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넘어서(克己와 超越)
시편 125; 잠언 22,1-2/8-9/22-23; 야고 2,1-10/14-17; 마가 7,24-37

한  문 덕 목사

 

[러셀의 오해]
 
 영국 언론에서 100년 만에 한명 나올까 말까 한 사람이라고 불렸던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에서 예수를 붓다나 소크라테스보다 낮게 평가하면서 예수의 행적이 문제가 있음을 밝힙니다. 마태복음 25장, 최후의 심판의 날에 사람들을 양편으로 가르고 한 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저주의 말을 퍼부은 사실이나(41절), 돼지 떼를 몰살시킨 사건(마태 8:28-34), 특히 무화가 나무의 철이 아니었음에도, 자신이 배고픈데 열매가 없다고 무화과 나무에게 저주를 하여 영원토록 열매를 따먹지 못하게 한 사건(마르 11:12-14) 등을 언급하면서 예수의 잔인성과 비합리적인 면을 비판합니다. 성서의 모든 사건을 역사적 사실로 생각하고 문자 그대로 믿다보면 러셀처럼 성서의 상징성이나 문학기법, 성서 이야기가 형성된 과정 등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마르코의 본문 또한 우리로써는 참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었던 예수님과는 사뭇 다른 예수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온갖 병자들을 고치시고 마귀를 쫓아내시며,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시면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같이 음식을 드셨던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예수님이 등장합니다. 더러운 영에 들려 신음하고 고통당하는 어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는 여인의 간청을 냉정한 말로 거절합니다. “자녀들이 먹는 빵을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이 말이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정말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표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요? 이 말은 전혀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의 이 말은 오늘 우리들에게 걸림돌이며,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구세주로 아는 마르코 공동체 구성원들에게도 쉽게 납득되기 어려운 말입니다. 그러나 마르코 복음서 저자는 예수에 대한 신뢰를 일거에 무너트릴 수 있는 이 말을 그대로 적고 있습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며 또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저는 오늘 이 본문을 다양한 각도에서 그리고 꼼꼼히 살펴볼 생각입니다. 검사와 변호사가 소송사건을 다루면서 공방하듯이, 또 탐정이 다양한 추측과 추론을 통해 사건을 해결해 가듯이, 아니면 상상력을 통해 당시로 건너가서 오늘 등장하는 인물들의 심정들을 들추어 보기도 하겠습니다.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마르코 복음서 저자는 왜 이 사건을 남겨야만 했는지, 어떤 의도가 있는지 그 실체에 대해서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지만 이런 과정들을 통해 여기 모이신 저와 여러분 각자에게 혹시라도 나름의 한 가닥 깨달음이 생길 수 있다면, 그래서 그것으로 오늘의 삶 속에서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다면, 어제의 나보다 한 걸음 성숙한 인간으로 변화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거룩한 분으로, 하느님의 유일한 아들로 그래서 하느님과 같은 분으로 고백하기에 예수님은 죄도 없고 흠도 없는 완벽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오늘 저는 이런 신앙고백이 있기 전의 예수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렇게 생각해야 오늘 본문에 좀 더 다가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인간적인 측면을 깊게 생각하는 것은 인간인 우리들의 성숙에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신으로만 모시는 것은 자칫하면 모든 것을 신에게 맡기고 자신은 하느님의 뜻을 전혀 행하지 않는 모순적인 신앙인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선생이 지적하는 것처럼 가난한 이들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자신은 정작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그럼 마르코 본문으로 들어가 보지요.

[예수님! 왜 그러셨나요?]

 오늘 우리가 예수님께 따질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어떻게 예수님이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인 발언을 함으로써 아픈 아이를 살리려는 엄마를 모욕하고 그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로써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만 마르코 복음서는 곳곳에 예수님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습니다.

