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기 다른 은총
시편 78,23-29; 탈출 16,2-4, 9-15; 에페 4,1-16; 요한 6,24-35

조  헌 정 목사


 세계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런던에서 진행되고 있는 올림픽 경기에 쏠려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상외로 잘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새벽 축구의 종가라 불리는 영국을 그것도 홈구장에서 꺾고 4강에 진출한 것은 세계를 놀라게 할 만한 쾌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씁쓸한 기분이 드는 일도 있습니다. 우선 예전의 경우와 같이 남북한이 탁구와 같은 일부의 경기에서라도 하나의 단일팀을 만들거나 최소한 입장만이라도 함께 하였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남북이 탁구에서 서로 경기를 하는 모습은 세계인들 눈에는 인간의 어리석음의 상징으로 보이는 일입니다. 평화와 일치라는 올림픽 정신에 위배되는 일일 뿐만 아니라, 호칭에 있어서도 남쪽은 대한민국이라 부르고 북쪽은 북한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국제 상호존중 정신에도 크게 어긋나는 일입니다. 북한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려면 스스로를 남한이라고 하든지 아니면 스스로를 대한민국으로 불렀으면 북쪽 또한 국제정신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부르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아니면 아예 솔직하게 국가보안법에 명시되어 있는 그대로 ‘반국가단체’라고 부르는 것이 현 MB정부의 입맛에 맞고 현행법에 맞는 표기법일 것입니다.

