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성만찬주일 향린공동체연합예배

차별과 경계를 넘어서

창세 3,8-13; 갈라 3,26-28; 마르 7,24-30

이 병 일 목사

내일(10/8)은 24절기 가운데 17번째 절기로 찬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는 시기라는 뜻의 절기인 한로(寒露)입니다. 한로 절기에는 기러기가 초대를 받은 듯 모여들고, 참새가 줄고 조개가 나돌며, 국화가 노랗게 핀다고 하였습니다.

한로와 상강(霜降) 무렵에 서민들은 추어탕(鰍魚湯)을 즐겨 먹었는데, 특히 한 해 동안 농사일을 도와 준 이웃들에게 추어탕으로 고마움을 대신했다고 합니다. <본초강목>에 미꾸라지가 ‘뱃속을 따뜻하게 하고, 원기를 돋우며 술을 빨리 깨게 할 뿐 아니라, 양기의 보충에도 효과가 있고 백발을 흑발로 변하게 한다’고 하니 고마움을 표현하기에 제격인 음식입니다. 가을에 누렇게 살찌는 가을 고기라 하여 미꾸라지를 추어(鰍魚)라고 합니다.<鰍 미꾸라지 추; 魚변에 秋>

조상들은 한로를 전후하여 국화전을 부치어 먹었고, 국화 술을 담가서 온갖 모임이나 놀이를 즐겼으며 수유(茱萸; 쉬나무, 수유나무, 꿀벌나무의 열매)를 머리에 꽂아 잡귀를 쫓았다고 합니다. 국화는 그 둥근 모양과 밝은 색이 태양을 상징하며 양의 숫자 중 가장 큰 수인 9가 겹치는 중양(9월 9일)이 바로 이즈음이기 때문입니다. 국화는 모진 서리를 이겨내고 꽃을 피우니 오상고절(傲霜孤節)이라 하고, 햇빛을 좋아해 볕이 잘 드는 동쪽 울타리에 심으니 동쪽 울타리 밑의 미인이라는 뜻으로 동리가인(東籬佳人)이라고도 합니다.

찬이슬이 내리는 한로부터 나무마다 단풍이 들기 시작합니다. 나뭇잎에 단풍이 드는 이유는 엽록소가 파괴되어 엽록소 때문에 보이지 않던 카로틴(Carotene)이나 크산토필(Xanthophyll)과 같은 색소가 나타나거나, 잎이 시들면서 잎 속에 있던 물질들이 그때까지 잎 속에 없던 색소로 바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단풍 현상을 타감작용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보기에 아름다운 단풍이 사실은 경쟁자를 제거하려는 독성 물질들의 화학전쟁이라는 것입니다. 단풍나무를 비롯하여 붉은 색으로 물드는 나무들은 주변에 다른 나무가 얼씬하지 못하도록 독을 분비하는 타감작용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타감작용(他感作用; allelopathy)이란 오스트리아 출신 독일의 식물학자 한스 몰리슈(1856~1937)가 주창한 용어인데, 한 식물이 독성물질을 분비하여 다른 식물에 해로운 영향을 미치고 자기의 생존을 확보하고 성장을 촉진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타감작용은 상호 대립되는 식물끼리 땅속의 영양분을 빨리 또는 보다 많이 흡수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면서 진화되었습니다. 서로 경쟁관계에 있는 식물을 함께 식재하면 서로 경쟁하기 때문에 성장이 빨라지기도 하며 대립식물을 고사시키기도 합니다.

남한강 주변에 칡넝쿨처럼 나무를 뒤덮은 넝쿨이 있는데, 가시박이라고 합니다. 외래종인 가시박은 타감물질을 분비하여 주변의 식물이 성장하지 못하도록 하며, 결국 말라죽게 합니다. 번식력도 뛰어나서 한 그루에서 2-3만개의 씨앗이 맺힙니다. 몇 년 전에 남한강 순례를 하면서 ‘가시박도 무섭지만, 이명박은 더 하다’라고 하면서 웃을 적이 있습니다. 소나무도 타감작용을 하는데 햇빛을 많이 받기 위해 다른 나무들이 자라는 것을 방해하는 물질을 내품습니다. 붉은색의 단풍잎에는 다른 식물의 성장을 억제하는 독소가 있어 잎이 땅에 떨어지면 단풍나무 잎에서 안토시아닌이라는 물질이 분비되어 다른 식물의 성장을 억제한다고 합니다. 허브 식물의 독특한 향기, 마늘에 포함된 알리신(Allicin), 고추의 메운 성분을 만드는 켑사이신(Capsaicin), 감자 싹에 들어 있는 솔라닌(solanine) 등도 대표적인 타감물질에 해당합니다.

