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감사주일


하느님께 가까이


시편 1; 잠언 31,10-31; 야고 3,13-4,3, 7-8a; 마르 9,30-37


조 헌 정 목사


제 기억 저 너머에 있는 아주 어리고 어린 어느 날부터 가정예배라는 것을 매일 드려왔습니다. 어떤 경우는 아침 저녁 두 번 드리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때 부모님께서 다른 일로 시간이 쫓길 때에, 성서를 펼쳐 읽는 대신에 몇 개의 외우고 있는 성서 말씀으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대표적인 말씀이 시편 1편과 23편입니다. 저는 외우는 일을 썩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아직도 이 두 시편은 쉽게 외울 수 있습니다. 시편은 오늘날로 말하면 찬송가입니다. 노래용 가사이지 설교용 본문으로 선택하여 이를 분석하고 말씀의 의미를 파헤쳐야 하는 그런 깊은 신학이나 역사성이 담겨있는 말씀은 아닙니다. 주로 찬양과 탄식의 노래입니다.


[복(福) 그건 소유인가? 존재인가?]


시편 1편은 모든 시편의 첫머리가 되는 노랫말입니다. 어쩌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드릴 때에 개회찬송으로 썼는지도 모릅니다. ‘복되어라’ 하는 노랫말로 시작합니다. 누구나 복을 원합니다. 건강의 복, 장수의 복, 재물의 복, 높은 자리의 복, 그런데 여러분 이 복의 내용을 가만히 묵상해보면 이 복은 모두 상대적인 복입니다. 건강의 복을 누린다고 해서 60, 70이 되어서도 청년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장수의 복을 누린다고 하더라도 90세를 넘기는 정도이지 백세 이백세 살 수는 없습니다. 재물을 갖는다 하더라도 세상 모든 재물을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결국은 모든 복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남과의 비교 속에서 많으면 복이 있다 말하는 것이고 적으면 복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상대에 따라 커졌다 적어졌다 하는 복은 진정한 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복은 주위 환경에 지배를 받지 않아야 하고, 그리고 복의 주체는 하느님 자신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상대에 따라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복이라면 그건 허위의 복이요 위선의 복입니다. 저는 이점에서 우리들이 정말 원하는 복이 어떤 것이야 하는지를 깊이 묵상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복되어라’라는 단어로 시작하는 시편 1편에서 말하는 복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복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우선 복 있는 사람은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고,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 다음, 그 대신 야훼께서 주시는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 이를 되새기는 사람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가져서 남보다 많이 가져서 얻어지는 복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이 사람됨에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음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복이 많다 적다라는 소유적 개념이 아닌 복된 사람이라는 존재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복된 사람은 마치 물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아 잎사귀가 시들지 않고 제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열매가 맺히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열매보다 중요한 것은 나무 자체가 갖는 복입니다. 나무는 물가에 심겨져 있기만 하면 자연적으로 열매는 맺게 되어 있습니다. 존재의 복을 바로 세우면 소유의 복은 자연적으로 뒤따라온다는 것을 물가에 심겨진 나무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낮음의 지혜와 축복]