  어느 분과 얘기하다 남한이 지금 금메달 획득 종목이 우연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격, 펜싱, 양궁, 쉬운 우리말로 하면 총과 칼과 활이라는 병기 종목에 집중되어 있어 이것 또한 남북의 군사적 대결 상황 만들어낸 결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이렇게 본래 살상을 기초로 시작한 경기는 이제는 올림픽 종목에서 삭제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시합장에서는 총으로 표지판을 쏘아 1, 2등을 가리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표지판이 아닌 진짜 사람의 심장을 향해 총을 조준하여 쏘는 참혹한 전쟁이 진행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올림픽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는 이제 아마추어 정신은 모두 사라지고 돈 많은 순위로 등수가 결정되는 자본의 싸움이 된 사실입니다. 게다가 선수 또한 메달을 땄을 때, 국가가 주는 막대한 상금과 연금, 그리고 광고 부수입 등이 순수한 올림픽 정신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 올림픽 기간에 영국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세계의 여러 현실에도 관심을 갖는 일이야 말로 진정한 올림픽정신을 되살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한주동안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출발하여 동쪽과 서쪽 양쪽으로 제주도를 순회하는 평화대행진이 뜨거운 태양볕 아래서 있었습니다. 저희 교회에서도 임보라 목사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참여했고 저도 3일 동안 참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올림픽 축제기간에도 시리아를 비롯한 중동의 전쟁지역에서 폭탄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기억해야 하고, 태풍으로 인해 북조선은 홍수로 인한 상당한 피해를 입고 세계에 긴급구호를 요청하였고 유엔은 그 상황의 시급함을 인지하고 구호품을 즉각 보내기로 결정했다는데, 정작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도움의 손길을 펴야 할 남쪽 MB정부는 우리는 알 바 없는 일이라고 고개를 돌리는 이런 몰지각한 일이 일어났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념을 넘어 우리 모두 하나되자고 하는 올림픽 기간 중에 이념의 노예가 되어 짐승보다 못한 발언을 국제사회를 향해 스스럼없이 하고 있는 이 정부 밑에서 국민으로 살아가자니 정말 치욕스럽기 한이 없습니다. 게다가 장로 대통령이란 사람은 북쪽의 굶주린 사람들이 우리의 원수가 될 수도 없지만, 설사 그 사람이 원수라 여긴다 할지라도 성서에는 분명히 원수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도 어기고 있으니 한 명의 기독교인으로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오늘 에페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들을 향해 하느님께서 불러주신 목적에 따라 합당하게 살아가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께서 불러주신 목적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앞서 2장에서 말한 바 평화와 화해의 직분입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 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 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외국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같은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평화와 화해는 모든 사람이 한 가족이라는 생각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이를 좀 더 구체화하여 이렇게 부탁합니다. “서로 너그럽게 대하십시오. 성령께서 평화의 줄로 여러분을 하나 되게 하신 것을 보존하십시오.” 그런데 하나 된다고 하는 일은 때로 자신의 생각을 접고 한발 뒤로 물러서야 하기에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다하고 사랑으로 서로를 너그럽게 대하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겸손과 온유와 인내, 사랑의 행위는 저 또한 끊임없이 추구하는 신앙의 덕목이자 삶의 원칙이긴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개인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한계에 부딪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바울 선생 또한 이런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잘 알고 있기에 그는 이를 이루기 위해 단순히 노력하라고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하나이고 주님도 한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고 세례도 하나이고 하느님도 한 분이시라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세 절 속에 무려 ‘하나’라는 단어를 일곱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거 모르는 분이 있습니까? 왜 바울 선생은 누구나가 익히 아는 이런 사실을 새삼스럽게 강조하는 것일까요? 세례가 하나라는 사실을 모르는 분이 있나요? 문제는 안다는 것과 이를 생활에 적용한다는 것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자기주장을 함으로 공동체가 깨어진다면 그건 자기가 받은 세례와 상대방이 받는 세례는 다른 세례라고 하는 것을 주장하는 것과 같다는 것임을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상대를 존중하자는 말을 많이 합니다. 차이를 인정하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 차이가 생겨나고 이것이 집단화되면 운동의 성격상 상대를 인정하는 쪽으로 가지 않고 대립과 갈등 쪽으로 흘러가기 마련입니다. 수십 년을 살아온 부부도 하나 되지 못해 갈라서는 경우가 생기거늘, 집단 안에 갈등이 있는 것은 그 집단이 죽어 있는 상태가 아닌 한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상대를 존중하고 차이를 인정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상대의 다른 의견에 동조한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 깊은 뜻은 나와 다른 의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와 다른 의견을 내놓는 ‘너’라는 사람의 주체성을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의견은 달라도 너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너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라는 말은 너도 허물이 있을 수 있고, 나도 허물이 있을 수 있다는 것과, 그래서 우리는 용서가 필요한 존재들임을 고백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너도 하느님의 형상을 띠고 난 하느님의 자녀이고 나도 또한 하느님의 형상을 띠고 난 한 하느님의 자녀임을 인식하는 것을 말합니다. ‘너’라는 존재성 속에서 나를 나 되게 만든 참의 근본정신 다른 말로 하면 신이 숨어 있음을 인식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석 유영모선생의 용어를 빌리면 의견의 충돌이 일어나는 반대의 ‘너’ 안에서 근본에서 하나 되는 얼 ‘나’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이 ‘얼 나’를 바울 선생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에게 각각 다른 은총을 알맞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헬라어 본문을 그대로 번역하면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에 따라 우리 각자에게는 은총이 주어졌습니다.” 은총(charis)이란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진 결과물이 아닌 위로부터 내려온 선물을 말합니다. 곧 우리들의 각기 다른 생각, 각기 다른 관심, 각기 다른 문제 해결 방식, 각기 다른 기질과 행동 등등은 그 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모두 하느님께서 그 사람에게 주신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말입니다. 만약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의 생각이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생각을 품는다면... 그래서 내 생각도 하느님께로부터 왔지만, 상대방의 다른 생각 또한 하느님으로부터 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서로 다른 차이 속에서도 하나 되는 길이 열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한자어에서 출발한 우리말의 ‘이해(理解)한다’는 단어는 상대방의 뜻을 분석하여 받아들인다는 이성적 노력이 전제되어 있는 판단의 단어입니다. 나 머리로 당신의 생각을 알고 있다 그런 뜻입니다. 

 반면 영어에서 이해로 번역되는 ‘understand’ 라는 단어는 상대방의 발밑에 선다는 행동과 감성의 단어입니다. 물론 제가 경험해본 바에 의하면 미국사람들은 개인 차원에서의 under - stand는 잘하는 것 같습니다만, 국제관계에서는 오히려 반대입니다. 저는 우리가 상대방을 이해한다고 말할 때에 그 이해는 남의 밑에 서보는 그런 역지사지의 희생정신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메리칸 인디언 속담에 남의 가죽 신발을 보름동안 신어보지 않고서는 남의 입장에 대해 안다고 말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발에 맞지 않는 가죽 신발을 보름동안 신고 험한 산길을 걷는다면 발은 온통 피투성이가 될 것입니다. 남을 이해한다는 말 속에는 상대방이 여기까지 도달하기 위한 생각의 아픔을 함께 짊어진다는 말입니다. 

