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밥

잠 9:1-6; 시 34:9-14; 에페 5:15-20; 요 6:51-58

흔히 지혜와 지식은 서로 구별이 됩니다만, 오늘날과 같이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서는 거의 동의어로 사용이 됩니다. 어떤 사건에 대해 많은 정보 곧 지식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으로 인정받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나이가 많을수록 지식이 많기에 지혜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아 사회의 지도자들을 긴 장(長) 자에 늙을 노(老)를 합쳐 장로라 불렀는데, 여기에 길다라는 표현은 수염이 긴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저 같이 수염이 긴 사람은 시대에 뒤떨어진 SNS라는 소통의 문화에 뒤떨어진 무식하고 고리타분한 사람의 모습으로 비쳐지곤 합니다. 몇 달 전부터 제가 기독교방송에서 성서강의를 하고 있는데, 거기서 스탭으로 일하는 분들은 모두 젊은 분들인데, 얼마 전에 제게 이런 문자가 왔어요. 혹시 목사님께서는 카카오톡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아니! 카카오톡 시작한지가 일 년도 넘었지만, 하얀 수염으로 인해 시대감각에 뒤떨어진 그런 사람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엊그제는 명동을 지나가는데, 길을 쓸던 구두를 닦는 아저씨가 저를 방송에 나오는 목사님이 아니냐고 묻더니 저를 박스 안으로 자꾸 들어오라고 하시더니 옆집 식당에서 가서 얼음물을 갖다 주시면서 자신의 얘기를 잠시 하시더니 기도 부탁을 하시더군요. 하얀 수염이 지혜의 상징이 아닌 어디 가서 함부로 처신할 수 없는 부자유의 상징이 되고 말았습니다.


[잠언은 단순한 지혜서인가?]


잠언서의 말씀이 본문 말씀으로 주어지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습니다. 잠언서는 격언, 교훈, 경고 등등이 함께 어우러진 책입니다. 이는 한 저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책이 아니라,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진 말씀들을 모은 지혜 말씀의 모음집입니다. 많은 경우에는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말씀도 있지만, 어떤 경우는 말씀이 나오게 배경을 알 수가 없어 전연 해석이 안 되는 경우도 있고, 시대 변화에 따라 의미가 퇴색한 말씀도 있습니다. 잠언서는 전체가 31장으로 되어 있어 하루에 한 장씩을 읽어간다면 한 달에 다 읽을 수 있습니다. 날짜별로 한 장씩 읽고 묵상하는 습관을 가진다면 몇 년 후에는 매우 좋은 결과를 가져 오게 될 것입니다.


1장부터 오늘의 본문 말씀이 있는 9장까지는 하나의 일관된 틀을 갖고 있습니다만, 10장부터 31장까지는 여러 잡다한 말씀들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7장 4절에 “지혜를 네 신부로 삼고 슬기를 네 애인이라 불러라.” 지혜를 남성적 관점에서 남성의 반려자로 이해되는 여성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여성신학자는 이런 지혜에 기초하여 희랍의 여신 Sophia를 남성신 야훼에 대비되는 여신으로 내세우기도 하였습니다. 본질에서 보면 잠언서의 기본은 성서의 다른 책과도 같습니다. 단순한 격언집은 아닙니다.


강대국들에 둘러싸여 침략과 포로 생활을 경험한 유대백성들에게 있어 가장 큰 유혹은 강대한 제국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의 남한 사회가 그렇듯이 경제 선진국을 넘어서 군사적 강대국의 반열에 올라서는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잠언서는 개인과 개인의 관계 안에서의 지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거대한 제국을 향한 꿈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공동체적 관점에서 경계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로 이러한 경고를 바탕으로 참 지혜를 따라 살 것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일곱 기둥을 세워 제 집을 짓고 소를 잡고 술을 따라 손수 잔치를 베푼다. 일곱 기둥이란 잔치의 참석자가 아무리 많아도 다 수용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의 잔치자리임을 말하는 것이고 시녀들을 보내어 마을 언덕에서 외친다 함은 이는 왕의 잔치자리 곧 하늘나라 잔치자림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어리석은 이여 이리 들어오시오 와서 차린 음식을 먹고 내가 빚은 술을 받아 마시지 않겠소. 복되게 살려거든 철없는 짓을 버리고 슬기로운 길에 나서보시오.”


