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으로 하느님을 예배하는가?

잠언 1:20-33; 시편 19; 야 3:1-12; 막 8:27-38


[버킷 리스트]


영어 단어이지만, 우리말로 자주 사용되는 단어가 하나 있는데, 버킷리스트란 단어입니다. 몇 년 전 이 제목으로 된 영화도 나왔습니다. 교만한 70대의 백인 갑부와 가난하지만, 꿈을 갖고 살아왔던 흑인 노인이 같은 병실에서 머물게 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사실 돈 많은 백인과 가난한 흑인이 한 병실에 있게 되는 일은 미국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니, 그 이후에 이어지는 얘기들도 현실과는 많이 동떨어진 얘기입니다만, 이 영화는 시한부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던 두 흑백의 노인이 의기투합하여 버킷리스트에 기록되어 있는 탐험에 나섬으로 죽음을 극복해가는 감동을 그리고 있습니다.


버킷이란 영어 단어는 저희 어렸을 때, 흔히 쓰던 일본어 바께쓰와 같은 단어입니다. 함석으로 된 물 양동이입니다. 우리나라는 이 양동이가 나오기 전까지는 도자기로 된 항아리를 썼는데, 이는 양쪽의 손잡이로 잡아 올려 주로 여인네들이 머리에 얹고 다녔습니다. 많이 불편했지요. 그래 제 어렸을 때에는 한 손으로 운반할 수 있는데다가 가볍고 깨지지도 않은 이 바께스가 대유행을 했습니다. 지금은 거의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래 전 유럽에서는 이게 가끔 자살용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목을 매달 때에 이를 뒤집어서 밟고 올라서서는 목을 매단 후에 이를 발끝으로 툭 차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살이라는 속어로 바께츠를 차다. kick the bucket 란 용어가 나왔고, 여기서 bucket list란 단어가 파생되었는데, 풀어 설명하면 ‘죽기 전에 해야 할 일, 혹은 하고 싶은 일’ 이렇게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영화 속의 흑인 주인공이 써놓은 버킷리스트에는 이집트 피라미드 가보기, 헹글러이더 타보기, 빙하 걸어보기 등등이 있었는데, 자신으로서는 그냥 꿈속의 얘기를 나열한 것에 불과했는데, 한 병실에서 죽음을 맞게 되는 돈 많은 백인과 의기가 투합하여 이를 실제 해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 이 영화를 보게 되면 누구나가 다 자신만의 버킷리스트를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이 영화가 아니더라도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것들이란 누구에게나 몇 개씩은 있게 마련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묻더라도 두세 개는 능히 답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 답하지 못하는 분이 혹 계신다면 그 분은 인생을 좀 밋밋하게 아니면 쫓기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오늘 식사하실 때에 함께 앉은 교우들에게 한번 당신의 버킷리스트는 무엇입니까? 하고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저도 버킷리스트를 글로 적어본 적은 없지만, 마음속에 담고 있는 것들이 몇 개 있습니다. 여기서 밝힐 수 있는 것도 있고 밝힐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만, 밝힐 수 있는 것 중에는 인왕산 암벽타기, 헹글라이더 타보기 그리고 아마존의 밀림과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를 걷는 것입니다.


