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신앙생활
아가 2:8-13;시편 45:1-2,6-9;야고보서 1:19-27;마가 7:5-13
찬68장, 오 하느님 우리의 창조주시니 / 찬 393장, 오 신실하신 주 
국악찬송 115장, 진정한 평화

[자연 앞에서의 인간]


8월과 9월이 교차되던 지난 주는 태풍 영향권에 있었습니다.
볼라벤, 덴빈 등 태풍이 오기 전부터 이 이름들이 얼마나 많이 언급되었던지 자다가도 입에서 툭툭 튀어나올 정도였습니다. 초대형 태풍, 작지만 강한 태풍 등으로 소개되면서 유사시를 대비하는 각양각색의 예방책들이 시시각각 전해졌습니다.


태풍이 지나가면서 전라도쪽에는 인명피해는 물론 여러 상흔들을 남겼습니다. 교우들 중에도 친인척, 이웃 등이 직접적인 피해자인 경우도 꽤 될 것입니다. 자매교회인 들녘교회가 있는 전북 완주군도 태풍피해가 많은 지역 중 하나인데 교회의 전면유리 8장이 파괴되고, 마을의 과수 농가들이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제주 강정마을 바다에 쑤셔넣은 케이슨이라고 하는 9800톤, 아파트 8층 규모의 방파제 뼈대 구실을 하는 구조물 7개도 파도에 파손되어 콘크리트 쓰레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케이슨 1개 제작 비용은 50억 원에 달하므로 무려 350억 원이나 되는 국민혈세가 사라져 버린 거죠.


태풍을 붙들어 맬 수 있는 능력이 인간들에게는 없습니다.
쏟아지는 비를 멈추게 할 수 있는 능력도, 그렇다고 비를 내리게 하는 재주도 없습니다. 그저 인간에게는 이산화탄소 농도를 아주 빠른 속도로 높여가는 재주, 희귀동물, 희귀식물들 싹 멸종시키는 재주, 기후를 붕괴시켜가면서 지구별 파괴를 앞당기는 재주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나마 인간 손으로 만들었기에 가동을 중지시킬 수 있는 핵발전소 가동마저 멈추기를 주저하는 통에 핵폭발 위험을 그냥 방치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사회 전반에 걸쳐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가 가속화되지만, 그리 오래지 않아 가난한 사람이던 잘 사는 사람이던 모두가 공멸하게 될 터인데 이를 멈추게 할 능력이 인간들에게는 없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태풍이 온다며 온 나라가 들썩 거릴 때, 우리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은 고작 창문에 신문지를 붙이는 일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창문에 신문을 붙이느라 고생하셨을 것 같아요. 테잎으로 붙이네, 아니네 물에 적셔서 붙이네 등등 붙이면 떨어지고, 테잎으로 붙이면 흔적이 남고 등등. 태풍이 오기 전날 제 딸들도 신문을 붙여야 된다고 몇 번씩이나 말을 했는데 제가 꿈쩍도 하질 않았어요. 아마 무슨 엄마가 저러나...했을 겁니다. 
태풍이 오기 전날, 붙이려고 보니 조중동도 없더라, 안팔리던 조선일보 매진 등 신문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이 많았죠. 왜 이렇게 신문을 창문에 붙이라고 했을까요? 이에 대한 해석이 재미있었어요. 신문을 붙이면 태풍이 읽느라 유리창을 못 깬다는 건데요. 덧붙인 충고가 걸작입니다. 태풍이 짜증나지 않도록 ooo은 뒤로 붙여라 라는 이야기입니다. 과연 이 면은 무엇일까요?
네. 정치면입니다. 태풍도 정치면을 읽다보면 짜증이 나서 더 세게 도발한다는 거죠.

[위선자의 자기기만과 율법]



주 중에도 여러 일들이 있습니다만, 주 중에 제일 화가 났던 보도사진은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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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 보셨나요?
사진에 무엇이 담겨있나요? 이 비슷한 경험이 있으신가요?
그 때 어떤 느낌이 드셨나요?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당일 실시간 속보로 오른 사진을 보다가 ‘정말 이 사람은 안 되겠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표정 때문입니다. 이런 표정을 본 경험이 있나요? 이건 정말 쇼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표정입니다. 쌍용자동차 김정우 지부장이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던 이유를 과연 알기나 할까? 하는 의문이 드는 표정입니다.  


누군가는 동상 언저리에 가기만 해도 눈물이 앞을 가리는데, 어느 누군가에게는 한번 찍고 오면 되는 장소로 여겨진다는 사실이 정말 모욕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나중에 보니 저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더군요. 꽃을 들고 갈 것이 아니라 쌍용자동차를 비롯 비정규직 노동자들, 노동전반에 대한 정책을 고민하고 갔어야 할 것 아니냐는 비난이 터져 나왔습니다. 아마 그런 고민을 진정으로 했다면 그 자리에서 무조건 엎드려 통곡했을 것입니다. 김정우 지부장 앞에 무릎 꿇고 정말 잘못했노라고 사죄했을 것입니다.   