술을 먹으라고 권유하는 오늘의 성서구절은 술을 구원의 문제와 연계하는 교회들에게는 매우 곤란한 구절이 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술을 오늘의 말씀에 근거해서 부담 없이 마시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잠언 4장 17절을 들려 드립니다. “그들은 불의로 얻은 양식을 먹고 강제로 빼앗은 술을 마시는 자들이다.” 술이 악인의 경우와 연계되고 있습니다. 술 얘기는 조금 있다 한마디를 더 하겠습니다.

오늘 잠언서의 본문 말씀은 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복되게 살려거든 철없는 짓을 버리고 슬기로운 길에 나서보시오” 하는 초청에 있습니다. 시편 1편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길을 따라가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리에 서지 아니하며 오직 야훼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하는 말씀과 같은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복을 누리는 지혜로운 삶이란 어떤 것인가? 참다운 지혜는 어디에 있는가?


[지혜로운 삶]


제1성서에서 제2성서의 말씀으로 근 천년의 시간을 건너 띱니다. 사도 바울로 당시의 에페소는 오늘날 터키의 남부 해변가에 위치하고 있었던 도시로서 가깝게는 페르샤의 문명의 중심지인 오늘날의 이란, 바빌론 문명의 중심지였던 오늘날의 이락 더 나아가 인도라는 아시아 대륙의 문화와 생산물이 집결하는 중요한 교역의 도시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 이탈리아, 이집트 등의 남부 지중해의 문화와 생산물이 교차하는 매우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지금도 이 도시가 얼마나 부흥했었는지를 보여주는 로마 시대의 콜로세움을 비롯한 마차경기장 그리고 도서관 등이 유물로 남아 있습니다.


당시의 문화적 고속도로의 교차로에 위치한 이 에페소는 오늘날의 뉴욕이나 파리처럼 세계의 모든 문화와 뛰어난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도시였으며,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언급했듯이 이름을 알지 못했던 신을 만들어 놓고 섬겼을 만큼 신비 종교들이 유행하였습니다. 곧 이방 종교가 갖고 있는 비윤리적이고 말초적인 신경을 자극하는 퇴폐적인 제사 모습들로 인해 교인들이 방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시대의 악함을 지적하고 지혜롭게 살라는 얘기를 하면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기회를 잘 살리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다른 성서에서는 ‘세월을 최대한 아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물질은 아껴 쓸 수가 있습니다만, 시간은 아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간은 그냥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아 둘 수가 없는 시간을 아껴 쓰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순간순간의 시간이 바로 자신에게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영원임을 깨달아 지금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일을 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24시간이 아닌 30시간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해야 할 일을 다하지 못할 것입니다. 곧 시간을 아끼라는 말은 시간을 잘 살려야 한다는 말이고 이는 삶의 우선순위를 잘 정해서 하라는 말이다. 중요한 것과 급한 것을 구별해서 사용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급한 것이 곧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쉽게 갖습니다. 급하다고 해서 항상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정작 중요한 일들은 급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좋은 책을 읽는 것, 성서를 묵상하고 기도하는 일, 급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마음의 생각이나 영혼의 양식을 얻는 이런 일들을 소홀히 하고 급한 일에만 쫓겨 다니다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은 결국 마지막 때에 이르러 내가 무엇을 위해 그리 급하게 허겁지겁 달려왔는가? 하는 후회 속에서 인생을 마치게 맙니다. 정작 중요한 일은 시간을 요하지 않는다는데 우리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마틴 루터가 행한 유명한 설교 예화가 하나 있습니다. 어느 날 사탄은 사람들을 미혹하기 위해 부하들을 세상으로 파송할 계획을 세웠다. 사탄은 부하들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끌고 올 수 있겠느냐?” 한 부하가 대답했다. “난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열심히 전하겠습니다.” “그건 이미 오래전부터 써먹은 방법이야. 그 방법은 이제 별로 효과가 없어.” 또 한 부하가 말했다. “나는 돌아다니면서 지옥이 없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죄를 더 많이 짓게 될 것입니다.” 두목은 실망한 표정으로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지옥을 안 믿어” 또 다른 부하가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사람들에게 고난을 주겠습니다. 사람들은 고난을 받으면 쉽게 유혹에 빠지니까요.” “사람들은 고통을 받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먹고 심지어는 순교당한다고 오히려 기뻐할지도 몰라.” 부하들이 난감한 표정으로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냥 가서 세상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라.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예수를 믿으시오. 시간은 넉넉합니다.”