 그 첫째가 우선 예수님이 띠로에 간 이유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선교를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계시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계속되는 병자의 치유(6:53-56),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과의 논쟁(7;1-23)으로 몸과 마음은 지쳐있을 때로 지쳐 있던 때였습니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 쉬고 싶었는데 그래서 유대 땅도 아닌 이방 땅까지 갔는데, 웬 이방여자가 찾아 왔으니 짜증이 났던 것은 아닐까요?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개나 다른 가축보다 앞서 자녀들을 먹여야 한다.” 식량이 늘 부족한 고대 사회에서 이 말은 지중해 연안의 모든 사람들이 알던 격언이고 속담이었습니다. 예수는 이 말을 끌어 들여 여인을 돌려보내려고 했던 것이지요. 사실 누구나 알고 있는 지극히 당연한 속담이지만 이 상황에서 유대인 남성인 예수의 발설은 이방인 여성에게는 완전 모욕적인 말이었고, 사실 이 정도면 여자는 욕을 하고 떠날 테고 어쩌면 예수는 원래의 목적, 아무도 모르게 쉴 수 있는 때와 장소를 확보할 지도 모르겠지요.

 그러나 마르코 복음서를 읽고 있는 독자라면 예수님의 이런 변명은 통하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전에도 찾아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어, 따로 한적한 곳으로 피신했던 적이 있는데, 그 때 많은 군중이 그 사실을 알고 예수 일행의 일정과는 상관없이 그곳에 찾아왔고, 예수는 그 사람들을 보고 불쌍히 여겨 가르침을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물고기와 빵으로 5천명이나 되는 사람을 먹였었기 때문입니다(6:30-44). 그 때도 피곤한 것은 마찬가지였고, 사람들을 피해 한적한 곳을 간 것도 동일했는데 그 때는 그렇게 기적을 베풀고 이번에는 이렇게 하다니요? 그 때는 유대사람들이 몰려 왔으니까 그런 것이고 지금은 헬라 여자가 오니까 다르게 반응하신 건가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게 되었을 때 회당장이 당신께 와서 그 발아래 엎드려 자기 딸을 살려달라고 간청했을 때는 군말 않고 가시더니(5:21-23), 이번에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 여자가 오니까 그녀의 간곡한 요청을 안 들어주실 뿐만 아니라 개라고 모욕까지 하시다니요! 그 여자도 예수, 당신 앞에 엎드려 빌었습니다. 예수님, 너무 하신 것 아닌가요? 내가 지금은 피곤하니 쉬시고 싶다고 말씀 하시든지, 다음에 약속을 잡자고 하시긴 어려웠나요? 이 쯤 되면 예수님은 더 이상 변명하실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네 삶의 터전에서 만들어지는 우리의 한계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리 간단치가 않습니다. 사건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장소와 예수를 찾아온 여인의 출신, 그리고 몇 단어들이 또 다른 암시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찾아온 여인은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헬라인 여자였습니다. 시리아 페니키아는 북아프리카에 있는 리보-페니키아와 쌍벽을 이루는 지역으로써 고대부터 해상왕국으로 이름을 날렸던 페니키아의 영토 중 하나였습니다. 띠로는 지중해 연안에 불쑥 튀어나온 섬 위의 항구인데, 시돈 남쪽으로 40킬로미터 지점에 있었고, 페니키아 성읍들 가운데 가장 강한 성읍으로 주전 2,700년경에 세워졌습니다. 띠로는 그 위치 때문에 난공불락의 ‘요새 성읍’으로 통했습니다.(삼하 24:7 참조).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이 띠로를 13년 동안 에워싸고도 정복하지는 못했고(겔 29:18-20 참조). 알렉산더 대왕은 흙담을 육지에서 섬까지 몰고 간 뒤 일곱 달 만에 띠로를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띠로에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 여성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 여성은 띠로 본토 출신입니다. 그리고 알렉산더가 점령하여 헬라의 문화가 풍미했을 때 그것들을 익힌 교양이 풍부하고 상류계층에 있던 여성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30절에 “아이가 자리에 누워 있었고”라고 번역된 “자리”는 헬라어로 “클리네 κλινη” 우리말로 침대입니다. 마르코 복음에 등장하는 자리 즉 침상은 모두 임시용으로 겉옷도 되었다가 보자기도 되었다가 밤에는 펼치고 덮고 자는 것이라면 이것은 부유한 계층만 소유할 수 있는 고급 침대인 것입니다. 아마도 이 여성은 오래도록 강대국으로 있었던 자기나라에 대한 자부심과 헬라 문화를 익힌 이로써의 우월감, 그리고 뭐하나 부족할 것이 없는 풍족함 속에서 일상을 보내며, 그렇지 못한 이들을 얕보면서, 다른 민족은 미개한 족속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어떤 계층이었습니까? 예수를 소개하는 모든 본문은 예수의 아버지가 목수였거나 예수도 목수였을 것이라 말합니다. 목수 예수를 오늘날 고급 옷장을 만드는, 또는 전쟁 수레를 만드는 기술자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아마도 예수는 일용직 노동자였을 것입니다. 소작농이거나 아니면 아주 적은 땅으로 농사를 짓다가 농한기가 되면 나사렛에서 10킬로미터 떨어진 세포리스 신도시 건설현장에서 일용직 근로를 하던 사람이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리고 그 신도시는 헬라식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띠로는 역사적으로 유다인들이나 예루살렘 주민들과 적대적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다를 통한 국제 무역에 힘입어 부강한 도시가 되자, 키프로스 및 다르싯(오늘의 스페인)과 같은 여러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고, 막강한 부와 군사력으로 그리스인들에게 유다 백성이나 예루살렘 성민들을 노예로 팔아 먹고 국경 너머 멀리로 끌어 갔던(요엘 4:4-6), 도시였습니다.