지난 2주간 제가 여름휴가를 다녀왔는데, 가장 중요했던 일은 지난 2년동안 전화로만 안부를 주고받았던 LA에 계시는 부모님을 뵙는 일이었습니다. 현재 87세, 84세로 가끔 병원 신세도 지시지만, 두 분이 그런대로 바깥 출입을 하시면서 60년을 넘어 서로 의지하시며 노인아파트에서 살고 계십니다. 어느 순간 하느님의 부름을 받으실지 모르니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찾아뵙는 것은 자식의 도리를 넘어 후회없는 삶을 살아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부모님을 뵙고 나서 저는 곧 저의 버킷리스트 하나를 실현하기 위해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중학교 때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잉카 문명의 유적지 마츄픽추를 한번 올라보는 일은 저의 오래된 꿈의 하나였습니다. 2천미터 이상의 고지대인지라 늙기 전에 가보아야 한다는 조바심을 갖고 가보았지만, 교통편이 잘 되어 있어 건강하다면 70, 80세라도 다녀올 수는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은퇴 후로 이 여정을 미루지 않고 이번에 하게 된 이유는 저에게 있어 여행은 단지 목적지만을 가보는 것이 아니라, 오고가는 과정에서의 새로움과의 만남, 다른 말로 하면 모험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었기에, 가능하면 하루라도 젊었을 때 다녀오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여행사의 도움 없이 배낭을 메고 혼자 갔습니다. 짐무게를 줄이기 위해 바지는 입고 가는 한 벌만으로 대신했습니다. 스페인어라고는 오래 전 미국 햄버거가게에서 일하면서 배웠던 우노 도스 트레스, 1, 2 ,3과 부에노스 디아스라는 아침 인사 밖에 하지 못하는 60세 가까운 사람이 혼자 여행한다는 것은 약간은 무리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게 여행이 주는 설레임이요 기쁨이었기에 수도 리마에서의 첫날밤을 보낼 호스텔 한곳만 인터넷으로 정하고는 무작정 떠났습니다. 물론 좀 더 치밀하게 준비할 수도 있지만, 저는 대강 준비하고 떠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여행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다 짜여 있는 일정에 따라 움직이는 여행, 그건 여행이 아닌 일상의 삶의 연속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 아내에게 있어 여행이란 휴식과 쉼에 방점에 찍혀 있기에 모든 일정이 잘 짜여져 있어야 하고 잠자리와 식사도 편하게 마련되어야 합니다. 저는 그 반대입니다. 돌발적인 사건이 계속 터져 나오는 긴장과 모험이 없는 것은 여행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호텔 예약이 없는 상태에서 여기저기 잠자리를 찾기 위해 애를 써보고, 먹는 것도 그 나라 사람들이 먹는 길거리 포장마차 같은 곳에서 먹어 보고,.. 그래 처음 결혼해서는 왜 우리 부부는 잘 지내다가도 여행만 가면 다투는지를 잘 몰랐습니다. 나중에 MBTI도 해보니 성격도 전연 다르고 여행에 대한 기대가 정반대인 것을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 페루 여행은 대부분이 3,4천미터의 고지대이기에 고산증이 심한 제 아내는 함께 갈수도 없는 여행이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이제는 웬만하면 혼자 가는 것을 선호합니다. 우리 아내가 이 자리에 없어 다행이구요.


혼자 배낭여행을 하면 장점이 많습니다. 우선 돈이 적게 듭니다. 여행사의 경비에 비하면 한 3분지 1로 줄어듭니다. 한 섬을 오고가는 중에 5박 6일 패키지로 온 불란서 친구를 만났는데, 자꾸만 바가지를 썼다고 불평하는 겁니다. 단순히 그 날의 여행만 비교한다면, 저는 그 섬을 오고가는 모든 여행 경비가 1박의 잠자리와 세 끼의 식사를 포함해서 우리나라 돈으로 약 2만 5천원을 지불했는데, 그 친구는 10만원을 지불했더군요. 비용의 이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혼자 다니면, 일정을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바꿀 수가 있습니다, 물론 여행이라는 것이 때로 말동무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고, 밤거리를 혼자 다니려면 간혹 두려움이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인생이라는 것이 본래 혼자 걷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 혼자 여행은 많은 이점이 있습니다.