 바로 여기서 다양성 안의 일치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고 사도 바울의 용어로 말하면 ‘그리스도의 몸’ 신앙입니다. 우리가 각기 다른 생각을 갖고 각기 다른 직분을 갖는 것은 몸의 지체가 다 다르듯이 이는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지체가 다르니 기능이 다를 수밖에 없고 때로는 같은 지체라 하더라도 서로 반대되는 일도 생기는 것입니다. 왼팔 오른팔은 같은 기능을 하는 팔입니다. 그러나 걷거나 뛸 때에 왼팔과 오른 팔은 엇갈려 나갑니다. 왼팔이 야 너는 왜 같은 팔인데 나랑 반대로 움직이냐? 부분으로서는 이해가 안 되지만, 몸이라는 전체 기능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여러 분파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나는 아볼로파다, 나는 베드로파와 나는 바울파다 심지어 나는 그리스도파다라 주장하며 갈기갈기 나뉘어져 다툼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밖에서 볼 때는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논리에 사로잡혀 있기에 이런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 바울 선생은 교회를 몸에 비유하고 각 사람을 지체에 비유하여 이렇게 반문합니다. 만일 온 몸이 다 눈이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또 온 몸이 다 귀라면 어떻게 냄새를 맡을 수 있겠습니까? 눈이 손더러 “너는 나에게 소용이 없다.”라고 말할 수도 없고, 머리가 발더러 “너는 나에게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사도바울을 신학적으로 혹은 교회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하든지간에 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론은 너무나도 훌륭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한 몸이고 우리는 이 몸에 속한 각기 다른 지체들입니다라는 이 얘기는 그가 주창하는 어느 신학적 주제보다 훌륭합니다. 그리고 이 각기 다른 지체론에 기초한 그의 마지막 질문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또 한 지체가 영광스럽게 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바울 선생은 다시금 그의 유명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하는 사람으로 어떤 사람은 전도자로 어떤 사람들은 목자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봉사의 활동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자라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 또한 직분의 이름은 다소 변했지만, 그 근본은 같습니다. 여기서 ‘성도들을 준비시킨다.’는 말을 여러분은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성경공부를 통해 성경에 관한 지식을 늘리고 기도의 능력을 배가 시켜 영력이 있는 인간으로 훈련시킨다.’로 이해하십니까? 그렇게만 생각하신다면 이 시간에 정확하게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준비시킨다.’는 헬라어 카타르티스모스(katartismos)라는 단어의 본래 뜻은 ‘뼈를 맞춘다’는 뜻입니다. 팔과 다리의 서로 어긋난 뼈를 맞추어서 몸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의 뼈가 다른 뼈보다 강해진다고 하는 개인의 경쟁을 유발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성도와 성도 간에 서로 다른 톱니바퀴를 서로 맞게끔 맞추어간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하는바 스스로를 준비시킨다는 말입니다.