진정성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저런 얼굴, 그리고 저러한 행동을 스스럼없이 하는 사람을 ‘위선자’라고 부릅니다. ‘겉으로만 착한 체를 하거나 거짓으로 꾸미는 사람’이 위선자입니다.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 남에게 보이기 위한 행동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위선자들은 자신을 향한 손가락질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왜냐면 스스로 선하고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실은 ‘자기기만’(self-deception)이지요. 심리학에서 자기기만은 자신 보호를 위한 무의식적 반응으로 봅니다. 사실 아는 거죠. 스스로를. 내적 갈등과 내적 긴장 상태가 오래 지속되는데, 그로 인한 불안이나 죄책감에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합리화를 시킵니다. 나만 그러나? 다 그래. 저 사람 때문이야...로 부터 시작하여, 과장된 행동과 때로는 매우 유치한 언어로 자신을 감쌉니다. 불안정한 상태에서 오는 불안함을 감추기 위해서입니다.


위선과 자기기만을 중심축으로 놓고 오늘의 마르코 말씀을 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 몇 사람은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손을 깨끗이 씻어야 하는 전통을 따르지 않은 제자들을 목격하고는 맘이 불편해졌습니다. 손을 씻는 정결례는 바리사이파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들이 지키고 있는 조상의 전통인데 저 사람들은 어쩌면 저렇게 거리낌 하나 없이 남들 보는 눈도 있을텐데 손을 안 씻고 음식을 먹나?
남들의 눈을 항상 의식하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겠지요. 게다가 아주 틀린 소리를 한 것도 아닌 것 같고요. 그런데 예수는 대뜸 ‘하느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고집하고 있다.’ ‘너희는 그 전통을 지킨다는 구실로 교묘하게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고 있다.’며 수위 높은 맹비난을 퍼붓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아니 내 말은 정결례를 왜 안 지키냐는 것인데 도리어 우리보고 계명을 버리고, 어겼다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거냐?’ 하고 분개했을 것입니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꼴이 된거죠.


정결례법은 아시다시피 당시의 환경과 문화적인 요인이 있었습니다. 위생상의 이유도 있었을 것이고요.  
그런데 살아있는 사람을 위해서 지키자고 한 율법들이 어느 때 부턴가 지킬 수 있는 사람만 지킬 수 있는 법이 되다보니 사람을 죽이는 법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 법으로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지배를 위한 도구로 변했습니다. 그러니 사람을 살리려면 그 법이 사람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싸우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본디 율법이라 함은 오랜 동안 제국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거대한 체제에 편입되지 않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해 그들과 구별되기 위한 유일무이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국의 체제에 편입되어 가면서 동시에 제국과의 구별이 아닌 너와 나 사이를 구분 짓기 위한 목적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너와 나를 구분하면 나는 언제나 너보다 나은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너는 나에게 항상 복종해야 하는 사람, 내 말을 잘 들어야 하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를 배반한 기독교]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로마인들은 유태인들의 종교가 단지 종교제의적 축제, 개인적 신앙, 그리고 지역의 사회 질서를 강화하는 정도 이외에 더 이상 다른 형태를 띠지 않는 한, 종교행사를 허락했다. 유태종교가 보다 집단적인 표현을 하여 정치적 의도를 지니는 순간, 로마는 새로 강화된 물리적 억압으로 간섭했다. (중략) 율법서의 사회, 정치적 운용이 막혀버린 뒤에 바리새파 사람들은 개인적 경건과 형제애의 정결함 등에만 초점을 두었다. 또 다른 결과는 개인적 혹은 집단적 고통의 원인으로 죄에 초점을 두는 것을 강조한 것이었다. (중략) 제국의 상활들의 실제구조가 있는 한, 유태종교의 전통들에 대한 제한적 행사를 허락한 로마의 관용은 구조적 폭력과 억압을 강화하는 것으로 되었다. (예수를 배반한 기독교, 333-334쪽)


바라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도 제국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와 어긋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율법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비록 제국의 지배 아래 있으나 제국에 복종하지 않고 하느님의 법을 따라 살아야 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제국은 하느님의 자리를 넘보며 사람들을 억압하며 지배했습니다. 이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순응하는 쪽을 택하였고, 제국의 식민 지배로 가장 억압받는 이들을 이중삼중을 옭아매었습니다.
그러니, 예수가 면전에서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이 위선자들!' ‘외식하는 자들!’