 그러니 평범한 유대인 남성이라면 예수의 이런 반응에 대해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동안 시리아 페니키아의 띠로 주민들이 유대인들에게 해왔던 것을 생각하면 차라리 속이 시원하지요. 유대 민중들을 착취해서 헬라식 도시를 짓고, 그 문화에 취해 있는 헤롯 정권과 정부 요직의 인사들의 행태를 보아 왔던 민중이라면 헬라풍의 이 여자가 좋게만 보일 리 없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은 원래 유대인의 갱신운동이었으니 이방인 여자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개인의 자유와 평등, 모든 인류의 권리가 존중되고,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의 소중함을 생각하는 오늘날의 눈에서 보면 예수의 발언이 참기 힘들지만 1세기 유대인 독자들의 눈에서는 오히려 예수의 발언 이후가 그들에게 더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콧대 높은 헬라 귀부인이 오늘 예수에게 제대로 한방 당했구만! 아이구 속이 다 시원하네. 평소에 좀 있다고 으스대는 모양, 눈꼴 사나웠는데, 자 어떻게 하나 좀 보자!”

[예수의 자리와 오늘 우리의 자리]

 이렇게 잔뜩 기대하고 있는데 이 여성의 입에서 나오는 첫마디는 “주님”입니다. 이 말 한마디로 사건의 반전이 일어납니다. 오늘 예수와 시로 페니키아 출신 여성의 만남은 모든 병을 고쳐주는 용한 의원과 딸아이가 낫기를 바라고 온 한 어머니의 단순한 만남 이상이 녹아 있습니다. 그저 병만의 문제라면 깔끔하게 고쳐주면 되고 말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는 그 이상의 무엇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육체를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이상, 삶의 굽이굽이마다 내 몸과 기억에 아로새겨진 삶의 경험과 상처들이 녹아 있는, 그래서 서로 다른 느낌과 생각, 처지와 상황 속에 있는 이들이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육체적 한계 즉 사회적-문화적 시공간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 예수라 할지라도 유대인 남성으로 태어나 나자렛 촌동네에서 일용직 근로자요 가난한 농부로 자란 경험과 기억은 언제든지 스물 스물 나오고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툭 튀어 나올 뿐만 아니라, 머리로 짜고 성찰했다고 해도 그 기반이 이미 구부러진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중의 자기기만이 되어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모르게 됩니다. 각자의 경험들은 각기 다른 정체성을 만들어 내고, 그 다양성이 모여 복잡한 사회를 구성하고, 새로움도 창출하지만 동시에 소통되지 못하고 서로에게 갈등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야기는 단순히 병을 고친 “기적 이야기”가 아니라 삶의 유한성으로부터 발생하는 갈등을 어떻게 치유하면 좋은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논쟁 이야기”입니다.