 ‘봉사의 일을 하게 한다.’는 이 말은 또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교육부, 관리부, 봉사부, 친교부, 사회부, 선교부에 들어가서 일을 하면 봉사의 일을 하는 것입니까? 물론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봉사의 뜻을 우리가 분명히 알고 이런 일들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봉사라는 헬라어 단어는 디아코니아(diakonia)입니다. 그런데 이를 봉사하는 사람으로 바꾼 단어인 디아코노스(diakonos)라는 단어는 ‘노예나 종’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봉사한다는 말은 하느님의 종이 되는 일이요, 이는 결국 다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요즘은 신분상의 종은 없습니다만, 루가복음 17장에 보면 종이란 어떤 사람인가를 잘 말해주는 예수님의 비유가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농사나 양치는 일을 하는 종을 데리고 있다고 하자. 그 종이 들에서 돌아오면 ‘어서 와서 밥부터 먹어라.’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오히려 ‘내 저녁부터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실 동안 허리를 동이고 시중을 들고 나서 음식을 먹어라.’ 하지 않겠느냐? 그 종이 명령대로 했다 해서 주인이 고마워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너희도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 것 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사실 봉사라는 단어보다는 섬김이라는 단어가 더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다시 한 번 풀어 해석하면 ‘우리는 교회 안에서 서로가 서로의 필요에 따라 자신을 낮추어 종의 자리에까지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맞는 사람이 되는 섬김의 일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를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종에 비유하는 것은 할 일을 다 하고도 그저 할 바를 했다고 하는 자족하는 마음을 품는 것으로 그치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다른 생각이 든다면 오히려 그런 일을 할 수 있도록 내게 달란트와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할 때, 그 사람은 믿음과 지식에 있어 하나가 되는 성숙한 인간이 되며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완전’이라는 단어에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만, 헬라어 본래의 뜻은 충만함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넘쳐남으로 나는 감춰지고 그리스도만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저는 여기서 성인이라는 한자어가 어른이 된다. 얼이 있는 인간이 된다는 의미에서 이룰 성(成)자에 사람 인(人)도 되고, 이렇게 참 성인(成人)이 되면 이 성인은 자신은 감추어지고 하늘의 뜻만이 보이는 거룩한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고 이 거룩한 성인은 공자가 말하는 만물의 근원이 되는 인(仁)을 이루는 이룰 성의 어질 인 성인(成仁)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바울 선생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완전성’입니다.

 이런 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우리는 이미 어린아이가 아니어서 인간의 간교한 유혹이나 속임수로서 사람들을 잘못에 빠뜨리는 교설의 풍랑에 흔들리거나 이러저리 밀려다니는 일이 있어서는 않게 될 것이고. 도리어 사랑 가운데서 진리대로 살면서 여러 면에서 자라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일이 생겨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은 이러합니다. “우리의 몸은 각 부분이 자기 구실을 다함으로써 각 마디로 서로 연결되고 얽혀서 영양분을 받아 자라납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도 이와 같이 하여 사랑으로 자체를 완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함석헌 선생은 사람됨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사람된 점은 생각하는데 있는데, 생각은 항상 못났어야 할 수 있다. 생각하던 사람도 스스로 잘났거나 하는 의식에 빠지면 생각하기를 그치고, 또 생각해도 그것은 참 생각이 아니요 거짓된 망녕된 생각, 곧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생각이 되버린다. 생각은 못난 자리에 있어야 할 수 있다. 인간의 인간됨은 스스로 못났다는 의식, 그래서 늘 알아차리고, 적응할 준비 태세에 있고, 가르쳐주면 들을 수 있는 심정에 있다. 에덴동산에서 하느님과 같이 될 수 있다 생각했을 때 사람이 인간성조차 잃고 타락했다는 이야기는 사람의 생각하는 태도가 잘못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를 경고해주는 말이다. 인류가 생물 중 어느 종족보다 더 더 준비기간 즉 교육받는 기간이 긴 것은 이 때문이다. 항상 못난 줄 알아야 인간적일 수 있다. 토론보다도 사실을 보라. 사람이 스스로 잘났다 생각할 때는 사람에게서 멀어지고 발달을 그친다. 가장 본질이 된다는 도덕에서조차 스스로 잘났다할 때 정반대의 악마의 지경으로 떨어진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는 영혼의 상실병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 병에 걸렸다고 판단이 되면 추장이나 원로에게 데려갑니다. 그러면 추장이나 원로들은 이런 질문을 묻는다고 합니다. “당신은 언제부터 춤추기를 중단했는가? 당신은 언제부터 노래 부르기를 중단했는가? 당신은 언제부터 홀로 있는 시간이 두려운가? 당신은 언제부터 사는 것이 시시하다는 생각이 들었는가?”

 여러분은 지금 내 영혼의 상태가 어떠한지 깨닫고 계시는가요? 질문을 한번 바꿔서 이렇게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도 춤추기를 계속 하고 계시나요? 당신은 지금도 노래 부르기를 계속하고 계시나요? 당신은 홀로 있을 때에 두렵지 않고 편안한가요? 당신은 지금 꿈과 열정을 갖고 살아가고 계신가요? 아니면 홀로 있음이 두렵고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 끼여 하루하루를 그럭저럭 살고 계신가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 나아오신 여러분을 향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