전도사이며 현재는 개인 사정으로 휴직 중에 있습니다. 저는 올 초에 향린에 왔습니다. 때마침 조헌정 목사님께서 맡으신 역사와 해석성서배움마당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멋진 교우님들과 함께 많이 배우고 성찰해 볼 수 있었던 참 좋은 시간들이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목사님과 교우님들께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였습니다. 하루는 예배 후에 교회 형이 저에게 오더니 너 오병이어를 믿냐?” “예수님이 물위를 걸은 거 믿어?”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믿는 데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형이 그러더군요 ! 그건 어떤 아이가 먹을 것 내 놓으니까 어른들이 부끄러워서 뒤에 숨겨 둔거 꺼내서 다 같이 나눠 먹은 거야 옛날 사람들이 예수를 신처럼 보이게 하려고 과장한 것이라고. 그건 네가 생각하는 그런 기적이 아니야!” 저는 분개했습니다. “형님! 정말 믿음이 없으시군요! 아니 그럼, 5000명이 배고프면 지들이 알아서 꺼내 먹으면 되지 어린 애가 내 놓을 때까지 왜 기다렸다가 부끄러워하고 꺼내먹어요. 이건 초자연적인 기적이라구요!”

그렇게 논쟁이 붙었고 옆에서 구경하던 두 세 명이 더 합세하더니 점점 말싸움으로 번졌습니다. 더 나아가 오병이어 사건이 한번이다. 두 번이다. 아니다. 한번인데 두 번으로 쓴 거다. 사람이 어떻게 물위를 걷냐? 무슨 예수님이 물 도마뱀이냐? 믿음이 없다! 신을 이해해서 믿냐? 믿음으로 믿어야지! 니들 광신자다! 뭐라 뭐라고 하면서 파가 갈렸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그 형 쪽은 소위 자유주의학파고요, 제 쪽은 전통 보수주의라고 보시면 됩니다. 나중에 신학교에 가서 알게 된 것이지만 이런 지리멸렬한 논쟁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더군요.

오병이어는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비중 있고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오병이어 내용입니다. 대부분 신학자들은 요한복음의 프레임을 유대교와 예수운동을 비교하면서 유대교를 비판한 것으로서 율법의 진정한 완성을 이룬 예수운동을 뜻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보수교회에서는 정형화된 교리의 관점에서 오병이어를 바라보는 성향이 강한데요 대부분 예수님이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기 위해 초자연적인 역사를 일으킨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더불어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치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듯 예수님께서 이를 빈들에서 재현함으로서 자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 생명의 양식이므로 즉 예수 믿어야 구원 받는다이렇게 해석을 하곤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마르코와 루가복음에 있는 오병이어 사건을 한 사건, 혹은 두 사건으로 보며 남은 광주리 숫자에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의 숫자인 12와 이방인들의 숫자인 7은 그 당시 예수공동체가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예수와 그들이 함께 있었을 때 풍족했었다는 것을 뜻하는 일종의 신앙고백이었다고 합니다.

정 반대로 기적 사건 자체를 부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성서 기록자가 당시의 상황 즉 굶주리고 병고에 시달리는 민중의 기대치를 충족시키기 위해 예수가 온갖 병을 고치고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키는 초인으로 묘사했는데 이것을 현대에 와서도 아무런 비판 없이 곧이 곧대로 믿는다는 것은 기독교의 넌센스가 아니냐며 비판합니다.

그래서 비신화화를 주장하는 학자도 있었고 이에 대해 반대로 아기를 목욕시키고 목욕물 버릴 때 아기까지 같이 버렸다며 반박하는 학자도 있었습니다. 이렇듯 신화다. 팩트다. 사건이다. 비유다. 상징이다. 등등 관점에 따라 다양한 신학적 스팩트럼 속에 수많은 교훈과 가르침이 있습니다.