 한참 덥더니 요사이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기운이 돌기까지 합니다. 이제 곧 추석이 다가오지요. 전국 곳곳에서 가족들이 모일 것입니다. 그리고 올해 대선이 있으니 서로 그런 이야기가 오고 갈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한 가족이 다 모였다고 칩시다. 여기는 어느 시골입니다. 부모님은 초등학교 졸업하시고 평생 농사만 지으신 분들이십니다. 은행은 오로지 농협하나만 있는 줄 알고 사시지요. 도장과 통장이 없다면 은행에서 돈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시고, 카드하나 들고 가서 돈이 인출되는 사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조국 근대화는 박정희 대통령의 위대한 영도 하에 이루어진 것이기에 이번 대선에서도 당연히 박근혜를 찍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큰 아들은 부모의 헌신적인 지원 덕분에 일찌감치 서울로 유학 가서 제법 알려진 대학의 경영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학생 때는 민주화를 위해 거리 시위(가투)도 제법 나갔지만 지금은 모기업의 부장으로 있습니다. 결혼하여 딸 둘을 낳았는데, 요즘 TV에서 계속 방영되는 성폭행 사건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안심치 않습니다. 둘째인 여동생은 맏이만을 받드는 시골 분위기에서 찬밥 신세였지만 홀로 굳건히 독립해서 중소기업의 회사원으로 살고 있습니다. 공부 욕심이 있어서 결혼하라는 부모의 잔소리를 견디며 돈이 좀 모이면 대학원에 입학하여 여성학을 전공하려고 합니다. 막내는 시골에서 부모님 모시며 살면서 농사를 이어갑니다. 가장 먼저 결혼해서 자식이 셋이나 있는데 그의 아이들은 요즘 닌텐도와 스마트폰, 컴퓨터 게임을 왔다 갔다 하며 하루를 보냅니다.

 이들이 모여 추석에 어떤 주제를 가지고 얘기를 나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함께 동감하며 모두 맞장구 칠 수 있는 부분은 얼마나 될까요? 그런 주제들이 몇 가지나 될까요? 얼마나 서로를 이해하며 편하게 얘기할 수 있을까요? 혹시 유산상속 문제가 대두 된다면 이 집안은 화목하게 잘 분배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서로 원수가 될까요?

[자기를 넘어서는 방법: “내려놓기”와 “역지사지”]

 오늘 시로 페니키아 여인의 간청에 예수가 보인 반응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사실 우리들 사이에서 부지기수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자신의 삶과 경험 속에서 자연적으로 나오는 말들은, 타인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또는 자신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상대방에게 모욕이나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사실 없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예수 또한 오늘 그런 실수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이러한 반응을, 즉 저주의 말을 복음의 소식으로 바꾼 것은 시로 페니키아 여인의 한 마디였습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선생님”이라고 되어 있지만 원문을 보면 이 여인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이 여인뿐입니다. 이 여인은 주님인 예수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이 여성은 예수 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 놓습니다. 과거 왕국의 영화도, 헬라 귀부인의 교양도, 그동안 가지고 있던 민족적 우월성도 모두 내려 놓습니다. 사랑하는 딸 아이의 고통 앞에서 어쩌면 이 엄마는 삶의 진리를 깨달았는지도 모릅니다.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것, 그리고 그밖에 나머지 것들은 모두 헛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는 사실. 내 자존심이나 명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주님, 그렇긴 합니다만 상 밑에 있는 강아지도 아이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얻어 먹지 않습니까?” 겸손한 이 한 마디에 녹아 있는 절규와 흐느낌과 간절함은 예수의 편견을 깹니다.

 “옳은 말이다.” 마르코 복음서 저자는 이 사건 이후의 예수 행적을 전부 이방에서의 행적으로 이어갑니다. 예수는 띠로를 떠나 이방지역인 시돈과 데카폴리스로 선교여행을 떠납니다. 그저 쉬러,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간 것이 아니라 이제는 본격적으로 그곳에도 복음을 전하려 갑니다. 그리고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였듯이 일곱 개의 빵과 물고기 몇 마리로 이방 사람 4천명을 먹입니다.