이번 여행은 짧은 기간에 우리나라 반대편에 있는 먼 곳을 선택하다보니 오고가는 시간으로 상당한 시간이 소비되고 말았습니다. 이번 여행 중 짧게는 한 시간 길게는 열두시간이 걸리는 비행기를 열 번을 탔습니다. 값싼 비행기 표를 구입하다보니 연결편이 좋지 않아 비행장에서 장시간을 보내야 했는데, 한 번은 열 시간 두 번은 열다섯 시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총 집계를 해보니 2주 기간 중의 절반 이상이 비행장을 오고가고, 비행기를 기다리고 그리고 비행기 타는 시간으로 소요되었습니다. 그래 침대에서 잔 날이 절반밖에 되지 않았고, 나머지 반은 대합실 의자와 비행기 의자에서 잤습니다. 다행히 아프지는 않았습니다만, 밤낮이 바뀌고 체질적으로 밀가루 음식이 맞지 않은데다, 고도 3,4천미터에서 잠을 자다보니 호흡곤란에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젊은이들과 한방에서 잠을 자는 호스텔이다 보니 어떤 경우는 새벽까지 옆방에서 떠드는 소리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고, 쿠스코라는 도시에서는 이틀을 머문 호스텔 바로 뒷집이 디스코텍이었습니다. 새벽 4시까지 밤새 내내 벽을 때리는 베이스의 울림으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호스텔에 머물다 보면 이런 불편도 있지만, 우선은 하루 방값이 만원정도로 싸고 보통 한 방에 2층 침대 몇 개씩이 있어 여러 명이 함께 잠을 자게 되는데, 각국에서 온 여러 여행객들을 만나 담소할 수 있어 좋습니다. 보통은 남녀 구별을 하여 잠을 자는데, 때로는 남녀가 섞어서 한 방에서 잠을 자는 경우도 있습니다. 십여년 전 처음 유럽 배낭여행을 하면서 한 방에서 젊은 여성들과 잠을 자게 되어 처음에는 상당히 거북스러웠는데, 몇 번 경험하다보니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샤워도 하고 잠도 잡니다.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것의 진정한 본질을 전달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며, 정신적인 것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한 번 명확하게 실물을 보아두기만 하면, 책을 읽거나 다른 사람한테서 이야기를 들어도 흥미가 깊어진다. 그건 살아 있는 인상과 연결되기 때문이며, 그때 비로소 우리는 사색하거나 판단할 수가 있다.”


제가 오늘 하늘뜻펴기를 준비하면서 페루 여행기를 말할까말까를 고민했었습니다. 남들은 제대로 휴가도 못 가는데, 목사가 이런 여행을 강단에서 말하는 것이 과연 신앙적인가? 더구나 오늘 야고보서 말씀은 말에 조심할 것을 당부하고 있고 “혀는 인체에서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엄청나게 허풍을 떱니다.”라는 구절도 있어 교우들을 시험에 빠트리는 것은 아닌가 하여 여러 차례 고민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은 제가 이번 본 살아 있는 인상의 깨달음과 오늘의 본문 말씀이 일치하는 바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야기의 효과를 위해 페루의 전통 모자와 조끼 그리고 중세시대의 모습을 간직한 성당에서 구입한 스톨을 입겠습니다.)


수천 년 전의 잉카 문명의 유물들을 보면서 도대체 역사가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사람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아무리 영화로운 삶을 누린다 하더라도 결국 수천 년 뒤에는 이런 폐허로 남겨지는 것이 역사요 인생이 아닌가? 거기서 무엇이 정말 내가 계속 붙잡고 가야 할 삶의 줄기가 무엇인가?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내 자신을 되돌아보고 미래의 목회를 고민하였습니다만, 정작 제가 가장 깊은 인상을 얻은 곳은 잉카 문명이 아니라, 아까 얘기했던 한 섬에서 하루를 머문 경험이었습니다.