사실 우리나라는 어디에서나 나무가 잘 자랍니다. 특별히 황무지 땅이라고 불릴만한 곳이 없습니다. 세계를 돌아다녀 보면 이 점에서 우리나라처럼 복된 나라는 없습니다. 어디에나 수풀이 우거져 있고, 먹을 물을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 기자가 살아가는 팔레스타인 땅은 우리와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사막과 광야가 대부분입니다. 기후 또한 우기와 건기로 일 년의 반씩 뚜렷하게 구별이 됩니다. 우기에는 어디에나 물이 넘쳐납니다. 물이 흘러내린다고 겉으로만 판단하고 거기에 쉽게 뿌리를 내리는 나무는 건기가 되면 자연히 말라 비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몇 개월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건기에도 나무가 살아남으려면 땅 속에 흐르는 물줄기를 찾아 거기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나무에게 장소를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다면 나무는 어디에 자신을 심어야 할까요? 땅 속을 흐르는 물줄기가 보이지는 않지만, 중요한 것은 그 지역에서 가장 낮은 곳을 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지혜가 바로 복의 근원입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지혜롭고 지식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증거를 보여주도록 하십시오.” 이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두고 한 말입니다. 지난 주에는 남한에 있는 장로교단 수 십 여개가 모두 97회 총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교단 총회를 개최했는데, 우리 교회가 속한 기장 총회도 강원도 홍천에서 3박 4일의 회의를 가졌습니다. 700명이 넘는 총대들 가운데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게 마련이고 가끔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갖고 법을 주장하며 계속 물고 늘어지는 사람도 있어 짜증나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아는 기자가 취재차 왔기에 “방청할만 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기장 총회 정도면 정말 신사적인 회의라고 얘기하면서 다른 교단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더군요. 이미 언론에도 폭로가 되었지만, 한 보수장로교단에서는 총회에 사설경호원을 동원하여 총대가 아닌 회원들의 출입을 막고, 총회 석상에서 교단총무목사님은 자신이 지금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고 하면서 가스총을 들어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이쯤 되면 목사장로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거룩한 모임인지, 아니면 조폭들의 모임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감리교의 K목사 3형제는 모두가 초대형교회를 이룬 것뿐만 아니라, 위로 두 형은 감리교의 최고 수장인 4년 임기의 감독회장을 역임한 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이 형들을 이어 셋째가 감독회장을 하겠다고 나섰는데, 목사가 되기 전 사회법정에서 받은 범죄 사실로 인해 자격에 문제가 있어 법정 투쟁을 하는 바람에 지난 3년동안 교단이 거의 무력화 되어버렸습니다. 올해에는 꼭 정상화를 이루겠다고 모두가 노력하고 있지만, 삼남 목사가 기어이 감독회장이 되겠다고 나서고 단독후보가 되는 과정에 또 다시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 법적 투쟁에 또 다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만약 삼남 목사가 이 법적 투쟁에서 승리하여 감독회장이 된다면 이 또한 기네스북에 오를만한 일이지만, 이 형제분들은 이미 기네스북에 오를만한 업적을 달성시킨 사람들입니다. 그건 초대형교회를 이루었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이 3형제 모두 자기 아들들에게 담임목사직을 세습시키는 업적을 달성시킨 일입니다. 그래서 지금 감리교단은 이번 총회에서 아들에게 담임목사직을 세습하는 일을 금지하기 위한 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지원자가 없는 작은 교회에서 아들이 아버지의 목회직을 이어받는 일은 아름다운 일로 칭송받을 수 있지만, 수만 명이 모이는 대형교회를 아들에게 물려주는 일은 일종의 권력이양과 같은 일이기에 오늘날의 민주사회에서는 설사 교인들이 원한다 하더라도 사회적 반응을 고려할 때, 결코 피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가끔 돌발적인 반공 보수 발언으로 화제를 불러오는 이 둘째 동생 목사께서는 2주전 조선일보 전면에 자신이 아들에게 세습을 하는 일은 성서적이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으로 주장하고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남이 잘되는 것을 시기하는 투정꾼으로 심지어는 빨갱이로 매도하는 광고성 설교를 실었습니다. 지나가는 개도 웃을 얘기입니다만, 수만 명이나 되는 그 교회 교인들이 아멘하는 것을 보면 남한의 교회도 이제는 그 생명이 다 한 것 같습니다. 현재 남한 땅에는 아들이나 사위에게 세습하는 교회들이 한 두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가 사유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교회 역사는 말합니다. 교회의 사유화는 필연적으로 부패를 불러일으키고 부패는 분쟁을 분쟁은 사망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남한의 선교역사를 돌이켜 보면 지난 백년의 기간은 교회 개척의 우기와도 같아 어디에나 십자가를 세우면 사람들이 모여들었지만, 이제는 건기가 시작하여 말라비틀어지는 교회들이 계속 속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훼께서 주시는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이란 단순히 성서 말씀에 능통한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목사님들이야 말로 누구보다 성서 말씀에 능통하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훼의 법을 밤낮으로 되새긴다는 소유 개념의 구절보다는 앞서 나오는 말씀을 낙으로 삼는다는 구절에 유의하여야 합니다. 야훼의 말씀을 낙으로 삼는다는 말은 말씀이 자신의 삶으로 녹아들어가 있는 변화된 존재의 모습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땅의 지혜, 하늘의 지혜]


야고보서 기자는 오늘날과 같이 교회의 지도자들로 인해 교회 안에 분쟁이 일고 사회적 비난이 가득 차 있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는 하늘에서 오는 지혜를 좇아야 한다. 하늘에서 오는 지혜와 땅에 속한 지혜를 구별하는 기준은 그 지혜가 성서에 있는 말씀이냐 아니면 세상 책에서 나온 말이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들의 마음속에 시기심과 이기적인 야심이 있어 공동체 안에 분란이 일어나면 그건 땅에 속한 지혜라고 말합니다.