한때 미국 애팔래치아산맥을 뒤덮었던 아메리칸 밤나무는 타감 작용을 하는 대표적 식물이었습니다. 하지만 20세기 초 아시아에서 새로운 병충해가 들어오자 다양성이 없는 밤나무 숲은 그대로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자기의 생존을 확보하고 더 크게 자라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내뿜는 타감물질이 심하면 자기의 씨앗까지도 죽이고, 결국에는 자기의 생존마저도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종들 외에 대부분의 많은 생명들은 자기와 다른 생명들과도 함께 공존하며 살아갑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자기와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를 강조하게 되면 차별이 생깁니다. 그 차별을 특정 집단의 생존이나 성장을 위한 타감작용이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다름이 틀림으로 차이가 차별로 이어지는 일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에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가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서로 댓구가 되는 짝은 당시의 상황에서는 그리 쉽게 융화될 수 없는 상대였습니다. 인종과 계급과 성이 다르다는 것은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여전히 차별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요즘에는 이러한 요인이 서 세분화 되어 약자나 소수자들을 차별합니다.

특히 오랜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은 많은 차별을 받아야했습니다. 그 차별의 흔적을 들꽃의 이름에서도 착을 수 있습니다. 들꽃 이름 중에 며느리가 붙어 있는 이름이 있습니다. 며느리 밥풀꽃, 며느리 밑씻개, 며느리 배꼽이 그것입니다. 저는 며느리 3부작이라고 합니다. 그 이름들에 담긴 사연이나 이야기는 모두가 며느리들의 삶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성차별의 극단적인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며느리 밑씻개는 ‘꺼끄렁풀’이라고 할 정도로 잔가시들이 잎과 줄기에 붙어 있는데, 못된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그것으로 화장지를 대신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며느리 배꼽의 열매는 마치 갓난아기의 배꼽에 붙어서 떨어지려는 탯줄의 꼬리와 같이 흉하게 생겼습니다.

며느리 밥풀꽃은 슬픈 전설을 담고 있습니다. “옛날, 외동아들집에 며느리를 맞게 되었답니다. 자식처럼 연인처럼 아들을 길러 온 홀어머니는 아들을 빼앗긴 듯한 느낌에 점점 심하게 박대를 했답니다. 어느 날 밥을 짓던 며느리는 밥이 다 익었는지 알아보려고 밥알 몇 개를 씹어 보다가 들켰답니다.(일설에는 밥이 다 되었는지 보려는 순간에 천정에서 떨어진 흙이 솥에 들어가서 그 부분을 골라내다가 아까워서 먹으려는 순간에 시어머니가 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미운 놈은 미운 짓만 보인다고, 눈엣가시 같은 며느리에게 트집을 잡았지요. 시에미보다 먼저 밥을 먹었다고.(일설에는 조상에게 올리기도 전에 먼저 먹었다고 트집 잡았다는 얘기도 있더군요.) 당연히 습관처럼 오락처럼 사정없이 몽둥이로 두들겨 팼답니다. 당연히 분통이 터졌겠지요. 상처야 한두 군데 터졌겠어요? 변명도 못해보고.... 그게 원통해서 높은 산으로 도망가서 울다가 지쳐 죽었답니다. 다음해에 그 곳에서 싹이 나고 꽃이 피었습니다.” 그래서 며느리 밥풀꽃은 산 높은 곳에 핍니다. 그리고 마치 밥알을 안 먹고 입에 넣고 씹어만 봤다는 듯이 말없는 시위처럼 혓바닥에 밥알 두 개를 물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며느리 밥풀꽃은 억울한 사연을 높은 산에서 하늘에 고하는 꽃입니다.

그러한 차별의 근원을 찾아가면 자기와 다르거나 약한 존재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데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죄를 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선과 악을 알게 된 것을 죄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선과 악을 알게 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자기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핑계를 대기 때문입니다. 두려워서 숨은 남자와 여자를 찾아온 하느님께 남자는 말합니다. “야훼 하느님이 저와 함께 살라고 짝지어주신 여자, 그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그것을 먹었을 뿐입니다.” 남자의 이 핑계 속에는 두 가지 대상을 염두하고 있습니다.