페루와 볼리비아 접경 지역에는 고도 3,800미터 높이에 티티까까라는 호수가 있습니다. 안데스산맥 5곳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여 제주도의 절반만한 커다란 호수를 만들었습니다. 성서에도 갈릴리 호수를 갈릴리 바다라 부르듯이 여기도 수평선의 끝이 보이지 않으니 바다나 같습니다. 뿌마라는 도시에서 여행객들이 들리는 섬이 3개가 있습니다. 우로스, 아만따니, 따낄레입니다. 그런데 이중 우로스 섬은 floating island라 해서 고정되어 있는 섬도 아니고 바닥이 흙으로 된 섬이 아니라, 오래되어 단단하게 뭉쳐진 갈대뿌리를 엮어다가 물 위에 띄어놓고 닻으로 고정시킨 다음 그 위에 갈대 줄기를 덮어서 만든 인공섬입니다. 잉카제국의 침입을 피해 호수로 들어간 우로스 부족들이 수백 년을 조상대대로 이런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물고기와 사냥으로 생계를 유지해왔는데, 지금은 관광수입에 의존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섬의 크기는 가로세로 각각 약 20미터쯤 되는데 약 8가구가 한 섬에 모여 삽니다. 모두 45개의 섬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사는 이 갈대섬은 한 20년이 지나면 효력이 다해 이를 버리고 새로 만듭니다. 그러니 부동산 투기니 혹은 아파트 전세, 월세니 하는 단어는 알지도 못합니다. 자기 집이 없다는 말 또한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제한된 땅덩어리를 두고 서로 싸워오고 있는 자본주의 가치관 너머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여행객들은 보통 하루 일정으로 섬을 돌아보거나 1박 2일 여정으로 원주민들과 함께 잠을 자는 경험을 갖게 되는데 시설이 좋은 아만따니 섬에서 하루를 잡니다. 그런데 저는 아만따니 섬에서 자는 것 대신에 시설이 열악한 따낄레 섬에서 하루를 자는 선택을 했습니다. 약 천명의 주민이 사는 서너 시간만 돌아다니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아주 작은 섬입니다. 사방이 저 멀리 수평선이 까마득하게 보이는, 외부와 단절이 된 수백 년 전의 삶의 방식과 전통 문화가 매우 잘 보존되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제가 놀란 것은 이들이 간직해온 전통문화가 아닌, 전연 다른 것이었습니다.


[태고의 고요]


제가 머문 곳이 언덕 높은 곳에 있어 그 아래 약 200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낮에는 정확하게 몰랐는데, 밤이 되자 확연히 느껴졌습니다. 도대체가 이 동네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차 소리, 전화소리 tv 소리를 비롯한 일체의 문명이 가져오는 소리는 물론, 사람들의 도란도란 얘기하는 소리는 물론 짐승들의 울음소리, 개소리조차 전연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정적이 단순히 한 두시간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밤새 내내 유지가 되었습니다. 닭이 있긴 했는데, 새벽에 꼬끼요 하는 닭울음소리도 없었습니다. 주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여기는 개가 없느냐? 손을 단호하게 젓는 것을 보니 아예 개는 키우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저 양 몇 마리와 소 몇 마리가 보일 따름입니다. 왜 세상의 그 흔하디흔한 개를 이곳에서는 키우지 않을까,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정적을 깨는 개짓는 소리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연의 고요, 태고의 정적에 익숙해진 마을 사람들에게 있어 개는 인간의 반려동물이 더 이상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것은 아기들의 울음소리조차 전연 들리지 않은 것입니다. 학교에 가보니 아이들이 흥겹게 노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엄마 품에 안긴 갓난아기들이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어린이들이 울거나 떼를 쓰는 모습을 전연 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수염 난 불청객의 생김새가 이상하여 호기심 반 평상심 반으로 깜박깜박 거리는 맑은 눈동자만 보았습니다. 왜 이곳의 아이들의 눈은 한결같이 맑고 칭얼대지 않는 것일까? 반면 도시에 사는 아이들은 왜 칭얼댈까? 그 칭얼댐은 타고난 것인가 아니면 살아가면서 어른들로부터 배우는 것일까? 도대체 문명은 무엇이고 문명인이란 어떤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가? 오늘날 문명인이라는 도시 사람들이란 무언가를 달라는 칭얼댐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아닌가? 소비라는 미명아래 칭얼대는 일이야 말로 현대인들의 삶의 본질적인 모습이 아닌가?