저는 이에 대해 제가 이렇다. 저렇다. 하면서 여러분들에게 학자들의 주석을 열거하기 보다는 오병이어에 담긴 단순한 원리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당시 상황에 날은 어두워 가고 장소는 빈들이었다고 나옵니다. 여러분, 만약 전라도나 경상도 지방 변두리에 근처에 식당도 없고 읍내도 없는 외딴곳에 5000명이 모였다고 생각해 보세요. 남자 숫자만 오천이었으니 당연히 애들과 여자까지 합치면 도합 2만 명쯤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빌립에게 물었을 때 이백데나리온이라고 측정한 것도 최소단위였습니다. 1인당 김밥 한 줄이라고 잡아도 2만명을 먹이려면 그래도 큰돈이 듭니다. 더 큰 문제는 지금 이곳이 변두리인지라 근처에 식당은 한곳도 없습니다. 환경적으로 철저하게 무엇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어떤 아이가 공기밥 5개와 어머니가 구워준 고등어 두 마리를 가지고 나옵니다. 그러면 과연 여러분 일반적인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요?

지금 장난하냐? 장난해! 이걸 가지고 어떻게 2만명을 먹여?”, “누구 약을 올리는 거야?”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아니나 다를까 제자들의 반응 역시 그것이 무슨 소용이 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병이어를 축복의 상징으로 보지만 원래 십자가가 사형틀이었듯이 제가 보기에 빈들의 오천명 앞에서 오병이어는! 마치 2만명 앞에 있는 공기밥 5개와 고등어 2마리처럼 누구든 좌절할 수밖에 없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너무나 철저하고 적나라한 현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셨나요? 감사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이런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누구든 좌절할 수밖에 없는 이 상황에 감사기도라니요? 감사기도가 아니라 간청기도를 해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보리빵과 물고기를 불어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성서는 예수님께서 간청하였다는 내용은 없고 오히려 감사하셨다고 합니다. 앉게 하시고 나눠주라고 하시더니 결국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먹고 남아 거두어들이기 까지 한 것입니다. ! 그렇다면 여기서 과연 오병이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며 또한 도대체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감히 말하길 향린교회! 바로 여러분들이 오병이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게 무슨 궤변이냐? 이게 무슨 해괴한 알레고리적 해석이냐? 라고 반문하시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왜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향린교회에 오기 전에 매스컴을 통해 여러분을 보았을 때 상당히 회의적이었습니다. 아닙니다. 회의적이란 표현보다는 비관적이라고 하는 게 더 솔직한 것 같습니다. 솔직히 우리나라 진보교회 숫자가 많습니까? 무지 부족합니다. 마치 오병이어처럼요. 저는 여러분들을 보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저 사람들이 저런다고 세상이 바뀌나? 계란으로 바위 치기지! 여러분을 보면 마치 제1 성서시대의 외로운 예언자들의 무리처럼 보였습니다.

향린이 정의를 외치며 사회정의를 부르짖으면 세상은 저게 교회야? 시민단체야? 저런 일은 시민단체가 하고 있는데 왜 교회가 나서서 저래? 정치집단 아니야? 라고 비난 받았습니다.

향린이 생명을 외치며 이웃종교와 연대하면 보수 교회들은 뭐야 얘네들? 종교다원주의자들 아니야? 교회에 중을 불러? 완전 이단이로구만! 라고 비난받았습니다.

향린이 평화를 외치며 팍스 아메리카나에 저항하면 이거 완전 친북주의자들 아냐? 강정에 목사가 왜 가 있는 거야? 완전 종북좌파네! 빨갱이야! 라고 비난 받았습니다.

저는 이런 여러분들의 모습을 볼 때 마다 이 사람들 너무 무모한 게 아닌가? 저런다고 뭐가 이뤄지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보수 대형교회들이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와 교세확장을 위해 부패권력의 딸랑이가 되어 현대판 바알종교가 되어가고 있을 때 향린은 정의가 강같이 흐르게 하라는 야훼 하느님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타협이 없었고 부패권력에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이런 거침 없는 예언자적 면모를 보면 한편으론 여러분들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긴 했었습니다만 결국 비관적이었죠.