[시간을 구속한다는 말의 의미는?]


시간을 잘 살리라는 말을 헬라어(exagorazo)의 본래 뜻으로 보면 이는 시간을 속량한다 혹은 구속한다는 뜻이다. 속량, 구속이라는 말은 무언가를 값으로 지불하고 다른 무엇을 해방시킨다는 것을 말한다. 곧 시간을 주고 내 안의 다른 무엇을 해방시킨다는 뜻이다. 시간과 우리는 무엇을 맞바꿀 수 있을까요? 그건 자유입니다. 시간의 매임에서 시간의 자유에로 나아가는 것이야 말로 시간을 잘 살리는 일입니다.


곧 물량적인 시간을 주고 영원한 존재를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영원하신 하느님을 믿고 고백한다는 것은 내 안에 바로 그 분이 존재하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부르시고 계시는 하늘의 존재를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시간을 구속하는 것입니다. 곧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카이로스의 순간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 안의 성령께서는 바로 그러한 일을 하고 계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술 취하지 말라는 얘기를 하면서 성령을 가득히 받으라고 말하는데, 다른 성서에서는 성령에 취한 사람이 되라는 말로 번역을 해놓았는데, 서로 대비가 됨으로 쉽게 이해는 쉽게 되지만 이는 성령에 대한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술에 취하는 것과 성령에 취하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비슷할지 몰라도 본질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술을 먹고 취하는 것은 본인이 결정합니다. 물론 술이 술을 먹고 술이 사람을 먹는 단계에 들어서면 어쩔 수가 없지만, 그러나 술에 취하는 것은 본인이 결정할 수 있습니다. ‘아 오늘은 술에 취하고 싶다.’ 그리고 주량을 넘어 마시면 됩니다. 그런데 성령의 취함은 인간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 나는 오늘 밤 성령에 취하고 싶다.” 아무리 그렇게 기도하고 노력해도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전적으로 성령의 의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또 술에 취한 사람과 성령에 취한 사람은 일상의 틀을 벗어난다는 점에서 겉으로는 비슷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근본이 다릅니다. 술에 취한 사람은 자기밖에 모릅니다. 뭐든지 자기중심입니다. ‘내가 말이야 예전에...’ 이렇게 시작하면... 이는 벌써 술에 취한 증거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막고 자기 주장을 하기 시작할 때, 술에 취한 증거입니다. ‘야 더 먹어 오늘 술값은 내가 낼 거야.’ 이것도 술에 취한 증거입니다. 깨고 나면 왜 만용을 부렸든가 후회합니다. 술에 취한 사람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을 향해 많은 말을 내어 뱉지만, 자기 안에 갇혀 있는 언어들만을 내어 뱉습니다.