이 섬에서 태어난 사람은 두 가지를 교육받는다고 합니다. 첫째는 언제나 진실을 말할 것 둘째는 언제나 일할 것. 그래서 그들은 남자고 여자고 걸어가면서도 뜨개질을 합니다. 제가 쓴 이 모자는 제가 머문 여관집 남자 주인이 만든 모자입니다. 농사지을 땅도 부족하고 생계를 위해 별로 할 것이 없는 섬인지라,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전통 직물짜기로 살아오고 있는데, 유네스코에서 인류문화재로 지정을 한 곳이기도 합니다. 제가 머물던 집의 아들은 중학교 2학년쯤 되었는데, 한 낮에도 열심히 이런 모자를 짜고 있었고, 밥을 먹을 때에도 뜨개질을 목에 걸고 있었습니다. 언제라도 이를 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일은 그들의 삶의 일부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코 일이 아닌 하나의 놀이로, 편안함으로 보였습니다.


돈으로 환산한다면 이 사람들의 일 년 소득은 한 천불이 될까요? 돈이 성공과 행복과 만족의 척도라면 우리는 그 사람들보다 최소한 20배쯤 행복하고 만족해야 할 것 같은데, 제가 하루를 접해본 짧은 경험에 의하면 그들이 우리보다 20배 아니 한 백 배 이백배 이상은 더 행복해 보였고, 만족스런 삶을 사는 듯이 보였습니다.


문명이란 어둠에서 깨인 사람을 말하고 미개인이란 아직도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하는데, 세상 기준으로 말한다면 삼성과 LG와 현대로 대변되는 남한 사람들은 문명인이요 그것도 경제규모나 올림픽 경기로 볼 때, 세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문명인이요, 저 따낄레 섬 사람들은 핸드폰은커녕 라디오도 제대로 갖지 못하는 결코 세계 뉴스에 등장할 일이 없는 미개인이 분명한데, 제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저들이야 말로 깬 사람들이요, 우리야 말로 무엇이 인생인지를 분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영원의 향연(饗宴)]


날이 어둑어둑해지며 저는 그 고요와 침묵, 그리고 완전한 정적 속에서 하늘에서 쏟아지는 별과 거대한 은하수를 보았습니다. 수 천미터 고지대에서만 볼 수 있는 그 하늘의 수많은 별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시편 19편을 떠올렸습니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속삭이고 창공은 그 솜씨를 일러줍니다, 낮은 낮에게 그 말을 전하고 밤은 그 밤에게 그 일을 알려줍니다. 그 이야기, 그 말소리 비록 들리지 않아도 그 소리 구석구석 울려 퍼지고 온 세상 땅 끝까지 번져갑니다.’