정말 냉철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가령 한미 FTA를 예로 들어 보지요. 알고 보면 이 싸움은 단순한 양국의 외교문제라기 보다는 미정부를 앞세운 거대 자본과의 싸움입니다. 이게 과연 게임이 될까요? 그들은 힘이 있습니다. 돈이 있습니다. 권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힘도 돈도 권력도 없습니다. 때문에 제 눈에는 월가의 철옹성 같은 마천루 아래 노숙자처럼 옹기종기 텐트치고 있는 시위대들을 보면 너무나 초라해 보이기 짝이 없었습니다. 인간적인 시각에서는 저들이 과연 세상을 어떻게 바꿀까? 저런다고 뭐가 이뤄져? 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그저 돌아오는 건 고소 고발장과 재판, 벌금뿐일 텐데..

우리 사회는 어떤가요?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 배부른 돼지가 되길 원하는 사회입니다. 그 욕망이 바로 지금의 이명박 정권을 탄생시켰고 역사관이 친박(?)스러운 새누리당의 어떤 대선후보의 지지율은 50%에 육박합니다. 권력에 빌붙은 썩은 먹물들은 진실을 왜곡하고 민중을 농락하려들고 초등학생들의 장래희망은 이제 더 이상 대통령이나 과학자가 아니라 부자공무원이라고 쓰는 야만적인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마당에 과연 희망이 있다구요?

! 이렇게 비관적이었던 제가 오병이어를 본 순간 다시금 절망이 아닌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 희망은 분명 남아 있었습니다! 성서는 분명히 믿음, 희망, 사랑은 언제나 남아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때문에 저는 오병이어가 바로 절망과 좌절의 상징이 아닌 남아 있는 희망과 가능성임을 깨달았습니다.

비록 날이 어두워만 가고 아무것도 없는 빈들 같은 현실에 처했을지라도 오병이어는 희망입니다! 오병이어는 가능성입니다! 철저한 현실 속에서 절망과 좌절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예수님처럼 감사하며 나아갔을 때! 그리고 예수님의 분부대로 제자들이 오병이어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을 때! 기적은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향린에서 늘 강조하고 추구하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정신이며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속성인 정의, 평화, 생명 그리고 자유와 해방, 평등이라는 이 가치들이 항상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이 오병이어를 나누어 준 것처럼 우리가 이 가치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를 그치지 않고 이 땅에 하느님나라를 선포하며 나갈 때 저는 이 기적이 지금 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는 희망과 가능성임을 발견했습니다.

만약 300년 전에 누군가 민주주의를 외쳤다면 그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을 것입니다. 만약 200년 전에 누군가 노예제 폐지를 외쳤다면 그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을 것입니다. 만약 100년 전에 누군가 여성과 아동에 인권을 외쳤다면 그 역시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을 보십시요!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상과 페스도는 예수쟁이들을 미쳤다고 했지만 그 당시 2만명 앞에 오병이어처럼 보였던 이 모든 것들은 지금 이루어져있고 어떤 것들은 이루어져가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거센 바람 같은 엄청난 장애가 있었고 사나운 바다물결 같은 커다란 장벽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희생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어두운 바다 위를 우리 예수님께서 걸으신 것처럼! 이 어두운 세상을 예수님께서 발아래 두신 것처럼! 결국 정의가, 평화가, 생명이 승리한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 현실 앞에는 수많은 과제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에도 그랬듯이 어두운 바다의 거센 바람과 사나운 파도는 우리 앞을 또 다시 가로 막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께서 물위를 걸으신 것처럼 결국 정의, 평화, 생명이 승리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저는 감히 향린을, 바로 여러분들을 오병이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희망이자 가능성이라고 말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