[‘~척/~체병’에 걸린 이들이여! 말씀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 사진 보신 적 있으세요?
서울에서 꽤 유명한 한 아파트에 붙은 경고문으로 인해 시끄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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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층짜리 아파트라고 합니다. 14층부터 걸어 내려오면 건강에도 좋지 않겠어? 라고 생각 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한 이유가 새벽기도회에 가는 사람들이 항의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곳은 교육환경 때문에 일부러 이사 가는 사람이 많은 곳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집값도 비싸다고요.
신문을 사러 일부러 나가지 않아도 집 앞까지 배달해주는 분들이 있어서 매일 아침 신문을 읽으면서 아침을 먹을텐데도 정작 배달하는 분들로 인해 승강기가 고장이 나고, 관리비가 많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당한 모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질 좋은 교육을 받는지 모르지만, 교육환경점수는 빵점입니다.
이런 것을 보며 자란 아이들은 어디서고 배달하는 분이 엘리베이터를 타면 ‘어? 왜 계단으로 안가요? 배달하는 사람은 엘리베이터 타면 안돼요!’ 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배운 ‘체’만 할 줄 알지 신분제 사회의 ‘관습’에 머물러 있습니다.
너희들은 그런 불편쯤은 견디며 살아야지! 하지만 우리는 못해! 안해!

이런 ‘체/척’ 병이 이 사회에 만연해 있습니다. 
정의로운 ‘척’, 배운 ‘척’, 착한 ‘척’, 예쁜 ‘척’, 고상한 ‘척’, 아는 ‘척’ 날난 ‘척’, 거룩한 ‘척’, 신앙심이 깊은 ‘척’, 게다가 하느님과 매우 가까운 사이인 ‘척’하며 삽니다.
체/척’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는 아이러니하게도 주일성수하는 것, 성서를 많이 읽은 것, 헌금을 많이 내는 것이 될 경우가 많습니다. 하느님과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되려면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하는데, 하느님의 기준이 아닌 것을 하느님의 판단하시는 기준이라고 우기는 이들로 인해 하느님이야 말로 답답해 돌아가실 지경입니다.


‘나는 신앙의 기본바탕이 되어 있는 사람이다. 나의 기준은 성경이다.’ 라는 말을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알아듣습니다. ‘실은 신앙의 기본이 뭔지 모른다’, ‘나는 성경의 말씀과는 상관없이 산다’.
게다가 이런 류의 사람은 스스로를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는 탓에 늘 다른 사람을 쉽게 얕봅니다.
‘저는 믿는 사람이라서요.’ 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표정과 행동을 보며 그들을 신실한 신앙인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요즘과 같은 시대에 별로 없습니다. 단지 자기만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철썩 같이 믿을 뿐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을 믿고 있습니다. 


남에게 보이는 행위에만 신경 쓰는 사람들은 그 옛날에도 있었습니다. 남을 함부로 정죄했습니다. 바울로는 이방인들에 대해 끊임없이 불편한 눈길을 보내는 유대인을 의식하며 로마서에서 ‘오직 믿음으로’를 강조했습니다.
그로부터 한 세대 정도가 지나자 지켜 행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이들이 한켠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의 편지는 ‘말씀을 실천’하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오죽 답답했으면 거울에 자기 얼굴을 비추어 보고도 뒤돌아서면 잊어버리냐고 했을까요? 실은 바로 내 모습과 꼭 같지요. 
제도적 교회의 모습을 갖춰가는 과정에서 굳이 하느님의 계명과 사람의 전통으로 구분할 필요조차 없는 ‘환대’와 같은 구체적 실천을 등한시하게 되었습니다. 제도적으로 갖춰지기 시작하면 시스템이 돌아가는 것이니까 일면 편해집니다. 손수 하지 않아도 알아서 돌아가니까요.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면서도 그 시스템이 갖는 맹점이기도 합니다. 


'듣기는 빨리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라’ 이런 말도 새로운 충고가 아닙니다.
잠언에도 이 비슷한 구절이 많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이런 기본조차 잊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계명보다 몸에 익어서 편한 전통이나 관습이 하느님의 계명이라고 착각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매단 것도 부족해서 제도적 교회가 생긴 이후 하느님은 오히려 더 갇히고 더 핍박받고 이용당하기만 합니다. 
하느님의 활동을 자기가 중요시 하는 밥그릇 정도의 크기로 제한하려 들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남보다 훨씬 더 잘 믿고, 잘 지키며 살고 있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사실 나만 모르지 남들은 다 압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있는 것인지, 자기 말대로 사는 것인지 말입니다.  실제, 자유를 주는 완전한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은 몸에 베어 바로바로 실천할 수 있지만, 사람의 전통, 자기식로의 편의주의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도 잴 것이 많아서 왔다갔다 하다가 나중에는 그 중심이 어디인지조차 알기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공의를 말하면서도 불의를 조장하거나 방관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하면서도 실은 내 자신이 존경받고 영광받기를 얼마나 갈망하고 있습니다. 