반면 성령에 취한 사람은 자기는 뒤로 사라지고 성령이 앞에 나섭니다. 자기로부터의 해방이 일어납니다. 자기 생각을 말하는 대신에 공동체의 생각을 먼저 헤아립니다. 갈라디아서 5장 23절에서 바울의 유명한 성령에 대한 정의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맺어 주시는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 이는 모두 공동체를 자신보다 더 소중히 여길 때에 취하는 행동의 열매입니다. 꼭 알콜이 들어간 술을 먹었다고 술에 취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뜻을 하느님의 뜻으로 절대화시키면 바로 그 사람은 술에 취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밥]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요한복음의 일곱 개의 신적 선언 중의 하나입니다. 빵을 성찬용 빵으로 이해하면 우리말로 떡이 되겠습니다만, 이는 성례전 안에서 이해할 때, 적절한 번역이 되겠고, 본래 빵은 유대인들의 주식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밥이다.’이다가 보다 정확한 번역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요한 공동체는 이 말씀을 어떤 의미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인가? 요한공동체는 공관복음서의 예수님의 5천명 급식기적 이야기를 전연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을 던지고 있는데, 이는 무슨 의미이며 무슨 까닭인가? “내가 줄 밥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유다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서로 따졌다.” 이 말씀의 정확한 이해를 위해 먼저 우리는 당시 요한공동체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역사적 정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예수를 주로 고백하던 요한공동체는 모세 율법에 기초한 거대한 유대교 사회로부터 쫓겨남을 당했습니다. 나면서 소경된 자를 고치는 이야기 속에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축출된다고 하는 구절이 나오고 이외에도 요한복음에는 그러한 구절이 여러 번 나옵니다. 곧 지금 요한공동체는 주류 사회로부터의 배척과 핍박 속에서 예수의 삶과 말씀을 기억하며 이를 다시금 자신의 삶의 현장 안으로 재해석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곧 5천명 급식 기적 이야기에 대한 자신들의 하늘뜻펴기입니다.


지금 요한공동체는 예수의 살을 먹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다 알고 있습니다. 이는 성례전 예전을 통해 매 주일 행해오고 있는 의식입니다. 그런데 이 살을 먹는다는 의미를 문자적인 이해를 추구했던 유대인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서로 따지고 있다는 구절은 곧 유대인들의 문자에 매이는 어리석음을 풍자하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3장에서 당시 유대사회의 존경받던 지도자였던 니고데모가 예수와의 대화 속에서 던진 질문을 알고 있습니다.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 없지 않습니까?” 이 구절이 지시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당시 이 얘기를 듣던 요한공동체 구성원들의 “아 모세 율법이라는 문자에 사로잡힌 유다인들이란 이렇게 다 어리석을 수 밖에 없구나. 참 안됐다.” 일종의 풍자적인 비웃음입니다. 이미 격리된 상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축출 당한 작은 공동체가 주류 사회를 향해 취할 수 있는 길이 풍자나 비웃음 아니면 무슨 다른 길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자신들만이 예수의 진리의 길을 걷고 있다는 절대화된 믿음이 갖고 있는 오만과 독선의 독이 저들 안에 숨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또 살을 먹는다는 것은 민수기 11장에서 모세를 따라 나선 히브리 조상들이 광야에서 애굽에서의 물질적으로 풍족했던 때를 기억하며 고기를 달라고 불평했던 경우를 떠올리고 있습니다. 야훼께서 화가 났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몹시 걱정이 되어 야훼께 울부짖습니다. “어찌하여 이 종에게 이런 꼴을 보이십니까? 이 백성이 모두 제 뱃속에서 생겼습니까? 제가 낳기라도 했습니까? 어찌하여 저더러 이 백성을 품고 선조들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까? 유모가 젖먹이를 품듯이 품고 가라고 하십니까? 어디에서 이 백성이 다 먹을 만큼 고기를 얻어 주란 말씀입니까?” 그런데 요한공동체는 이미 이 고기, 곧 예수라는 살을 통해 이 고기를 먹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가 배불렀고, 먹고 남은 것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들이 풍족히 먹을 수 있는 양이 준비되어 있다는 선언입니다. 곧 예수를 통해 모두가 풍족하게 먹고 남았다는 구절은 이미 모세를 넘어섰다는 선언입니다.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먹어야 산다는 뜻을 문자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어리석음의 유다인들을 깨우치기 위해 이 요한 저자는 매우 친절한 해석을 말미에 하고 있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이것이 발 하늘에서 내려온 밥이다. 이 밥은 너희의 조상들이 먹고도 결국 죽어간 그런 밥이 아니다. 이 밥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밥’이 던지는 종교 사회학적 의미]