먼저 남자는 야훼 하느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서로 돕는 짝으로 당신이 만들어 주신 여자 때문에 일이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자기의 잘못을 야훼 하느님께 그 책임을 돌리고 있습니다. 야훼 하느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을 때에, 여자를 보고 남자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감격하면서 말했습니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아니 좋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그 여자를 왜 만들어서 나를 곤경에 빠지게 합니까!’라고 말하면서 책임을 전가합니다.

다음에 남자는 여자를 고발합니다. 엄격히 말하면 고발이 아니라 누명을 씌우는 것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여성 차별의 확실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여자는 유혹에 잘 넘어가고, 남자를 유혹하여 죄를 짓게 만드는 사탄으로 오해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잘 살펴보면, 뱀으로부터 유혹을 받을 때에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었습니다. 뱀은 그들에게 계속해서 “너희”라고 말하고, 그들은 “우리”라고 말합니다. 또한 6절에는 여자가 먼저 그 열매를 따먹고 “함께 있는” 남자에게도 주었다고 합니다. 현장에 같이 있었으면서도 남자는 자기만 살겠다고 여자에게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여자도 또한 뱀에게 책임을 떠넘기면서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인류가 이 세상에 존재한 후에 여성들은 거의 모든 시대에서 차별받았습니다. 인간이 아니라 남자의 재산으로 취급되기도 하였습니다. 그 근원을 따라가 보면 야훼 하느님의 창조 이야기부터 왜곡되어 내려옵니다. 사람이 자기의 잘못을 창조주인 야훼 하느님과, 동료 인간과, 자연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자기만을 위한 이기심의 극대화에서 온 것입니다. 야훼 하느님이 주신 생명의 자유를 넘어서 선과 악을 분별하는 지식을 소유하고, 그 분별지로 말미암아 모든 관계가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분별지에서 차별도 생기고 경계도 그어집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자기만을 위한 각자위심 때문에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자기의 생존을 위해 핑계를 댑니다. 선과 악을 알게 됨으로써 악을 멀리하고 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선하다고 고집하면서 다른 존재들을 악으로 취급하여 누명을 씌우기 때문에, 선과 악의 분별지가 나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활동할 당시에 여성으로서 어머니로서 예수님의 선교영역을 확장함으로써 차별의 근원을 무너뜨린 사건이 있습니다. 7장에 있는 ‘시로페니카아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 앞 뒤로 6장에 ‘오천 명을 먹이신 일’과 8장에 ‘사천 명을 먹이신 일’이 있는데, 세 이야기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것은 “빵”입니다. 6-8장은 빵을 주제로 큰 이야기를 이룹니다. 직접적인 사건의 보도뿐만이 아니라 배를 타고 여행할 때에도 빵에 대하여 언급하며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땅과 이방인의 땅에서 모인 무리를 먹였습니다. 그리고 시로페니키아 여인(여인의 딸)에게도 빵을 허락함으로써 그들을 먹여 살리고 있습니다. 먹이는 사건이 주의만찬을 상징하듯이 빵은 예수님의 몸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몸을 사람들에게 내어주어 먹게 하는 것은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빵이 되어 사람들을 먹인 것처럼 자기의 죽음으로 무리를, 다른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활동이 생명을 살리는 일이고, 생명을 창조하는 능력은 치유와 밥상친교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마가복음에 무리를 먹이는 이야기가 6장과 8장에 두 번 반복되어 나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특별한 의미가 없다면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할 정도로 마가복음은 널널하지 않습니다. 마가는 말을 아끼면서 짧은 복음서 속에 예수님의 활동을 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빵을 먹이는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은 그만큼 먹고 먹이는 일이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천 명을 먹인 이야기에서 남은 빵은 열두 바구니이고, 사천 명을 먹인 이야기에서 남은 빵은 일곱 바구니입니다. 이는 다섯 두루마리(오경)와 그 열둘로 대표되는 유대인과 사방으로 펼쳐진 온 땅과 그 일곱으로 대표되는 이방인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땅에서 빵을 먹이고, 바다를 건너 이방인의 땅에서도 똑같이, 차별 없이 빵을 먹임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습니다.