반면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는 첫째 순결하고 둘째 평화롭고 점잖고 고분고분하고 자비와 착한 행실로 가득 차 있으며 편견과 위선이 없으며 평화를 심어서 정의의 열매를 거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반문합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서로 싸우고 분쟁을 일으킵니까? 자기 욕심 때문이 아닙니까? 야고보 기자는 말을 우회하지 않습니다. 단독직입적으로 반문하고 결론으로 하는 말이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까닭은 하느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이고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가끔 자신에게 묻습니다. 교회를 섬기는 지금 나에게 사심이 있는가? 이기적 야심이 있는가?


우리는 흔히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요 찾으면 찾으리라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일방적으로 곡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찾고 구하는 모든 것을 주신다는 말씀에 앞서, 자기 욕정을 채우려고 구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는 말씀의 의미는 먼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전제된 말씀입니다.


마르코 복음서의 본문 말씀은 이를 더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권력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수년동안이나 함께 살아가는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서도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면 예수님이 왕이 되는 새로운 왕국이 시작할 것인데, 그때 누가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인가를 갖고 다투었습니다. 그래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그들 앞에 세우고 그를 안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또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곧 나를 보내신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일은 꼴찌가 되는 것]


어린이는 유치하고 아직 여물지 못했다는 부정의 의미와 야심이 없는 순수함과 낮아짐이라는 긍정의 의미가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어린이들은 어른들로부터 ‘네가 뭘 알아’ 하며 배척을 받습니다. 저는 우리 어른들의 인격이 얼마나 성숙되어 있는지는 어린이들을 대하는 자세에서부터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한 예뻐하고 쓰다듬는 대상이 아닌, 그들의 사심 없는 행동과 맑은 눈빛 속에 하늘의 깊은 지혜의 가르침이 온다고 하는 섬김의 대상으로 삼았을 때, 우리는 인격은 무르익어 갑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꼴찌의 사람이 되고 어린이와 같이 될 것을 요구하십니다. 꼴찌가 되어 모든 이를 섬기는 사람이란 단순히 겸손한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헬라어 본문에 의하면 이는 노예나 종을 말하고 당시 사회로 돌아간다면 꼴찌가 되는 종이 하는 일은 그 집을 들어오는 모든 손님들의 발을 씻어주는 일이었고 남이 먼저 먹고 남은 음식 찌꺼기를 먹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사람 축에도 들지 못했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다른 사회단체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우리가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일이고 남이 먹다 남은 음식을 먹는 일입니다. 우리가 직접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주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상상으로 교인들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때 묻고 냄새나는 발을 씻어주는 자신의 모습을 항상 머리속에 그리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저는 이 세족의 상징을 교회 어디엔가 두고 싶은 마음이 항상 있어왔습니다. 교회 마당에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주는 동상을 세워놓거나 이 예배실 한 구석에 수건과 대야를 놓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나누는 성찬의 예식을 행하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 우리의 살과 피를 나누기 위함인데,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주는 일이 없이 우리가 어떻게 살과 피를 나누는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어느 신앙인의 기도입니다.


제가 남보다 부유하다고 생각될 때 저는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가난한 자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남보다 높다고 생각될 때, 저는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낮은 자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남보다 지혜롭다고 생각될 때 저는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남보다 선하다고 생각될 때 저는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의인보다 죄인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따르는 신앙인이 되고 그리고 매주일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오는 이 예배의 행위는 우리가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함입니다.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현재의 자신을 비워내야 합니다. 하느님을 예배하는 행위는 우리가 더 높은 존재로 나아가기 위함인데, 현재의 자기를 비워내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더 높은 존재로 나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낮아지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비워낼 수 있겠습니까?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의 의미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날마다 자기를 비워낸다면 부부라 할지라도 매일매일 바뀌는 새로운 연인으로 변할 수 있고, 십년 이십년 만나는 교우라 할지라도 오늘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신선한 기대를 안고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추석감사주일로 지킵니다만, 오늘의 본문 말씀이 감사에 관련하여 직접적인 말씀이 없어 감사에 관련한 말씀을 드리지 못했습니다만, 저는 오히려 우리를 비워내고 낮은 자리에로 내려가라는 오늘의 성서 본문 말씀이 우리가 진정 깊이 감사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결실의 계절, 인생의 바구니에 무엇을 감사의 열매로 드릴 것인가? 역설적입니다만, 저는 오히려 빈바구니 내어 놓으며 주님께서 채워주시기를 바라는 열린 마음이야 말로 진정한 신앙의 열매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가오는 한 주간 부모님과 형제자매 친지들을 만날 때에 하늘나라의 잔치를 만끽하는 감사와 즐거움의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성찬식을 준비하며 마음을 비워내는 침묵으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