우리는 곧잘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살아갑니다. 영과 육, 더러운 것과 거룩한 것. 세상과 하늘나라, 순간과 영원, 참과 거짓, 물질은 더러운 것이고 순간적이며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이야 말로 순수하고 영원하다. 이런 이분법적 사고는 위기가 오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선으로 규정하고 자기편이 아닌 모든 사람은 악으로 보는 흑백사고의 틀로 변하게 됩니다.


지금 요한공동체는 주류 유대사회로부터 밀려나 변두리의 소수의 무리로 살아가면서 바로 그러한 유혹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여기서 매우 깊은 성찰을 가진 저자 요한은 예수를 영적인 존재, 곧 하늘에서 내려온 신비적 존재로 여김으로 이분법적 논리를 따라 자신을 절대화하는 영적 신비적 세계로 빠져 들어가려는 요한공동체를 향해 ‘그러지 마라. 그 길은 영지주의자들이 저지르고 있는 위험의 길이요, 스스로를 자멸로 몰아가는 길이다.’ 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온 밥이다. 우리가 매일 먹고 있는 손으로 만지고 우리의 뱃속으로 들어가서 영양분으로 분해되고, 우리가 먹다 상에 떨어뜨리는 그 밥이 예수다라고 하는 매우 도발적이고 혁명적인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성과 속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지 마라. 하늘로만 올라가려고 하지 마라. 너희들만을 깨끗케 하기 위해 예수는 오신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너희들이 미워하고 있는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신 것이다. 세상을 깨끗케 하기 위해 우리는 부름을 받았다라고 하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1장 처음에서 말한바 예수는 태초부터 하느님과 함께 하신 로고스가 육신/살(sarx)이 되신 분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바로 예수를 따라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교회는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섬김의 방식은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본에서 드러났듯이 서로서로가 너희의 발을 씻김으로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단순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어떤 선언을 넘어 매우 실천적인 헌신을 강조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들은 내가 아버지와 하나인 것 같이 서로 하나가 되라. 이런 선언은 어느 교회에서나 쉽게 들을 수 있는 선포입니다. 문제는 그런 모습이 실제로 비쳐지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은 기독교인들이 외치는 말로 판단하지 않고, 우리의 행동과 얼굴에 번지는 미소를 보고 판단합니다.


어느 날 프란시스가 한 제자에게 “오늘은 저 아시시의 거리로 나가서 설교를 합시다.” 그리고 두 사람은 거리에 나가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돌아보고 또 시장을 돌아다니며 서로의 느낀 점을 나누었습니다. 날이 저물어 수도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제자가 깜짝 놀라 외쳤습니다. “선생님, 오늘 우리가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것을 깜빡 잊었습니다.” 그러자 프란시스는 그 제자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웃으며 말합니다. “형제여, 우리가 시내를 거닐던 모든 시간동안 우리는 설교를 한 것이오. 사람들은 우리를 보았고, 우리의 대화를 엿들었소. 그리고 우리의 얼굴 표정과 행동들을 보았을 것이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설교가 아니고 무엇이 설교이겠소.”


마지막으로 예수의 말씀을 전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 사람들도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이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17장 16,17절) 진리는 그 주장하는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실천 속에서 능력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예수는 우리 안에 살아 움직이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밥이 되는 것입니다. 밥을 높여서 진지라고 부르지요. 어르신들을 향해 진지 잡수셨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이 진지를 참 진(眞) 자에 슬기 지(智)로 해석하면 어떨까요? 여러분 오늘 예수께서 주시는 진지(眞知)를 잡수셨나요?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