그 두 이야기의 중간에 시로페니키아 여인이 등장합니다. 딸의 귀신들림을 치유해 달라는 이방의 어머니를 향해서 예수님은 하나의 잠언을 인용합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개나 다른 가축보다 앞서 자녀들을 먹여야 한다.” “자녀를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는 빵을 개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당시의 속담을 인용한 것이지만 과연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이 한 말이 맞나 하고 의심하게 됩니다. 아무리 이방 여인과 그의 딸이지만 사람을 개로 비유(혹은 취급)하는 것은 자기 발 앞에 엎드려서 간청하는 사람에게 너무나 잔인한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이방 여인의 대답은 더욱 놀라게 합니다. 모욕을 그대로 받아 안고 마치 자기가 개라도 된 것처럼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그러나 식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떡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여인에게는 옛 시리아 제국의 페니키아인의 후예로서의 자존심을 땅에 팽개치고, 오직 악한 영에 시달리고 있는 딸을 구하기 위한 일념뿐입니다. 발 앞에 엎드려 간청하는 여인의 말은 예수님의 전통적인 관념을 바꾸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예수님은 그 연인에게 말합니다. “이 때문에, 그 로고스 때문에, 너는 가라, 그 영이 네 딸에게 나갔다.” 딸을 구한 것은 그 여인의 말씀(로고스)입니다. 그 여인의 생각입니다. 그 연인의 행위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개로 취급된 이방 여인의 놀라운 말씀(믿음이 아니라)으로 빵이 자녀에게서 개에게로 넘어갑니다. 자녀의 빵이 개에게 넘어가듯이, 생명의 빵이 이방인에게 그리고 여성에게도 넘어간 것입니다. 여인의 용기 있는 행동을 통하여 예수님의 활동은 새로운 지평을 얻게 되었으며, 인종과 이념과 역사와 종교의 장벽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이방 여인의 사랑과 용기로 예수님 안에서 같은 인간으로, 하느님 나라의 주체로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유대 땅에 있는 무리나 이방 땅에 있는 무리나 똑같이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생명의 빵을 먹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활동 속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가로 막고 있는 바다를 건너서 생명의 빵으로 양쪽을 똑같이 먹였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의 의미는 그 사람의 삶에 의해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어떻게 살았느냐는 그 사람의 죽음과 죽음 이후 남겨진 모습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자기 안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품으려는 활동이 없었다면, 십자가에서 양쪽을 하나 되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러한 행동의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사람이 바로 시로페니키아 여인이었습니다.

지금 내가 관계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 우리 사이에 놓인 벽은 무엇입니까? 크게는 국제적인 문제와 남과 북의 관계, 사회-정치적인 이슈들이 있습니다. 가까이에는 나 자신, 가족, 교회 학교, 일터에서 마주하는 일과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관계 속에서는 이미 벽이 허물어진 관계도 있고, 지금 막 쌓고 있는 벽도 있을 것이고, 벽이 생긴 지 너무 오래 되었거나 높아서 그저 덤덤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종과 자유인, 유대인과 이방인, 남성과 여성뿐만 아니라 오늘 나의 삶 속에서 나와 남을 가르는 벽을 허물기 위해서는 그만큼 노력도 해야 합니다. 노력뿐만 아니라 때로는 억울함이나 창피함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자기를 존재하게 하는 자존심이 심하게 구겨지고 상처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정말로 참을 수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개처럼 생각되어지는 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시로페니키아 여인은 당시의 통념대로 개같이 취급받게 될지라도 딸을 살리겠다는 애틋한 사랑으로 오히려 그 통념의 벽을 허물고 예수님의 몸을 함께 나누는 하느님 나라의 당당한 일군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목적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하느님 나라의 일군이 되어 함께 일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경계를 넘어서 담을 허물고 함께 하는 대동세상을 열기 위함입니다. 바로 이것이 마가복음에 먹이는 이야기가 두 번씩이나 나오는 이유입니다.

갈라지고 분열된 세상, 갈등과 혼란을 부추기며 힘으로 약한 사람들을 억압하는 정부가 지배하는 세상, 굶주리며 생존의 위협을 온 몸으로 거부하는 가난한 사람보다는 뒷짐 지고 용역깡패와 특수공권력을 동원하여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 하려는 부유한 사람을 옹호하는 권력자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그 벽을 허물고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세상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시로 페니키아 여인처럼, 예수님처럼 서로에게 힘을 주며 함께 벽을 허물고 경계를 넘는 일입니다. 너와 내가 주인이 되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바다 한 가운데에서 한 배를 타고 노를 젓는 우리의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사람들은 각자의 역할을 다르지만, 모두가 귀중한 존재입니다. 한 몸이 되었다는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몸은 손끝이나 발끝이 아파도 온 몸이 함께 아프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다 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