그런데 이 시편 구절이 오늘의 본문 말씀이 될 것이라고는 감히 상상도 못했습니다. 저는 그날 밤 정확히 9일 전, 그저 제가 기억하고 있던 시편 19편을 되내이며, 아 시편 기자가 말하는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속삭이고 창공은 그 솜씨를 일러주고, 낮은 낮에게 그 말을 전하고 밤은 그 밤에게 그 일을 알려주고, 그 말소리 비록 들리지 않아도 그 소리 구석구석 울려 퍼지고 온 세상 땅 끝까지 번져간다’는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며 깊은 감탄의 환성을 질러댔던 것입니다. 저 삼천 년 전 팔레스타인 광야 한 복판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경외와 감격 속에서 찬양해 마지않았던 한 시인의 감상 어린 찬양을 한 동양인이 우연히 들린 페루의 한 고도의 섬에서 경험했던 것입니다. 괴테의 말처럼 그날 밤의 감격을 어찌 말로 다 전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시편 19편의 드러난 오늘의 말씀을 강조하고 싶어 긴 서론의 여행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침묵과 고요가 만들어 낸 영원의 향연(饗宴), ‘하늘이 베푼 풍성한 잔치상’이란 말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문명이라는 허울아래 TV와 회식으로 밤이 주는 고요와 침묵을 잃어버린 오늘 우리 삶의 허구성을 드러내고 싶었고, 별과 달을 대신하는 가로등과 휘황찬란한 네온싸인의 불빛 속으로 불나방이 되어 소음과 욕망의 탐욕 속으로 질주하는 회색 도시인들의 죽음의 행진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도시 문명이란 다름 아닌 소음의 문명입니다. 또 현대인이란 말의 난무(亂舞)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TV와 신문기사와 인터넷에서 즉각즉각 뜨는 뉴스가 없이는 우리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바로 지금 이 자리도 하느님의 침묵이 아닌 인간의 말이 예배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침묵의 기도 시간이 있지만, 그건 순간일 따름입니다. 때로는 이 침묵을 깨고 과학 문명의 건재를 알리는 전화벨이 울리기도 합니다. 대선을 앞두고 정치인들의 말이 난무합니다. 협박이다 아니다 친구 사이의 충고이다. 택시를 탔다 안탔다 아 가만 생각해보니 탄 것 같다. 며칠 전 택시를 탔는지 자기차로 운전하며 갔는지를 분간할 수 없는 사람은 이미 정신이 나간 허깨비입니다. 우리는 그런 허깨비들을 정치지도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또 하나의 허깨비들이구요. 그리고 같은 학교 나왔으면 다 친구인가요? 말만 놓으면 다 친구인가요? 친구 사이임을 고집하는 그 사람에게 함석헌 선생의 ‘그대는 그 사람을 가졌는가?’란 시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친구란 오히려 상대방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이를 두고 하는 말인데, ‘너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어’라는 말이 오고가는 사이가 친구 사이가 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굳이 정치인들이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들의 일상은 상대방을 헤치고자 하는 칼날을 숨긴 말의 난무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tv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면서부터 사람들은 무료하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고, 외롭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군중 속의 고독이란 말처럼 tv는 가족을 한자리에 모았지만, 가족간의 대화의 시간을 빼앗아 가버렸고, 지구 저 끝에 있는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스마트폰은 머리맡을 맞대고 누워있는 부부 사이의 대화를 빼앗아가고 말았습니다. 손가락으로 누르는 텍스트는 간편하기 이를데 없을 뿐더러 동시에 세계의 수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하였지만, ‘하나 남은 구명조끼 서로 미룰 수 있는, 그 한 사람을 얻을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세계화라는 미명 아래 비인간화는 계속 심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잠언의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철부지들아, 언제까지 철없는 짓을 좋아하려느냐? 거만한 자들아, 언제까지 빈정되기를 즐기려느냐? 미련한 자들아, 언제까지 지식을 거절하려느냐? 내 훈계를 듣고 돌아서면 내 속마음을 부어주고 내 속엣말을 들려주련만, 너희는 불러도 들은 체도 않고 손을 내밀어도 아랑곳하지 않는구나. 나의 온갖 충고를 물리치고 훈계도 받아들이지 않아 너희가 참변을 당할 때,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운 일이 닥칠 때 내가 비웃으리라.” 성서 속의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내 손안에 든 텍스트의 메시지가 더 중요시되는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경고입니다.