[순수한 신앙을 회복하기 위하여]


신앙은 복음과 복음이 아닌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은 야고보서에 나오는 ‘순수한 신앙생활’이라는 말을 완전히 다른복음으로 각색하여 잡스러운 것들이 가득한데도 순수하다고 말하며, 순수한 표정의 가면 뒤에 사사로운 욕심이나 불순한 생각을 가득 담고 있습니다.
사회적, 신앙적으로 인격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터놓고 이야기하기를 꺼리고, 지나치게 과장된 자존감이 되어 과잉행동을 하고, 칭찬에 대한 욕구가 강하여 늘 자신이 중심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만족합니다.  


교회 용어를 잘 알아듣고, 제도에 순응하고, 그 말뜻이 뭔지도 잘 모르면서 네네 순종하는 것이 순수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잘못 배운 탓도 있습니다. 그것은 껍데기일 뿐 인데 알맹이는 온데간데 없고 껍데기만 붙들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병폐입니다. 


착시현상의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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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셔머(Michael Shermer)라는 작가/심리학자는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 보는가가 영향을 받게 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두뇌에는 믿음 엔진이라는 게 있어서 믿고 싶어한다 고 합니다. 그런데 그 믿는 과정에서 진짜가 아닌데 진짜라고 믿거나, 맞는데도 믿지 않는 오류를 범한다고 합니다. 뇌의 기능, 그 안의 화학 작용 등으로 설명할 수 있으나 중요한 것은 사람들은 10년동안 IQ점수가 3점씩 올라갈 정도로 똑똑해져 감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것들을 철썩같이 믿습니다. 대형교회 같은 경우 이해가 잘 되지 않잖아요? 그 이유는 애초에 인지적 편견이 가득한 틀거리를 주입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똑똑한 척 하지만 오류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니 정작 필요한 사람은 신용이 낮다는 이유로 버려지고 많이 가진 사람은 신용이 좋다는 이유로 더 쓰시라고 바치는 사회를 신용사회라고 부릅니다. 사람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오히려 그때는 외면하고 좋은 때만 친구인 척 합니다.
그러니, 오늘날 똑똑해진다는 것은 사악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들은 반드시 기도와  영성훈련을 해야 합니다.  제대로 된 교육도 필요합니다. 내 스스로가 복음의 빛으로 비추어보았을 때 얼마나 비정상적이고 얼마나 사악한 존재인지를 깨달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훈련이나 교육 자체에 편견이 담겨 있다면 우리는 평생가야 그런 내 자신을 깨닫지 못합니다. 단순히 편견을 받아들이고 내면화 시킵니다.
가정도, 학교도, 사회도 진짜를 진짜라고 믿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가짜를 진짜라고 믿게 만드는 편견을 심어주고 있는데 교회마저도, 종교마저도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이 오늘날의 비극입니다.


예수의 복음은 선경험, 선입견 이런 것들을 깨라고 합니다. 믿음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는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럴싸한 정결례법이 있다해도 더러운 손으로 먹는 음식으로 인해  마음이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것은 어디 밖에서 누구 누가 퍼트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에게서 나오는 것 들입니다.


향린교회 신앙고백 선언에 담겨 있는대로 ‘지금도 우리를 만드시는 하느님’을 믿는다면 새롭게 된 이 피조물은 완성품이 아니라 매일, 매순간마다 새롭게 되어야 하는 미완성품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고백이 진실한 나의 고백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겸허하게 낮아질 수 있습니다.


여전히 이곳저곳 손 볼 곳이 많은 나는 현재 순수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까?
오늘 야고보의 편지를 반복적으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기 혀를 억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셈이니 그의 신앙생활은 결국 헛것이 됩니다.”

다음 구절은 각색을 해보았습니다.


“하느님 앞에 떳떳하고 순수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고아들과 과부들)과 연대하며(돌보아 주며), 자기 자신을 지켜 신자유주의/자본주의/경쟁사회(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사람입니다.”


지금도 우리를 새롭게 빚으시는 그분에 의지하여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편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일상에서의 작은 폭력을 거부하며 사는 것이 평화입니다.
세상과 타인을 비판하듯 내 안을 잘 들여다 보는 것,
경쟁하지 말고 각자 다른 역할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
일을 더 잘하는 것만이 아니라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
폭력 앞에 비폭력으로 그러나 끝까지 저항하는 것이
평화입니다.

새로운 한주도 하느님의 사람답게 평화를 일구며 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