 이 여성 덕분에 예수는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는 생각에서 누구나 배불리 먹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도 자신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실천에 옮깁니다. 그리하여 마르코 공동체는 이방인, 유대인, 열두 제자를 추종하는 그룹, 소외되어 주변부에 머물렀던 여성, 장애인, 어린아이 모두가 함께 신앙을 나누는 공동체가 될 수 있었습니다. 마르코 공동체는 예수의 저주를 복음의 기쁜 소식으로 만들 줄 아는 공동체였고,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바로 이 시로 페니키아 여인의 재치와 기지, 자기를 내려놓을 줄 아는 용기와 생명에 대한 사랑, 편견에 사로잡힌 유대인 남성을 포용할 줄 하는 넓은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극기와 초월]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인간이 오래도록 추구했던 것은 바로 자기를 넘어서는 노력이었습니다. 동양에서는 이것을 극기라고 부릅니다. 글자 그대로 자기를 이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극복하려면 굳센 의지가 필요하고, 또 오랜 시간을 들여 훈련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하는 극기의 시작과 완성은 결국 남으로부터 가능합니다. 진정한 극기, 자기를 넘어서는 초월은 바로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깨우쳐 주는 타자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로 페니키아 여인은 예수의 모욕적인 말을 통해서 어쩌면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깨우쳤을 수도 있습니다. “나 또한 저런 편견에 사로잡혔던 사람이었지.” 예수는 여인의 현명한 대답을 통해 자신의 선교에 대해 깊이 자각합니다. 처음에는 쓰라리고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그것을 결국 넘어설 때, 서로에 대한 상처처럼 보이던 것이 각자가 하는 스스로의 성찰을 통해 성숙으로 변할 때 극기도 가능하고 초월도 가능합니다. 그렇게 너와 나는 서로에게 배워 각각이 자기를 초월하고, 그렇게 우리는 성숙해집니다.

 저는 60년사의 편집위원으로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향린의 지난 세월에 대한 기록들을 살피고 있습니다. 향린40년 책도 있고 그동안 나왔던 무수한 문서들이 있습니다. 향린지, 향린강단, 주보, 청년공동체, 향린소식, 파발마 등등. 그동안 향린은 참으로 많은 일을 했구나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가끔은 중요한 일들을 해내기 위해 시끄럽고 소란해지기도 했습니다. “가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는 속담처럼 향린공동체의 어느 가지에선가는 늘 바람이 불었습니다. 향린 구성원은 참으로 다양하고 또 다양한 만큼 다양한 관심사와 여러 일들이 진행됩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바람 잘 날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람 잘 날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가지들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다양한 가지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밑뿌리도 깊고 세밀하게 내려져 간다는 뜻입니다. 바람이 무서워 가지를 자르면 잎도 꽃도 열매도 못 맺고 나무는 죽습니다.
 
 60주년을 앞 둔 향린교우 여러분! 다시 한번 나를 돌아봅시다. 동시에 남의 얘기도 듣고 우리 공동체의 다양한 목소리도 귀를 기울여 들어봅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각자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서 한걸음 더 나가는 길입니다. 우리가 한 걸음 더 나가기 위해, 반종교, 비종교, 무종교인들의 얘기도, 이웃 종교들의 얘기도,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던지는 날카로운 비판의 소리도 주의 깊게 듣고 가장 좋은 길을 택해 그 길에 함께 걸어갑시다. 시로 페니키아 여인이 보여준 인내와 남에 대한 신뢰를 기억하면서, 또 다른 이를 통해 자신의 편견을 과감하게 고친 예수님을 따라 그 길로 갑시다. 오늘 예배 후에 푸른 이들이 어렵게 준비한 낮꿈을 합니다. 푸른이가 아닌 분들은 모두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항상 푸릇한 그네들의 이야기들을 보고 들으면서 에른스트 블로호가 꿈꿨던 낮꿈, 밤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홀로 꾸는 꿈, 그저 지나고 나면 잊혀지는 꿈이 아니라 대낮에 나를 넘어서 모두가 함께 어깨 걸머지고, 손잡고 꾸는 꿈을 꾸어봅시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