야고보서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내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저마다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 가르치는 사람들은 더 엄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실수하는 일이 많습니다. 말은 입에 재갈을 물려야 고분고분해집니다.” 사실 여기서 말하는 말은 동물 말을 뜻하지만, 우리말에서는 입에서 나오는 말도 말이고 동물인 말도 말인지라 한 단어가 두 의미를 한꺼번에 주고 있습니다. 말의 입에 재갈을 물리듯이 우리 입에 어떻게 재갈을 물릴 수 있을까요? 우리는 종종 말을 하지 않아서 후회하기 보다는 말을 하여서 후회했던 적인 더 많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중세 가톨릭의 행위를 강조하는 교리에 대항하여 교회개혁을 하다보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값없이 주시는 하느님의 구원을 너무 강조하다가 그만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혹평을 했습니다만, 아마 지금은 루터마저도 ‘아 내가 그때 내 입에 재갈을 물렸어야 했는데...’ 라고 후회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날과 같이 말이 난무하는 시대에서는 오히려 로마서의 은혜의 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야고보서의 말씀이 더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야고보서를 제2성서의 잠언서라 말합니다. 오늘 말씀 또한 중요합니다. “혀는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아주 작은 불씨가 큰 숲을 불살라 버리듯이 우리 몸을 불살라 버릴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모든 들짐승과 새와 길짐승과 바다의 생물들을 길들일 수 있지만,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같은 혀로 하느님을 찬양하기도 하고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양도 나오고 저주도 나옵니다. 내 형제 여러분, 이래서는 안되겠습니다. 같은 샘구멍에서 단 물과 쓴 물이 함께 나올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한 사람의 인격을 아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그가 식당에서 종업원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래 전에 한 인터넷에 한 아빠가 결혼을 앞 둔 딸에게 쓴 글 가운데 이런 글귀가 있었음을 기억합니다. ‘딸아, 너는 네가 사귀고 있는 사람이 택시를 타고 내릴 때에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잘 보아야 한다. 그가 다른 차의 흐름에 전연 상관하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손을 들어 택시를 세우고, 아무 곳에서나 내려달라고 할 때, 그 사람은 같은 방식으로 결혼 후의 너를 대할 것을 알아야 한다.’


오늘 마르코복음의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하는 예수님의 질문은 매우 깊은 신학적인 성찰이 담긴 질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가 답한 메시야 상과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메시야 상에 엄청난 괴리가 놓여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답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시험지에 기록한 답은 정답이었지만, 그러나 방과 후에 친구들을 대하는 모습은 그 답과는 전연 딴판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말한 그리스도의 상은 희생과 낮아짐의 하늘의 그리스도가 아닌 지배와 높아짐의 땅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 또한 베드로와 전연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를 나오고 하느님을 예배하고 저 십자가의 희생과 낮아짐 속에 나의 구원이 온다고 고백하지만, 그러나 드러나는 우리들의 삶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이 아닌 십자가 없이, 때로는 십자가를 밟고 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도시 문명의 혼잡함을 뚫고 말의 난무를 그치고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루해가 저물어가는 저녁 시간 홀로 앉아 침묵과 고요 속에서 내가 오늘 하루동안 던진 나의 말들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기를 바랍니다? 정성을 다한다는 한자의 성(誠)은 말씀 언(言) 변에 이룰 성(成)이 결합한 단어입니다. 자기 말을 삶으로 구현해 내는 일이야 말로 정성을 다해 하느님을 예배하는 일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고백은 십자가 뒤로 자기는 감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하느님을 예배합니까? 예물로, 삶으로, 행동으로, 기도로, 통장의 지출항목으로,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예배합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우리는 말로 하느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말에서 우리가 믿는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하는 말이 바로 우리의 하느님입니다.


이해인 수녀의 시로 오늘의 말을 맺고자 합니다.


행복하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정말 행복해서

마음에 맑은 샘이 흐르고

고맙다고 말하는 동안은

고마운 마음 새로이 솟아올라

내 마음도 더욱 순해지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잠시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마음 한 자락이 환해지고

좋은 말이 나를 키우는 걸

나는 말하면서

다시 알지


침묵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침묵이 아닙니다. 참 침묵은 말의 한계를 깊이 깨닫고 말 너머의 빈 공간으로 들어가 자신이 해체되는 경험을 말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